[추천 작품]/***** 좋은 단편

우국 / 미시마 유키오

소설가 구경욱 2009. 2. 14. 21:41

미시마 유키오 : 일본 소설가·희곡작가. 도쿄[東京(동경)] 출생. 1947년 도쿄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1946년 단편《담배》를 발표하여 주목받았으며, 49년 장편 《가면의 고백》으로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56년 《긴카쿠지[金閣寺(금각사)]》로 예술적 정점을 이룬 뒤, 60년 미·일안전보장협정을 계기로, 1936년의 극우 쿠데타미수사건인 2·26사건을 다룬 《우국(憂國, 1961)》에 이르러서는 전쟁전과 같은 국수주의로 기울었다. 그 후 반시대적 경향을 보이던 끝에 70년 자위대에 침입하여 평화헌법의 개정을 위한 궐기를 호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할복자살하였다. 희곡작품으로 《로쿠메이칸[鹿嗚館(녹오관), 1957]》 《사드후작부인(1965)》 등을 남겼다.


憂國



쇼오와[昭和] 십일년(서기 1936년, 譯者註) 이월 이십 팔일(즉, 二·二六 사건 돌발 삼일 째 되는 날), 근위보병연대 근무 다케야마 신지[武山信二] 중위는 사건 발생 이후 친구가 반란군에 가입한 사실에 대하여 깊은 고뇌를 거듭하였고, 황군(皇軍)이 서로를 쏘는 사태에 이를 것이 명약관화한 정세에 통분하여, 요츠야[四谷]구 아오바쵸[靑葉町] 육의 자택 팔 죠[疊, 일본전통 가옥의 방바닥에 까는 다타미 한 개를 일컫는 말로 흔히 우리의 坪처럼 방의 면적을 나타내는 단위로 사용됨, 譯者註) 방에서 군도를 뽑아 할복자살하였으며, 레이코[麗子] 부인 또한 남편을 따라 칼로 자결하였다. 중위의 유서로는 「황군(皇軍)의 만세(萬歲)를 기원하노라」라는 단 하나의 글귀가 남아 있었고, 부인은 양친보다 앞 서 가는 불효를 사죄한 후, 「군인의 아내로서 올 날이 오고야 말았습니다」운운의 글을 유서로 남겼다. 열부열부(烈夫烈婦)의 최후, 진실로 하늘도 울릴 감개가 있다. 아울러 중위는 향년 삼십 세, 부인은 이십삼세, 화촉의 의식을 치르고서 반년을 채우지 못하였다.





다케야마 중위의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물론이고, 신랑신부의 기념사진만을 본 사람들조차도 이 두 사람의 빼어난 용모에는 새삼스레 감탄사를 발하였다. 군복을 입은 중위는 군도를 왼손으로 짚고 오른손에는 군모를 쥐고서는 늠름한 모습으로 신부를 보위하며 서 있었다. 실로 늠름한 얼굴로 짙은 눈썹과 커다랗게 부릅뜬 두 눈이 청년의 순수함과 무구함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흰 예복을 입고 있는 신부의 아름다움은 견줄 데가 없었다. 상냥한 눈썹 아래의 둥그런 눈에나, 가냘프게 생긴 빼어난 모양의 코며, 도톰한 입술 그 모두에 요염함과 고귀함이 함께 서려 있었다. 슬그머니 예복의 소매로부터 비어져 나와 부채를 쥐고 있는 손가락은 섬세하게 모아져 있었으나 박꽃의 봉오리와도 같이 보였다.
두 사람의 자결 후, 사람들은 자주 이 사진을 꺼내어 바라보고는 이렇게 나무랄 데 없이 아름다운 남녀의 결합이 불길한 그 무엇을 머금기 쉬운 것을 한탄하였다. 사건이 일어나고 난 후에 보니, 그런 생각 탓인지 금병풍 앞의 신랑신부는 그 어떤 것에도 뒤지지 않는 맑은 눈동자로 곧 다가올 죽음을 투시해 보고 있는 듯이 여겨졌다.
신혼여행은 비상시라 하여 가지 않았다. 두 사람이 첫날밤을 보낸 것은 이 집에서였다. 잠자리에 들기 전, 신지는 군도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아내를 향하여 군인다운 훈계를 내렸다. 군인의 아내된 자로서 언제 어느 때이고 남편의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내일 닥쳐올지도 모르는 일이며, 모레가 될 수도 있다. 언제 그런 일을 당하여도 흔들리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는 가고 물은 것이다. 레이코는 일어서서 장롱서랍을 열고는 가장 소중한 혼수로 어머니로부터 받은 단도를 남편과 같이 아무 말 없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이것으로 훌륭한 묵계가 성립되었으며, 중위는 두 번 다시 아내의 각오를 묻거나 하지 않았다.
결혼하고 몇 달인가가 지나자 레이코의 아름다움에는 세련됨이 더해졌고, 비개인 하늘에 뜬 달과 같이 그 아름다움은 영롱하였다.
두 사람 모두 참으로 건강하고 젊은 육체의 소유자들이었으므로, 그들의 정교(情交)는 격렬하였다. 밤에는 말할 것도 없었고 훈련에서 돌아온 흙먼지 투성이의 군복을 벗을 틈새도 아까운 나머지 집에 돌아오자마자 신부를 그 자리에 밀어 눕힌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레이코 또한 이에 잘 응하였다. 첫날밤을 지내고 한 달이 지났을까 말까 한 때에 레이코는 기쁨을 알게 되었고, 그 사실을 안 중위도 기뻐하였다.
레이코의 몸은 희고 엄숙하였다. 솟아오른 그녀의 유방은 너무나도 강력한 거부의 정결함을 나타내 보이면서도 일단 수용한 후에는 잠자리가 가지는 따뜻함을 머금었다. 그들은 잠자리에서도 무섭고 엄숙할이만치 진지하였다. 점점 격렬해져 가는 광태(狂態)의 한가운데에서도 그들은 진지하였다.
낮동안 중위는 훈련 사이사이의 휴식시간에도 아내를 생각하였고, 레이코 또한 하루종일 남편의 잔상(殘像)을 쫓았다. 그러나 그녀는 혼자 있을 때에도 결혼식 때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자면 그들의 행복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불과 수개월 전까지만 해도 그저 길거리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타인에 불과했던 사내가, 그녀가 갖고 있는 온 세상의 태양이 된 사실에 대하여 더 이상 아무런 신기함도 느끼지 않았다.
이런 일들은 모두 도덕적이었으며 교육칙어(敎育勅語)의 「夫婦相和」라는 가르침에도 들어맞는 것이었다. 레이코는 단 한번도 말대답을 하지 않았으며, 중위 또한 아내를 꾸짖을 만한 이유라고는 아무것도 찾지 못하였다. 폐하의 신단(神壇)에는 고오타이 진구우[皇太神宮, 일본 神道의 최고신인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를 모신 神社, 譯者註]의 부적과 함께 천황, 황후 양폐하의 사진이 걸려 있었고, 아침마다 출근전의 중위는 아내와 함께 신단아래에서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신단에 바치는 물은 매일 새로 갈았으며, 신단에 바치는 나뭇가지는 언제나 윤이 흐르고 새로웠다. 이 세상은 모든 것이 엄숙한 신의 위엄에 의하여 보호받았으며, 온몸의 구석구석까지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쾌락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사이토오[齋藤] 내부(內府, 內大臣의 별칭. 1885년 일본 내각제 창설시 궁중에 설치된 중직, 譯者註)의 저택은 가까운 곳에 있었으나 이월 이십육일 아침, 두사람은 총소리조차 듣지 못하였다. 단, 십분 간의 침묵이 끝나고 눈 내린 새벽녘에 들려온 집합나팔 소리가 중위를 잠에서 깨웠다. 중위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무 말 없이 군복을 입고는 아내가 내미는 군도를 차고 아직 채 밝지 않은 눈이 수북이 쌓인 아침 길을 뛰어나갔다. 그리고 이십 팔일 저녁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레이코는 곧 라디오의 뉴스를 통하여 이 돌발사건의 전모를 알게 되었다. 이날로부터 이틀간, 홀로 남은 레이코의 생활은 문을 꼭꼭 쳐 닫은 채 쥐죽은 듯이 보낸 것이었다.
레이코는 눈이 수북히 내린 아침, 한마디 말도 없이 뛰쳐나가듯 집을 나간 중위의 얼굴에서 이미 죽음을 향한 결의를 읽은 것이다. 남편이 이대로 살아 돌아오지 않을 경우, 그 뒤를 좇을 각오는 되어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신변의 물건들을 정리하였다. 몇 벌쯤 되는 외출복은 학창시절 친구들에게 줄 유품으로, 각각의 포장해 둔 종이 위에 보내는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두었다. 언제나 내일 일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남편이 늘 말해 왔으므로, 레이코는 일기도 쓰지 않았다. 때문에 최근 수개월간에 이루어진 행복의 기록을 찬찬히 되짚어 읽어보며 타들어 가는 불 속으로 그것들을 던져 버리는 즐거움을 누릴 기회를 잃고 말았다. 라디오 옆에는 도자기로 만든 작은 개, 토끼, 다람쥐, 곰, 여우와 함께 작은 항아리와 물병이 있었다. 이것이 레이코의 유일한 콜렉션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유물로 남길만한 것이 못되었다. 그렇다고 구태여 관속에 넣어달라고 하기도 뭐하였다. 그런 생각을 하자 작은 도자기 동물들은 어찌할 바 모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레이코는 그들 가운데에서 다람쥐를 손에 쥐어 보고는 이런 자신의 어린아이와 같은 애착의 저 멀리 건너편에 남편이 구현하고 있는 태양과도 같은 대의(大義)를 우러렀다. 자신은 기꺼이 그 빛나는 태양의 수레바퀴에 휩쓸려 죽어갈 몸이건만, 지금의 이 짧은 동안만큼은 홀로 이런 천진한 애착에 잠겨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진심으로 이런 것들을 사랑한 것은 지난 날의 일이었다. 지금은 사랑했던 추억을 사랑하는 데 지나지 않았으므로, 마음은 더욱 격렬한 것, 더욱 미칠 듯한 행복으로 가득하였다.... 그러나 레이코는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뛰는 낮과 밤의 육체의 기쁨을 쾌락 따위의 이름으로 부른 적은 한번도 없었다. 아름다운 손가락은 2월 한겨울의 차가운 대기 속에서 도자기로 만든 다람쥐가 느끼게 해 주는 그 얼어붙는 듯한 감촉을 머금고 있었지만, 그러는 사이에도 중위의 억센 팔이 그녀에게로 뻗어오던 찰나를 생각하면, 단정하게 차려입은 비단옷 앞자락의 되풀이되어 그려진 똑같은 모양의 무늬들 안쪽으로, 레이코는 눈을 녹일 만큼 뜨겁게 과육(果肉)이 젖어들어 옴을 느꼈다. 뇌리에 떠오르는 죽음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으며 남편이 지금 느끼고 있을 일, 생각하고 있을 일, 그 비탄, 고뇌, 여러 가지 상념들 등의 모두가 홀로 집에 남겨진 레이코에게는 그의 육체와 똑같이 자신을 쾌적한 죽음으로 데려가 주리라 굳게 믿었다. 그 생각의 어떤 조각에도 그녀의 몸은 쉽사리 녹아 들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레이코는 그리고는 시시각각 들려오는 라디오의 뉴스에 귀를 기울였고, 남편의 친구 중 몇 사람이 궐기한 자들 중에 들어 있음을 알았다. 그것은 죽음의 뉴스였다. 그리고 사태가 시간이 갈수록 어찌 해 볼 도리도 없는 형국이 되어 가는 것, 칙령이 언제 내려질지 알지 못하며 애초에 유신(維新)을 위한 궐기라 여겨지던 것이 점점 반란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써 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자세히 알게 되었다. 연대(聯隊)로부터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새벽에 내린 눈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 시내에서 언제 싸움이 시작될지 알 수 없었다.

이십 팔일 해질 무렵 현관문을 세게 두드리는 소리를 레이코는 두려운 마음으로 들었다. 현관으로 달려가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간유리 건너편의 그림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남편이 틀림없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그 미닫이 문 열쇠가 그때만큼 빡빡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때문에 열쇠는 더욱 손을 거역하였고, 문은 좀체로 열리지 않았다.
문이 열리기도 전에 카키색 외투로 둘러싸인 중위의 몸뚱이가 눈과 진흙으로 무거워진 장화를 들이밀고는 현관바닥에 올라섰다. 그는 문을 닫자 자신의 손으로 다시 열쇠를 잠갔다.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한 행동인지 레이코는 알 수 없었다.
'어서 오세요'
이렇게 말하며 레이코는 깊이 머리를 조아렸으나 중위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군도를 끄르고 외투를 벗으려 했으므로 레이코는 그의 등뒤로 돌아가 외투 벗는 것을 도왔다. 외투는 차갑고 젖어 있었으며 그 때문에 햇빛에 쪼인 외투가 풍기는 말똥냄새는 나지 않았고, 대신 그녀의 팔을 무겁게 눌러왔다. 외투를 옷걸이에 걸어놓고 군도를 감싸안은 채 그녀는 장화를 벗은 남편을 따라 방으로 올라갔다. 일층의 육죠[疊]짜리 방이다.
밝은 불빛 아래에서 보는 남편의 얼굴은 수염으로 뒤덮여 있었고, 딴사람처럼 초췌해 있었다. 볼은 움푹 패여 광택과 탄력을 잃고 있었다. 기분이 좋을 때면 돌아오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저녁식사를 재촉하는 그였건만 군복을 입은 채로 밥상 앞에 앉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레이코는 저녁식사를 준비할 것인지 묻기를 그만두었다.
조금 지나자 중위가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모르고 있었어. 녀석들은 내게 동참을 권유하지 않았지. 아마 내가 신혼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거야. 가노오[加納]도 그랬고, 혼마[本間], 야마구치[山口]마저도...'
레이코는 남편의 친구들이며 때대로 집으로 놀러 오곤 하던 원기 왕성한 청년장교들의 얼굴을 머리 속에 떠올렸다.
'아마 내일 당장에라도 칙명이 내려지겠지. 녀석들은 반란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될 거야. 나는 부하들을 지휘해서 녀석들을 쳐야만 해....... 못해. 그런 일은 할 수가 없어'
그리고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지금 경비교대 명령을 받고 오늘 하룻밤 귀가를 허락 받았어. 내일이면 틀림없이 녀석들을 치러 나가게 될 거야. 나는 도저히 그런 일을 할 수가 없다오, 레이코'
레이코는 똑바로 앉은 채 눈을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일이지만 남편은 이미 단 한가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중위의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죽음에 의하여 뒷받침되고 있었으며, 이 어둡고 견고한 뒷받침됨을 위하여 말[言]은 움직이기 어려운 힘을 두드러지게 과시하고 있었다. 중위는 고뇌를 털어놓고 있었지만, 거기에 이미 머뭇거림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고 있는 침묵의 시간 동안에도 흡사 눈이 녹아내려 흐르는 계류(溪流)와 같은 청렬(淸冽)함이 있었다. 중위는 이틀에 걸친 고뇌의 끝에 자신의 집에서 아름다운 아내의 얼굴을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마음이 평온해짐을 느꼈다.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아내가 무언의 각오를 눈치채고 있음을 금새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잘 들어' 중위는 계속되는 불면에도 불구하고 맑고 씩씩한 눈을 크게 뜨고, 처음으로 아내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오늘밤 할복한다'
레이코의 눈은 조금도 흠칫거리지 않았다.
그 둥근 눈은 세게 울리는 방울소리와 같은 탄력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각오는 하고 있었어요. 운명을 함께 하고 싶어요'
중위는 그녀의 눈이 발하는 힘에 자신이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말은 마치 헛소리와 같이 술술 흘러나와서는, 이리도 중대한 허락이 어쩌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가벼운 표현으로 드러나는지 알 수 없었다.
'좋아. 함께 가자. 단, 내가 할복하는 모습을 지켜 봐 주기를 바래. 좋지'
이렇게 이야기를 해 놓고 나자, 두사람의 마음속으로는 갑자기 해방된 자의 기쁨이 생겨났다.
레이코는 남편이 보여준 이 커다란 신뢰에 가슴이 벅찼다. 중위로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음을 이루어야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과정을 지켜 봐 줄 사람이 있어야만 하였다. 그런 역할의 담당자로 아내를 선택한 것은 최고의 신뢰였다. 함께 죽기를 약속하면서도 아내를 먼저 죽게 하지 않고 아내의 죽음을 스스로는 확인해 볼 길 없는 미래에 두었다는 사실은 그 다음으로 큰 신뢰라 할 수 있었다. 만일 중위가 의심 많은 남편이었다면 흔한 동반자살과 마찬가지로 아내가 먼저 죽는 길을 골랐을 터였다.
중위는 레이코가 한 '운명을 함께 한다'는 말을 신혼초야 이후 자신이 레이코를 주도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발화(發話)하도록 해온 커다란 교육의 성과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중위의 자부심을 북돋아 주었으며, 그는 애정이 그녀로하여끔 자발적으로 그 말을 하도록 하였다고 믿을 만큼 해이하고 나르시시즘에 빠진 남편은 아니었다.
기쁨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서로의 가슴으로부터 용솟음치고 있었으므로, 서로 마주본 두사람은 자연스레 미소지었다. 레이코는 신혼의 밤이 다시 찾아온 느낌이었다.
눈앞으로는 고통도, 죽음도 없었으며 자유롭고 널찍한 들판이 펼쳐져 있는 듯 하였다.
'목욕물이 데워졌어요. 목욕하시겠어요?'
'아, 그래'
'식사는?'
이 말은 참으로 아무렇지도 않으며 가정적으로 튀어나왔으며, 중위는 하마터면 착각에 빠질 뻔하였다.
'식사는 됐고, 술을 좀 데워 주겠어'
'네'
레이코는 일어서서 남편이 목욕후 입을 단젠[丹前, 솜을 넣어 만든 일본식 잠옷, 譯者註]을 꺼낼 때 열어놓았던 장롱서랍으로 남편의 시선을 환기시켰다. 중위는 일어서서는 장롱 서랍 속을 들여다보았다. 정리되어 있는 포장지 위로 수신인의 이름들이 하나하나 읽힌다. 이렇게 아내의 굳은 각오를 본 중위의 마음에 슬픔이란 조금도 없었으며 달콤한 정서로 가득하였다. 아직 앳된 아내의 어린아이 같은 쇼핑목록을 구경한 남편처럼, 중위는 사랑스러움에 겨운 나머지 뒤에서 아내를 끌어안고는 목덜미에 입맞춤하였다.
레이코는 목덜미 위로 남편의 턱에 난 수염이 일으키는 간지러움을 느꼈다. 이 감각은 단지 현세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그녀에게는 현실 그 자체였으나, 그것이 곧 없어지고 마리라는 느낌은 더없이 신선하였다. 한순간 한순간이 생생한 힘을 얻었으며, 몸의 구석구석까지가 새롭게 눈뜨는 것을 느꼈다. 레이코는 다비[足袋, 일본식 버선,譯者註] 끄트머리에 잔뜩 힘을 주고 남편의 애무를 받았다.

'목욕을 하고, 술을 마시고 나면...어때, 이층에 자리를 깔아주겠소?'
중위는 아내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레이코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중위는 거칠게 군복을 벗어 던지고는 욕탕 속으로 들어갔다. 먼 곳에서 퉁겨져서는 되돌아오는 소리를 들으며 레이코는 거실화로의 불을 한번 살펴보고는 술을 데웠다.
단젠과 허리띠, 속옷가지를 챙겨들고 욕탕으로 가서는 물이 적당히 데워졌는지 물었다. 데워진 목욕물의 수증기가 자욱한 욕탕 안에서 중위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수염을 깎고 있었다. 젖어있는 그 늠름한 팔뚝의 근육이 팔의 움직임을 따라 기민하게 움직이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여기서는 무엇하나 특별한 시간이라고는 없었다. 레이코는 분주히 움직이며 즉석으로 안주를 장만하였다. 손도 떨리지 않았으며 모든 일이 평소보다 활기차고 유쾌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다가도 문득 가슴속의 심연에서 신기한 고동이 일렁이고는 지나갔다. 멀리서 내려치는 번개와도 같이, 그것은 반짝하며 매우 강렬하게 스치고, 그리고는 지나가 버렸다. 그밖에는 무엇하나 평소와 다른 것이라고는 없었다.
욕탕 안에서 중위는 수염을 깎으며, 덥혀진 그의 몸이, 어찌할 도리 없는 고뇌로부터 온 피로가 말끔히 가셨으며 죽음을 앞에 두고 있음에도 즐거운 기대로 하나 가득해 짐을 느꼈다. 아내가 밖에서 일하고 있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러자 이틀동안 잊고 지냈던 그의 건강한 욕망이 다시금 고개를 쳐들었다.
두 사람이 죽음을 결의한 순간의 그 기쁨에 한치의 불순함도 없다는 것을 그는 자신할 수 있었다. 물론 바로 이것이야 라고 뚜렷이 의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다시 한번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두사람만의 정당한 쾌락이 대의와 신(神)의 위엄, 그리고 한치의 틈새도 없는 완전한 도덕에 의하여 지켜지고 있음을 감지한 것이었다. 두사람이 눈길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눈동자 속에서 정당한 죽음을 발견하였을 때, 다시 한번 그들은 그 누구도 부술 수 없는 철벽으로 둘러싸이게 되었으며 타인은 그들의 손가락 하나도 건드리지 못하는 미(美)와 정의에 의하여 보호받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그러므로 중위는 자신의 육체적 욕망과 우국지정 사이에 어떠한 모순이나 당착(撞着)도 발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들을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조차 있었다.
어둡고 군데군데 금이 간, 김이 잔뜩 서린 벽면거울 안으로 중위는 얼굴을 들이밀고 정성스레 수염을 깎았다. 이것이 그대로 그의 데드 마스크가 되는 것이었다. 보기 흉하게 수염을 남기거나 해서는 안되었다. 수염을 깎은 그의 얼굴은 다시 한번 젊게 빛났으며 어둡던 거울을 밝게 비출 정도였다. 이 맑고 건강한 얼굴과 죽음의 결부에는, 이를테면 일종의 산뜻함이 있었다.
이것이 그대로 죽은 얼굴이 된다! 이미 그 얼굴은 절반이 중위의 소유로부터 떨어져 나가 죽은 군인의 기념비 위에 놓인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는 눈을 감아 보았다. 모든 것은 암흑으로 둘러 싸여 있었고, 더 이상 그는 사물을 바라보는 인간이 아니었다.
욕탕에서 나온 중위는 윤기 흐르는 뺨 위로 푸른 면도자국을 빛내며 불이 잘 일어난 화롯가에 앉았다. 바쁜 가운데에도 레이코가 재빨리 얼굴을 고쳐 만진 것을 중위는 알았다. 젊은 아내의 이런 격정적인 성격의 징표를 보고 중위는 참으로 자신이 아내를 제대로 선택했음을 느꼈다.
중위는 술잔을 비우고 그것을 레이코에게 주었다. 한번도 술을 마셔 본 적이 없는 레이코이지만 순순히 그것을 받아 들고 조심조심 입을 가져다 대었다.
'이리 와'
중위가 말하자 레이코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서 비스듬히 그의 품에 안겼다. 그의 가슴은 격렬히 물결쳤고 교차하는 슬픔과 희열은 독한 술을 섞어 놓은 듯 하였다. 중위는 아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것이 자신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사람의 얼굴, 여자의 얼굴이었다. 나그네가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지방의 아름다운 풍광에 내리쏟는 시선으로 중위는 천천히 아내의 얼굴을 점검하였다.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 아름다운 얼굴은 잘 정돈되어 있었지만 거기에 차가움이라고는 없었으며 입술은 부드러운 힘으로 가볍게 닫혀 있었다. 중위는 자기도 모르게 그 입술에 입맞춤하였다. 조금 지나서야 알아차린 일이지만 그 얼굴은 조금도 흐느낌으로 일그러지지 않았지만 감겨진 눈의 길다란 속눈썹의 그림자로부터 눈물방울이 차례로 넘쳐 그 눈 끝으로 빛을 발하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중위가 이층의 침실로 올라가자고 재촉하자, 아내는 목욕을 마친 후에 그러마고 하였다. 중위는 홀로 이층으로 올라가 가스 스토브로 데워진 침실로 들어가서는 깔아 놓은 요 위에 큰 대자로 드러누웠다. 이렇게 아내가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시간까지, 무엇하나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는 머리 밑으로 두팔을 괴고는 스탠드의 불빛이 미치지 않는 흐리멍텅하게 어두운 천장의 판자를 응시하였다. 그가 지금 품고 있는 것이 죽음인지 광적인 감각의 즐거움인지, 그 부분이 중복되어 마치 육욕의 죽음을 향하고 있는 듯이 생각되기도 하였다. 그 어느 쪽이건 중위가 지금만큼 혼신의 자유를 맛본 적은 없었다.
창문 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온다. 길가에 아직 남아 있는 눈을 뒤엎고 지나가는 타이어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가까운 곳의 담벼락으로 클랙션이 반향하였다.... 이런 소리들을 듣고 있노라면 변함없이 바쁘게 오고가는 사회라는 바다 한가운데에 오직 이곳만은 외딴 섬과 같이 우뚝 솟아 있음을 느낀다. 자신이 걱정하고 있는 나라는 이 집의 주위로 커다랗고 어수선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는 지금 그것을 위하여 몸을 바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의 몸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간언(諫言)하고자 하는 그 거대한 나라는 과연 이 죽음을 한번이라도 뒤돌아봐 줄지 알지 못하였다. 그것으로 족하였다. 이곳은 화려하지 않은 전장(戰場), 그 누구에게도 공을 과시할 수 없는 전쟁터이자 영혼의 최전선이었다.
레이코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낡은 집의 급하게 경사진 계단은 자주 삐걱거렸다. 이 삐걱거리는 소리는 무척 반가운 것이었으며, 셀 수 없이 중위는 잠자리에서 그녀를 기다리며 이 감미로운 삐걱거림을 들었다. 두 번 다시 이 소리를 들을 수 없으리라 생각하자 그는 청각을 그곳에 집중시키고 귀중한 시간의 한순간 한순간을 그 보드라운 발바닥이 울려대는 삐걱거림으로 빈틈없이 하나 가득 메우고자 하였다. 이렇게 시간은 찬연한 빛을 발하였고, 이윽고 그것은 보석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레이코는 유카타[浴衣]에 나고야오비[名古屋帶, 허리띠의 일종, 譯者註]를 메고 있었다. 그 진홍빛 허리띠는 엷은 어두움 속에서 거무튀튀하게 보였으며 중위가 그리로 손을 가져가자 레이코의 손의 도움을 얻어 펄럭이며 달음박질하여 방바닥 위로 떨어졌다. 아직 유카타를 입고 있는 채로 중위는 아내의 양쪽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어 끌어안으려 했으나 야츠구치(일본의 전통의상은 겨드랑이 부분을 꿰매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이 부분을 야츠구치라 함, 譯者註)로 드러난 겨드랑이의 따듯한 살갗으로 중위의 손가락이 닿는 순간, 그는 손가락 끝으로 전해진 감촉으로 인하여 온몸이 불타오름을 느꼈다.
두사람은 스토브 불빛 앞에서 언제인지도 모르게 자연스레 알몸이 되어 있었다.
입으로 말하지는 않았으나 몸과 마음, 그리고 설레는 가슴 모두가 이것이 마지막 행위라는 생각으로 하나가득 넘쳐나고 있었다. 이 '마지막 행위'라는 문자는 보이지 않는 먹으로 두사람의 전신에 빈틈없이 빼곡이 적혀 있는 듯하였다.
중위는 격렬하게 아내를 끌어안고 입맞춤하였다. 두사람의 혀가 상대의 매끄러운 입속을 구석구석까지 확인하였고 아직 어디에서도 징조를 보이지 않는 죽음의 고통이 그들의 감각을 달구어진 쇠붙이와 같이 새빨갛게 단련해 주고 있음을 느꼈다. 아직 느낄 수 없는 죽음의 고통, 이 먼 고통이 그들의 쾌감을 정련(精鍊)해 주었던 것이다.
'당신 몸을 보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군. 천천히 잘 보고 싶어'
중위는 이렇게 말하고는 스탠드의 갓을 옆으로 눕혀 드러누워 있는 레이코의 몸 위로 빛이 쏟아지도록 하였다.
레이코는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낮게 깔린 빛이 이 엄숙하고 흰 육체의 기복을 선명히 드러내었다.
중위는 약간은 이기적인 기분에서 이 아름다운 육체가 붕괴하는 모습을 보지 않고 끝날 수 있다는 행복을 기뻐하였다. 그는 잊을 수 없는 풍경을 천천히 마음에 새겼다. 한 손으로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다른 한 손으로는 조용히 아름다운 얼굴을 쓰다듬었고, 눈길이 닿는 곳에 일일이 입맞춤하였다.
아름답고 조용하며 차가운 이마로부터 부연 눈썹 밑으로 길다랗게 늘어진 속눈썹에 둘러싸여 감겨 있는 눈, 빼어난 코의 생김새, 적당히 도톰하고 단정한 입술사이로 슬며시 엿보이는 이의 반사광, 부드러운 뺨과 날카로운 턱... 이런 것들이 진실로 맑은 데드 마스크를 생각나게 하였고, 이윽고 스스로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댈 하얀 목덜미를 몇 번이고 강하게 빨아 붉게 만들고 말았다. 입술로 돌아와서 그 입술을 가볍게 누르고는 자신의 입술을 그 입술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와 같이 움직였다. 눈을 감자 세계는 요람과 같이 변하였다.
중위의 눈길이 가는 곳을 그의 입술이 충실히 훑으며 쫓았다. 거칠게 숨쉬는 유방은 야생벚꽃의 봉오리와 같은 유수를 갖고 있었으며 중위의 입술에 둘러싸여 굳어졌다. 가슴의 양옆으로 매끈하게 흘러내린 아름다운 팔, 그 둥그런 팔이 그대로 손목을 향하여 점점 가늘어지는 그 정교한 모습, 그리고 그 끝에는 결혼식날 부채를 쥐고 있던 섬세한 손가락이 있었다. 그 손가락 하나하나는 중위의 입술 앞에서 부끄러운 듯이 각각의 손가락이 만드는 그림자 뒤로 숨었다.....가슴으로부터 허리에 이르는 천혜의 자연스런 굴곡은 부드러운 채로 팽팽한 탄력을 머금고 있었으며 그곳으로부터 허리로 펼쳐지는 풍만한 곡선을 예기(豫期)하며, 그 스스로 추호의 단정치 못함도 없는 육체의 올바른 규율과도 같은 것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빛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 배와 허리의 순백과 풍만함은 커다란 사발에 하나 가득 담겨진 젖[乳]과 같았으며 유독 정결하며 움푹 들어간 배꼽은 마치 그곳에 방금 한 방울의 빗물이 떨어져 뚫어 놓은 신선한 자국처럼 보였다. 그림자가 점차로 짙게 드리워지는 부분으로 체모는 상냥하고 민감하게 우거져 있었고, 향기 짙은 꽃잎을 태우는 듯한 냄새는 지금은 진정되지 못하는 신체의 그침 없는 요동과 함께 그 근처로부터 조금씩 짙어져 갔다.
결국 레이코는 뚜렷하지 않은 음성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보여줘요... 내게도, 추억으로 남길 수 있게 자세히...'
이처럼 강력하고 정당한 요구는 여태껏 아내의 입밖으로 흘러나온 적이 없었으며 그 소리는 중위에게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녀의 조심스러움이 감추고 있던 것이 한꺼번에 봇물 터진 듯이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들렸다. 그는 얌전히 누워서 아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요동치던 그녀의 흰 육체는 경쾌하게 일어나서는 남편이 여태껏 한 일을 되돌려 주겠노라는 사랑스런 소망으로 발열하여 가만히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는 중위의 눈을 두 개의 흰 손가락으로 흘러가듯 쓰다듬어 감겼다.
레이코는 눈꺼풀마저 상기될 만큼 흥분으로 뺨을 붉게 물들이며 애틋함에 겨워 중위의 짧게 깍은 머리를 꼭 끌어안았다. 젖가슴으로 남편의 짧은 머리카락이 아프게 닿아왔고, 그의 오뚝한 코는 차갑게 그곳을 눌렀으며 숨결이 뜨겁게 부딪혔다. 그녀는 남편의 얼굴을 가슴으로부터 떼어놓고 그 씩씩한 생김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늠름한 눈썹, 감겨진 눈, 준수한 콧날, 굳게 다문 아름다운 입술...푸른 면도자국을 남겨놓은 뺨은 실내의 불빛을 반사시키며 매끄럽게 빛나고 있었다. 레이코는 그것들에 이어서 굵은 목덜미, 억세게 벌어진 어깨, 두 장의 방패를 이어놓은 듯한 건장한 가슴과 짙은 오렌지 빛 젖꼭지에 입맞춤하였다. 두터운 가슴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겨드랑이로는 체모가 우거진 부분으로부터 달콤하고 암울한 냄새가 어지러이 풍겨왔고, 이 냄새의 달콤함에는 어딘지 청년의 죽음에 대한 실감이 서려 있었다. 중위의 피부에는 흡사 보리밭의 그것과 같은 찬란함이 있었으며 모든 근육들이 뚜렷한 윤곽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복근 밑으로 다소곳한 배꼽을 쥐어 짜내고 있었다. 레이코는 남편의 이런 싱싱하고 탄탄한, 짙은 체모로 뒤덮인 겸허한 배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이곳이 얼마지 않아 참혹하게 칼로 파헤쳐 지고 말 것을 생각하며 안타까운 나머지 그곳으로 엎드려 울며 입맞춤을 퍼부었다.
드러누운 중위는 자기의 배 위로 흐르는 아내의 눈물을 알아채고는 어떠한 극렬한 할복의 고통에도 견뎌 내리라는 용기를 다졌다.
이러한 경위로 두사람이 그 얼마나 지극한 기쁨을 맛보았는가는 구태여 말로 할 필요도 없으리라. 중위는 당당히 몸을 일으켜 슬픔과 눈물로 녹초가 되어버린 아내의 몸을 억센 팔로 끌어안았다. 두사람은 서로의 뺨을 미친 듯이 비벼대었다. 레이코의 몸은 떨고 있었다. 땀에 젖은 가슴과 가슴은 완전히 밀착되어 두 번다시 서로 떨어질 수 없으리라 생각될 만큼, 그들의 젊고 아름다운 육체는 구석구석까지가 하나가 되었다. 레이코는 외쳤다. 높은 곳으로부터 나락으로 떨어졌으며, 나락에서 날개를 얻어 다시 현기증을 일으킬 만큼 높은 곳까지 날아올랐다. 중위는 긴 구보에 지친 연대 기수와 같이 신음하였다... 그리고 한바탕의 격정이 지나가자 다시 격렬한 정의(情意)에 넘친 두사람은 다시 서로를 부여잡고 지친 기색도 없이 단숨에 절정을 향하여 갔다.





시간이 지나 중위가 일어선 것은 행위에 질려서가 아니었다. 우선은 할복에 필요한 많은 힘을 없애는 것을 꺼려서였다. 또 하나는 지나치게 욕망을 탐함으로써 최후의 감미로운 추억을 손상시키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중위가 분명하게 자신의 몸으로부터 떠나자 레이코는 이에 승복하였다. 두사람은 알몸인 채로 서로의 손가락을 움켜잡고 드러누운 채로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땀이 한꺼번에 흘러 내렸지만 스토브의 열기 덕분으로 조금도 춥지 않았다. 너무나 조용한 밤이었고,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마저 이제는 그치고 들리지 않았다. 요츠야[四谷]역 부근의 성선(省線) 전차와 시영(市營) 전차의 공명도 고궁을 둘러싸고 있는 도랑(고궁을 둘러싼 도랑이란 서양이나 일본의 성곽건축에서 보이는 moat를 말함, 譯者註) 안쪽으로 메아리 칠 뿐, 아카사카 이궁[赤坂離宮] 앞의 널따란 찻길에 면한 공원의 숲에 가려 여기까지 들려오지는 않았다. 이 도쿄의 한 구석에서는 지금도 둘로 분열된 황군(皇軍)이 서로 대치하고 있다는 긴박감이 거짓말 같기만 하였다.
두사람은 내면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느끼며 방금 맛보았던 그지없는 최상의 쾌락을 머리 속에 떠올렸다. 그 한순간, 한순간, 그치지 않는 입맞춤의 감촉, 현기증이 날것만 같은 쾌감의 한 장면, 한 장면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어두운 천장의 판자에서는 이미 죽음의 얼굴이 그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기쁨이란 마지막의 것이었으며 두 번다시 그들의 몸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컨데 앞으로 그들이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한들, 그만큼의 환희에 도달하는 일이 두 번다시 없으리란 사실은 거의 확실한 것이었고, 두사람 모두 그런 생각에는 다름이 없었다.
서로 움켜잡은 손가락의 감촉, 이것 또한 오래지 않아 상실하고 말리라. 지금 바라보고 있는 천장의 나뭇결 모양마저도 곧 그들은 상실하고 말리라. 죽음이 그들 몸속에 한 발짝 더 가까이 와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되었다. 용기를 내어 스스로 그 죽음을 움켜쥐려 달려들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자, 준비를 하지'
중위가 이렇게 말하였다. 그것은 분명 쾌활한 어조에 실려 나온 말이었으나 레이코는 남편이 이처럼 따듯하고 상냥하게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바쁜 일거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중위는 여태껏 이부자리 깔고 개는 일을 거든 적이 없었으나 쾌활하게 오시이레(일본식 붙박이장, 譯者註)의 문을 열고 손수 이불을 들어 그곳에 넣었다.
가스 스토브의 불을 끄고 스탠드를 치우고 나자, 중위가 집을 비운 사이 레이코가 이 방의 정리를 끝내놓고 말끔하게 청소를 해 놓은 덕분에 구석에 놓여진 자단(紫檀) 책상을 빼놓으면 이 방은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 전의 거실풍경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여기서 술도 자주 마셨지. 가노오[加納], 혼마[本間], 야마구치[山口]하고 말이야'
'그랬죠 모두들'
'녀석들과도 곧 저승에서 만날 수 있을 거야. 당신을 데리고 온 걸 알면 필시 녀석들은 나를 무척 놀려대겠지'
계단을 내려오며 중위는 환하게 전등을 밝혀 놓은 이 청징한 방을 돌아보았다. 그곳에서 마시고, 떠들고, 천진스럽게 자랑거리를 늘어놓던 청년장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는 이방에서 자신이 배를 가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었다.
일층에 있는 두 개의 방에서 부부는 마치 물이 흘러가듯 담담하게 각자의 준비를 하였다. 중위는 용변을 마치고 그의 몸을 정화시켰던 욕탕으로 들어갔으며, 그 사이에 레이코는 남편의 단젠을 개고 군복 상하의와 깔끔하게 재단한 육척짜리 표백된 무명 천을 욕탕 앞에 놓고는 유서를 쓰기 위한 종이를 탁자 위에 가지런히 놓은 후 벼루 뚜껑을 열어 먹을 갈았다. 유서로 남길 문구는 이미 생각해 두었다.
레이코의 손가락은 먹의 차가운 금박을 슬며시 눌렀다. 벼루의 바다는 먹구름이 퍼지듯 순식간에 흐려졌고 그녀는 이러한 동작의 반복, 그리고 이 손가락의 압력과 소리의 희미한 왕복이 오로지 죽음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죽음이 그의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그것은 시간을 담담하게 새겨 나가는, 일상 다반사로 하는 흔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마모됨에 따라 차츰 매끄러움을 더해 가는 먹의 감촉과 점점 축적되어 가는 먹의 향기에는 무어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림자가 있었다.
맨살 위로 반듯하게 군복을 차려입은 중위가 욕탕으로부터 나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탁자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붓을 잡고는 종이 앞에서 머뭇거렸다.
레이코가 흰옷을 챙겨들고 욕탕으로 가서 몸을 정결히 하고 엷은 화장을 한 뒤 흰옷을 입은 모습으로 거실로 돌아 왔을 때 전등 밑의 종이에는 검정글씨로
'황군만세 육군 보병중위 다케야마 신지'
라고만 쓰여진 유서를 볼 수 있었다.
레이코가 중위의 건너편에 앉아 유서를 쓰고 있는 동안 중위는 아무 말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붓을 쥔 아내의 하얀 손가락이 단정하게 움직이는 품을 응시하였다.
중위는 군도를 차고, 레이코는 허리띠에 단도를 꽂고서 유서를 들고 신단 앞에 나란히 앉아 묵도한 후 일층의 전등을 모두 껐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잠시 뒤를 돌아본 중위는 어두움 속에서 지긋하게 눈을 내리깔고 그를 따라오는 아내의 아름다움에 잠시 넋을 잃었다.
유서는 이층의 도코노마[床の間]에 가지런히 놓였다. 족자를 떼어내야 했지만 두사람의 중매역이었던 오제키 중장의 글씨였으며 그것도 '至誠'이라 쓰인 것이었으므로 그대로 두기로 하였다. 설령 핏방울이 이것을 더럽힌다 하여도 중장은 이를 양해해 주리라.
중위는 도코노마의 기둥을 뒤로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 군도를 무릎 앞에 눕혀 놓았다.
레이코는 다타미 한 개를 사이에 둔 거리에 앉았다. 모든 것이 모든 것은 백색이었던 지라 입술에 칠한 엷은 붉은 색 연지가 퍽이나 요염하게 보였다.
두사람은 마주 앉아 가만히 서로의 눈동자를 응시하였다. 중위의 무릎 앞에는 군도가 놓여 있었다. 이것을 보자 레이코는 첫날밤의 기억을 되살렸고, 슬픔에 견딜 수 없었다. 중위가 숨죽인 목소리로 말하였다.
'가이샤쿠[介錯, 할복시 옆에서 목을 쳐주는 사람, 또는 그 행위 : 譯者註]가 없기 때문에 깊숙이 밸 생각이야. 끔찍할지도 모르지만 겁을 내거나 해서는 안돼. 어차피 죽음이란 곁에서 보고 있노라면 두려운 것이지. 그걸 보며 약해져서는 안돼, 알겠지'
'네'
레이코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 희고 보드라운 정경을 보자 죽음을 앞에 둔 중위는 신기한 도취를 맛보았다. 지금부터 그가 착수하고자 하는 일은 여태껏 아내에게는 보인 일이 없는 군인으로서의 공적(公的) 행위였다. 전쟁터의 결전에서와 똑같은 각오가 필요한, 전쟁터에서의 죽음과 동등하고 동질인 죽음이었다. 그는 지금 전쟁터의 모습을 아내에게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때문에 중위는 짧은 순간의 신비로운 환상을 맛보았다. 전쟁터의 고독한 죽음과 눈앞의 아름다운 아내, 이 두 개의 차원에 동시에 다리를 걸쳐놓고, 있을 법하지도 않은 두 개의 공존을 구현하고서, 지금 자신이 죽어가려 하고 있다는 이 감각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미로운 그 무엇이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지고의 행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내의 아름다운 눈에 자신의 죽음이 시시각각 목도되고 있다는 사실은, 향기로운 미풍을 맞으며 죽어 가는 것과 같았다. 거기에는 무엇인가가 용납되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남들은 알지 못하는 경지에서 다른 그 어느 누구에게도 용납되지 않는 경지가 용납되고 있었던 것이다. 중위의 눈앞에 있는 신부(新婦)와도 같은, 흰 예복을 차려 입은 아내의 아름다운 모습에 자신이 사랑하고 몸바쳐온 황실과 국가, 군기(軍旗), 그리고 그것들 모두의 화려하게 개인 환상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들은 그의 눈앞에 있는 아내와 동일하였고 그 어디, 아무리 먼 곳으로부터도 그침 없이 해맑은 눈을 밝히며 자신을 바라보아 주는 존재였다.
레이코 역시 죽음을 결행하려는 남편의 모습을 이 세상에 이만치 아름다운 것은 없으리라는 생각으로 바라보았다. 군복이 잘 어울리는 중위는 그 늠름한 눈썹, 굳게 다문 입술과 함께 지금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 아마도 최고의 것일 남자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자, 그럼'
마침내 중위가 이렇게 말하였다. 레이코는 다타미에 깊이 몸을 조아려 예를 취하였다.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눈물로 화장을 망치게 하지 않으리라 생각하였으나 눈물은 멎지 않았다.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을 때 눈물 너머로 흔들리며 보이는 것은 이미 뽑아든 군도의 날 끝을 대여섯 치 드러내 놓고 칼을 흰 천으로 감싸고 있는 남편의 모습이었다.
천으로 감싼 군도를 꿇어앉은 무릎 앞에 올려놓자, 중위는 자세를 바꾸어 양반다리로 앉고는 군복 옷깃의 호크를 끌렀다. 그 눈은 더 이상 아내를 보고 있지 않았다. 넓적한 놋쇠로 만든 단추를 그는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끌렀다. 여섯척 짜리 순백색 훈도시(ふんどし, 근대적 상식을 가진 이방인(일본인의 입장에서 볼 때)들이 보면 가장 충격 받는 일본 전통 남성 속옷, 영화 풀 몬티를 생각하면...., 譯者註)가 보였고, 중위는 허리를 느슨하게 하고는 훈도시를 슬쩍 끌어내리고 오른손으로 군도를 흰 천으로 감싼 부분을 잡았다. 그대로 시선을 내리깔고 자신의 배를 바라보고는 왼손으로 아랫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중위는 칼이 잘 드는지가 염려되었으므로 왼쪽 바지통을 걷어올려 넙적다리를 드러내고는 그곳으로 가볍게 칼날을 미끄러지게 하였다. 순식간에 칼로 벤 상처로부터 피가 스며들었고, 여러 개의 가는 핏줄기가 밝은 빛을 받으며 그의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처음으로 남편의 피를 본 레이코의 심장박동이 무서울 이만치 빨라졌다. 그녀는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중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 피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척 고식적인 안심이라 생각하며 레이코는 짧은 순간의 안도감을 맛보았다.
그 때, 중위는 매의 그것과도 같은 시선으로 아내를 격렬히 응시하였다. 칼을 앞으로 들이대고는 허리를 치켜세우고 상반신이 칼끝으로 빨려 들어갈 듯한 모습으로 몸에 모든 힘을 쏟아 붓고 있는 것을 그 군복의 성난 어깨로부터 알 수 있었다. 중위는 단숨에 깊숙이 왼쪽 옆구리로부터 찌를 작정이었던 것이다. 기합을 넣는 날카로운 소리가 침묵으로 가득찬 방안을 관통하였다.
중위는, 스스로 힘을 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타인으로부터 두툼한 몽둥이로 옆구리를 통타 당한 듯하였다. 일순간 머리에 심한 현기증을 느끼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대여섯치를 드러낸 칼끝은 이미 중위의 살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었으며 손으로 꼭 쥐고 있던 흰 천이 그의 배에 직접 맞닿아 있었다.
의식을 되찾은 중위는 칼날이 확실하게 복막을 관통했다고 생각하였다. 호흡이 곤란하였고, 가슴은 심한 박동으로 고동쳤으며, 흡사 자신의 내부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깊고 깊은 심연에서 땅이 갈라지고 뜨거운 용암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처럼 무시무시한 통증이 솟아 나옴을 알 수 있었다. 그 고통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순식간에 그에게로 다가왔다. 중위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내려 하였으나, 이내 아랫입술을 깨물고 이를 억눌렀다.
이것이 할복이란 것인가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것은 하늘이 머리위로 무너져 내리고 세계가 뒤흔들리는 것과도 같은 엉망진창으로 뒤죽박죽인 감각이었다. 칼날이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견고한 것으로 비쳤던 자신의 의지와 용기가 지금은 가느다란 한 도막의 철사처럼 변하여 오로지 그것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불안에 그는 휩싸였다. 손의 감촉이 미끈미끈해져 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래를 쳐다보자 손과 하얀 천이 모두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훈도시도 이미 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러한 극렬한 고통의 한가운데에서도 아직 보이는 것이 보이고, 있을 것들이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레이코는 중위가 왼쪽 옆구리에 칼을 찌른 순간, 그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막을 내리기라도 한 듯이 핏기가 가신 것을 보고 달려가고픈 자신과 싸우고 있었다. 까닭을 막론하고 그 광경을 그저 바라보아야만 하였다. 지켜보고 있어야만 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남편이 레이코에게 지워준 책임이었다. 다타미 하나 정도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서 아랫입술을 깨물고 고통을 견디고 있는 남편의 얼굴은 선명하게 보였다. 그 고통은 한치의 틈도 없는 정확함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레이코는 그것으로부터 남편을 구해 낼 도리가 없었다.
남편의 이마에서는 흘러나온 땀방울이 빛나고 있었다. 중위는 눈을 감고 다시 시험이라도 해 보려는 양, 다시 눈을 떴다. 그 눈은 평시의 광채를 잃고 작은 동물의 눈과 같이 천진하며 또한 흐리멍텅하게 보였다.
고통은 레이코의 눈앞에서, 그녀의 온몸이 갈가리 찢어지는 듯한 비탄에도 아랑곳없이 마치 한여름의 태양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고통의 키는 자꾸자꾸 커져갔다. 크기를 더해 가는 것. 남편이 이미 다른 세상의 사람이 되어 그의 모든 존재를 고통과 환원하고는 손을 뻗쳐도 닿을 수 없는 고통스런 영어(囹圄)의 수인(囚人)이 되어 있는 것을 레이코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레이코는 가슴아파하지 않았다. 그녀의 비탄은 마음의 고통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레이코에게는 자신과 남편 사이에 누군가가 무정한 유리로 만든 높은 벽을 세워 놓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결혼 이후 남편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녀가 존재함이었고, 남편의 숨결 하나 하나까지가 그녀의 숨결이었음에도, 지금 남편은 고통의 한가운데에 가까스로 존재하고 있었고 레이코는 비탄에 빠진 채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증을 무엇 하나 붙잡지 못하였다.
중위는 그대로 오른손으로 칼날을 이동시키려 하였으나, 칼끝은 그의 장(腸)에 걸렸고 부드러운 탄력 때문에 칼이 쉽사리 밀려나왔으므로 두손으로 칼날을 배 안쪽 깊숙이 눌러가며 칼날을 옮겨야만 함을 알았다. 손을 옆으로 움직였다. 생각한 만큼 베어지지 않았다. 중위는 오른손에 온몸의 힘을 집중시켜 칼날을 그었다. 서너치 정도가 베어졌다. 고통은 배 깊숙한 곳으로부터 서서히 번져갔고 그의 배 전체가 쩌렁쩌렁 울리는 듯 하였다. 그것은 흡사 난타 당하는 종(鐘) 같았으며, 자신의 호흡 한번마다, 그리고 맥박이 한번씩 뛸 때마다 고통이 천 개의 종을 한꺼번에 울려대기라도 하듯이 그의 존재를 뒤흔들었다.
중위는 더 이상 신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러나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자 칼날은 이미 그의 배꼽 아래까지 전진해 있었고 그것을 보자 만족감과 용기를 얻었다.
피는 점점 기세등등하였으며 상체 부위로부터 맥박치듯이 흘러나왔다. 중위가 앉아 있는 부위의 방바닥은 피로 붉게 젖어 있었으며 카키색 바지의 주름잡힌 부위에 고인 피가 그리로 흘러 내렸다. 그리고 드디어 레이코가 입고 있는 하얀 예복의 무릎으로 한 방울의 피가 작은 새와 같이 멀리서 날아와서 앉았다.
중위가 겨우 오른쪽 옆구리까지 베었을 때 이미 칼날은 꽂혀 있던 깊이가 얕아지며 기름과 피로 미끈거리는 몸뚱이를 드러내고 있었으며 돌연히 구토를 느낀 중위는 목쉰 비명을 내질렀다. 구토가 극렬한 고통을 더욱 심하게 하였으며 지금까지 단단히 아물어 있던 그의 복부는 급격히 물결쳤으며 상처 부위가 크게 벌어지며 마치 칼로 베인 자국이 하나가득 토사물을 토해 놓기라도 하듯이, 그의 장이 와락 쏟아져 나온 것이었다. 장은 주인의 고통은 알지 못하다는 듯, 건강하고 징그러울 이만치 생생한 모습으로 미끄러져 나와 중위의 넓적다리에서 넘쳐나고 있었다. 중위는 고개를 숙이고 어깨로 숨을 쉬며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입으로부터는 침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의 어깨로는 견장의 금이 빛나고 있었다.
피는 여기저기로 아무렇게나 흩어졌고 중위는 자신의 피 웅덩이에 무릎까지 잠겨 그곳으로 한쪽 손을 짚고는 널브러졌다. 피비린내가 방안 하나가득 진동하였고 고개를 숙인 채 구토를 되풀이하고 있는 모습을 어깨로부터 알 수 있었다. 쏟아져 나온 장에 밀려나오기라도 한 듯이 칼은 이미 칼끝마저 드러내 놓은 채 중위의 오른손에 쥐어져 있었다.
이때 중위가 있는 힘을 다하여 몸을 제껴올리던 모습은 비할 바 없을 만큼 장렬하였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너무나 급하고 격렬하게 제껴올린 탓에 뒤통수가 도코노마의 기둥에 부딪히는 소리가 또렷이 들렸을 정도였다. 레이코는 그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오로지 자신의 무릎까지 퍼져오는 피의 흐름만을 좇고 있었으나, 이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중위의 얼굴은 살아 있는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눈은 움푹 들어갔고 피부는 바싹 말라 있었으며 그토록 아름다웠던 뺨과 입술은 건조한 흙빛깔로 변해 있었다. 오로지, 무척 무거운 듯이 칼을 쥐고 있는 오른손만이 꼭두각시 인형처럼 가볍게 움직이며 자신의 목덜미로 칼끝을 가져가려 하고 있었다. 이렇게 레이코는 남편 최후의 가장 고통스럽고 공허한 노력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피와 기름기로 번들거리는 칼끝이 몇 번이고 목덜미를 노렸다. 칼끝은 이내 빗나가고 말았다. 이젠 기운이 다 빠진 것이었다. 빗나간 칼날은 옷깃에 닿았고 견장에 부딪혔다. 호크를 끌러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군복의 딱딱한 깃은 저절로 다물어지며 이내 그의 목덜미를 칼날로부터 보호하고 말았다.
레이코는 더 이상 그런 광경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남편에게 다가가고자 했으나 일어 설 수가 없었다. 피로 흥건해진 바닥을 무릎으로 기어서 전진했으므로 그녀가 입고 있던 흰옷의 무릎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남편의 등뒤로 돌아가 옷깃을 벌려주는 도움만을 주었다. 떨리는 칼끝이 가까스로 벌거벗은 목덜미에 닿았다. 레이코는 그 순간 자신이 남편을 밀어 넘어뜨린 듯한 착각을 하였으나 그렇지는 않았다. 그것은 중위가 스스로 의도한 마지막 힘이었다. 그는 갑자기 칼날을 향하여 자신의 몸을 내던졌고, 칼날은 그의 목덜미를 관통하였다. 엄청난 피의 분류와 함께 전등빛 아래로 냉정하며 시퍼런 칼날을 세워 놓고 모든 것은 고요해졌다.





레이코는 피로 미끈거리는 다비를 신은 채로 계단을 내려갔다. 이미 이층은 조용하였다. 아래층의 불을 켜고 가스의 밸브를 잠그고는, 화로 위에 물을 끼얹어 잿속에 남은 불씨를 껐다. 전신거울 앞으로 가서 거울 앞에 쳐 두었던 발을 걷어 올렸다. 피는 그녀가 입고 있던 순백의 옷을 화려하고 대담한 무늬가 있는 옷처럼 보이게 하였다. 전신거울 앞에 주저앉자 넓적다리 언저리가 남편의 피에 젖어 무척 차가웠다.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긴 시간을 들여 화장을 하였다. 뺨에는 짙은 연지를 발랐으며 입술도 짙게 칠하였다. 그것은 남편을 위한 화장이 아니었다. 남겨진 세상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녀의 솔에는 장대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일어서자 전신거울 앞의 바닥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레이코는 이에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는 화장실에 갔고 마지막으로 현관 앞에 섰다. 어제 남편이 이곳의 열쇠를 잠근 것은 죽음의 준비였다. 그녀는 한참동안 단순한 생각에 잠겼다. 열쇠를 열어놓아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만일 잠가 놓는다면 이웃사람들은 며칠이 지나도 두 사람의 죽음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었다. 자신들의 주검이 부패한 채로 발견되는 것은 그녀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역시 열어두는 것이 좋았다. ....... 그녀는 잠긴 문의 열쇠를 풀고 간유리 문을 조금 열어 놓았다. ...... 갑자기 찬바람이 들어왔다. 심야의 길거리에 사람의 그림자라곤 없었으며 건너편 집 마당 나무들 사이에서 얼어붙은 별들이 반짝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레이코는 현관문을 그대로 둔 채 계단을 올라갔다. 여기저기 걸어다닌 탓에 다비는 더 이상 미끄럽지 않았다. 계단 중간쯤부터 이미 이취(異臭)가 그녀의 코를 찔렀다.
중위는 피바다의 한복판에 엎드려 있었다. 목덜미 위로 서있는 칼날이 아까보다도 더욱 빼어나 보였다.
레이코는 피웅덩이 한가운데를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갔다. 그리고는 중위의 시체 옆에 앉아서 방바닥에 있는 그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중위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 머리를 소매로 감싸 안아 올려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아주고는 이별의 입맞춤을 하였다.
일어서서 오시이레에서 흰 천과 새 허리띠를 꺼냈다. 옷섶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허리에 두툼한 천을 감고 그것을 허리띠로 단단히 졸라맸다.
레이코는 중위의 시체로부터 한척정도 떨어진 곳에 앉았다. 단도를 허리띠로부터 뽑아 명징한 칼날을 가만히 응시하고는 혀를 갖다대었다. 잘 갈아진 무쇠는 약간 단맛이었다.
레이코는 주저하지 않았다. 아까 그토록 죽어 가는 남편과 자신을 갈라놓았던 고통이 이번에는 자신의 것이 된다고 생각하자 남편이 이미 영유하고 있는 세계에 동참한다는 기쁨이 있을 따름이었다. 괴로워하는 남편의 얼굴에는 처음으로 보는 무엇인가 불가해한 것이 있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그 수수께끼를 푸는 것이었다. 그녀는, 남편이 믿었던 대의(大義)의 진짜 단맛과 쓴맛을 지금이야말로 자신도 맛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남편을 통해서만 겨우 맛보아왔던 것을 이번에는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의 혀로 맛보는 것이었다.
레이코는 목덜미에 칼날을 갖다 대었다. 한번 찔렀다. 칼은 깊숙이 찔리지 않았다. 머리가 무척 뜨거워졌고 손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칼날을 옆으로 움직였다. 입안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 넘쳤고 눈앞의 시야는 뿜어져 나오는 피의 환상으로 새빨개졌다. 그녀는 힘을 얻어 칼날을 강하게 목 깊숙한 곳으로 찔러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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