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작품]/***** 좋은 단편

<2009 문화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 안녕, 피터/황지운

소설가 구경욱 2009. 2. 21. 04:44

<2009 문화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 안녕, 피터/황지운

 

 

영수는 운전대를 쾅, 하고 쳤다. 그 소리에 유진이 거울을 보고 있다가 깜짝 놀랐다. 도로만 뚫으면 다 해결되는 줄로 아는 멍청한 공무원 새끼들, 영수는 다시 한 번 운전대를 쳤다. 13번 국도로 들어가는 고가도로는 휴일을 맞아 교외로 나가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더위를 잘 타지 않는 유진의 이마에도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유진은 왼손을 들어서 땀을 닦았다. 손끝에서 땀이 뚝, 하고 떨어졌다.

유진은 문득 뒤를 돌아봤다. 진석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자고 있었다. 진석의 셔츠는 땀에 절어 칙칙한 색으로 변해 있었다. 진석이 숨을 들이쉴 때마다 거대한 배가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으음, 진석이 몸을 뒤척이자 땀 냄새가 훅, 하고 올라왔다. 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얼마 전 내린 눈이 논 위에 그대로 쌓여 있었다. 논 위에서 콩콩콩, 뛰는 까치를 보면서 평화롭다는 생각을 했다. 유진은 그렇게 까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땀을 닦았다. 영수는 주머니를 뒤져서 담배를 한 대 물었다. 라이터가 고장인지 불이 붙지 않았다. 영수는 신경질적으로 라이터를 창밖으로 던졌다. 라이터는 포물선을 그리면서 바닥에 착지했다. 라이터 사이로 보이는 날씨는 무척 청명했다. 낙엽은 잘 말라서 바람이 불 때마다 바삭바삭거리는 소리가 났고, 하늘은 눈이 부셨다. 배드민턴 치기 딱 좋은 날씨였다.

히터가 고장 난 건 차에 탄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스위치를 힘껏 돌린 게 장갑을 끼고도 손이 시리다고 말하던 유진이었는지, 성질 급한 영수였는지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았다. 누군가 스위치를 돌리던 순간, 스위치는 힘없이 뽑혀버렸다. 누구의 잘못을 탓할 수는 없었다. 셋은 그저 창문이란 창문은 한껏 연 채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뿜어져 나오는 히터의 열기를 그대로 맞으면서 길을 달릴 수밖에 없었다.

여행은 영수의 말년휴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셋은 5년 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셋과 재희는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다. 진석과 영수는 초등학교 때부터 같은 학교를 나왔고, 재희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전학을 왔다. 넷은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잠시 어울려 다니다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다시 만났다. 그 고등학교는 재희의 어머니가 지은 학교였다. 재희는 그 학교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예쁜 여자애들이 많아서 다닐 만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하지만 학교 주위는 황량했고, 구멍가게와 오래된 아파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넷은 그곳에서 2년 반 동안 언제나 함께였고, 항상 즐거웠다. 진석이 입던 밑단이 다 해진 후줄근한 교복이나, 담배를 피우다가 교사에게 벌을 받던 영수의 모습도, 좋아하던 학교 선생님이 결혼하던 날 펑펑 울던 유진이나 가출을 밥 먹듯이 하던 재희도 모두. 매일매일은 비슷했고, 짜릿함이나 흥미진진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날들이었다. 하지만 넷은 아니, 셋은 그 세월에 만족했다. 고3 어느 봄날에, 재희가 그렇게 가버리고, 진석이 학교를 그만두고 난 후, 넷은 영영 모이지 못했다. 아니, 전혀 만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영수가 군대를 갈 때라든가, 진석이나 영수가 대학을 가는 일이 있으면, 셋은 만나서 맥주 한잔을 홀짝홀짝 비우면서 술집 벽에 붙은 티브이만 보다가 헤어졌다.

셋은 어제 재희를 화장한 곳에 가보기로 했다. 재희는 강원도 방태산 언저리에 뿌려졌다. 이사장은 재희가 산이라면 질겁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척했다. 이사장은 재희가 한번도 가보지 못했던 선산에서 생을 마무리 짓기를 바랐다.

어쨌든 지금 그곳에 간다는 건 이제 와 생각해보면 미친 생각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가자고 마음을 먹었을 무렵에는 무척 좋은 생각처럼 들렸다. 그저 셋은 오랜만에 만났고, 무언가를 기념해야겠다는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게다가 유진이나 진석은 가끔 교외에 나가기는 했지만 전라남도를 벗어난 적은 없었고, 둘에게 강원도라는 지명은 하와이나 프라하처럼 멋있게 들렸다. 강원도에서 2년 남짓 머물고 있는 영수가 둘을 말려야했지만 영수는 너무 취해 있었다.

지금 정신을 차린 셋은 고가도로 입구에서 손으로 부채질만 하고 있다. 부채질은 하나마나였다. 영수는 주머니의 담배를 만지작거렸고, 혹시 좀 더 더워지면 저절로 어디엔가 불이 붙어서 담배를 피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 생각을 하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오랜만에 웃은 영수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제 먹은 술은 영 깨질 않았다. 그건 영수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코를 골면서 자고 있는 진석은 모르겠지만 유진은 차가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누군가 얼큰한 해장국을 한 그릇 준다면 영혼까지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제, 진석은 2년 만에 고향에 들렀다. 너무 오랜만 아니야? 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군복무 중이잖아, 라고 변명을 하곤 했지만 그건 핑계였다. 스무 해가 넘게 살아온 도시였다. 모든 것이 지겨울 정도로 익숙했다. 영수는 이 도시가 권태로웠다. 영수는 기차역 앞에 서서 이곳도 제법 도시 티가 나는군, 하면서 큰 도시에서 오랫동안 살다 온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도시는 너무 낯설게 변해버렸다. 그토록 영수가 드나들던 역 앞 오락실이며, 만홧가게는 텅 빈 건물만 철거 표시를 안고 서 있었다. 영수는 자신이 낯선 고장에 온 것처럼 불안했다. 영수는 벤치에 앉아서 담배 한 갑을 천천히 피웠다. 한참 후 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이 덜 깬 유진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영수는 고향에 오길 잘했다고 안도했다.

으으음, 하고 진석은 소리를 내면서 팔을 휘저었다. 차가 심하게 흔들렸다. 영수는 쾅, 하고 다시 운전석을 쳤다.

“이 상황에서 저 자식은 잠이 온대니? 추헌곤, 저 자식 좀 깨워봐.”

“어머! 누가 추헌곤이래? 유진이라고 부르랬잖아. 왜 자꾸 옛날 이름을 부르고 그래?”

“아, 그랬나? 미안. 아니, 그럴 수도 있지. 이름 바꾼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5년이나 지났거든! 기분이 상하니까 앞으로는 제대로 된 이름을 불러줬음 좋겠어.”

“근데 왜 하필 유진이야? 알렉스나 토미, 이런 걸로 바꾸지 그랬어? 요새 게이 삐끼들은 그런 이름 안 쓰나?”

영수가 빈정거리자 유진은 몸을 살짝 틀어서 창밖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이름 바꾼 지가 언젠데 이제 와서 시비야, 자기 돈 들여서 바꾼 것도 아니면서, 하고 중얼거렸다. 유진은 5년 전에 이름을 바꿨다. 오래 전부터 유진이 간절히 원하던 일이었다. 추헌곤이라는 이름은 고풍스럽다는 느낌을 훨씬 지나쳐서 촌스러웠고, 무엇보다 너무 남자 이름 같았다. 이름을 지을 때, 삼대독자니까 돌림자를 써서, 라는 할아버지의 말을 엄마는 무시해야 했다고 유진은 언제나 생각했다. 과거야 어쨌든, 유진은 지금의 이름이 무척 좋았다. 영어로 바꾸기도 좋았고, 무엇보다 남자 이름 같지 않았다.

영수는 고개를 돌리고 창밖을 바라보는 유진의 옆모습을 힐끗 바라봤다. 고등학교 때나 지금이나 턱선은 여전히 날렵했고, 수염 한 올도 나지 않았다. 변하지 않은 건 턱선뿐만이 아니었다. 입술도 여전히 새초롬했다. 아니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귀여운 남자였다. 하지만 영수는 재희에게도 그 말을 하지 않았었다. 그런 말을 남자에게 하는 건 사내자식이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유진이 입술에 립글로스를 발랐다. 유진은 새끼손가락을 날렵하게 들어서 입술이 더 반짝거리도록 정돈했다. 영수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영수는 무안한지 괜히 빵빵거리면서 짜증을 냈다.

“루, 루씰!”

진석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차가 다시 한 번 출렁거렸다. 시발, 불안해서 운전해먹겠나. 영수가 투덜거렸다.

“…아, 꿈이었네.”

진석은 입맛을 쩝쩝 다셨다.

“무슨 꿈을 꿨는데?”

“루씰이 사람이 돼서 다른 남자랑, 그런….”

“루씰이 네 방에 있던 인형 맞지?”

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걔가 남자랑 뭐?”

“…그냥, 그런…그런… 꿈… 부끄럽게시리”하고 진석은 헛기침을 했다. 진석은 말을 시작할 때나 끝맺을 때 헛기침을 했다. 진석의 목소리는 점잖으면서도 음산하고 조용했다.

“영감탱이냐? 헛기침이나 하고.”

영수는 못마땅한지 한마디 뱉었다. 진석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근데 이놈의 차들이 갈 생각을 안 해. 사람들이 밥 처먹고 도로로만 나왔나?”

“영수야, 그만 짜증 내. 너만 짜증 나는 것도 아니잖아.”

유진이 짜증스럽게 한마디 뱉었다. 영수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유진을 바라봤다. 영수가 왼손을 흔들면서 유진에게 화를 내려는 순간, 앞 차가 움직였다. 영수는 천천히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열린 창문으로 건조하고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셋의 이마에 맺힌 땀이 빠른 속도로 식었다. 셋은 시원함에 안도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갈림길이 나오자 영수는 속력을 줄였다.

“왼쪽으로 가는 게 맞는 거지?”

영수는 조심스럽게 유진에게 물었다.

“응.”

“확실해?”

“응.”

영수가 길을 잘 못 찾는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영수는 항상 다니던 길이어도 약간 다른 각도에 데려다놓으면 길을 찾지 못해서 우왕좌왕했다. 수십 번 가 본 재희의 집도 항상 헷갈려했고, 유진의 아파트의 동과 호수도 잘 몰랐다. 유진은 갈림길이나 이정표가 나올 때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이 길 맞는 거지? 를 외칠 영수를 생각하자 한숨이 나왔다.

“근데 꼭 국도로 가야 되는 거야?”

영수가 말했다.

“재희가 고속도로를 싫어했잖아.”

“당연하지. 재희는 오토바이 타고 다녔잖아. 차가 있었으면 고속도로를 무척 사랑했을 걸? 국도로 가는 게 얼마나 돌아가는 길인지 알고는 있지?”

“몰라, 그냥 가. 난 오토바이를 타던 재희밖에 몰라, 그리고 차들이 쌩쌩 달리는 길보다 풍경을 보면서 천천히 갈 수 있는 국도가 더 좋아.”

유진의 말에 영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 다 좋으니까, 이따 편의점이나 슈퍼가 보이면 바로 서는 거다. 라이터가 고장 났어.”

유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셋이 탄 차는 첨단지구 13번 국도를 지나 담양으로 갔다. 셋은 도중에 편의점에 들러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산 후, 컵라면 세 개를 사서 해장을 했다. 아침 겸 점심이었다. 오는 길에 88고속도로 근처를 지나면서 영수가 다시 한 번 고속도로를 타고 가자고 강하게 이야기하면서 핸들을 틀었지만, 둘의 찢어질 듯한 함성에 다시 핸들을 돌렸다. 다이어트를 하겠다며 라면 한 개만 먹겠다던 진석이 한 개를 더 먹을 동안, 영수는 담배를 피우면서 인도에 무성하게 난 풀들을 발로 건드렸다. 풀들은 영수의 발끝이 닿으면 휘청거리다가 다시 제자리를 잡기도 했고, 영영 부러져서 바닥에 누워버리기도 했다.

영수는 바닥에 누워버린, 반쯤 누렇게 변해버린 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재희, 같았다. 아니, 여자 친구의 결혼 소식을 듣던 날부터 지금까지 주욱, 아무것도 하지 않고 웅크리고 있는 영수 같았다. 여자 친구는 상냥했고, 착했지만 군 복무기간 동안 기다려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영수는 기다려줬음 하고 생각했다. 딱히 사랑을 바라는 건 아니었다. 곁에 누군가가 있어줬으면 싶었다. 영영 떠나지 않을 것처럼 말하던 여자 친구가 지금 임신 5개월째라니. 영수는 손가락으로 여자 친구를 만났던 적을 세어보다가 안심했다.

적어도 영수의 아이는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여자 친구와 마지막으로 자던 날, 콘돔에 구멍이라도 낼 걸 그랬어, 라고 영수는 생각했다. 영수는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쌀쌀한 바람이 온몸에 파고들었다. 영수는 몸을 웅크리면서 인도에 걸터앉았다.

“얘, 그렇게 앉아있지 마. 꼭 양아치 같잖니. 어쩜 앉아도 꼭.”

“남이사. 신경 꺼.”

영수는 유진에게 퉁명스럽게 대꾸하곤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휑하게 뚫린 교차로가 눈에 들어왔다. 간혹 신호등 앞에서 깜박이를 켜고 서 있던 차들은 좌회전을 하거나 우회전을 했다. 영수 앞으로는 한 대의 차도 지나가지 않았다. 차가 지나다니면 공기가 안 좋다고 투덜거릴 거면서 영수는 아무도 없는 것이 쓸쓸하다고 느꼈다. 진석은 왕뚜껑 하나를 다 먹고 국물을 마시고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영수에게까지 후루룩 소리가 들렸다. 술이 깨면서 자꾸 우울함이 엄습했다. 기집애도 아니고 우울하기는, 하고 영수는 다시 담배를 한 대 물었다. 그리고,

“가자.”

하며, 입가심으로 빵을 먹고 있는 진석과 막대 사탕을 입에 막 문 유진에게 말했다.

“담배는 다 피우고 차를 타야지.”

유진이 얼굴을 찌푸렸다.

“아깐 뭐라고 하지도 않더니만 갑자기 왜 그래?”

“아깐 막히는 도로 위였고, 지금은 아니잖아. 나가서 다 피우고 들어와. 간접흡연이 얼마나 안 좋은 줄 알아?”

“너흰 몰라. 진정한 사나이의 괴로움을.”

“…우린 흡연자를 이해해야 해.”

진석은 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걔네들은 니코틴에 중독된 병자들이거든.”

진석은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놀리는 거냐?”

“아니… 거짓말은 아니잖아. 너도 알잖아. 네 폐가 썩어가고 있는 거.”

진석은 다시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간접흡연으로 인해서 우리의 폐도 함께 썩어가고 있지. 우린 담배 한 대도 안 피우고, 폐암으로 죽을 수도 있어. 혹은 후두암 같은 것도 포함해서 말이지. 그럼 우리는 죽기 직전에 영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원망하겠지.”

인생에서 도움이 안 되는 녀석들이다. 하긴 언제는 도움을 바란 적이 있었는가. 영수는 입을 다물었다.

“삐졌어?”

유진이 영수를 쿡쿡 찔렀다. 영수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고개를 흔들었다.

“삐진 거 맞네. 다 너 좋으라고 하는 소리지, 괜히 그러겠어?”

유진은 계속 영수의 옆구리를 찔렀다.

“가만히 좀 있어! 시발, 가만히 있으니까 누굴 호구로 아나!”

영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유진은 깜짝 놀라며 울 듯한 얼굴로 영수를 빤히 쳐다보더니,

“진석아, 나 가슴이 떨려서 도저히 영수 옆에 못 앉겠어. 자리 좀 바꿔줘.”

라고 말했다.

영수는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미안하다는 말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나이 처먹고도 계집애처럼 질질 짜는 게 쪽팔리지도 않냐? 아니, 그럼 애초에 사람 신경을 살살 긁지나 말지. 담배 좀 피우는 게 뭐 어때. 재희가 피울 때는 멋있다고 하면서 난리 치던 새끼가 말이야.”

“거기서 재희 얘기가 왜 나와?”

유진이 울먹이면서 소리를 질렀다. 영수는 차 문을 벌컥 열고 나갔다.

“나 운전 안 해. 잘난 늬들끼리 가든지.”

“…우리 운전면허증도 없어.”

진석이 말했다.

“뭐? 그 나이 처먹도록 면허도 안 따고 뭐한 거냐? 다들 인생을 왜 이렇게 헛사는 거야? 여기에서 군대 간 사람도 나밖에 없지?”

“군대나 학교 같은 제도권을 통해서 인간의 계급을 따지는 건 일차원적인 일이야…군대 갔다 오면 어른이 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어른이 된다는 보장은 없잖아. 그리고 어른이 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그냥 어른 대접 해주니까 어른인 척하는 거지… 어른이라는 개념도 명확하지도 않고. 그저 세월이 흐를수록 이상한 방향으로 유치해지는 거야….”

진석의 말이 끝나자, 영수는 한동안 잠자코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 유치하다는 거야?”

진석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 죽일 자식, 영수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유진은 얼굴을 찡그렸다. 왜 유진에게 화를 냈는지, 영수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영수는 담배를 깊게 빨았다. 그리고 체념한 듯 다시 차에 올라탔다. 차가 쌩 하고 움직였다. 유진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가 앞으로 쏟아졌다.

그리고 셋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석은 차에 타자마자 앞좌석의 두 명이 분위기가 어떻든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잠을 자기 시작했다. 우석대학교를 지나자 전라도를 벗어났다.

왜 그랬을까. 유진은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생각하느라 자신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충청도를 지나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유진이 좀 심하게 영수에게 뭐라고 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영수는 언제든 유진이 짜증을 내면 잠자코 받아주었다. 유진은 울다 만 눈으로 영수를 훔쳐봤다. 영수는 입을 꾹 다문 채 운전을 하고 있었다. 군대에 가더니 사람이 변했다. 유진은 살짝 야속했다.

점심때가 훨씬 지났지만 셋 중 누구도 점심을 먹자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차는 득안대로 고가도로를 지나, 논산을 거쳐서 계룡시 방면으로 가고 있었다. 허기가 져서 일어난 진석은 창밖의 식당들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점심 안 먹을 거야?”

진석은 입맛을 다셨다. 둘은 고개를 돌려서 진석을 보았다. 표정이 싸늘했다. 진석은 무서울 때 하는 것처럼 목을 움츠리고 둘의 반응을 살폈다.

“나, 난 삼겹살.”

진석이 말했다.

영수와 유진은 젓가락을 든 채 허겁지겁 삼겹살을 먹는 진석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천천히 좀 먹어라. 어째 사흘 굶은 애처럼 먹냐? 너 예전에도 이렇게 많이 먹었었냐?”

진석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수는 혀를 끌끌 차며 담배를 한 대 물었다. 유진은 고개를 돌리면서 손을 휘휘 저었다. 영수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유진이 죽으려면 혼자 죽지 왜 우릴 끌어들여, 라는 둥 투덜대자 영수는 꽥 소리를 질렀다.

“시발, 옆에서 더럽게 꽥꽥거리네. 술 마시는 게 죽을죄냐? 한잔만 마실게. 됐지?”

“…너네 싸우는 게 꼭 오래된 부부가 싸우는 것 같다.”

진석이 입 안 가득 고기를 넣은 채 말했다.

“저 자식이 못하는 말이 없어.”

영수의 얼굴이 빨개진 걸 감추려는 듯 괜히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건 영수의 오랜 소원이었다. 유진과 부부가 되는 것. 유진이 남자를 좋아할 적마다 심하게 놀리던 영수였다. 일부러 유진 앞에서 레이싱걸 누드화보집 같은 것을 보면서, 착착 소리가 나게 페이지를 넘기던 영수였다. 언제나 유진을 좋아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저 생각만 했다. 어떤 여자들보다 유진은 예뻤다. 유진은 영수가 찾던 여자였다.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제길, 영수는 소주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입 안에 씁쓸함과 시원함이 퍼지면서 온몸이 나른해졌다. 영수는 까맣게 탄 삼겹살을 한 점 집어 먹었다. 유진은 영수의 잔을 빼앗으면서, 이제 그만 마셔, 라고 말했다. 아, 알아서 해, 라며 영수는 다시 삼겹살을 집어 먹었다. 거지 같은 인생이었다.

영수는 언제는 인생에 되는 일이 있었나 싶었다. 넘길 수 없는 커다란 벽이 있는 것처럼 영수의 인생은 언제나 막막했다. 겨우 유진을 잊고 여자를 만났지만, 여자 친구는 다른 남자랑 결혼을 한다고 했다. 극장에서도 인기 있는 영화는 영수 앞에서 매진되었고, 영수가 좋아하는 식당은 언제나 몇 달 못 가서 없어져 버렸다. 생애를 통틀어서 인생을 바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어느 순간 죽어버렸다. 그 자식은 친구도 아니야, 영수는 생각했다.

그날도 오늘처럼 날씨가 좋았다. 재희는 일주일째 학교에 나오지 않았고, 오랜만에 오전수업만 하는 날이었다. 그날 왜 오전수업만 했는지 뚜렷하게 기억은 나지 않았다. 그냥 유진과 진석과 함께 누구의 집으로 갈까 고민을 하다가 밖에서 배드민턴이나 치자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셋은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공원에서 만나기로 한 후,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영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길을 걷고 있었다. 재희에게서 전화가 온 건 그때였다. 재희의 목소리는 반쯤 잠겨 있었다. 영수는 목소리가 왜 그래? 그러니까 담배 좀 작작 피워, 새꺄, 하하. 하면서 웃었다. 재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약간의 흐느낌이 들렸다. 재희의 말은 간단했다. 여기, 동네 근처 빌딩 옥상 난간이야. 영수는 옥상에는 어떻게 올라갔느냐고도 묻지 못했다. 네가 올 때까지, 한 발짝도 안 움직일게. 할 말이 있어, 였다. 영수는 크게 웃었다. 그리고 무슨 소리를 하냐, 라고 말했다. 재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수는 장난치지 말고, 이따 애들이랑 배드민턴 치러 갈 건데 같이 가자, 라고 말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재희는 유진과 진석에게도 전화했지만, 누구도 그곳으로 가지 않았다. 재희가 죽을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고 셋은 생각했다. 언제나처럼 속았지? 하면서 나타날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 재희는 죽었다. 어이없게도 교통사고였다. 재희는 빌딩에서 내려와,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를 역주행했다. 재희는 자동차 세 대와 부딪히고, 오 킬로 정도를 더 운전했다. 그리고 트럭을 들이받고 허공으로 날아갔다. 죽었다, 는 말을 곱씹을 여유도 없을 정도로 쏜살같이 일어난 일이었다. 그때 영수가 해야 했던 건 뭘까. 영수가 달려갔다면 상황은 변했을까? 영수는 아직도 그날의 그 대화를 생각해본다. 그때마다 재희의 목소리는 조금은 밝았다가, 조금은 어두웠다. 영수가 했던 말도 조금씩 바뀌었다. 하지만 재희가 죽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영수야? 졸리지?”

진석이 졸다 말고 일어나서 영수에게 말했다.

“응, 조금.”

“내가 이야기 하나 해 줄까?”진석은 영수의 대답도 듣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영화 한편을 봤어… 딱히 재밌지는 않았는데, 뭐랄까, 감동적이었지… 그 감동이 우리가 항상 포르노를 보면서 느끼는 감동은 아니었어. 신도 아닌 남자가 음악을 연주해서 사람들을 구하는 내용이었지. 그때 전 세계는 레밍 바이러스가 퍼져 있었어.”

“레밍 바이러스가 뭔데?”

“…몰라. 어떻게 감염되는지, 어디에서 생겨났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어. 그냥 그 바이러스에 걸리면 짧게는 1분, 길게는 석 달 안에 모두 죽어. 아니, 죽고 싶어서 견딜 수 없어 하다가, 결국 죽어. 동맥을 긋든, 한강에서 뛰어내리든, 빌딩에서 뛰어내리든… 근데 영화를 보면서 의문이 하나 생겼어. 그렇게 해서 죽은 사람은 자살인 걸까, 타살인 걸까?”

“그 얘기가 재밌다는 거냐, 지금?”

잠깐만, 진석은 말했다.

“…손녀가 레밍 바이러스에 걸린 남자가 있지. 그 남자는 음악가를 찾아가. 그 음악을 들으면 잠시나마 레밍 바이러스의 활동을 멈출 수 있거든… 그때 손녀는 손발이 꽁꽁 묶인 채, 침대 위에 누워 있었지. 손녀로는 미야자키 아오이가 나와. 결혼을 했어도 아름다운 여자지. …그런 여자랑 결혼하는 남자는 사형시켜야 한다고 생각해…. 어쨌든 손녀가 음악을 듣는 동안, 그 남자는 음악가의 어머니에게 말하지. 왜 늙어서 다 죽어가는 자신이 아니라, 손녀가 레밍 바이러스에 걸렸는지 모르겠다고. 어머니는 이렇게 말해. 아름다운 것들은 빨리 죽고, 우리같이 추한 것들만이 남아서 세상을 지켜가는 거라고.”

“…그래서?”

진석은 어깨를 으쓱했다.

“넌, 그 얘기를 들으면 잠이 깰 거라고 생각했던 거냐?”

“…나름, 재밌는데. 유진아, 재밌지 않았어? 난 그 영화 보면서 울었는데.”

으응, 유진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여튼, 영수는 투덜거렸다.

영수는 23번국도 송선 교차로에서 속도를 줄었다.

“여기에서 어떻게 가야 되는 거야?”

영수는 자고 있는 유진을 깨웠다. 유진은 으음, 하면서 몸을 뒤척였다. 영수는 진석을 깨웠다. 진석은 눈을 반쯤 뜨고는 손가락도 펴지 못한 채 허공을 가리키더니 잠이 들었다. 시발, 나더러 어떡하라고, 영수는 차를 세워놓고 담배를 피웠다.

영수가 길을 헤매면, 재희는 어디에 있든 길을 가르쳐줬다. 재희는 길을 참 잘 가르쳐주었다. 영수도 재희가 길을 가르쳐주면 쉽게 그곳을 찾을 수 있었다. 재희는 보통 사람들처럼 큰 건물, 큰 도로를 중심으로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영수가 길을 잃은 지점에서, 어디에 서 있다고 이야기할 때, 영수가 그곳을 등지고 있는지, 마주보고 있는지, 왼쪽 혹은 오른쪽에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가끔 영수는 어디에선가 재희가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아서 오싹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재희가 함께 있다는 건, 절대 꺼지지 않는 등불을 들고 있는 것처럼 든든했다.

재희가 죽고 난 후, 영수는 교차로나 신호등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곤 했다. 영수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영수는 밤마다 같은 꿈을 꿨다. 재희가 나오는 꿈이었다. 재희는 저만치에서 담배를 입에 물고 흥얼거리면서 길을 걷고 있었고, 영수는 재희를 따라가고 있었다. 재희 앞에는 태양이 잘 마른 아스팔트길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지만, 영수가 걷는 길은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진흙길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영수는 재희야, 하고 불렀지만 재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걷기만 했다. 영수가 온 힘을 다해서 길을 걸어도 재희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 영수는 꿈에서 눈물을 흘렸다. 일어나보면 베개가 눈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눈물은 닦아내도 계속 흘렀다. 잠에서 깨고 나서도, 영수는 걷지 못했다. 꿈속에 나온 진흙길처럼 걷는 게 버거웠다. 그럴 때마다 영수는 재희에게 전화를 했다. 재희의 전화는 언제나 꺼져 있었다.

영수는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영수는 기어 옆에 놓인 유진의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다가 재희의 번호를 눌렀다. 영수는 한참동안 그 번호를 바라보더니 종료버튼을 눌렀다. 이젠 확실히 알고 있다. 재희는 절대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걸.

영수는 어디든지 가기만 하면 되지, 하는 심정으로 액셀러레이터를 세게 밟았다. 국도는 구불구불하게 이어졌다. 영수는 몇번 국도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쌩쌩 달렸다. 대충 북쪽으로 가면 되는 거 아닌가, 라고 생각했다. 도로는 구불구불했지만 차를 타고 다니기에는 적당했다. 전국이 이런 도로들로 거미줄처럼 얽혀 있겠지, 영수는 생각했다. 수많은 도로와 건물과 사람들 중에서 절반은 영수가 가보지 못한, 가보지 못할 것들이었다. 하지만 어디든 다를 건 없었다. 영수는 낯설 것도 없는 풍경을 바라봤다. 길을 걷는 사람들은 이방인을 보듯 영수를 바라봤다. 쓸쓸했다.

연기군청을 지나서 조치원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영수가 다니던 학교가 있다. 영수는 액셀러레이터를 더 세게 밟았다. 학교가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삼 년 남짓 다닌 학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 어떤 것도 즐겁지 않았다. 그냥 버티고, 지탱하고 있던 시간들이었다. 아니, 재희가 사라진 후, 모든 시간들은 그냥 흘러가고 있는 것뿐이었다. 영수는 담배를 한 대 물었다.

충청도를 지나 남한강 대교에 들어서자 날씨가 흐려졌다. 아침부터 쉴 새 없이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주위는 벌써 어둑어둑해졌다. 이정표에 강원도가 쓰여 있었고 싸락눈이 내리고 있었다. 영수는 숨이 턱 막혔다. 내가 이 저주받은 도시에 제 발로 들어오다니. 영수는 라이트를 켰다. 가로등이 없는 국도는 조금만 어두워져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도로에 반짝거리며 떨어지는 눈의 개수는 점점 많아졌다. 영수는 뻑뻑해진 눈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영수는 잠을 자고 있는 둘을 바라봤다. 둘은 점심을 먹은 이후부터 계속 잠을 자고 있다. 진석이 몸을 뒤척일 때마다 차가 출렁거렸다. 영수는 지금 자신이 아침부터 쉬지 않고 운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화가 치밀었다.

춘천, 홍천, 인제…이정표들이 보이고, 방태산의 이정표가 보였다. 그때마다 영수는 유진을 깨웠지만 유진은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방태산의 이정표가 빈번하게 보이고, 우회전과 좌회전을 반복할 때였다. 31번 국도의 사거리에서 쉼 없이 쏟아지는 눈을 와이퍼로 닦아내면서, 흐릿해진 이정표를 물끄러미 살폈다. 에라, 영수는 직진을 했다.

운전석에 앉은 오다기리 조의 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유진은 그의 머리를 뒤로 넘겨주었다. 그가 환히 웃으면서 유진의 손을 잡았다. 손끝은 차가웠지만 손바닥은 따뜻했다. 유진은 그를 보면서 싱긋 웃었다. 그는 유진에게 사랑해, 라고 얘기했다. 일본어가 아닌 한국어로. 유진은 행복에 겨워서 롤러코스터를 타고 순식간에 내려오는 듯한 짜릿함을 느꼈다. 오랜만에 느끼는 환희였다. 차에서 덜컹, 하는 소리가 났다. 오다기리 조는 시발, 하고 외쳤다. 유진은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야?”

영수는 담배를 입에 문 채, 밖으로 나가 차 문을 발로 있는 힘껏 찼다. 차 문은 힘없이 찌그러졌다. 똥차가 사람을 죽이려고 들어? 하고 악을 질렀다. 유진은 창문을 내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차는 앞바퀴가 바닥에서 살짝 떠 있었고, 뒷바퀴는 어딘가에 빠져 있었고, 주위에는 눈을 뜰 수도 없을 정도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유진은 황급히 차 문을 열었다. 차 문이 쌓인 눈 때문에 힘겹게 열렸다. 걸을 때마다 무릎이 푹푹 빠졌다.

“우리가 3박 4일 갇혀 있었던 거야? 무슨 눈이 이렇게 무섭게 많이 와?”
“그래서 여기가 저주받은 도시 아니냐. 왜 더 푹 주무시지 벌써 일어났냐? 그렇게 깨울 때는 일어나지도 않더니만.”

영수는 담배꽁초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여기가 어디야?”

“…나도 몰라.”

“이 지경까지 오도록 말 한마디도 없었단 말이야?”

“설마 내가 이 지경까지 오도록 말이 없었겠어? 네가 안 일어난 거겠지.”

“몰라, 깨우지도 않았으면서 거짓말쟁이.”

유진은 다시 차 안으로 들어갔다. 쾅, 하고 문을 닫자 눈이 차 안으로 들어왔다. 저 새끼를 죽일 수도 없고, 영수는 다시 담배를 물었다. 담뱃갑에 담배가 얼마 남지 않았다. 충청도에서 골프장 어귀를 지날 때 한 갑 더 사놓기는 했는데, 하고 영수는 담배를 아껴 피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유진은 핸드폰을 꺼냈다. 전화는 먹통이었다. 유진은 짜증을 내며 핸드폰을 던졌다. 쨍, 하고 핸드폰 케이스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진석은 그 소리에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진석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중얼거렸다.

“여기는…천국인가…?”

하고 진석은 비척비척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진석은 몇 걸음 걷지도 못하고 눈 위로 넘어졌다. 아, 아, 따뜻해. 루씰. 하고 진석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또라이 같은 새끼, 영수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얘기했다.

“이제 어쩔 거야? 책임져.”

“나더러 뭘 책임 지라는 거야? 내가 길 모르는 거 뻔히 알면서 자던 새끼가 누군데?”

영수가 소리를 지르자, 메아리가 되어서 울렸다. 영수가 윽박지르자 유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시발, 까딱만 하면 처울고 말이야. 뭐냐? 이게.”

“몰라, 나 재희 보러 갈 거야. 빨리 책임져.”

“…그럼 그날 나가서 붙잡지 그랬냐? 여기 와서 죽은 재희 보고 징징거리지 말고.”

영수는 아차 싶었다. 유진은 성큼성큼 영수에게 다가와서 영수의 뺨을 때렸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내가 너한테 맞을 정도로 잘못한 거냐? 그리고, 내가 거짓말한 거냐? 사실이잖아. 어디서 손찌검이야, 손찌검이.”

영수는 주먹을 들어서 유진의 배를 가격했다. 유진은 신음 소리도 못 내고 눈 위에 그대로 쓰러졌다. 아, 이게 아닌데. 영수는 안절부절못하며 슬금슬금 유진에게서 멀어졌다. 영수는 발끝으로 진석을 툭, 건드렸다. 그때까지 눈 위에 엎드려 있던 진석이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영수에게 다가왔다.

“…친구끼리 때리면 안 돼.”

하고 말했다. 영수는 그때까지 주먹을 꾹 쥐고 바르르 떨고 있었다.

“넌 또 뭐야? 옆에서 같이 처잔 주제에.”

영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다.

“너 목소리가 좀 이상해졌다. 왜 그렇게 부르르 떨어? 추워? 그리고 난 너한테 길을 척척 가르쳐줬어. 내가 어찌나 능숙하게 길을 가르쳐줬던지 네가 무척 좋아하면서 나한테 뽀뽀도 해줬단 말이지. 근데 꿈이었더라고.”

“상식적으로 내가 너한테 뽀뽀를 했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냐? 화 돋우지 말고, 들어가서 다시 잠이나 자든지, 119에 신고라도 해보든지.”

“…여기가 재희가 있는 데야?”

진석은 영수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재희를 만나면 할 말이 있거든.”

“뭔데?”

“흠, 너는 모르는 일들이야. 신경 안 써도 돼.”

“너 왜 자꾸 숨기는 건데? 너 내 흉봤지?”

진석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면서, 뭐 눈에는 뭐만 보일 뿐이지, 라고 말했다. 영수는 쓸데없이 화가 치밀었다. 이 자식이 말이야. 누구 때문에 강원도에 편하게 도착한 건데 말이야, 하고 영수는 주먹을 쥐고 진석의 배를 때릴 참이었다. 죽은 듯이 쭈그려 앉아 있던 유진이 비척비척 일어나서 영수의 옆구리를 물었다. 악, 영수는 비명을 지르며 옆구리를 움켜쥐었다. 유진은 쭈그리고 앉아 있는 영수 위에 올라가서 팔로 영수의 목을 졸랐다. 나쁜 자식, 어떻게 네가 날 때려! 영수는 꺽꺽거리면서 유진의 팔을 풀어보려고 애를 썼다. 영수의 얼굴은 벌게졌다가 새파래졌다. 영수는 팔꿈치로 유진의 배를 쳤다. 유진은 허리를 구부리며 주저앉았고, 영수는 유진의 가슴을 발로 쳤다. 퍽, 소리가 났다.

“그래, 넌 얼마나 잘한 게 있다고 올 때부터 지금까지 떽떽 거리냐? 한번 들어보자. 시발새끼야!”

영수는 한숨을 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왜, 왜 그때 안 간 건데?”

유진은 쭈그리고 앉은 채 아무 말이 없었다.

“너, 너도 안 갔잖아!”

유진이 말했다. 영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은 영수는 그곳에 갔었다. 한참동안 길을 헤매다가 빌딩에 갔을 때, 재희는 없었다. 영수가 빌딩 옥상에서 내려오자 어디선가 끼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영수는 반사적으로 그곳으로 달려갔다. 오토바이 한 대가 역주행을 하고 있었다. 오토바이는 자동차 세 대와 부딪히고, 오 킬로 정도를 더 운전했다. 그리고 트럭을 들이받고 오토바이 운전자는 허공으로 날아갔다. 영수는 아무 생각도 못하고 가만히 그 광경을 바라봤다. 사람들이 허공에서 포물선을 그리면서 도로 위로 착지한 운전자를 둘러싸고, 웅성거렸다. 영수는 천천히 뒷걸음질 쳐서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것은 재희가 아니었다. 영수는 다시 재희가 아니었다고 중얼거렸다. 영수는 눈물이 나올까봐 눈을 감았다.

“너도 할 말 없잖아! 왜, 나한테만 그러는 건데?”

유진은 비틀비틀 걸어서 허공에 주먹을 날렸다. 영수는 유진의 팔을 꽉 잡고 흔들었다. 유진이 종잇장처럼 펄럭거렸다.

“…그만해!”

진석이 말했다.

“…그냥, 잊어버려.”

“너, 너 말이지! 너는…!”

영수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관두자, 이제 와서. 눈은 아까보다 더 많이 쌓였다. 셋을 둘러싼 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눈이 내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유진도 영수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유진은 그날 뭘 하고 있었나? 영수와 진석이 배드민턴을 치러 가자고 했던 건 기억이 났다. 하지만 재희의 전화통화 내용도, 그때 재희의 목소리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호모새끼라고 학교에서 놀림 받을 때, 재희는 껄렁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괜찮아? 하고 물었다. 재희 옆에 언제나 북적거리던 남자들, 여자들, 선생님들. 여유로운 걸음걸이, 시니컬한 말투와 교복에 묻어있던 따뜻한 가정의 냄새 같은 것들. 재희가 죽을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유진이 죽어야 했다. 유진의 눈물이 눈 위에 떨어졌다. 훌쩍, 하고 유진이 콧물을 삼키자, 영수가 휴지를 내밀었다.

“아까, 주유소에서 주더라.”

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유진은 고마워, 하면서 웃었다.

“웃지 마, 흉해.”

영수가 말하자 유진은 다시 뾰루퉁해졌다. 귀여운 녀석, 영수는 유진을 보면서 쿡, 하고 웃었다.

“난 네가 더 귀여운데.”

진석이 말했다. 영수는 얼굴을 찡그렸다.

“닥쳐 인마.”

영수는 담배를 물었다. 라이터에 눈이 들어갔는지 불이 잘 붙지 않았다. 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영수는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하늘을 바라봤다. 담배 위로 눈이 떨어졌다. 눈이 떠지지 않을 정도로,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사라질 정도로 눈이 세차게 내렸다. 어제, 강원도를 나섰을 때도 눈이 왔었다. 재희도 이 눈을 볼 수 있을까? 재희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멍청이 같은 자식, 영수는 중얼거렸다. 영수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영수는 유진이 볼까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하늘을 바라봤다. 눈이 얼굴에 떨어지면서 녹았다. 아이스크림이 입 안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차갑게 사라졌다.

재희의 죽음과 함께 사라진 건 청춘이었다. 아니, 진심이었다. 셋은 아무렇지도 않게 연애를 하고, 밥을 먹고, 티브이를 보면서 웃었다. 하지만 어떤 것도 마음을 다하지 못했고, 마음 한 쪽은 텅 비어 있었다. 미친 듯이 밥을 먹고, 미친 듯이 남자와, 여자와 섹스를 해도 채워지지 않았다. 기뻐야할지도, 즐거워야하는지도 모르는 시간이 가볍고 무료하게 지나갔다. 셋은 열여섯, 열일곱에서 한 치도 성장하지 못한 채, 스물다섯 살이 부쩍 넘어버렸다. 아니, 애초에 어른이 될 기회 따윈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열심히 길을 걸어가도, 뒤처진다는 느낌은 지워지지 않았다. 청춘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셋을 비웃기만 했다. 셋은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

영수는 희미하게 보이는 내리막길을 바라봤다. 반투명한 재희가 껄렁한 웃음을 지으며 저 멀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쁜 자식, 저리 가버려, 영수가 말했다. 재희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영수도, 유진도, 진석도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면서 여전히 웃고 있었다. 눈물이 영수의 볼을 타고 내려와 눈과 섞였다. 안녕, 안녕, 재희. 영수는 중얼거렸다. 〈끝〉

 

<2009 신춘문예>
쓸데없는 생각할 때 기분 좋아, 줄리아 하트의 음반에 감사를
소설 당선소감 - 황지운

당선 소감을 쓰겠다고 책상에 앉은 지 두 시간이 지났지만, 노래만 흥얼거린다. 가사를 따라 부르면서 십대 후반의 여학생이 자정의 공원에서 헤드폰을 끼고 춤을 추는 장면을 상상한다. 여학생은 짧게 자른 머리를 하고, 검정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다. 그 여학생은 왜, 늦은 밤 춤을 출 수밖에 없었을까.

언제나 그랬던 것 같다. 소설을 쓰겠다고 책상에 앉으면 소설을 쓰는 시간보다 멍하게 앉아서 음악을 듣는 시간이 더 길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 시간이 가장 즐거운 시간이고, 온몸의 감각들이 팽팽하게 곤두서 있는 시간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 쓸데없는 생각이 늘어갈수록 기분이 좋다.

일단 ‘안녕, 피터’의 모티브가 된 줄리아 하트의 ‘배드민턴’에 감사한다. 줄리아 하트의 음반은 언제나 명반이다. 그리고 보잘것없는 나를 키워주신 부모님께 감사한다.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형중 사마와 청글 식구들에게 고맙다. 내가 언제 어디에 있든 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따뜻해진다.

나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대학원 은사님들께도 감사한다. 컴퓨터가 고장 나 여태 쓴 소설이 몽땅 사라져버리고, 망연자실해 있던 나에게 신춘문예에 소설을 내보라고 권해준 지영 언니와 대학원 문우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나의 영원한 친구 미스 김, 언제나 소설적 영감을 주는 차차에게 고맙다. 또 한없이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당선 소감을 듣고 나서 “오메, 내 새끼!”라고 외치면서 좋아하실 외할머니의 목소리를 한번만이라도 다시 들었으면 하는 생각을 간절하게 해 보았다. 그리고 앞으로 외할머니를 떠올리면서 눈물을 글썽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본명 박지애

▲1984년 광주 출생

▲전남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열림원 편집부 직원

 

<2009 신춘문예>
친구 흔적 찾는 로드무비 형식, 세 청년의 무기력한 방황 그려
소설 심사평

소설 최종심사를 맡은 문학평론가 김병익(왼쪽), 소설가 박범신씨. 예심은 문학평론가 장은수, 소설가 김인숙씨가 진행했다. 김동훈기자
예심을 거쳐온 9편의 소설에 대한 우리의 의견은 상통하기도 했고 엇갈리기도 했다. 작품을 이해하며 좋거나 모자람을 꼽는 데는 어울렸지만 그 좋고 모자람의 어느 점에 더 많은 무게를 둘 것인가에는 다소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논의는 다음 5편이었다.

‘하늘다람쥐도 아니었고’(최윤서)는 도박으로 거액을 잃고 자살한 사건을 중심으로 한 방송사 PD의 취재 전말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현장감은 활발한 대신 작가의 관심이 지나치게 퍼져 여러 모티브들이 하나의 주제로 집중되지 않은 흠을 가지고 있었다. ‘터미널’(배경열)은 이인칭으로 불수의 육체가 숨을 놓기까지의 의식을 끈질기게 붙들고 그 움직임을 전달해주고 있어 마치 임종의 중계를 듣는 듯한데 아쉬운 것은 그 전달이 육체의 불편에만 치우치고 저세상으로 미끄러지며 느낄 인간의 내면적 갈등에 대해서는 말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샛길’(김희남)은 폐지를 수집하는 여인의 일상을 뒤따르며 고단한 밑바닥의 삶을 묘사하는 데서는 매우 사실적이었지만 자기의 비루한 사진을 이용한 구호 홍보물 때문에 반발하는 등 종반의 반전에서는 그 사실감이 약화되고 있다.

우리의 토론은 ‘지뢰유실구역’(정운광)과 ‘안녕, 피터’(황지운)로 모였는데 두 작품은 미래의 희망 없음이란 우울한 전망을 드러내는 데는 함께하면서도 그 공간과 그 속에서의 장면 진행은 상반되고 있다.

‘지뢰유실구역’은 접경지의 섬에서 그 섬을 그토록 떠나고 싶어하는 여인이 반신의 불구로 힘들게 숨을 잇는 엄마를 버리고 제대를 앞둔 해병대 남자와의 탈출을 시도하지만 오히려 남자는 지뢰를 밟고 이송됨으로써 희망을 버릴 수밖에 없게 되는 좌절을 그리고 있고 ‘안녕, 피터’는 세 청년이 목숨을 버린 친구의 흔적을 찾아 자동차 여행으로 강원도로 떠나지만 결국 눈길에서 피폐해져 파투가 나고 마는 실의의 과정을 로드무비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앞의 것은 떠나고 싶어 했음에도 끝내 떠나지 못한 암담함을 폐쇄적인 공간 속으로 투영하며, 뒤의 것은 성장을 하지 못한 채 여전한 미숙아로 방황해야 하는 무기력을 막막한 분위기로 형상화하고 있는데 하나는 신춘문예적 패턴을 보이며 깨끗이 지우지 못한 작위성으로, 다른 하나는 문체의 정밀성의 미흡함으로, 우리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우리는 선택해야 했는데 그 선택에는 젊은 백수가 넘쳐나는 오늘의 현실도 감안되었다. 행운의 당선자는 그러므로 겸손하게 작가란 타이틀을 받아들이되 앞으로의 분발로써 그 이름에 마땅한 내실을 이루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김병익·박범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