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작품]/***** 좋은 단편

사사롭지만 도움이 되는 일 / 레이몬드 카버

소설가 구경욱 2009. 2. 24. 20:44

사사롭지만 도움이 되는 일 / 레이몬드 카버

토요일 오후, 그녀는 쇼핑센터의 제과점으로 차를 몰고 갔다. 각종 케이크 사진이 붙어 있는 바인더를 한 번 훑어본 그녀는,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초콜릿 케이크를 선택했다. 그녀가 고른 케이크는 우주선과 발사대가 그려져 있는 것이었는데, 하늘에는 하얀 별들이 점점이 떠 있고 그 반대편에는 빨간 설탕으로 혹성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그 별 밑에 아들의 이름인 스카티 라는 글자가 초록색으로 쓰여질 것이다. 두툼한 목을 가진 나이든 제과점 주인 아저씨는 다음주 월요일에 그 아이가 여덟 살이 될 거라는 그녀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는 꼭 화가용 작업복처럼 생긴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겨드랑이 밑에 달린 끈이 등뒤로 몸통을 한바퀴 돌아 육중한 허리 밑에서 단단하게 묶여 있었다. 그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그 동안 그는 줄곧 바인더에 나와 있는 사진들만 내려다보며 그녀가 수다를 떨건 말건 상관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어차피 그는 지금 막 일을 하러 나왔으므로 밤새 이 제과점을 지키고 있어야 될 터였고, 서둘러야 할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제과점 주인에게 앤 와이스라는 자신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케이크는 월요일 아침이 되어야 오븐에서 꺼낼 수 있도록 준비되겠지만, 파티는 그날 오후에 벌어질 예정이니 시간은 충분한 셈이었다. 제과점 주인의 얼굴을 그리 즐거워 보이지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연필을 쥐고 카운터 위로 몸을 구부리는 그의 볼품없는 체구를 지켜보며, 그가 지금까지 제과점 주인 말고 다른 일을 해본 적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서른 세 살의 그녀는 한 아이의 어머니였다. 이제과점 주인처럼 자기 아버지벌은 족히 될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아이들을 키워 보았을 것이고 따라서 생일 케이크니 파티니 하는 것들이 얼마나 특별한 것인가를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지금 이 아저씨하고도 마땅히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아저씨가 지금 그녀를 대하는 태도는 무례하다고까지 할 수는 없어도 상당히 무뚝뚝한 것만을 틀림없었다. 이윽고 그녀도 그와 친해 보겠다는 생각을 포기해 버렸다. 그녀는 제과점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저 뒤쪽으로 길고 묵직히 보이는 나무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파이 냄비가 쌓여 있었다. 테이블 옆에는 조그만 선반으로 나누어진 철제 컨테이너가 놓여 있었다. 그밖에도 아주 많은 오븐이 눈에 띄었고, 라디오에서는 컨트리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과점 주인은 그녀에게 전해 들은 정보들을 특별 주문서에 기록한 다음, 바인더를 건네 받았다. 그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월요일 오전이라". 하고 한마디 중얼거렸고, 그녀는 간단히 인사말을 남긴 채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월요일 아침, 생일을 맞은 아이는 다른 소년 하나와 함께 학교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큼직한 감자튀김 봉지를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걸음을 옮겼는데, 생일을 맞은 아이는 이 친구가 오늘 오후 생일 선물로 뭘 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생일을 맞은 아이는 주위를 제대로 둘러보지도 않고 교차로에서 도로로 내려섰는데, 그 순간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가며 그를 치고 말았다. 아이는 옆으로 쓰러져 머리가 인도와 차도 사이의 조그만 배수구에 빠졌고, 다리는 길 위로 나와 있었다. 아이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두 다리는 마치 어디론가 올라가는 것처럼 교대로 버둥거리고 있었다. 그의 친구는 감자튀김 봉지를 떨어뜨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를 친 자동차는 한 백 피트쯤 가다가 길 한복판에 멈춰섰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어깨 너머로 뒤를 돌아보았다. 잠시 후 아이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약간 자세가 흔들리고 눈빛이 멍하기는 했지만, 괜찮은 듯이 보였다. 차를 운전하던 사람은 다시 기어를 넣고 그냥 가버렸다.
생일을 맞은 아이는 울지는 않았지만, 뭐 특별히 할 이야기가 없었다. 같이 있던 친구에게 차에 치였을 때 기분이 어땠냐고 물었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도로 집을 향해 돌아가기 시작했고, 친구는 그냥 학교로 갔다. 하지만 생일을 맞은 아이가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한테 그 사건을 이야기 하자, 아들과 함께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던 그녀는 아이의 손을 무릎 위에서 말아쥐고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얘야, 스카티, 정말 괜찮아?" 아무래도 병원으로 데려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이가 갑자기 탈진한 사람처럼 소파에 드러눕더니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이었다.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아이가 일어나지 않자, 그녀는 황급히 남편의 직장으로 전화를 걸었다. 호워드는 제발 침착하라고 아내를 타이른 다음, 자기가 직접 병원에 전화를 걸어 앰블랜스를 부른 다음 자기도 병원으로 달려갔다.
생일 파티가 취소된 것은 물론이었다. 병원에 도착한 아이는 그 사고로 커다란 충격을 받은 듯 가벼운 뇌진탕 증세를 보였다. 구토를 했기 때문에 폐 속에 고여 있는 오물을 뽑아 냈다. 그리고 나서 오후가 되자, 아이는 아주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닥터 프랜시스는 아이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더니, 이건 절대로 혼수 상태에 빠진 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여러 차례에 걸친 X-레이 촬영과 각종 검사가 끝난 밥 11시경, 아이는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이제 깨어나는 것은 시간 문제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 무렵 호워드는 잠시 집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와 앤은 그날 오후부터 줄곧 병원에서 아이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잠시 집에 들러서 목욕을 하고 옷이나 갈아입을 생각이었다.
"한 시간 정도면 돌아올 수 있을 거요" 호워드는 앤을 보았다. 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여긴 내가 지키고 있을테니까요". 호워드는 아내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고, 두 사람은 잠시 손을 맞잡았다 놓았다. 그녀는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아이를 들여다보았다. 이제 곧 아이가 깨어나서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사실이 입증되면, 그녀도 마음놓고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이었다.
호워드는 병원에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축축하고 어두컴컴한 도로를 아주 빠른 속도로 운전하고 있었지만, 문득 그런 사실을 깨닫고는 속도를 늦추었다. 지금까지 그의 인생은 무척 평탄했고 그럭저럭 만족스러웠다. 대학 생활, 결혼, 경영학 석사 학위를 따기 위한 대학원 시절, 그리고 투자 회사의 중간 관리자로 일하는 현재의 직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탄탄대러였다. 아버지가 될 때도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그는 행복했고, 적어도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다. 그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부모님은 아직 살아 계셨고, 형제들도 모두 독립했으며, 대학 동창들은 사회 요소요소에서 제각기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을 쓰러뜨리거나 좌절 속으로 밀어넣는 불운이나 예기치 못한 돌발 사태 등의 위기는 아직까지 한 번도 그를 찾아온 적이 없었다. 호워드는 집 앞에 차를 세웠다. 왼쪽 다리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그는 잠시 차 안에 그대로 앉아 지금의 상황에 합리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방안들을 생각해 보았다. 스카티가 차에 치여서 지금 병원에 누워 있지만, 큰 상처는 입지 않은 것 같다. 호워드는 눈을 감고 두 손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그런 다음 차에서 내려 현관 앞으로 다가갔다. 집 안에서 개가 짓고 있었다. 그가 열쇠로 잠긴 현관문을 여는 동안, 집 안에 서는 전화벨 소리가 계속 울려 퍼지고 있었다. 호워드는 다급하게 전등 스위치를 더듬어 찾았다. 제기랄, 병원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어! "빌어먹을" 호워드는 자기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
왜, 케이크를 찾아가지 않는 거요. 어딘지 모를 전화선 저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그게 무슨 소리요? 호워드는 어이가 없었다.
케이크 말이요, 목소리가 대답했다. 십 육 달러 짜리요
호워드는 그냥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리고는 주방으로 들어가 위스키를 조금 따랐다. 병원에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아이의 상태는 여전히 똑같다고 했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고,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욕조에 물을 받는 동안 호워드는 얼굴에 비누칠을 하고 면도를 했다. 그가 막 욕조에 몸을 담그고 눈을 감으려는 찰나, 다시금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호워드는 번개처럼 튕겨 일어나 수건을 집어들고는 거실로 뛰어가며 중얼거렸다. 이런 바보 멍청이 또 다시 병원을 떠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수화기를 집어들고 다급한 목소리로 "여보세요! 하고 외쳤을 때, 상대편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전화는 그냥 뚝 끊어지고 말았다.
호워드는 자정이 약간 지나서 병원으로 돌아왔다. 앤은 여전히 침대맡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호워드를 쳐다보더니, 다시 아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고, 머리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숨소리는 조용하고 규칙적이었다. 침대 옆에 놓인 길다란 봉에 포도당 병이 걸려 있었고, 거기서부터 튜브가 빠져 나와 아이의 팔둑에 연결되어 있었다.
"좀 어때?"
호워드가 캐물었다. "이건 뭐야?" 그는 포도당병과 투브를 가리켰다.
"닥터 프랜시스의 지시예요. 아이에게 영양을 공급해 주어야 기운을 잃지 않는다는다군요. 그나저나 왜 아직도 깨어나지 않는 거죠? 호워드. 이상이 없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잠을 잘 수가 잇는 건가요? 이해할 수가 없어요".
호워드는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괜찮을 거요. 이제 금방 일어날 거라구. 닥터 프랜시스가 괜찮다고 했으니 괜찮겠지."
잠시 후 호워드는 아내가 걱정스러웠다.
"이제 당신도 집에 가서 쉬고 와. 여긴 내가 지킬 테니까. 웬 얼간이가 계속 전화를 걸어오긴 하지만, 신경쓰지 말라구. 그냥 끊어 버리면 돼".
"누가 전화를 해요."
"낸들 아나, 심심해서 장난 전화질이나 해대는 얼간이겠지. 자, 당신도 가서 좀 쉬어요."
앤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에요. 난 괜찮아요".
"괜찮대두 그러네. 집에 가서 좀 쉬고, 아침에 다시 나랑 교대하면 되잖고. 아무 일 없을 거요. 닥터 프랜시스가 뭐라고 했소? 괜찮아질 거라고 했잖아. 우린 아무 걱정도 할 필요가 없다구. 스카티는 그냥 잠을 자고 있는 것뿐이야."
그때 간호사가 들어왔다. 그녀는 스카티의 침대 옆으로 다가오며 호워드 부부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간호사는 담요 속에서 아이의 왼족 팔을 꺼내더니. 시계를 들여다보며 맥박을 체크했다. 잠시 후 그녀는 팔을 도로 담요 속으로 밀어넣고 침대 발치에 붙어 있던 클립보드에 무언가를 적어 넣었다.
"좀 어때요?" 호워드의 손이 그녀의 어깨 위에 얹혀 있었다. 앤은 호워드의 손가락에서 전해지는 근심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맥박은 안정되어 있어요." 간호사는 걱정말라는 표정이었다. "조금 있으면 박사님이 오실 거예요. 지금 막 병원으로 돌아오셨거든요. 당장 회진을 시작하실 거예요."
"난 지금 막 집사람한테 잠시 집에 가서 쉬다 오라고 말하고 있는 참이었고, 의사 선생님이 다녀가시면 그러는 게 좋겠죠."
"좋은 생각이네요. 원하신다면 두 분 다 돌아가셔도 좋아요." 간호사는 금발의 덩치가 큰 스칸디나비아 여자였다. 목소리에 그쪽 억양이 남아 있었다.
"어서 박사님 말씀을 들어보고 싶어요." 앤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짙게 베야 있었다. "의사 선생님과 얘기를 나눠 보고 싶어요, 저렇게 계속 잠만 자는 게 아무래도 이상하잖아요. 어쩌면 좋지 않은 신호일지도 모르구요."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리며 머리를 약간 앞으로 숙였다. 어깨 위에 놓인 호워드의 손에 약간 더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목덜미께로 올라오더니 팽팽하게 긴장된 목 근육을 어루만져 주었다.
"닥터 프랜시스가 곧 오실 거예요." 간호사는 그 말만 남기고 병실을 나가 버렸다.
호워드는 잠시 아들을 바라보았다. 조그만 가슴이 담요 밑에서 조용히 오르내리고 있었다. 사무실에서 앤의 전화를 받고 그 끔직한 소식을 접한 뒤 처음으로 진짜 두려움이 엄습해 오기 시작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호워드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스카티는 괜찮을 거야. 하지만 스카티는 짐에 있는 자기 침대에서 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붕대를 두르고, 팔뚝에 주사 바늘을 꽂은 채 병원 침대에 누워 있지 않은가. 호워드는 어떻게든 자신의 마음부터 추스르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닥터 프랜시스가 들어오더니, 불과 며칠 시간 전에 처음 만났을 뿐인 호워드에게 악수를 청했다. 앤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부인." 닥터 프랜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상태에 변화가 있는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의사는 침대 옆으로 다가가더니 아이의 맥박을 짚어 보았다. 이어서 양쪽 눈꺼풀을 차례로 뒤집어 보는 것이었다. 호워드와 앤은 의사 옆에 가만히 서서 그의 동작을 하나하나 지며보고 있었다. 의사는 담요를 걷고 아이의 심장과 폐에 청진기를 대보았다. 손가락으로 복부를 여기저기 눌러보기도 했다. 검진이 끝나자, 그는 침대 위의 차트를 살펴본 다음, 현재 시간과 함께 몇 가지 사실들을 기록하고는 호워드와 앤을 돌아보았다.
"선생님 어떤가요." 허워드가 말했다. "아이에게 정확히 어떤 문제가 생긴 겁니까?"
"왜 이렇게 오랫동안 깨어나지 않는 거죠?" 앤도 거들었다. 의사는 보기좋게 그을린 얼굴과 넓직한 어깨를 가진 잘 생긴 남자였다. 조끼까지 갖춰 입은 파란 정장에 줄무늬 진 넥타이와 아이보리 커프스 단추가 썩 잘 어울려 보였다. 회색빛이 도는 머리칼은 가르마를 다라 산뜻하게 빗어 넘긴 모습이었다. 마치 연주회 구경을 갔다가 막 돌아온 사람 같았다.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의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런 상태가 오래 가는 개 약간 이상하긴 하지만, 신체적인 이상은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지금쯤 깨어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기는 한데... 아마 틀림없이 곧 깨어날 겁니다." 의사는 다시 한 번 아이를 들여다보며 덧붙였다. "두어 시간 후에 검사 결과가 다 나오면 보다 많은 사실들을 알 수 있겠지요. 하지만 내 말을 믿으세요. 두 개골에 난 머리카락 굵기 만한 골절을 재외하고는 전혀 아무런 이상이 없는 상탭니다."
"어머 골절이 있어요." 앤이 다급하게 되물었다.
"그리고,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약간의 뇌진탕 증세가 있기는 합니다. 물론 갑자기 큰 충격을 받았으니 무리는 아니지요. 때때로 충격 때문에 이런 증세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잠을 자는 증세 말입니다."
"그래도 위험한 상태는 아니란 말씀이지요." 호워드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아까 선생님은 아이가 혼수 상태에 빠진 건 아니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생각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까?" 호워드는 그 질문을 던져 놓고 의사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예, 혼수 상태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군요." 의사는 다시 한 번 아이를 힐끗 쳐다보았다. "아이는 지금 아주 깊이 잠이 든 상탭니다. 어떻게 보면 아이의 몸이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가기 위한 일종의 본능적인 조치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절대로 위험한 상태는 아닙니다. 아무튼, 정밀 검사 결과가 나와 보면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되겠지요."
"이건 일종의 혼수 상태예요." 앤은 궁금했다.
"정확하게 말해서 혼수 상태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보기엔 애매한 부분이 많아요. 아무튼 적어도 아직은 그런 상태가 아닌 게 분명합니다. 아이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어요. 그럴 경우 이런 반응은 그리 드물지 않게 나타나곤 합니다. 육체적인 충격에 대한 일시적인 반응인 셈이지요. 혼수 상태라.. 글쎄, 혼수 상태라 하면 며칠, 심지어는 몇 주동안 계속되는 비교적 장기간의 무의식 상태를 말히지요. 스카티는 우리가 보기에 그런 상태는 아닙니다. 아마 틀림없이 장담할 수 있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아이가 일어나면 더 자세한 원인을 알아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만약 원하신다면 굳이 두 분다 이렇게 병실을 지키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군요. 물론 걱정이 되리라는 건 나도 알고 있습니다."
의사는 다시 한 번 아이를 돌아보더니, 앤에게 시선을 돌렸다.
"부인,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내 말을 믿으세요. 우린 필요한 모든 조치를 다 취하고 있습니다. 단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뿐이지요." 의사는 앤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인 다음, 호워드와 또 한 번 악수를 나눈 뒤 병실을 나갔다.
앤은 아이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 그나마 열이 없는 게 다행이네요". 앤은 그렇게 말해 놓고는 문득 이렇게 덧붙였다. "세상에, 열이 나기는커녕 이마가 싸늘해요, 호워드. 혹시 추위를 느끼고 있는 건 아닐까요? 이마를 한 번 만져 보세요".
호워드는 아이의 관자놀이에 손을 대보고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렇진 않을 거요. 그가 절래절레 고개를 저었다.
"얘는 지금 심한 충격을 받은 상태라고 하지 않고. 의사가 지금 막 보고 갔으니, 뭔가 이상이 있다면 알아차렸겠지".
앤은 잠시 더 침대 옆에 서서 이빨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한참만에야 그녀는 자기 의자로 돌아와 앉았다.
호워드도 그 옆에 걸터앉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뭔가 다른 이야기를 꺼내어 앤의 마음을 달래주고 싶었지만, 아닌 게 아니라 그 자신도 겁이 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호워드는 아내의 손을 잡아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렇게 그녀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호워드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쥐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손을 맞잡고 말없이 앉아 있었다. 이따금 호워드가 손에 힘을 주곤 했다. 이윽고 앤이 먼저 슬그머니 손을 빼냈다.
"기도를 했어요". 그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호워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기도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막상 하니까 생각이 나네요. 눈을 감고 "하나님, 저흴 도와 주세요, 스카티를 좀 도와주세요' 하고 말해놓고 나니까, 나머지는 저절로 술술 나오대요. 마치 미리 준비를 한 것처럼 말이에요. 아마 당신도 기도를 해보면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아까부텨 기도를 하고 있었어." 호워드가 조용히 대답했다. "오늘 오후, 아니 어제 오후로군. 당신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달려오면서 내내 기도를 했는 걸."
"잘 하셨어요." 앤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그녀는 처음으로 남편과 함께 이 곤경을 헤쳐 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문득 지금까지는 이 모든 일이 앤 자신과 스카티한테만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록 호워드가 곁에 있었고, 또한 그의 존재가 절실히 필요하기 는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도 모르게 지금까지는 그를 제3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앤은 자기가 그의 아내라는 것이 기쁘게 느껴졌다.
아까 그 간호사가 다시 들어와 아이의 맥박을 체크하고 침대 위에 매달린 포도당 병에서 주사액이 잘 흘러 들어 가고 있는지 점검했다.
한 시간쯤 지나자 다른 의사가 한 명 들어오더니, 방사선과에서 근무하는 파슨즈라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턱수염을 덥수룩히 기른 남자였다. 그는 운동화를 신고 캐주얼한 셔츠를 입었으며, 청바지 차림이었다.
"아이를 아래층으로 데리고 가서 사진을 몇 장 더 찍어야겠습니다. 사진을 몇 장 더 찍고, 뇌주사 사진도 찍어야겠어요".
"뇌주사리니, 그게 뭐죠?' 앤은 덜컥 겁이 났다. 그녀는 처음 보는 이 의사와 침대 사이에 서 있었다. " 엑스 레이 사진은 벌써 찍었잖아요".
'몇 장 더 필요한 게 있어서 그럽니다.' 의사가 앤을 봤다. "놀라실 필요 없어요. 사진 몇장 더 찍고, 뇌에 무슨 이상이 있는지 정밀 검사를 하려는 것뿐이니까요".
"하나님". 앤이 중얼거렸다.
"이런 종류의 환자에게는 누구에게나 하는 정상적인 절차에요". 의사가 그녀를 달랬다. "우린 단지 아이가 왜 아직까지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는지를 알고 싶을 뿐입니다. 그건 지극히 정상적인 절차고, 따라서 전혀 놀라실 필요가 없습니다. 조금 있다가 사람들이 아이를 데리러 올 겁니다."
잠시 후, 남자 간호사 두 사람이 바퀴 달린 침대를 끌고 들어왔다. 그들은 검은 머리칼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젊은이들었는데,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포도당 병을 고리에서 떼어내고 아이를 옮겨 누이며 외국말로 뭐라고 저희들끼리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들이 침대를 굴려 병실에서 나가자, 호워드와 앤도 그 뒤를 따라 같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앤은 엘리베이터 안에서까지 잠시도 아이에게서 눈을 데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기 시작하자 앤은 눈을 감았다. 간호사들은 각기 침대 양쪽에 서 있었는데, 한 사람이 역시 저희 나라 말로 뭐라고 중얼거리자 다른 한 사람이 고개를 끄덕인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말이 없었다.
얼마 후 태양이 방사선과 대기실의 창문을 비추기 시작했을 무렵, 그 두 남자 간호사가 스카티를 도로 병실로 데려다 주었다. 이번에도 호워드와 앤은 그들과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서는 다시금 아이의 침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루종일을 기다렸지만 아이는 아직도 깨어나지 않았다. 호워드와 앤은 둘이 번갈아가며 아래층의 카페테리아로 내려가 커피를 마시곤 했는데, 그때마다 번번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하는 죄책감을 불현 듯 떠올리고는 서둘러 병실로 올라오곤 했다. 오후에 닥터 프랜시스가 다시 한 번 올라와 아이를 진찰했는데, 상태는 여전히 좋은 편이고 이제 깨어나는 건 시간 문제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어젯밤과는 다른 간호사들이 수시로 들락거렸고, 한 번은 연구실 소속이라는 젊은 아가씨 하나가 다녀가기도 했다. 하얀 바지와 하얀 블라우스 차림의 그녀는 조그만 쟁반에 담긴 도구들을 몇 가지 들고 오더니, 그걸 침대 옆의 탁자에 올려놓고는 후워드와 앤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아이의 팔뚝에서 피를 뽑아내는 것이었다. 호워드는 그 아가씨가 아이의 팔뚝에서 적당한 자리를 골라 주사 바늘을 찔러넣는 순간, 눈을 감아 버렸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앤이 그 여인에게 따졌다."의사 선생님의 지시예요" 아가씨가 빠르게 말했다. "난 지시 받은 대로 할 뿐이에요. 피를 뽑아 오라고 해서 뽑은 것뿐이라구요. 그나저나, 아드님은 어떻게 된 거죠. 아주 귀엽게 생겼는데".
"자동차에 치였소" 호워드가 대답했다.
"뺑소니 사고요." 아가씨는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 저으며 아이를 다시 한 번 쳐다보더니, 쟁반을 챙겨들고 나가 버렸다.
"왜 여태 깨어나지 못하는 걸까요?" 앤이 답답하다는 투로 호워드를 봤다. "호워드? 제발 속시원하게 대답이라도 좀 들었으면 좋겠어요."
호워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도로 의자에 앉아서 한쪽 다리를 다른 다리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아들을 한 번 쳐다본 다음, 앉은 자세를 고치더니 눈을 감고 잠이 들어 버렸다.
앤은 창가로 다가가 병원 주차장을 내려다보았다. 벌써 밤이 되어 있었고, 주차장은 드나드는 차들은 제각각 라이트를 켜고 있었다. 앤은 두 손으로 창틀을 꼭 붙든 애 창가에 서 있었다. 지금 자신이 무언가 새로운 상황, 굉장히 힘든 시절로 들어서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또다시 덜컥 겁이 났다. 이빨이 자꾸만 맞부닥치는 소리를 내는 바람에 턱뼈에 잔뜩 힘을 주어야 했다. 병원 현관 앞에 커다란 승용차 하나가 멈춰서더니, 길다란 코트를 입은 여인이 그 차에 올라타는 것이 보였다. 앤은 자기가 그 여자였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었다. 누군가가 저렇게 자신을 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데려가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에서 내리면, 기다리고 있던 스카치가 엄마하고 소리치며 번개처럼 와락 품 속으로 뛰어들 그 어딘가로......
잠시 후 호워드가 깨어났다. 그는 아이를 한 번 살펴본 다음, 의자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창가의 아내 곁으로 다가왔다. 한동안 둘 다 아무 말없이 주차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은 없어도 서로의 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근심이 그들의 속마음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완벽한 투명체로 만들어 버린 것 같았다.
문이 열리더니 닥터 프랜시스가 들어왔다. 이번에는 다른 양복과 다른 넥타이 차림이었다. 그래도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는 머리 모양은 그대로였고, 방금 면도까지 한 듯 말쑥한 얼굴이었다. 그는 곧장 침대로 다가가 아이를 진찰했다. 이제쯤 깨어날 때가 되기도 했을 텐데.... 도무지 이유가 없는데... 닥터 프랜시스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리더니 호워드와 앤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하지만 우린 이 아이가 위험한 상태에 처해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틀림없이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러다가 깨어나면 한층 더 기분이 좋겠지요. 지금으로서는 이 아이가 회복될 수 없을 만한 어떠한 이유도 없는 상탭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아마 처음 깨어날 땐 약간의 두통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는 미리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요. 지극히 정상적이다, 이런 얘깁니다."
"그럼, 지금은 혼수 상태라는 말씀인가요?" 앤이 지난번처럼 물었다.
의사는 말쑥한 자신의 뺨을 문지르며 애매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아이가 깨어날 때까지는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지요. 그나저나 두 분 다 무척 피곤할 것 같군요. 확실히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부담없이 나가서 식사라도 좀 하고 오십시오. 의사는 나직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마 제 말을 듣는게 좋을 겁니다. 그렇게 하시겠다면 그동안 간호사에게 이 방을 지키라고 일러두겠습니다. 가서 식사라도 좀 하고 오시지요".
"난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어요." 앤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럼 뭐 다른 일이라도 하십시오. 어쨎든 내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모든 검사 결과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제 잠에서 깨어나기만 하면 당장 등산이라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호워드는 진심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는 다시 한 번 의사와 악수를 나누었다. 의사는 호워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 준 다음 병실을 나갔다.
"우리 둘 중에 한 사람이라도 집으로 가서 그 동안 별일이 없었는지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소. 호워드가 앤을 쳐다봤다. 어차피 슬러그에가 밥도 주어야 되잖소".
"옆집에 전화를 걸어서 부탁하죠, 뭐". 앤의 시선은 침대의 스카티에게 가 있었다. "모건 씨네에 전화를 해보세요. 설마 개한테 밥 좀 주라는 부탁을 안 들어줄라구요".
"알았소". 호워드는 수긍하는 듯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여보 당신이 한 번 다녀오는 게 어떻겠소. 잠시 집에 가서 아무 일도 없는지 확인해 보고 돌아오면 되잖소. 그러는 게 당신한테도 좋을 거요. 여긴 내가 지키고 있을테니 말이요. 정말이오". 그는 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우리에겐 이 난관을 극복할 힘이 필요해. 스카티가 깨어난 뒤에도 한동안 더 여기 있어야 할지도 모르니까 말이요".
"그럼 당신이나 다녀오세요. 슬러그에게 밥도 주고, 당신도 좀 쉬고 오세요."
"난 이미 다녀왔잖소". 호워드가 그녀를 설득하려고 애를 썼다. "난 정확하게 한 시간 십오 분 동안 집에 있다가 왔소. 이번에는 당신이 가서 한 시간 가량 쉬다 오라구. 아마 당신도 기운이 좀 날 거요".
앤은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였지만, 너무나 피곤해서 생각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눈을 꼭 감고 다시 한 번 정신을 집중하려고 애를 써보았다. 잠시 후 그녀가 결론을 내렸다. "그래요, 잠시 집에 다녀오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내가 이렇게 붙어 있으며 한시도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으니, 어쩌면 만약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우면 스카티가 일어날지도 모르잖아요. 누가 알아요, 내가 없는 사이에 스카티가 정신을 차릴지? 집에 가서 목욕을 하고, 옷도 갈아입고, 슬러그에게 밥도 주고, 그리고 돌아올게요."
"그래, 그 동안 내가 여기 있겠소. 어서 가봐요, 여보. 여기 걱정은 하지 말고". 호워드는 마치 밤새도록 술을 마신 사람처럼 눈이 충혈되고 얼굴은 약간 부어 있었다. 옷은 다 구겨졌고, 턱에는 어느새 새로운 수염이 돋아나고 있었다. 앤은 남편의 얼굴을 한번 만져보다가, 얼른 손을 거두었다. 호워드가 잠시만이라도 혼자 있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잠시 동안이라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자신의 근심을 나누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이윽고 앤이 핸드백을 집어들자, 호워드는 그녀가 코트 입는 것을 거들어 주었다.
"오래 있진 않을 거예요".
"그냥 가만히 앉아서 잠시 쉬다 오라구. 뭘 좀 먹고, 목욕도 하는 게 좋겠지. 욕실에서 나오면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서 쉬어요. 그러고 나면 한결 기운이 날거야 자 우리 이제 걱정은 그만하자구. 닥터 프랜시스가 한 말, 당신도 들었잖소".
앤은 코트를 입은 채 의사가 한 말 한마디 한마디를 정확하게 떠올려 보려고 애썼다. 미묘한 어감의 차이, 혹은 그의 말 속에 숨겨진 뭔가 다른 의미가 있지는 않았던가? 아이를 살펴보기 위해 몸을 구부린 그의 표정에 어떤 변화가 나타나지는 않았던가? 아이의 눈꺼풀을 뒤집어 보고 숨소리를 들을 때 혹시 안색이 변하지는 않았던가?
문 앞으로 다가간 앤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를 향했던 그녀의 시선이 이내 아이 아빠에게로 올라왔다. 호워드는 고개를 끄덕여 보았다. 앤은 병실을 나온 뒤 등 뒤로 살며시 문을 닫았다.
앤은 간호사 대기실을 지나 엘리베이터 있는 곳을 찾으려고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복도 끝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니 조그만 대기실이 나왔고, 거기에는 흑인 일가족이 등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카키색 셔츠와 바지를 입은 중년 남자는 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다. 홈드레스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뚱뚱한 여인은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었고, 청바지를 입고 머리를 수십 갈래의 조그만 가닥으로 땋아내린 십대 여자애는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앤이 무심코 그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들 일가족의 눈길이 온통 그녀에게 날아와 박혔다. 그들 앞에 놓인 조그만 탁자에는 햄버거 포장지와 스치로폴컵 따위가 널려 있었다.
"프랭클린!" 뚱뚱한 여인이 얼른 자세를 고쳐 앉으며 외쳤다. "프랭클린에게 무슨 일이 생겼어요". 그녀의 눈은 금방이라도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어서 말씀 좀 해보세요. 선생님. 프랭클린 때문에 오신 거죠?" 그녀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려 했지만, 중년 남자가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진정해, 진정하라구, 이블린".
"죄송합니다". 앤은 그들이 착각했다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난 엘리베이터를 찾고 있던 중이었어요. 우리 아들이 이 병원에 입원해 있거든요. 엘리베이터가 어디 있는지 보이질 않더군요".
"엘리베이터는 왼쪽으로 꺾어서 저쪽 끝에 있소". 중년 남자가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여자아이가 담배를 손에 든 채 앤을 빤히 쳐다보았다. 넓직한 입술을 천천히 벌려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가느다랗게 실눈을 뜨고는 뚫어질 듯 앤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뚱뚱한 여인은 금세 실망한 얼굴로 이제 관심이 없다는 듯 앤에게서 눈길을 돌려 고개를 떨어뜨렸다.
"우리 아들은 차에 치였어요". 그녀는 어떻게든 자신의 처지를 설명해야 할 것만 같았다. "약간의 뇌진탕 증세가 있고 두 개골에 아주 미세한 금이 갔어요. 하지만 혼수 상태인지도 모른다구요. 우린 아무래도 그 부분이 걱정이에요, 혼수 상태 말이에요. 난 잠시 집에 다녀오려고 가는 길인데, 병실은 남편이 지키고 있어요. 어쩌면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아들이 의식을 회복할 지도 모르죠".
"안됐군요". 중년 남자는 의자 위에서 몸의 균형을 반대편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 저으며 탁자를 내려다보더니, 다시 앤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도 앤은 그대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우리 프랭클린은 지금 수술을 받고 있소. 칼에 찔렸소. 어떤 놈이 프랭클린을 죽이려 한 거요. 어떤 파티장에서 싸움이 벌어졌는데,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니 프랭클린은 그냥 가만히 서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더군. 누굴 약올리거나 하지도 않고 말이요. 하지만 요즘엔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사고를 당하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 아무튼 그애는 지금 수술실에 들어가 있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리라고는 그저 기도나 드리는 것 밖에 없다오. 그는 차분한 시선으로 앤을 바라보았다.
앤은 다시 한 번 여자아이를 쳐다보았다. 그 아이는 아직도 앤을 훔쳐보듯 힐끔거리고 있었다. 뚱뚱한 여인은 고개를 축 늘어드린 채 이제는 눈까지 감고 있었다. 앤은 그녀의 입술이 조금씩 달싹거리는 것을 보았다. 기도라도 드리는 모양이었다. 앤은 그 여인을 붙자고 뭐라고 기도를 했는지 물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앤은 지금 자심과 비슷한 처지에 처한 채 무작정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사람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들과 앤은 두려움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앤은 아들이 당한 사고에 대해서,스카티가 어떤 아들인지에 대해서, 하필이면 생일날, 그러니까 월요일에 사고를 당해서 아직까지도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 후 앤은 중년 남자가 아려준 방향으로 복도를 걸어와 엘리베이티를 발견했다. 닫힌 문 앞에서 잠시 내가 지금 집에 가는 게 잘하는 일일까 하는 갈등을 느꼈다. 이윽고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 버튼을 눌렀다.

집 앞에 차를 세운 앤은 시동을 껐다. 눈을 감고 핸들에 잠시 머리를 기대고 앉아 있었다. 엔진이 식으면서 무언가 탁탁 하고 튀는 소리가 났다. 앤은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집 안에서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앤은 현관 앞으로 다가가 잠긴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켜고 차를 끓이기 위해 주전자를 불에 올렸다. 깡통에 든 개밥을 따서 뒤쪽 베란다에 놓아 주자, 글러그는 쩝쩝거리는 소리와 함께 게걸스럽게 먹어대기 시작했다. 개가 밥을 먹는 소리가 주방까지 들려왔다. 앤이 찻잔을 들고 소파에 앉으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네!" 앤이 얼른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와이스 부인" 남자의 목소리였다. 지금 시간이 새벽 다섯 시, 수화기에는 무슨 기계 소리 같은 것이 어렴풋이 배경음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네, 무슨 일이죠?" 앤이 물었다. "제가 와이스 부인이에요. 바로 저라구요. 무슨 일이세여" 앤은 무슨 소린지도 모르면서 배경에서 나는 기계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스카티 문젠가요".
"스카티". 목소리가 이름을 따라 불렀다. "그렇소, 이 문제는 확실히 스카티하고 관련이 있지. 스카티에 대해서 잊어버렸소? 남자는 다음 전화를 끊어 버렸다.
앤은 황급히 병원으로 전화를 걸어서 3층을 대달라고 부탁했다. 일단 대기실의 간호사에게 스카티의 상태를 물어본 다음 자기 남편을 바꿔 달라고 했다. 대단히 급한 일이라고 덧붙이면서.
앤은 전화코드를 손가락으로 돌돌 감으며 남편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자꾸만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아서 눈을 감아 버렸다. 아무래도 뭔가 음식을 좀 만들어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슬러그는 뒷베란다에서 거실로 들어와 앤의 발치에 누워 있었다. 녀석은 자꾸만 꼬리를 흔들었다. 앤은 녀석이 자기 손가락을 핥는 동안 개의 귀를 잡아당겨 보았다. 드디어 호워드가 나왔다.
'누가 전화를 걸어 왔어요". 앤은 안절부절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전화코드를 비비꼬고 있었다. 앤의 목소리는 거의 울부짖고 있었다.
"스카티는 괜찮아". 호워드는 침착하게 얘기했다. "그러니까 아직도 자고 있다는 듯이요. 아무런 변화도 없어. 당신이 나간 뒤로 간호사가 두 번이나 더 다녀갔소. 아니, 간호사 한 사람하고 의사 한 사람이었지. 스카티는 괜찮소". "어떤 남자였어요. 스카티에 대한 일이라고 했다구요".
"여보, 당신에게 필요한 건 약간의 후식을 취하는 것뿐이오. 아마 내가 받은 전화와 같은 놈인가 보지. 그 전화는 잊어버려요. 푹 좀 쉬고, 천천히 와요. 여기로 와서 같이 아침이나 먹으러 가든지 하게 말이요".
"아침". 앤은 배가 고픈지에 대한 감각이 없었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요".
"당신도 내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잖소". 호워드가 애써 설명했다. "하다못해 쥬스라도 한 잔 마셔야 할 것 아니요. 제기랄, 나도 모르겠어. 나도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아. 앤. 전화를 받고 있는데, 닥터 프랜시스가 있다가 여덟 시에 병실로 온다고 했소. 그때가 되면 뭔가 좀 분명한 얘기를 들을 수 있겠지. 간호사가 그럴 거라고 했소. 자기는 그것 말고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더군. 앤? 여보 그때쯤이면 좀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거요. 그동안 내가 여기서 스카티를 지키고 있을 테니 걱정 말아요. 아직은 여전히 똑같은 상태야".
"전화가 왔을 때 난 막 차를 마시려던 참이었어요. 그자는 스카티에 대한 일이라고 말했다구요. 배경에서 뭔가 잡음이 났어요. 당신이 받았을 때도 그런 소리가 들렸어요, 호워드?"
"기억이 안 나". 호워드는 그런 일에 신경을 쓰기가 귀찮았다. "어쩌면 스카티를 친 차를 운전하던 사람인지도 모르지. 어쩌면 그냥 정신병자 같은 놈이 어떻게 우연히 스카티에 대해서 알게 되었거나. 하지만 여긴 내가 잘 지키고 있으니 당신은 그냥 쉬기나 해. 목욕을 하고 한 일곱 시쯤 병원으로 와요. 의사가 오면 같이 얘기를 나눠 보게 말이오. 아무 일도 없을 거요, 여보. 여긴 나도 있고, 사방에 의사와 간호사들이 우글거리지 않고. 그들이 모두 스카티의 상태가 괜찮다고 하니 괜찮겠지, 뭐".
"겁이 나서 죽겠어요".
앤은 욕조에 물을 받은 다음 옷을 벗고 물 속으로 들어갔다. 마음이 급해서 대충 몸을 씻은 다음 머리고 감지 않고 얼른 욕실에서 나와 버렸다. 속옷을 새로 갈아입고, 울 바지와 스웨터를 꺼내 입었다. 앤은 다시 거실로 들어가자, 슬러그가 그녀를 쳐다보며 꼬리로 방바닥을 한 번 철썩 내려쳤다. 앤이 바깥으로 나왔을 때는 막 먼동이 희뿌옇게 밝아오려는 참이었다.
병원 주차장에 도착한 앤은 바로 앞에서 빈 자리를 하나 발견했다. 왠지 자꾸만 스카티에게 일어난 일이 자기 때문이라는 죄책감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앤은 일부러 그 흑인 가족에 대한 생각을 해보려고 애썼다. 프랭클린이라는 이름과 함께, 햄버거 포장지가 널브러져 있던 탁자며 담배를 꼬나문 채 자신을 바라보던 십대 여자아이까지 기억해 냈다. "무자식이 상팔자라더니...". 병원 현관을 들어서는 순간 그 여자아이의 모습이 떠오른 앤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앤은 지금 출근길인 듯한 두 사람의 간호사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왔다. 수요일 아침, 7시가 조금 못된 시간이었다. 3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의 문이 스르르 열리는 순간, 어디선가 닥터 매디슨을 부르는 호출 소리가 들렸다. 앤은 간호사들 뒤를 다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지만, 그들은 다른 방향으로 가버렸다. 그제서야 그들은 앤이 올라타는 바람에 끊어졌던 이야기를 자기네끼리 다시 시작하는 것이었다. 앤은 흑인이 기다리고 있던 조그만 휴게실을 찾아가 보았다. 이제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놓인 의자를 보니, 마치 사람들이 조금 전에 막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간 듯한 느낌이었다. 탁자 위에는 예의 그 햄버거 포장지와 종이컵이 흩어져 있었어,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수북했다.
앤은 간호사 대기실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간호사 하나가 카운터 뒤에서 머리를 빚으며 하품을 하고 있었다.
"어젯밤에 수술을 받은 흑인 아이가 하나 있었죠." 앤이 간호사를 보았다. "이름이 프랭클린이라고 하더군요. 그 아이 가족들이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 아이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서요".
책상 앞에 앉아 잇던 간호사가 펼쳐놓은 차트에서 눈을 들어 앤을 바라보았다. 그때 전화벨이 울리는 바람에 그녀는 수화기를 집어들었지만 눈으로는 계속 앤을 바라보고 있었다.
"운명했어요". 카운터에 있던 간호사는 메마른 음성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빗을 손에 든 채 앤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족의 친구분이신가요?"
"난 어젯밤에 처음으로 그 사람들을 만났어요". 앤은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 아들도 이 병원에 입원해 있거든요. 충격을 받은 모양이에요. 아직 어디가 잘못 되었는지 확실하게 알지 못하고 있어요. 난 그냥 프랭클린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을 뿐이에요. 고마워요". 앤은 복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벽 색깔과 똑같은 이리베이터 문이 스르르 여리더니, 하얀 바지에 하얀 운동화를 신은 삐쩍 마른 대머리 남자 하나가 묵직한 손수레를 끌고 내리는 것이었다. 앤은 어젯밤에는 여기에도 에리베이터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었다. 그 남자는 손수레글 끌고 에리베이터에서 가장 가까운 병실 앞으로 다가가더니, 클립보드를 한 번 들여다본 다음 쟁반 하나를 손수레에서 끄집어냈다. 이어서 그는 병실문을 가볍게 노크한 다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어서 그는 병실문을 가볍게 노크한 다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앤은 그 손수레를 지나치는 순간 그다지 향긋하지 못한 음식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앤은 다른데 한 눈 팔지 않고 곧장 스카티의 병실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호워드는 뒷집을 진 채 창가에 서 있다가, 앤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았다.
"좀 어때요?" 앤은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핸드백들 침대 테이블 옆의 땅바닥에 내려놓고 보자 왠지 아주 한참만에 이 병실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앤은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남편의 이름을 불렀다.
"닥터 프랜시스가 조금 전에 다녀갔어". 호워드가 말했다. 앤은 남편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며 그의 어깨가 약간 처져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아침 여덟 시에 올 거라고 했잖아요".
"다른 의사 하나와 같이 왔더군. 신경과 의사하고 말야".
"신경과?'
호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그의 어깨는 확실히 축 늘어져 있었다. "그래, 뭐라고 하던가요, 호워드? 그 사람들이 뭐라고 했어요?'
"아랫층으로 데리고 가서 검사를 좀더 해봐야겠더군. 여보, 그들은 수술을 할 생각이래. 스카티에게 말이오. 왜, 아직까지도 깨어나지 않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으니까, 아무래도 단순한 충격 때문은 아닌 것 같다는 거야. 문제는 두개골에 금이 간 건데, 그것 말고는 달리 의심이 갈 만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지. 그래서 수술을 할 생각이래. 당신한테 전화를 할까 했지만, 벌써 떠났을 것 같아서 그냥 기다리고 있었소."
"어머 세상에!" 앤이 비명을 질렀다. "여보, 수술이라니....." 앤은 남편의 팔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저기 좀 봐!" 그때 호워드가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스카티! 저기 봐, 앤!" 호워드는 황급히 침대를 향해 앤을 돌려 세웠다.
아이가 눈을 떴다가 다시 감은 것이다. 잠시 후 스카티는 다시 한 번 눈을 떴다. 한동안 똑바로 ws방을 향하고 있던 아이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이더니, 이윽고 호워드와 앤을 향해 멈췄다. 하지만 이내 시선은 제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스카티". 앤이 침대를 향해 뛰어가며 소리쳤다.
"얘야, 스카티". 호워드도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들은 침대 위에 쓰러지듯 엎드렸다. 호워드는 아이의 손을 꼭 붙잡은 채 다른 손으로 얼굴을 똑바로 몇 번이고 그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스카티, 엄마 아빠다. 알아보겠니? 스카티?" 앤은 눈물이 글썽해 있었다.
아이는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았지만, 아무래도 사람을 알아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내 아이의 입이 약간 벌어지더니 눈이 도로 감겨 버렸다. 이어서 허파 속에 공기를 하나도 남기지 않으려는 듯 연신 가뿐 숨을 내쉬더니, 이윽고 얼굴이 평온하게 가라앉았다. 마지막 숨결이 목구멍을 통해 꼭 다문 이빨 사이로 가볍게 빠져 나오는 동안, 아이의 입술은 여전히 약간 벌어진 상태였다.
의사들은 아이의 사망 원인을 급성폐색이라고 설명하며 확률적으로 백만 분의 1밖에 되지 않는 경우라고 늘어놓았다. 어쩌면 사전에 그런 기미를 감지하고 신속하게 수술을 했더라면 아이의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도 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했겠지만, 어쨌거나 그들로서는 어떻게 손을 써볼 도리가 없었노라고 했다. 각종 정밀검사나 엑스레이 사진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닥터 프랜시스는 무척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정말이지 지금 내 심정을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정말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는 호워드와 앤을 의사 전용 휴게실로 안내했다. 휴게실에는 다른 의사 하나가 앞의자 등받이에 다리를 올린 채 아침 텔레비젼쇼를 보고 있었다. 그는 호워드와 앤을, 이어서 닥터 프랜시스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없이 일어나서 텔레비존을 끄고 나가 버렸다. 닥터 프랜시스는 앤을 소파로 안내한 다음 그녀 옆에 앉아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어느 시점에선가 그는 몸을 앞으로 내밀어 앤을 가볍게 껴안기까지 했다. 앤은 자신의 어깨에 맞닿은 그의 가슴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앤은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그의 포옹을 그냥 내버려두었다. 호워드는 화장실로 들어갔지만, 굳이 문을 닫지는 않았다. 한바탕 격렬하게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쏟은 호워드는 수돗물을 틀어 얼굴을 씻었다. 그런 다음 그는 화장실에서 나와 전화기가 놓여 있는 조그만 탁자 위에 걸텨 앉았다. 그는 무엇부터 먼저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잠시 멍하니 전화기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몇 군에 전화를 걸었다. 그 다음에는 닥터 프랜시스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지금 당장 제가 도와 드릴 일이 있겠습니까?" 닥터 프랜시스가 물었다.
호워드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앤은 방금 닥터 프랜시스가 한 말이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닥터 프랜시스는 그들 두 사람을 병원 현관으로 안내해 주었다. 아직 아침 7시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쉼없이 병원문을 드나들고 있었다. 앤은 지금 자신이 이렇게 걸음을 옮기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왠지 자기네는 이렇게 이 병원을 떠나서는 안 될 것 같은데, 닥터 프랜시스가 자꾸만 그들을 밀어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앤은 초점없는 눈길로 주차장을 바라보다가 다시 병원 현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안 돼요." 앤이 짧게 소리쳤다. "스카티를 혼자 두고 이렇게 그냥 갈 수는 없어요". 앤은 그런 자기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순간, 텔레비젼에서 끔찍한 혹은 갑작스런 죽음으로 넋을 잃은 사람들이 흔히 중얼거리곤 하는 상투적인 대사가 자기 입에서 흘러나온 것을 믿을 수 없는 심정이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무언가 보다 독창적인 독백이 필요할 것 같았다. "안 돼". 앤이 다시 마음 속으로 외치는 순간, 웬일인지 머리를 어깨에 얹다시피 고개를 떨구고 있던 흑인 여자의 모습이 뇌리에 떠올랐다. "안 돼".앤은 다시 한 번 뇌까렸다.
"조금 있다가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닥터 프랜시스가 호워드를 향해 정중하게 말했다. "아직 처리해야 할 일들이 몇 가지 남아 있거든요. 우린 어떻게든 아드님의 상황을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연구를 해야 하니까요". "부검 이야기로군요". 호워드는 어두운 얼굴이었다.
닥터 프랜시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내 그는 깜짝 놀란 정도의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런 빌어먹을! 알기는 뭘 안단 말입니까? 선생님, 난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모르겠단 말입니다!"
닥터 프랜시스는 한쪽 팔로 호워드의 어깨를 감쌌다. "정말 유감입니다. 하나님, 어째서 이런 일이......" 닥터 프랜시스는 호워드의 어깨에서 내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호워드는 한동안 그 손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마주 잡았다. 닥터 프랜시스는 다시 한 번 앤을 가볍게 껴안았다. 마치 그는 앤이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선으로 충만한 사람처럼 보였다. 앤은 닥터 프랜시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지만, 두 눈은 여전히 뜨고 있었다. 그녀는 병원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탄 자동차가 주차장을 빠져 나오는 동안에도 앤의 눈은 여전히 병원에 붙박혀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앤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호워드는 아이 방의 문을 닫아 버렸다. 커피 메이커의 스위치를 올려놓고, 빈 상자를 하나 찾아냈다. 거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아이 물건을 치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그 역시 소파에 앤과 함께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상자를 한쪽 옆으로 밀어놓고 몸을 앞으로 숙여 무릎을 끌어안았다.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앤은 그의 머리를 끌어다 자기 무릎 위에 올려놓고 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다 끝났어요". 그녀는 남편의 어깨를 토닥거리는 행동을 계속했다. 앤은 호워드의 흐느낌 사이로 주방에 있는 커피메이커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자, 호워드." 앤이 애써 부드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보, 스카티는 갔어요. 우린 이제 그 사실에 익숙해져야 해요".
잠시 후 호워드가 벌떡 일어나더니 목적없이 거실 안을 이리저리 오가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는 상자가 들려 있었지만, 아무것도 그 안에 집어넣지는 않았다. 그 대신 소파 한쪽 끄트머리의 마룻바닥에 아이의 물건들을 하나하나 집어다 쌓고 있었다. 호워드는 상자를 내려놓고 커피를 거실로 가져왔다. 잠시 후 앤은 친척들에게 전화를 몇 통 걸었다. 한 번씩 전화를 걸고 한 번씩 상대방이 전화를 받을 때마다 몇 마디 말을 꺼내다 말고 한동안 울기만 하는 상황이 되폴이되었다. 그런 다음에야 앤은 목소리를 차분하게 가다듬고 어찌어찌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장례 절차에 대해서도 의견을 주고받았다. 호워드는 상자를 들고 차고로 들어갔다. 그는 거기서 뜻하지 않게 아이의 자전거를 발견했다. 상자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자전거 옆에 털썩 주저앉은 호워드는 가만히 그 자전거를 가슴에 끌어안아 보았다. 고무가 달린 자전거 페달이 가슴을 가볍게 찔러왔다. 호워드는 바퀴를 한 바퀴 돌려 보았다.
앤은 자기 동생과 통화를 한 뒤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녀가 막 다른 전화번호를 찾고 있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앤은 첫 번째 벨 소리가 미처 끊어지기도 전에 수화기를 낚아챘다.
"여보세요." 앤은 배경에서 뭔가 윙윙거리는 나지막한 소음을 들을 수 있었다. "여보세요! 당신 도대체 누구세요?" 역시 그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 아이를 잊어 버렸소". "이 개같은 자식". 앤은 수화기에 대고 냅다 고함을 질렀다. 어떻게 이런짓을 할 수가 있어. 개만도 못한 자식아". "스카티". 남자는 차분한 음성이었다. "스카티에 대해선 까마득히 잊어버린 모양이군". 그는 그 말을 남긴 채 전화를 끊어 버렸다.
앤은 고함 소리에 깜짝 놀라 뛰어들어온 호워드는 탁자 위에 엎드린 채 울고 있는 아내를 발견했다. 호워드는 얼른 수화기를 들어보았지만, 뚜 하는 신호음 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지나 자정이 되기 직전이었다. 그 동안 그들은 많은 일을 처리했다. 그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당신이 받아봐요". 앤은 겁에 질린 음성이었다. "호워드, 그놈일 거예요". 그들은 커피를 앞에 놓고 주방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참이었다. 호워드는 커피잔 옆에 조그만 위스키 잔도 하나 준비해 두고 있었다. 세 번째 벨이 울릴 때 호워드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그가 말했다. "누구요?"
그 순간 전화는 먹통이 되어 버렸다.
"그놈이에요. 그 개자식! 당장 쫓아가서 죽여 버리고 싶어요. 총을 마구 쏴서, 쭉 뻗어 버리는 걸 보고 싶어요".
"앤, 그만해". 호워드가 그런 그녀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혹시 무슨 소리 못 들었어요?"
앤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놈을 잡을 수만 있다면...." 그 순간 불현 듯 앤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그게 누군지 알고 있었다. 스카티, 케이크, 전화번호...... 앤은 의자를 와락 뒤로 밀치며 벌떡 일어났다. "여보 쇼핑 센타까지 좀 태워다 주세요".
"무슨 소리야".
"쇼핑센타 말이에요. 전화하는 놈이 누군지 알아냈어요. 제과점 주인이에요. 그 개 같은 작자가 이 따위 짓을 하고 있는 거라구요. 호워드. 스카티 생일 때문에 케이크를 주문했거든요. 틀림없이 그놈이에요. 내가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으니, 그걸 가지고 계속 전화질을 해대는 거예요. 케이크를 찾아가지 않는다고 앙심을 품고 말이예요. 그 개자식!"

그들은 차를 몰고 쇼핑센타로 달려갔다. 맑은 밤하늘에 별들이 총총했다. 날씨가 추워서 차 안에 히터를 틀어놓아야 했다. 그들은 제과점 앞에다 차를 세웠다. 상점들은 모두 문을 닫았지만, 반대편 영화관 앞 주차장에는 차들이 서 있었다. 제과점 창문에는 불이 꺼져 캄캄했지만, 문틈 사이로 들여다보니 가게 안쪽의 뒷방에 불이 켜져 있고 이따금 앞치마를 두른 덩치 큰 남자가 왔다갔다 하는 것이 보였다. 앤은 유리창을 통해 전시용 상자와 의자가 달린 조그만 테이블 몇 개를 볼 수 있었다. 앤은 문을 밀어보고 유리를 두들겨 보기도 했다. 주인은 그 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는 호워드와 내이 있는 쪽으로는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차를 타고 이번에는 건물 뒤편에다 세웠다,. 그 곳 창문에서는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너무 높아서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없었다. 뒷문에 팬트리 제과, 특별주문이라고 쓰인 팻말이 붙어 있었다. 앤은 안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소리와 함께 뭔가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오븐 문을 여는 소리가 아닐까 싶었다. 앤은 몇 번 문을 두들긴 다음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조금 있다가는 훨씬 더 크게 문을 두들겼다. 라디오 소리가 줄어드는가 싶더니, 서랍 같은 것을 열었다가 닫는 듯 뭔가 긁히는 듯한 소리가 났다.
이윽고 누군가가 안에서 문을 열었다. 제과점 주인이 고개를 내밀고 그들을 쳐다보았다. "영업 시간 끝났소. 이 시간에 와서 뭘 어쩌자는 거요? 자정이 넘었잖고. 취했소".
앤은 열린 문틈으로 새나오는 불빛 속으로 불쑥 들어섰다. 제과점 주인은 무거워 보이는 눈꺼풀을 몇 번 껌뻑이더니, 그녀를 알아보는 눈치였다. "오라, 당신이로군".
"그래, 나예요." 앤은 시비를 걸 듯 말을 받았다. "스카티의 엄마죠. 이쪽은 스카티의 아빠구요. 좀 들어갔으면 좋겠군요."
제과점 주인이 대답했다. "난, 지금 무척 바쁘다오. 일을 해야 하거든".
앤은 그 말을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호워드도 그 뒤를 따랐다. 주인도 엉거주춤 따라 들어왔다. "여긴 정말 제과점 같은 냄새가 나는군요. 그렇지 않아요."
"원하는 게 뭐요?"
제과점 주인이 물었다. "케이크 찾으러 왔소. 그렇군, 이제사 케이크 생각이 났단 말이요? 당신이 케이크를 주문하지 않았소, 생각나요?"
"제과점 주인치고는 꽤 똑똑하군요". 앤이 툭 쏘았다. " 호워드 우리에게 전화를 한 자예요". 앤은 주먹을 불끈 쥔 채 뚫어질 듯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몸 속 어디선가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분노가 그녀 자신을 원래의 자신보다, 심지어는 자기 남편이나 그 덩치 큰 제과점 주인보다 더 큰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잠깐만요". 제과점 주인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안색이었다. "사흘이나 묵은 케이크를 찾으러 왔소? 정말 그런 거요? 난 댁하고 쓸데없이 말싸움하고 싶지 않소. 케이크는 이미 다 상해 가고 있소. 정 원한다면 처음에 얘기한 반값에 드리겠소. 정말 그걸 원하시오? 그렇다면 얼마든지 가져가시오. 어차피 나에게는 이제 아무 쓸모가 없는 물건이니까. 난 그 케이크를 만드느라 적지 않은 시간과 돈을 쏟아부었소. 정 가져가겠다면 가져가시오, 싫으면 안 가져가도 괜찮소. 난 이제 그만 일이나 해야겠소". 제과점 주인은 그들을 바라보며 이빨 뒤로 혀를 굴렸다.
"케이크 얘기가 아니에요". 앤은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이성을 되찾고 있음을 느꼈다. 이제 그녀의 태도는 몰라보게 차분해져 있었다.
"이것 봐요, 부인. 난 이 좁은 공간에서 하루에 열 여섯 시간 동안 일을 해요, 먹고 살기 위해서 말이요". 제과점 주인은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먹고 살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여기서 일을 한단 말이요". 앤의 얼굴에 다시금 독기가 어리는 것을 본 제과점 주인은 한발 뒤로 물러서며 중얼거렸다. "말 귀를 못 알아듣는 모양이군". 그는 카운터로 오른 손을 뻗더니, 밀가루 반죽을 미는 자그마한 홍두깨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그걸 왼손바닥에 대고 탁탁 치는 것이었다. "케이크를 가져 갈거요, 말 거요? 난 일을 해야 된다고 하지 않았소. 제과쟁이들이 밤에 일을 한다는 것 몰라?" 앤은 그의 조그만 눈이 무척 비열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눈은 얼굴의 살에 밀려서 아주 조금밖에 찢어져 있지 않았다. 뚱뚱한 목에도 온통 비계덩어리였다.
"제과쟁이들이 밤에 일한다는 건 나도 알아". 앤이 언성을 높였다. "그래서 전화도 밤에 거는 거고, 당신 아주 나쁜 놈이야". 제과점 주인은 계속해서 홍두께로 손바닥을 두들기며 호워드를 힐끔 쳐다보았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 우리 아들이 죽었어". 앤이 마치 마지막 선언을 하듯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월요일 아침에 차에 치었어. 우린 아이가 숨을 거둘 대까지 멍청히 지켜보고만 있었다구. 하지만 물론 당신은 그런 사실을 알 턱이 없었겠지. 제과쟁이라고 해서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니니까. 그렇지 않아, 제과쟁이? 하지만 우리 앤 죽었어. 죽었다구, 이 개자식아!" 분노는 피어오를 때만큼이나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사르라들기 시작했다. 그 대신 당장 멀미가 날 것만 같은 현기증이 일어났다. 앤은 마룻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인 목재 테입ㄹ에 몸을 기대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그건 불공평한 일이야, 불공평하다구!"
호워드는 아내의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제과점 주인을 바라보았다. "창피 한 줄 아시오". 호워드는 다시 한마디 더했다.
"창피하지도 않소?"
제과점 주인은 홍두깨로 도로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이어서 앞치마를 풀더니 카운터 위로 휙 집어 던졌다. 그는 한 동안 두 사람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그는 메모지와 영수증, 반죽기, 전화번호부 따위가 놓인 조그만 테이블 밑에서 의자를 하나 끄집어냈다. "앉으시오". 그가 권했다. "제발 부탁이니 좀 앉으시오". 그는 호워드를 행해 그렇게 말하고는 가게 앞쪽으로 가서 조그만 철제 의자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좀 앉아요, 두 분 다".
앤은 눈물을 닦으며 제과점 주인을 쳐다보았다. "당신을 죽여버리고 싶었어요. 당신이 죽어 버리기를 바랬다구요".
제과점 주인은 테이블에 그들이 앉을 자리를 마련했다. 반죽기를 한쪽 옆으로 밀어놓고, 수첩과 영수증 따위도 그 위에 쌓아 올렸다. 그가 전화번호부를 바닥으로 집어던지자, 생각보다 훨씬 크게 쿵 하는 소리가 낫다. 호워드와 앤은 테이블 앞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제과점 주인도 마주 앉았다.
"우선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려야겠소". 제과점 주인이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어떻게 이 심정을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소. 내 말을 좀 들어봐요. 난 일개 제과쟁이에 지나지 않소. 결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요. 한때는 나도 지금 같은 인간은 아니었소. 워낙 오래된 일이라 지금은 기억도 잘 나지 않지만 말이요. 하지만 나는 사람이 완전히 변해 버렸소. 그 결과 지금은 그저 평범한 제과쟁이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말씀이오. 무론 이런 얘길 한다고 내가 한 짓거리에 대한 변명은 되지 않는다는 걸 나도 알아요. 정말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소". 그는 테이블에 올려놓고 있던 손을 뒤집어 손바닥을 펼쳐보이며 말을 이었다. "나에겐 자식이 없소. 지금 당신들 심정이 어떨지 안다고는 감히 말하지 못하겠소.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저 미안하다는 말뿐이오. 할 수만 있다면, 제발 나를 용서해 주시오". 제과점 주인은 둘의 얼굴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숙이고는 계속 했다. "나도 그렇게 나쁜 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적어도 당신이 전화로 말했던 것처럼 그렇게 악질적인 인간은 아닐 거요. 나로서는 이제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댁들을 위로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소. 제발 용서해 주기를 원한다면 내가 너무 뻔뻔한 거겠소?"
제과점 안은 무척 따듯했다. 호워드는 테이블에서 일어나 코트를 벗었다. 그리고 앤이 자기 코트를 벗는 것도 도와주었다. 제과점 주인은 한동안 그들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섰다. 그는 오븐으로 다가가 스위치 몇 개를 돌린 다음, 어디서 잔을 찾아오더니 커피 메이커에서 커피를 따랐다. 크림통과 설탕통도 가져와 테이블 위에 놓았다.
"당신들 뭘 좀 먹는 게 좋을 것 같소". 제과점 주인이 부드럽게 말했다. " 내가 만든 핫 롤을 좀 들어보지 않겠소? 일단은 든든히 먹어 둬여 견뎌낼 수가 있는 법이오. 뭔가를 먹는다는 건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이런 때는 그보다 더 좋은 일도 없을 거요".
그는 막 오븐에서 꺼낸 따뜻한 계피빵을 가져왔다. 겉에 입힌 설탕물이 아직 채 마르지도 않은 상태였다. 제과점 주인은 버터와, 버터를 바를 나이프도 테이블 위에 꺼내 놓았다. 그런 다음 그는 테이블에 앉아서 그들이 먹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호워드와 앤은 쟁반에서 빵 한 조각을 집어들고 먹기 시작했다.
"뭔가를 먹는다는 건 좋은 일이요". 제과점 주인이 그런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빵은 얼마든지 있소. 먹고 싶은 만큼 얼마든지 먹어도 좋아요. 여긴 이 세상의 모든 빵들이 있으니까".
호워드와 앤은 빵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앤은 갑자기 배가 고파졌고, 빵은 따뜻하고 달콤했다. 앤이 쉬지 않고 세 조각을 먹어치우자, 제과점 주인은 흐믓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다음 그가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 호워드와 앤은 열심히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둘 다 무척 피곤하고 심란한 상태였지만 그 제과점 주인이 늘어놓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경청했다. 그가 외로움에 대해서, 그리고 중년의 나이에 느낀 의구심과 좌절감에 대해서 얘기할 때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그는 그 오랜 세월 동안 자식 없이 살아온 자신의 인생이 어떠했는지를 이야기했다. 그의 인생은 끊임없이 오븐을 채웠다가, 또 비워내는 단조로운 작업으로 점철되었다. 지금까지 그가 만들어 낸 파티 음식과 축하 케이크가 그 얼마던가. 그가 지금까지 소모한 설탕만 해도 실로 엄청날 것이다. 그가 자시 손으로 만든 결혼 기념 케이크는 지금까지 수백, 아니 수천 개에 달할 것이다. 생일 케이크 또한 그랬다. 게다가 지금까지 그가 만든 생일 케이크에 꽂혀 불이 밝혀졌던 촛불은 또 몇 개가 될 것인가. 그는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이다. 그는 제과쟁이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꽃장수가 아니라는 사실이 다행스럽게 느껴진다고 했다. 먹을 수 없는 꽃을 가꾸는 일보다는 먹을 수 있는 빵을 만드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빵 냄새보다 더 좋은 꽃향기는 어디에도 없는 법이다.
"냄새를 맡아봐요". 제과점 주인이 거무튀튀한 빵 덩어리를 두 동강으로 잘랐다. " 그렇게 고급스런 빵은 아니지만 영양분은 아주 풍부해요." 호워드와 앤은 그가 내미는 빵의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러자 제과점 주인은 맛도 한번 보라고 권했다. 당밀 맛과 굵은 밀가루 알갱이 맛을 느낄 수 있었다. 호워드와 앤은 제과점 주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더 이산 먹지 못할 때가지 빵을 먹었다. 그 검은 빵도 맛있게 씹어 넘겼다/ 그 빵을 삼키는 기분은 마치 현란한 형광등 불빛 속에서 가슴까지 시원한 햇빛 아래로 나온 것 같은 맛이었다. 그들은 신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윽고 창문에 희미한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지만, 그들은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