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작품]/***** 좋은 단편

丘 仁 煥 / 산정의 신화

소설가 구경욱 2009. 10. 8. 10:13

 丘 仁 煥 / 산정의 신화

 

먼 거리에 가스등불이 비치기 시작했다.
아직도 차가운 바람결이 그 불빛을 휘어감았다.
눈을 떴다. 시야가 흐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 짙은 햇빛에 눈부시어 감았던 눈이 어둠으로 채색되는 시야
도 구분할 수가 없다.
벌써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것인가. 나무들이 장승처럼 검은 색으로 멀어져 갔다. 앞에서 웃고 있는 동상
도 커다란 나무로 변해 등신같이 서 있다.
고요하다. 그야말로 물이라도 끼얹은 청중이다. 바시시 하는 짐승이나 사람이 움직이는 소리나, 철이 아
니라도 새소리라도 들릴 법한 노릇이다. 아직 이런 벤치에 앉아 보는 것이 이른 탓일까. 그 많은 아베크의
발길이라도 한 번쯤 스쳐 갈 만도 한 일이다. 좀 늦추위가 있다곤 해도 낮에는 십 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이
고 보면, 바바리를 걸친 남녀의 발길이 안 미치는 데가 없을 것이 아닌가.
이슬비라도 내린 듯한 촉촉한 촉감이 어둠을 감쌌다. 부스스 포켓을 뒤졌다. 담배를 꺼냈다. 성냥을 그었
다. 화약 냄새가 역겹게 코를 찔렀다. 깊이 들이마셨다. 시원하다. 폐부를 찌르르 하게 자극을 주는 쾌적한
기분이 온 몸을 감쌌다. 풀잎이 이토록 즐거운 기분을 가져온다는 것은 신기한 노릇이다. 그야말로 무궁한
섭리의 편린이라고나 할까. 몇 번 빨아서 내뱉는 동작, 별로 힘을 안 들이고 그 동작에 비해 그 동작으로
해서 얻어지는 쾌적한 기분은 너무나 큰 셈이다. 그러기에 담배는 백해무익이라는 둥 또는 암의 원인이 된
다는 둥 말도 많지만, 손쉽게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것도 조그마한 동작에 비해 너무나도 엄청난 즐거움을 주
기 때문이리라.
그 자리에 누웠다. 팔베개를 베었다. 차가운 촉감이 등골을 스친다.
푸른 기운이 있는 까만 하늘에 별이 보였다. 드없이 높은 공중에 수없이 명멸한다. 티없는 소녀의 반짝이
는 눈, 청상의 차갑고도 애처로운 눈빛이라고나 할까. 까맣게 채색된 공중에 수없이 깔린 별들이 무슨 신비
스러운 사연이라도 속삭이듯 깜빡거렸다.
하늘의 천사, 티없이 맑고 아름다운 미의 화신, 별들의 속삭임이 온 몸을 감쌌다.
얼굴의 긴장이 풀리면서 바시시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형용할 수 없는 활짝 핀 웃음이 입가를 물들였다.

산마루에 녹음이 짙어져 풀내음이 풍성했다.
"야 어디를 자꾸 가니?"
머스매는 앞장서서 가는 가시네의 댕기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아므 말 말고 따라오믄 된다. 조금만 더 가믄 말야."
벌써 마을이 보이지 않았다. 신등성을 하나 넘어섰으니, 집이 산너머에 있지 않은가. 풀이 제법 자라 머
스매의 고무신이 묻혔다. 잡목들은 머스매의 키를 덮게 컸다. 가시네는 자꾸만 잡목을 헤치면서 앞으로 갔
다. 머스매도 나무 사이를 더듬으며 붉은 댕기를 따랐다.
"얘 같이 가지 혼자만 달아나니? 얘!"
머스매는 좀 겁이 났다. 엄마가 언제나 멀리 가면 용청백이(나병환자)가 잡아간다고 한 말이 머리를 스쳤
다.
"혼자 가면 난 모른다. 응……."
좀 떨리는 목소리였다. 금시 눈물이 나오며 울음이 터질 것 같다. 가시네가 저기 가서 꽃도 꺾고 놀다가
오자고 한 말을 곧이 듣고 크다고 믿고 따라 나온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꽃도 꺾어 주지도 않고 혼자
만 저렇게 달아나니 말이다. 몇 살 더 먹은 나이값도 못한다고 생각했다. 앞에 가던 가시네가 힐끗 뒤를 쳐
다보았다.
"같이 가 꽃도 꺾어 주어야지……."
머스매는 꽃보다 혼자 가는 것이 무서웠다. 짐승이 튀어 나와서 앙 하고 물든지 용청백이가 붙잡아 갈
것만 같다.
눈물이 핑 돌았다.
가시네가 서 있었다. 빤히 머스매의 울보가 될 듯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너 울지 않니? 바보 같으니, 무섭기는 내가 있는데 뭐가 무섭니 얘……."
가시네가 눈을 흘깃하며 머스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머스매는 그 흘깃하는 가시네의 눈길이 곱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화난 얼굴을 했다.
"자 좀만 더 가믄 되, 거기 가믄 꽃도 있고……."
가시네가 채 말끝을 맺지 못했다. 머스매의 어깨를 꼭 쥐면서 얼굴이 붉어졌다.
다시 산등성이를 내려갔다.
가시네는 어느 새 풀꽃을 따서 머리에 꽂고 있었다. 꽃과 귀가 잘 어울려 보였다. 잡목과 풀이 우거진 등
성을 지났다. 소나무가 쭉쭉 서 있다. 잔솔밭이었다. 작은 소나무들이 제법 하늘에 치솟아 귀공자와 같이 서
있다.
그 사이를 돌아들었다.
다시 좀 내려갔다.
환하게 하늘이 트이었다. 잔디가 곱게 자라 뫼마당같이 둥글게 보였다. 나무들이 폭 싸여 보이는 데가 없
었다.
"얘, 여기 좀 쉬어 가자."
"응, 여기가 어디야?"
가시네가 먼저 앉았다.
머스매는 참 히얀한 곳도 있다고 생각했다. 보이는 곳은 하늘뿐이요, 등성에서 좀 내려오고 도 풀과 나무
에 폭 싸여 눈길이 닿을 데가 없었다.
"얘 앉지 와 이리 서 있니?"
가시네가 머스매를 빤히 쳐다보았다.
머스매는 좀 고단하다고 생각했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가시네의 풀꽃이 꽂아 있는 옆 얼
굴을 쳐다보았다. 하얀 얼굴이 달같이 보였다.
"너 고단하지…… 여기 무섭지 않다, 얘……."
가시네가 먼저 저 잔디 위에 누웠다. 머스매도 잔디 위에 몸을 던졌다.
푸른 하늘이 소나무 사이로 빤히 보였다. 맑은 바람에 풀 내음이 짙게 코를 스며 왔다.
어디선가 꾀꼬리의 경쾌한 울음소리가 피리 소리같이 들려 왔다.
머스매는 재미가 있었다. 이렇게 누워서 꾀꼬리 소리를 들으면서 하늘을 보는 것은 참 처음이라고 생각
했다.
"저 소리가 무슨 샌지 아니?"
가시네의 손이 머스매의 손을 꼭 쥐었다.
"알지, 꾀꼴새지 뭐야."
머스매의 소리와 같이 가시네는 빙 한 바퀴 둥글어 머스매의 옆으로 다가왔다.
한 쪽 손을 꼭 쥐고 한 쪽 손은 어깨 위에 살며시 얹었다.
"너 이 꽃 줄까!"
가시네의 목소리가 좀 상기됐다.
"니나 가져라, 난 더 좋은 것 꺾을래."
머스매는 비로소 가시네를 보면서 말했다.
가시네가 상반신을 좀 들어 머스매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그리고 좌우로 가만히 두어서너번을 흔들었
다. 그러면서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넌 참 예뻐……."
머스매는 좀 무겁다고 생각했다.
가시네는 이번엔 볼을 머스매에 살며시 기댔다. 뜨거웠다. 그러면서 가슴을 꼭 눌렀다. 솜뭉치같이 몽실
몽실한 것이 머스매의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그러면서 어깨를 잡은 손을 조였다. 뚝뚝하는 가시네의 고동
소리가 머스매의 몸에 번졌다.
머스매는 숨이 가빴다. 다 큰 가시네의 몸이 무겁다고 생각하면서 손을 빼어 밀치려고 했다.
"왜 이러니 야……."
가시네는 더욱 얼굴을 대며 손에 힘을 주어 머스매의 몸을 눌렀다.
머스매는 좀 무서워졌다. 온 힘을 주어 몸을 빼려고 했다.
"얘 너 이쁘지, 고대로 가만 있어라 응……."
가시네의 목소리가 좀 떨리었다.
"앙! 싫다, 얘 숨이 막혀!"
또 힘을 주었다. 그 바람에 몸이 한 바퀴 데굴하고 돌았다. 가시네는 여전히 꼭 쥐고 머스매를 끼어안았
다.
또 힘을 주었다. 한 바퀴 빙 돌았다. 또 때굴때굴 뒹굴었다. 가시네는 눈을 감고 머스매를 꼭 껴안고 돌았
다.
머스매는 재미가 났다. 이번엔 두 팔로 가시네를 껴안고 잔디밭을 빙빙 돌았다. 때굴때굴!
"하하하! 얘 재미있다!"
머스매는 신이 나서 가시네를 안고 데굴데굴 굴렀다.
무엇인가 부시럭했다. 잡초였다. 어느 새 잔디밭을 건너 그 옆의 풀 속으로 두 몸이 둥굴었다.
가시네가 몸을 좀 일으켰다. 머스매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눈이 빛난다. 흩어진 머리채에 잡풀이 가려
진 사이로 섬광같이 빛나는 눈이 웃고 있었다. 파란 하늘, 푸른 풀 사이에서 가시네의 맑은 눈이 사뭇 신비
스러운 사연을 속삭이었다.

가슴이 고동했다. 별들이 더욱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별빛 위에 가시네의 웃음 띤 환한 얼굴이 겹쳤다.
피부가 간지럽게 좀 싸늘한 바람이 스쳐 갔다.
어디선가 두견새의 울음소리가 은은하게 번졌다.
다시 눈을 감아 보았다. 수없이 불빛이 난무했다. 꿈 속에서 사라져 가는 애인과 같이 수없는 불빛이 암
흑을 수놓았다. 그 불빛이 섬광으로 변했다. 샛파란 산소의 불빛과 같은 불빛, 모든 것을 다 태워 버리기라
도 하려는 듯한 섬광이 사뭇 폭포와 같이 내리퍼부었다.
눈을 떴다. 까만 색깔이 짓누르듯 둘러싸고 있다. 온 우주가 가라앉듯 지그시 압박해 오는 흑색의 베일,
그 흑색의 베일 속에서 한 줄기의 찬란한 불빛이 흘렀다. 북극성이었다.
무슨 충격을 받은 사람과 같이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다시 그 별빛을 보았다. 영롱하게 비치는 그 빛이
은은하게 가슴을 억눌러 왔다.
서서히 발길을 내딛었다. 양쪽 포켓에 손을 넣고 몇 발자국 걸어가다가 앞으로 내달았다. 누구에게 쫓기
기라도 하듯 어느 새 가스등이 조는 듯이 비치는 동상 앞을 스쳐 갔다.

벌써 십 분이 지났다.
아무 소식이 없다. 무슨 말 한 마디라도 있을 법한 노릇이다. 제법 세련된 여인의 직업적인 안내의 말이
라도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이건 시간이 지나서도 꿀 먹은 벙어리같이 말이 없으니 답답한 일이다.
가스등만이 졸리우듯 어둠을 감싸 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서성거렸다. 모두가 기둥에 걸려 있는 시계를 바라보며 무어라고 내뱉었다.
혹은 우두커니 서서 담배를 피어 문 사람, 또는 시계의 추 모양으로 그리 넓지도 않은 광장을 왔다갔다
하는 사람, 발을 둥둥 구르며 조급해하는 여대생, 모두가 편안한 대로 서서 스피커에 귀를 모으면서 출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다.
하루에도 수만 명의 사람들이 드나드는 역, 광장은 인파로 넘실댔다. 매일같이 수없는 사람이 후조(候
鳥)마냥 드나드는 서울의 관문, 머리들이 물에 떠 있는 콩나물 대가리같이 넘실댔다.
초저녁의 불빛에 광장은 좀 분주하게 서성거렸다.
하지만 출입구 쪽의 조그마한 광장의 사정은 달랐다. 모두가 기다리는 사람들뿐이다. 눈이 샛까맣게 나
오는 사람들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가슴을 조여야 하는 사람들이다.
또 기둥의 시계를 보았다. 9시 20분이다. 이십 분이 늦은 셈이다.
갈증이 났다. 기다리는 시간은 뱀과 같다더니 이건 목을 조이는 것 같지 않은가. 더구나 안내원까지 일언
반구 말이 없으니 모를 일이다.
또 담배를 피워 물었다. 이럴 때 담배란 위안의 반려자다. 깊이 들이마시며 출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아
직도 굳게 닫힌 채였다.
기둥에 몸을 기댔다. 좀 편안하다. 앞에 서 있던 아가씨도 좀 피로한 기색이다. 한 쪽 팔로 턱을 괴고 또
한쪽으로 턱을 괸 팔의 팔굽을 괴고 서 있다가 팔이 풀어져 버렸다. 그 아가씨가 무료하게 쳐다보았다. 피
식 웃는 것만 같았다. 꼭 다문 붉은 입술이 생생했다. 그 입술에 윤기가 없었다. 기다리다가 갈증이 난 모양
이다. 그러지 않고야 입술이 번지르르하게 윤기가 넘쳐야 할 나이에 저렇게 메마를 수가 없지 않은가.
출입구가 열렸다.
사람들이 와 하고 몰려들었다.
아가씨의 얼굴에도 생기가 돌았다.
사람들 사이를 비비고 여객이 나오기 시작했다. 가방을 든 여인, 짐을 든 신사, 보따리를 인 시골의 아낙
네, 정답게 얘기하면서 나오는 사람들, 혼자 뚜벅뚜벅 나오는 대학생…… 양쪽으로 늘어선 사람들 사이로
난 줄을 따라 꾸역꾸역 몰리어 나왔다.
서로 이름을 부르며 손을 잡고 반가와하는 여인들, 오빠를 부르는 여학생, 자식의 이름을 부르는 어머니,
조그마한 광장은 활기를 되찾았다.
출입구 옆쪽 철조망 앞으로 갔다. 철조망 사이로 밀려 나오는 여객의 얼굴을 살폈다. 피로한 빛도 없이
나오는 여객들, 아무리 긴 여행이라도 목적지에 와 닿았으니, 좀 생기가 돋아 올 것이 아닌가.
눈을 반짝이면서 앞을 보았다. 보이질 않는다.
좀더 앞으로 다가섰다. 철조망을 꼭 쥐고 앞을 응시했다. 수없는 여객들이 바삐 나갈 뿐이었다.
그 눈빛은 보이질 않았다. 용광로와 같이 빛나던 그 빛은 가스등불 아래로 나타나지 않았다.
갈증을 느꼈다. 등허리에서 땀이 나는지도 몰랐다. 입술이 바시시 타 왔다.
철조망에 인영이 보이지 않았다. 벌써 다 나온 모양이다. 두 줄로 늘어섰다. 마중 나온 사람들도 하나 둘
차에서 내린 사람을 만나 돌아가고, 만나지 못한 몇몇 사람들이 역내를 기웃거리며 서성거렸다.
출입문이 닫혔다. 집찰(集札)하던 역원도 들어갔다.
조그마한 광장이 텅 비었다.
서서히 몸을 돌렸다. 발길이 무거웠다.
앞에 검은 인영이 보였다. 고개를 들었다.
아까 팔굽을 괴고 있던 아가씨였다. 애수어린 눈매였다. 기둥에 기댄 채 역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못 만나셨군요!"
  누가 한 말인지도 몰랐다. 그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굽어보는 가스등불을 누볐다.
가슴이 뭉클했다. 그 아가씨의 호젓하고 실망에 겨운 모습에 가슴이 찌릿했다.
발길을 빨리 떼었다. 그 자리에 더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앞으로 내달았다. 지남철이 끄는 것 같이 힘껏 조그마한 광장을 빠져 나왔다.
역전 광장엔 불빛이 졸고 싸늘한 바람이 뺨을 스쳐 갔다.

  발을 멈추었다. 눈앞이 아찔했다. 몸이 비틀하면서 상반신이 앞으로 거꾸러졌다.
응 안 되지, 그쯤에 몸을 가누지 못해서야. 정신이 아물아물했다.
다시 몸을 일으켰다. 바로 서서 앞을 살폈다.
  아스팔트의 길가에 서 있는 집들, 전신주가 서 있다.
  다시 눈을 비볐다.
  축대,차고, 전신주에 가로등이 켜 있다.
 응 멋지게 사는 친구라 이거지? 차고로 으스대고, 샷다가 반쯤 열려 있으니 아직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
다…….
  발을 내딛었다. 작부의 말대로 어딘가 집을 찾아가야 한다.
두서너 되는 들이켰다. 그것도 급행으로 말이다. 한 되를 마시자 옆에 서 있던 작부가
  "이 양반이 술 구경을 못했나? 그게 무슨 숭늉으로 아슈."
하며 의아한 표정이었다. 옆에 와 앉았다.
"왜 먹는 것도 시빈가? 달라는 술을 주기만 하면 되는 거야……."
 또 한 잔을 들이켰다. 작부가 눈을 뵙뜨면서 빤히 쳐다보았다.
"혼자 먹기가 적적하죠. 잔 좀 돌려 봐요."
 작부가 수작을 걸어 왔다. 인물은 제법 빤빤하고 입술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보조개를 지면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볼이 붉게 물들어져 있었다. 취기가 있었다.
"이 양반이 구두쇠야. 그렇지 않음 아무리 세상의 인심이 험하기로서니 그래 술 한 잔을 못준단 말예
요……."
고개를 돌렸다. 눈매가 거슴츠레하게 물들어져 있었다. 아이·라인이 좀 짙게 보였다.
술잔을 뺏아 갔다. 주전자를 가져다가 술을 부었다. 한 번 쳐다보고는 쭉 들이마셨다.
"한 잔 드시지. 억지로 술을 뺏아 먹는 것 같아서 미안해요."
 컵을 코 앞에 내밀었다. 입을 삐죽하면서 빤히 눈을 들어 치켜 보았다.
"좋아! 그럼 잔을 돌려 같이 먹는 거야."
치켜뜬 눈을 쳐다보면서 단숨에 마셨다. 목구멍이 따가왔다. 숨이 좀 찼다. 급행으로 단숨에 마시니, 따가
운 것도 무리가 아니다.
"잘 마시는데, 미리 빼지는 말고, 어디 한 번 실력 발휘를 해 보시지……."
작부도 한 숨에 마셨다. 제법 임전 태세가 돼 있다.
주막에 객이라고는 별로 없었다. 아까부터 구석에서 혼자 마시던 신사도 언제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술잔이 제법 돌았다.
"이것 몇 된 줄 알아. 서 되째야. 음! 무얼 대단하다고 젠 체하는 거지. 없는 거야. 없어, 이 세상에 마음
줄 사람은 없는 거야. 나를 송두리째 태워 버릴 사람은 없는 거야. 없지……."
작부의 눈이 점점 감겨지고 입술이 붉게 타올랐다.
"흥 세상에서 으스대는 놈들이 뭐 사람이라고 큰 소리지. 이 나를 두고 또 누가 있다는 거야. 이래 뵈도
자신이 있어 당신을 맞을 수 있다. 충분한 여인이야! 응, 알겠어."
작부가 빤히 쳐다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이봐, 나를 천당으로 데려갈 수는 없을까. 이 뭇사내에게 술이나 따르는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는 없느
냐 말야 응……젊은이야……."
작부가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불빛이 찬란한 눈이 반짝이었다.
"자신이 없음 내가 마련해 주지. 그 해사한 얼굴에 즐거움이 가득 차게 해 줄 테야. 알겠어. 그 입술과 눈
에 웃음이 활짝 피게 해 준단 말야."
손을 잡아끌었다. 눈은 담뿍 요기를 품어 섬광같이 빛났다.
"술이나 가져와. 천당이고 지옥이고 간에 잠꼬대를 그만두고, 술이나 가져오란 말야."
도시 그 빛나는 눈빛을 그대로 빤히 쳐다볼 수가 없었다.
불빛이 더 훤하게 주막을 비쳤다.
"알겠어. 나 같은 계집애로는 천당을 갈 수 없다는 말이지. 좋아, 술집 작부는 뭐가 달라서 그러는 거야.
뭐 없는 게 있는 거야. 아니면, 같이 살자고 못 살게 굴까 봐서- 호호호, 그러고 보니 겁쟁이시로군."
"닥치지 못해, 술이나 가져와, 술을 말야. 어서 술을!"
가슴이 타올랐다. 입술이 열병 환자와 같이 타고 목이 말랐다.
"술이라고, 술은 너희놈들의 위안이나 주기 위해서 있는 줄 아시나 보지. 그러지 말고 같이 카시미롱 이
불 속에서 천당의 꿈이나 꾸자구요!"
작부의 혀꼬부란 말소리에 그만 밖으로 뛰어나갔다.
"둘이 어딘가 찾아가자구요, 이 겁쟁이 젊은이!"
가야지, 어딘가 찾아가 이 검은 장막을 헤쳐 나가야지. 앗튀! 작부의 말대로 어딘가에 천당에로의 길은
있을 것이 아닌가.
발을 멈추었다. 환한 불빛이 앞을 가로막았다.
약국의 아크릴이었다. 눈에 익은 듯했다.
저녁에 피로할 때나 잠이 오지 않으면 약을 사다 먹는다고 했지
"그리고 그 약방에 무엇이 있는지 아세요. 네 맞추어 보세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요. 그만한 센스도 없
이 어떻게 젊은이라고 할 수 있어요. 경호씬 그래서 둔하다는 거예요. 미쓰가 거리에서 제일 관심을 두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쟎아요. 네 맞았어요. 그거예요. 그거, 멋진 남성을 보는 거예요, 그 약방에도 그거예요.
약제사가 멋있는 친구예요. 그래서 젊은 여성이 단골이 많다고 야단이잖아요."
호들갑스럽게 웃어대며 말한 약국이었다. 별로 잘 차려진 것 같지도 않다. 골목길로 발을 돌렸다.
미애가 늦었으니 아무데서나 지체하다가 가라고 끄는 것을 굳이 마다고 뿌리치고 간 골목이다.
응! 멋있는 사나이가 있는 약국에 모여드는 여성들이 많다고, 좋아, 무슨 진열장으로 아는 모양이지, 엇
튀!
창문에 불빛이 훤했다. 발을 멈추었다. 고요했다. 벌써 잠이 들었는지 몰랐다.
그 자리에 우뚝 섰다. 통금이 지났는지 여기저기 호각을 부는 소리가 들렸다. 통금 위반자를 단속하는지
도 몰랐다.
하지만, 녹크를 해서는 안 되는 거야, 미애가 버선발로 뛰어나와서 맞이해 들어간다고 해도 그 창문을
노크해서는 안 돼지, 안 돼.
창문을 지그시 응시했다. 별다른 동정이 없었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인가.

경호씬 나를 원하지 않는가 보죠.
그날 밤 울다가 잠이 들었어요.
그렇게 애타게 경호씰 그리는 한 여인의 애절한 정성을 뿌리친다는 것은 일종의 죄의식을 유발하지 않겠
어요. 더구나 마음속으로는 뜨거운 열정을 느끼면서 그 열정에 불꽃이 도화선이 붙을까 두려워하는 것은
스스로 비극을 자인할 수밖에 더 있어요.
이 미애는 알고 있어요. 경호씨의 그 지극한 사랑을 그 눈에서 볼 수 있어요. 천한 여인이라고 싫다면 그
것으로 족해요.
경호씨! 그렇게 스스로 억제하여 괴로워하지 말고 이 미애의 품에 안기세요.
그리고 저 푸른 하늘을 마음껏 비상하며 삶을 승화시켜요.싫다는 말 한 마디라도 있으면 차라리 단념하
겠어요.
일생, 경호씰 못 잊어 괴로울지라도 말예요. 안녕.
                                                  미애가
벌써 일 주일 전이다. 미애가 쉬는 날 미애의 청으로 하루를 소일했다.
돌아가는 길이었다. '호야의 집'이라는 조그마한 맥주집에 들려 좀 과하게 마셨다.
밤이 이슥해서 약국을 지나 미애의 창문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미애, 잘 자."
잡는 손을 놓고 몸을 돌렸다. 발이 좀 후들후들 했다. 미애가 뒤를 따라왔다.
"아니 통금 직전에 어딜 가랴는 거예요. 안 돼요."
손을 잡고 끌었다.
그 눈빛은 반드시 통금에 걸릴 것을 걱정해서만은 아니었다.
지그시 미애를 쳐다보았다. 눈이 빛났다. 승화를 갈구하는 여인의 눈동자, 입술이 바르르 웃었다. 하지만
그 빛은 아니었다.
"가야 한다. 지금 가야 하는 거야."
미애의 손을 뿌리치고 마구 뛰었다. 알콜 기운이 확 하고 온 몸에서 발산했다.
미안쩍해서 나간 '운하'에서 종이 쪽지를 놓고 갔다. 그것을 읽으면서 좀 찌릿했다.
미애! 미안하기는 해요. 하지만 그 눈빛은 없어요. 수없는 실비에 싸여 그 사연을 말하는 맑은 눈빛은 아
니잖아. 그것을 찾아야 해, 어딘가에 있을 그 빛을 찾아야 나의 삶이 승화되는 거야. 미애의 그 탄력은 매혹
하고 남지. 하지만, 그 빛은 없는 거야. 그때 맞은 편 벽에 걸린 액자의 추상화가 웃고 있었다.
창문을 빤히 쳐다보았다.
형광등의 불빛만이 훤할 뿐이다.
안 돼, 그 빛을 찾아야지, 그것을 찾아내야 돼. 왜 미애의 창문을 응시하는 거지, 미애! 미안해, 잘 자는
거야. 그리고 싫도록 미워하는 거예요. 다시는 사랑이니 뭐니 하는 대사도 집어치우고 오늘의 의미에서 그
빛을 찾아야 하는 거야.
발을 돌이켰다. 몸이 비틀했다. 정신이 아찔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힐 소리가 들려 온다고 생각했다.
따그닥 따그닥,
누구의 팔에 끌려갔다. 대문을 여는 삐걱하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 왔다.
"이것 놓지 못해, 건방지게 가는 길을 막는 거야."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불빛이 훤하게 비쳤다.
"어서 누세요. 이렇게 취해 가지곤 어딜 간다는 거예요."
놀란 미애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험한 계곡이었다. 골짜기에 물이 졸졸 흘렀다.
앞은 험한 등성이고 뒤는 녹음이 짙은 숲, 푸른 하늘이 곱게 물들어져 있었다. 숲 속에선 쓰르라미가 울
었다.
여울물을 건넜다. 돌을 밟으며 서서히 발길을 옮겼다.
앞에 우뚝 솟은 등성이 험상궂게 보였다.
저 산비탈을 올라 산정에 올라서야 했다. 그 위에 올라 지금까지 꿈꾸어 오던 그 보물을 찾아야 한다.
좀 비탈진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뒤에서 자꾸만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경호씨! 가면 안 돼요, 그 길은 위험해요!"
여인의 애끊는 울부짖음이었다. 애소하기도 하고, 또는 성칼진 목소리로 절규하기도 했다.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우거진 수풀에 녹음이 짙은 향기, 여인의 부름이 발길을 더디게
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앞으로 발길을 옮겼다.
가야 돼, 저 정상을 향하여 옆을 돌아보지 말고 가야 된다. 여인의 따스한 부름, 부드러운 손길, 더구나
미소를 띠워 방긋 웃는 입술…….
비탈길을 올랐다. 잡목으로 가리운 험한 길이었다. 잡목을 가린 풀을 헤치고 길을 더듬었다.
길가에 늘어선 잡목의 가지가 얼굴을 갈키었다. 가지를 헤치고 나가는 손등에 피가 번지기 시작했다.
"경호씨! 어서 돌아와요. 이제라도 발길을 돌려요. 알겠어요, 그 길은 위험해요. 그 산 위엔 절벽일 뿐예
요……."
길을 떠나기 전에 여인의 하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다. 산에 올라가기 위한 길은 버릴 수
는 없었다.
이번에는 험한 돌길이었다. 울툭불툭하게 돌이 산등성이를 덮고 있었다.
발을 함부로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돌이 미끄럽기도 하고, 또 모가 나기도 하여 도시 마음놓고 발을 디
딜 수가 없었다. 바닷가의 모래사장에 흩어져 있는 돌뿌리 같기도 하고, 또는 돌로 되어 있는 산 위에 여기
저기 돌이 흩어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조심해서 한 발자국씩 떼어놓았다. 어둔 길을 가듯이 발을 밀었다. 구두를 벗어 던졌다. 내미는 발바닥을
먼저 댄 다음에 몸의 중심을 옮겨 앞으로 나가는 행동을 반복했다.
갑자기 햇빛이 내리비쳤다. 돌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따뜻해지더니 점점 열기가 더해졌다. 뒤
를 돌아다보려다 멈추었다.
앞으로 발을 빨리 옮겼다. 두 주먹을 쥐고 힘껏 앞으로 달렸다. 하지만 자꾸 미끄러져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이마에서 땀이 비지기 시작했다. 발에서 피가 번졌다. 그래도 달렸다. 이를 물고 앞으로 내달았다. 온 몸
이 땀으로 목욕을 했다.
따가운 햇빛이 더욱 세게 내리비쳤다. 모든 물기가 금시 증발했다. 눈이 따가와졌다. 아팠다. 목이 말랐
다.
눈을 들었다. 산정이 푸른 하늘에 솟아 있다. 손짓을 하는 것만 같았다.
어서 힘을 내어 저 위에 올라가야 한다. 저 산, 저 산 위에 말야, 또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돌이 뜨거웠
다. 어느 새 햇빛에 반사되어 열기를 훅훅 내뿜었다.
숨이 가빠졌다. 갈증이 났다. 숨이 턱턱 막히고 발이 비틀거렸다. 누가 뒤에서 쫓는 것도 아니었다. 위에
선 햇빛이 내리비치고, 돌이 발을 헛딛게 하면서, 뜨거워지는 열기로 조이는 것이었다.
맥이 풀리기 시작했다. 목이 말라 더 이상 뛰어갈 수가 없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목이 콱콱 막히었다.
이마에서 땀이 비오듯 했다.
"물 물……물 좀……"
그 자리에 쓰러졌다.
목이 불탔다. 손을 들며 허우적거렸다.
"물……물……."
눈을 떴다. 희미한 빛이 보였다. 다시 눈을 두어 번 감았다. 방안이었다. 옷을 벗고 내의 바람으로 누워
있었다. 고개를 갸우둥 했다. 어딜까?
왼쪽 위에 창문이 보였다.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이마에 비지땀이 흐르고 있었다. 목이 탔다. 칼칼하게 목이 조여드는 것만 같다.
다시 눈을 감았다. 악몽이라고 생각했다. 그 광열은 지독한 것이라고 희미하게 꿈 속의 일을 생각했다.
머리가 팅하고 아팠다. 의식이 조금씩 되살아 왔다.
"물물……."
손을 가만히 내저었다. 닿는 것이 있었다. 스텐 그릇이었다. 액체가 있었다. 들어 마셨다. 달콤했다. 아마
설탕을 탄 물인 것 같았다.
다시 자리에 누웠다.
약국 앞은 지나서 빠져나갔을 텐데. 오싹 소름이 끼쳤다. 한기가 꽉 치틀었다. 술이 깨는 모양이다. 이불
을 덮었다. 촉감이 좋았다. 입에 넣자마자 녹아 들어가는 꿀과 같이 사르르 온몸을 감싸주었다.
쾌적한 기분이 감쌌다. 옆으로 몸을 돌렸다. 어깨에 얹은 팔을 폈다.
손에 닿는 게 있다. 탄력이 있다. 손으로 더듬어 봤다. 사르르 손바닥이 스쳐 갔다. 더 손을 저어 봤다.
탄력있는 육감, 여체였다.
눈을 감았다. 머리가 핑하고 돌았다. 몸을 돌렸다. 여체 옆으로 바짝 다가 누웠다. 이번에는 위쪽으로 손
을 더듬었다. 얼굴이 닿았다.
얼굴을 더듬어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한 손으로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의 짙은 향기가 뭉클하게 스
며 왔다.
침이 꿀꺽 넘어갔다. 온 몸에 갈증을 느꼈다.
머리에 볼을 댔다. 부드러운 촉감이 스쳤다. 그 감촉이 전신에 사르르 퍼져 갔다. 머리를 스쳐 눈매를 더
듬어 볼을 스쳤다.
여체가 꿈틀하고 움직이었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아래로 내려 어깨를 어루만졌다.
볼을 스친 얼굴은 귀를 지나 목덜미로 내려갔다. 어깨를 지난 손에 보드라운 감촉이 따끈하게 느껴졌다.
불룩한 잔등이 유방이었다. 살며시 손으로 눌렀다. 그리고 한 쪽 손으로 허리를 휘어감으며 입술을 더듬었
다.
"으…… 경호씨!"
여인이 잠에서 깬 모양이었다.
상반신을 가슴 위에 얹으며 지그시 눌렀다.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을 주면서 입술을 포갰다.
여인의 손이 낙지와 같이 허리를 휘어감았다. 뜨거운 열이 온 몸에 번져 여체가 난무하기 시작했다. 눈을
감으며 난무에 꿈속의 신비를 찾아 저돌하게 부딪쳐 갔다. 그 부딪침에 여체의 눈에 섬광이 발했다. 그 섬
광에 따라 신비의 심연으로 황홀하게 빠져 들어갔다.

다음날 또 역에 나갔다.
여객의 인파는 여전했다. 사연도 여러 가지이련만, 수없는 길손이 내리고 타고 떠나는 심장부이리라.
가스등이 은은하게 광장을 비치며 오고 가는 인파에게 미소를 보냈다.
시계탑은 벌써 9시를 넘고 있다.
출입구 쪽으로 갔다. 마침 도착한 차의 집찰이 끝나고 철문이 닫혀 있었다.
철조망 앞으로 갔다. 저 쪽 너머로 고가도로의 불빛이 찬란했다. 역을 지나가는 디젤과 고가도로를 질주
하는 차가 교차로를 이루는 셈이다.
차는 또 늦어지는 모양이다. 어제와 같은 열차, 마중 나온 사람들이 그득히 서 있다. 별로 같은 사람이
없다. 어제 오겠다는 사람들은 다 온 것일까. 혹 안 온 사람이 있어도 그대로 포기하고 다시는 나오질 않는
것일까.
모두가 서성거리며 끼리끼리 얘기를 하면서 플래트·홈 쪽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같이 나온 사람들보
다는 혼자 외로이 서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 누가 온다기에 이렇게 안타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기다리다가 목이 늘어졌다는 옛 동화의 풍경이라고나 할까. 얼굴이 다르고 신분도 가지각색이지만 꼭 한
군데가 닮은 데가 있다. 출입구를 쳐다보는 눈빛이다.
좀 적적했다. 주위를 살폈다. 그 아가씨의 그림자도 없다.
"지금 몇 시죠?"
앳된 여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머리를 곱게 빗은 여대생이 눈 앞에 서 있다. 얼굴이 곱살스럽고 코가 유난히 돋보였다.
이 쪽을 빤히 쳐다보았다. 옅게 화장한 눈매가 시원했다.
"차가 도착할 시간이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여대생은 그대로 선 채 빤히 쳐다보았다. 맑고 시원한 눈, 눈썹이 속삭이듯 곤두서
고 강한 눈빛이 압도해 왔다.
여객들이 밀려 왔다. 출입문이 열리고 집찰계원이 나왔다.
종착열에 닿은 착잡한 심회를 안고 밀려오는 여객들, 모두가 피로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희망에 넘치는
것 같았다.
나오는 사람들을 하나 하나 살펴봤다. 역시 오늘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상기된 얼굴을 하고 나올 모습
이 나타나지 않았다. 철조망 너머로 섬광과 같이 빛나는 눈초리를 하고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 나타나야 할
얼굴이 안 보이는 것이다.
좀 실망의 빛이 서렸다. 오한이 날 때와 같이 전신이 떨리는 듯했다. 허전한 심사가 감싸기 시작했다.
없는 거야, 그 빛은 없는 거야. 어디를 가거나 그 바시시 웃으며 용광로와 같이 불타는 그 눈빛은 없는
거야. 하지만 종착역인 서울역에서 내릴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저 수많은 인파 속에 없을 리 없다. 분명히
역 집찰구에서 손을 흔들고 바시시 웃으며 나올 것이 틀림없다.
어느 새 광장이 텅 비었다. 여객이나 마중 나온 사람들이 각기 흩어져 보금자리를 찾아갔으리라.
발길을 돌렸다. 저만치 그 여대생이 혼자 걸어가고 있었다. 아마 끝까지 기다리다가 돌아가는 모양이다.
그 뒷모습이 힘없어 보였다.
멀건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화라도 난 듯이 발길을 옮겼다.

화사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올해는 늦추위 때문에 꽃 소식이 늦게 온다는 보도에도 개나리가 피고, 벚꽃이 상춘객들을 불렀다.
또 며칠이 지났다.
매일같이 역에 나가 기다렸다. 좀 피곤했다.
다방 '운하'에 들렸다. 시간도 좀 이르고, 그날 밤 일이 머리에 떠올라 왠지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
다. 그 황홀한 불빛이 머리를 스쳐 갔다.
미애는 자리에 없었다. 잠간 외출했다고 했다.
자리에 앉았다.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미애를 오래 대하기 면구스러워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미애가
없으니 천천히 자리에 앉아 머리도 식힐 겸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이라도 바라보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아직 퇴근 때가 안 되어서인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홀에는 왈츠곡이 흘렀다. '백조의 호수'였다. 모처럼 듣는 멜로디였다. 마음이 가라앉는 듯했다. 하지만
그 맑고 섬광과 같이 빛나는 눈빛을 찾아야 한다. 푸른 하늘과 잡목 속에 덮여 반짝이던 그 빛을 다시 찾아
야 되는 거야. 그것을 찾지 않고는 아무래도 삶의 비약을 기대할 수 없는 거지, 승화를 할 수 없는 서야. 서
울역, 광장에 꾸역꾸역 나오는 수많은 인파에도 손을 흔들며 나오지 않는 거야, 아가씨나 여대생도 만나지
못한 거야. 어딘가에서 찾아올 거다….
"허선생은 무얼 그렇게 생각하세요. 좀 초췌하네요."
레지가 커피를 놓으면서 빤히 쳐다보았다. 안면이 있는 갸름한 여인이다.
"언니가 없어 허전한 모양이죠. 걱정 마세요, 곧 올 거예요."
의미 있는 미소를 던지고 카운터 쪽으로 갔다.
하지만 빛이 필요한 거야, 미애의 여체의 황홀보다 그 맑고 불타는 눈빛이 나를 연소시켜야 하는 거야.
목마르게 기다리는 그 빛을 찾는 데 삶이 싹트는 거야.
-경호씬 꿈을 꾸고 있는 거예요. 그 눈빛은 아무 곳에도 없어요. 자 보세요. 모두가 그 빛을 찾는다지만
다 허사가 아니에요.
미애의 음성이 허공에서 메아리쳤다.
남쪽 창이 다 막아져 실내는 밤같이 은은한 빛이었다.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어 고객을 유치하려는 장식
이리라.
도어가 열렸다.
인영(人影)이 실내에 미끄러져 들어왔다. 제법 균형이 잡혀 있다고 생각했다.
"언니! 왜 늦었수, 허선생이 와 계신데."
차를 가져온 레지였다.
"그래! 하두 마음이 답답해서."
좀 당황한 음성, 좀 안정을 잃은 모습이 탁자에 다가왔다.
말없이 의자에 앉았다.
"웬 일이예요."
좀 칼칼한 말투다. 원망과 그리움이 뒤섞인 감정일까! 좀 야윈 얼굴이었다.
미애의 얼굴을 더듬듯 시선이 위로 거슬러 올라갔다. 붉게 타오르는 입술, 솟은 코, 거슴츠레한 눈매, 눈
이 섬광과 같이 빛났다. 맑고 불타오르는 불빛을 토했다.
빛이다. 그 맑고 섬광과 같이 빛나는 눈빛! 가시네의 그것 같기도 했다.
가슴이 뭉클했다. 서서히 고개를 들던, 이름지을 수 없는 흥분이 딱 멎었다.
"미애! 가자, 여기를 나가 저 돌산의 정상으로 가자."
눈이 휘둥그래져 미애는 당황했다.
"무얼 머뭇거려, 어서 가잔 말야. 저 하늘 밑 따사한 곳으로 말야."
가슴속에서 불타오르는 섬광 같은 불길을 느끼면서 미애의 손을 잡고 '운하'의 도어를 밀었다.
아직도 해는 중천에 걸려 있었다.
<100인문학 1971.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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