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희 단편소설] 계단
윤성희 프로필
1973년 경기도 수원 출생
서울예술대학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단편 '레고로 만든 집' 발표
2008년 제32회 이상문학상 우수상 '어쩌면'
2007년 제14회 이수문학상 소설부문
대표작 - 유턴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 거기 당신, 레고로 만든 집
[윤성희 단편소설] 계단
버스는 몇 분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정류장에는 정장을 입은 중년 아주머니와 검은 고무줄로 머리를 묶은, 화장기가 전혀 없는 삼십대 초반의 여자가 있다. 그들에게서 두 발짝 정도 떨어진 거리에 쑥색 카디건을 입은 남자가 박카스를 손에 든 채 서 있다. 이놈의 동네, 이사를 가든지 해야지. 중년 여자가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남자는 들고 있던 박카스 한 모금 마셨다. 저 멀리 택시가 다가오자 중년 아주머니와 남자가 동시에 손을 번쩍 들었다. 택시는 정류장을 지나쳐 부동산 앞에 멈추었다. 택시 운전사가 차에서 내리더니 달려오는 남자를 향해 어깨를 으쓱하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는 택시 운전사가 부동산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들고 있던 박카스를 마저 마셨다.
택시 운전사는 미세요, 라고 적혀 있는 부동산 문을 잡아당겼다. 문은 콘크리트 바닥을 긁으면서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집을 내놓고 싶어서요. 운전사의 말에 부동산 중개인은 찌푸렸던 미간을 펴고는 냉장고 문을 열어 요구르트와 박카스를 꺼냈다. 어느 걸로 하시겠어요? 운전사는 요구르트를 집었다. 태양 연립 2동 504홉니다. 중개인은 책상 서랍에서 두툼한 공책을 꺼내 매매 태양연립 2동 504호, 라고 적었다. 그 위에는 매매 태양연립 2동 504호, 라고 적혀 있다.
부동산은 이 동네에서 삼십삼 년째 한곳을 지키고 있다. 중개인은 태양연립이 지어졌을 때를 기억했다. 원래 연립이 있던 터는 야트막한 산이었는데, 땅주인의 외아들이 태양건설이라는 회사를 차리고는 그 자리에 연립을 지었다. 나중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땅주인은 그곳에 건물이 들어서는 것을 한사코 반대했다고 한다. 거긴 내가 묻힐 땅이야. 술에 취하면 그렇게 말하곤 했다고, 그가 죽은 후에 사람들은 말했다. 땅주인이 죽은 것은 연립이 거의 다 지어졌을 무렵이었다. 아들은 유산으로 물려받은 논과 받을 팔아 옆 동네에도 태양연립을 짓기 시작했다. 태양 1차 연립, 태양 2차 연립……. 그렇게 번호를 붙인 걸로 보아서 3차 연립을 짓는 것이 꿈이었던 모양이지만,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태양건설의 사장은 세 번째로 지어질 태양연립 자리에서 음독 자살을 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태양연립은 급격하게 쇠락했다. 이름 때문인지, 태양이 내리쬐는 한낮이면 건물에나 잇는 가는 금까지도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새로운 집을 얻고 싶어요. 1층으로요. 운전사는 바지에 손바닥을 문지르며 말했다. 같은 태양연립이라면 더 좋고……. 중개인은 매물을 적은 공책을 넘기다 말고 운전사를 쳐다보았다. 오랫동안 부동산을 해왔지만 같은 연립으로 이사를 가겠다는 사람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중개인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오늘은 참 이상한 날이라는 생각을 했다. 태양연립 104호에 산다는 남자가 찾아온 것은 30분쯤 전이었다. 104호 남자는 지금 살고 있는 연립을 내놓았다. 1층만 아니면 된다고 했다. 태양연립은 이 년 동안 거의 거래가 없었다. 손님께서도 아시겠지만 태양연립은 워낙 시세가 없어요. 그걸 팔아서 근처에 다른 집을 얻을 수가……. 말을 하다 말고 중개인은 검지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볍게 톡톡, 쳤다. 맞아, 그 방법이 있었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중개인은 태양연립 104호에 사는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104호 남자는 타이레놀 두 알을 삼켰다. 동네 새마을금고에서 나누어주는, 날짜가 커다랗게 찍힌 달력은 아직도 2월이다. 2월 24에는 커다랗게 동그라미가 쳐 있다. 거실에는 가구가 별로 없는데도 다른 집의 거실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거실 가운데에는 커다란 탁자가 있고, 탁자 위에는 9번 버튼에 손톱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는 리모컨이 놓여 있다. 지난 이십 년 동안 어머니는 한결같이 거실에서 잠을 잤다. 어머니의 머리가 닿았던 곳의 벽지는 누렇게 색이 변했는데, 그 모양이 원자폭탄이 터졌을 때 만들어지는 버섯구름과 비슷했다.
그는 커튼을 살짝 들춰 밖을 내다보았다. 위층에 사는 할머니가 화단에 물을 주고 있었다. 위층 할머니는 겨울을 제외하고는 거의 일년 내내, 화단 주위에서 하루를 보냈다. 한여름이면 넝쿨장미가 3호와 4호 라인 입구에 멋진 그늘을 만들어주었고 위층 할머니는 그 아래 돗자리를 갈고 여름을 났다. 지겨워, 저 할망구.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면서 두꺼운 커튼을 치곤 했다.
어머니는 그때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할머니가 허리를 펴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커튼을 닫으면서 생각했다. 위층 집과 맞바꾸었으면 되었을 것을. 그러면 위층 할머니는 화단을 가꾸기 위해 어머니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어머니는 위층 할머니가 우리 집을 훔쳐본다는 피해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가장 많이 눈물을 흘린 사람은 이모였다. 그리고 그 이모만큼 눈물을 흘린 사람은 위층 할머니였다. 그는 위층 할머니의 눈물을 보고 적잖이 당황했었다. 그 눈물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어째서 혈육인 자신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리는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는 슬펐고, 그 슬픔이 자신을 단단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는 옆으로 누워서 자던 잠버릇을 버리고 천장을 쳐다보면서 잠을 자기 시작했다. 옆으로 누워 자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흐를까 봐.
부엌으로 가다 어머니의 돋보기를 밟았다. 돋보기의 한쪽 다리가 부러졌다. 그는 부러진 돋보기를 얼굴에 대고, 렌즈를 통해 부엌을 들여다보았다. 애당초, 이사는 아무 곳으로 가도 상관없잖아.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어머니 흔적이 묻어있는 이 집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는 버스 정류장에 있는 부동산으로 전화를 걸었다.
「네, 생각해 봤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504호 남자는 이를 닦다 말고 전화를 받았다. 정말입니까. 그렇게 말하고선 그는 입속에 남아 있는 치약을 삼켰다. 치약게서 소금맛이 느껴졌다. 화장실에는 소금 성분이 함유된 치약이 세 상자나 남아 있었다. 박스에는 기적의 미백 효과!라고 적혀 있을 것이다. 치약은 아내가 국민은행 앞에서 좌판을 펴놓고 팔던 것들이었다. 아내는 치약뿐 아니라 바퀴벌레 퇴치약도 같이 팔았는데, 그것들을 팔 적에는 반드시 흰 가운을 입었다. 그는 왜 흰 가운을 입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흰 가운을 입은 아내의 모습을 보는 것만은 좋아했다.
아내와는 바이킹이라는 놀이기구를 타다 만났다. 조카의 손에 이끌려 몇 개의 놀이기구를 탄 끝이라 그랬는지 바이킹을 타자마자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고, 결국 기구가 움직이자 앞에 앉은 여자의 머리에 낮에 먹은 햄버거를 토해 버리고 말았다. 여자가 머리를 감는 동안 그는 놀이동산의 마스코트가 커다랗게 새겨진 분홍색 티셔츠를 사왔다. 죄송합니다. 그는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를 했고, 여자는 티셔츠에 새겨진 활짝 웃는 마스코트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렇게 웃으라는 건가요. 화내지 말고. 그리고 몇 달 후, 그는 여자와 결혼을 했다.
아내는 최고급 소파를 사왔다. 칠 년 동안 모은 돈으로 그는 태양연립을 샀다. 그 돈이면 괜찮은 전세를 구할 수 있다고 했지만 그래도 내 집이 낫다 싶었기 때문이다. 먼저 살던 사람들은 정년 퇴임을 한 교장 부부였다. 계약한 날이 지나도록 이사를 가지 않아서 그의 속을 태우기도 했다. 아내가 사온 소파를 놓자 거실의 반이 줄어들었다. 아내는 집이 너무 작다고 투덜댔고, 그럴 때마다 그는 쓸데없이 소파는 왜 사왔느냐고 큰소리를 쳤다.
5층 베란다에 서서 그는 아내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내가 연립 입구에 있는 분식집을 지나쳐 ㄱ 자로 꺾어진 골목으로 간, 집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지진이라도 났나 싶어 주변을 둘러본 후에야 그는 집이 아니라 자신이 흔들리는 것임을 알았다. 마치 바이킹을 타고 있는 것처럼. 울렁거리는 증상은 1층으로 내려와야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는 이사를 갈 수가 없었다.. 아내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신의 발목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만약 아래층에 사는 사람이 집을 바꿔주기만 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난간을 붙잡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1층으로 내려와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104호 초인종을 눌렀다.
홍보부 차장은 두 번째 표지 시안이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제 생각에도 이게 제일 좋을 것 같습니다. 104호 남자는 두 번째 표지 시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세 갈래로 나누어진 길 가운데서 자동차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그림이었다. 그 위에 파란색으로 교통안전지도라고 씌어 있는데, 안전이라는 글자 위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좋습니다. 이걸로 하지요. 홍보부 차장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면서 그는 이 회사가 몇 번째 보험회사인지를 헤아렸다. 다섯 번째였다.
그가 회사에 입사했을 당시만 해도 사장은 보험회사와 단 한 건의 계약도 성사시키지 못했다. 지도를 만드는 회사에서 가장 확실한 영업은 보험회사에 지도를 납품하는 것이었다. 그는 국내 화재보험사의 이름을 적어 책상에 붙여놓았다. 처음 이 년 동안 그가 공략한 회사는 오 년째 순이익 1위, 고객만족도 1위를 차지한 보험회사였다. 그동안 사장이 실패한 이유는 하나였다. 사장은 매출이 가장 적은, 고객만족도 리스트에서 언제나 8,9위를 차지하는 회사와 접촉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가장 높이 매달려 있는 끈을 잡기만 한다면 그 아래에 있는 끈들은 쉽게 잡힐 것이라고 그는 사장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의 말처럼 국내 굴지의 보험회사와 계약을 하고 나자, 다른 보험회사와 계약을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단, 그는 언제나 간발의 차이로 2위를 달리고 있는 화재보험사는 찾아가지 않았다. 그것이 처음 계약을 해준 회사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는 회사로 돌아와 디자이너에게 두 번째 시안이 통과되었음을 알려주었다. 자리에 앉아서 커피 한잔을 마시려고 할 때 전화벨이 울렸다. 네 우길지도입니다. 사장은 우리 길에서 만나자, 라는 문장을 줄여 우길지도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우길지도라는 회사 이름이 웃길지도라도 이름으로 들려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곤 했다. 거기 지도 만드는 회사죠? 남자의 목소리는 이미 고조된 상태였다. S시 지도를 펴보세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전화기 저편에서 남자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왜, 말을 안해? 잠깐 기다려봐. 지도를 찾고 있나 보지. 그제서야 그는 남자가 왜 말을 안했는지를 알았다. 그러고는 네, 지도를 펼쳤습니다, 라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거기 우리 동네가 나오지 않아요. 오른쪽 가장자리에 주공아파트라고 보이죠. 그 옆이 우리 동네인데, 왜 지도에 안 나오는 거죠?
퇴근길에 그는 대형 쓰레기 봉투를 샀다. 안방은 잠겨 있었다. 그는 신발장을 열어 어머니가 신던 겨울 부츠에서 열쇠뭉치를 꺼냈다. 모니터를 비스듬하게 집어넣을 수 잇는 컴퓨터 책상과 인체 공학적으로 설계했다는 의자는 그의 방에 있는 것과 똑같았다. 컴퓨터의 파워 버튼을 눌렀다. 바탕화면에는 아홉 살 무렵의 그와 형이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이 깔려 있다. 형이 실종되었을 때, 어머니는 이 사진을 오려 전단지를 만들었다. 얼굴이 똑같은 쌍둥이였기 때문에 그의 사진을 써도 되었을 텐데, 어머니는 한사코 형의 오른쪽 턱이 어깨동무를 한 그의 손에 가려진 이 사진을 쓴다고 우렸다. 형은 사진 찍는 것을 싫어했다. 네 사진을 보면 되잖아. 형은 그렇게 말했었다. 그는 바탕화면에 있는 사진을 삭제했다.
장롱과 벽 사이에는 사람이 한 명 들어갈 정도의 공간이 있고, 거리에 야구글러브와 배트, 축구공, 농구공 같은 것들이 들어 있다. 그는 그것들을 쓰레기 봉투에 집어넣었다. 그가 축구공을 사오면 어머니는 그날로 똑같은 축구공을 사왔다. 책상 서랍을 빼서는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모조리 쓰레기 봉투에 넣었다. 한번도 쓰지 않은 색색의 펜들과 초등학교 삼 년 동안 빠짐없이 탓던 개근상과 우등상장이 버려졌다.
그는 옷장 위에 있는 상자를 내렸다. 상자 안에는 형이 사용했던 물건들이 들어 있다. 초등하교 4학년 1학기 교과서들. 작은 신발. 만화 주인공이 그려져 있는 둥근 딱지들. 그 틈에서 그는 말을 옮기는 다이아몬드 게임을 찾아냈다. 그 게임판에는 별 모양이 새겨져 있고 그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이 뚫려 있다. 모두 여섯 개의 삼각형이 있는데, 빨간색 삼각형에 빨간 색 말을 꽂고 노란색 삼각형에 노란색 말을 꽂아 반대편에 있는 똑같은 색 삼각형으로 누가 먼저 말을 옮기는지를 시합하는 게임이었다. 그는 형과 이 놀이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삼각형에 말을 꽂았다. 빨간색 말을 한 칸 움직이면서 말했다. 자, 이제 형이 할 차례야. 그는 초록색 말을 움직였다. 그는 몸을 오른쪽으로 틀었다. 그럼, 이제 엄마 차례. 그렇게 말하고는 노란색 말을 한 칸 앞으로 옮겼다. 쓰레기 봉투가 쓰러지더니 그 안에 있던 농구공과 축구공이 바닥으로 굴렀다. 축구공이 다이아몬드 게임판을 건드렸고, 초록색 말들이 몇 번 흔들리다가 쓰러졌다.
3층 세 번째 계단은 다른 계단보다 폭이 좋았다. 그 계단에 앉아서 504호 남자는 담배를 피웠다. 누군가도 여기에 앉아서 담배를 피웠는지, 계단 아래에 담배를 비벼 끈 흔적이 보였다. 갑자기 그는 자신이 앉아 있는 계단에 대한 알 수 없는 연민이 일었다. 예전에 그는 서로 치수가 다른 신발을 산 적이 있었다. 걸을 때마다 발이 불편했는데도 아무 의심없이 한 달이 넘도록 짝짝이 신발을 신고 다녔다. 짝이 다른 신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자, 이상하게도 그 신발이 한없이 안쓰럽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후로 그는 고장난 물건들을 보면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연민을 느끼곤 했다. 그는 누군가 낸 흔적 위에 담배를 비벼 껐다. 꽁초가 포물선을 그리며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는 얼마나 힘들여 올라가는가, 보다 얼마나 멋지게 떨어지는가, 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장롱을 열었다. 아내는 옷을 챙겨가지 않았다. 화장대에는 아내가 쓰던 화장품이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아내는 여행 가방 가득히 물건을 집어넣었다. 지퍼가 잘 잠기지 않는다고 그에게 소리를 지르기도 했었다. 그는 아내가 도대체 어떤 물건을 들고 갔는지 짐작 할 수가 없었다. 아내만 없어졌을 뿐 물건은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 그는 옷장을 뒤져, 예전에 놀이동산에서 아내에게 사주었던 분홍색 티셔츠를 찾았다. 활짝 웃던 마스코트의 얼굴이 희미하게 지워져 있다. 아내가 치약을 팔 때 입었던 흰 가운에서 락스 냄새가 어렴풋하게 났다. 그는 장롱에 난 흠집을 손으로 만지면서 어디서부터 짐을 정리해야 할지 생각했다.
그는 박스에 그릇들을 담기 시작했다. 밥그릇 아홉 개, 국그릇 아홉 개, 수저 아홉 벌, 크기가 다른 접시 열 개, 그는 그릇을 담다 말고 밥그릇과 국그릇을 다시 세었다. 역시 아홉 개 였다. 베란다에서 쌀자루를 찾아냈다. 아내의 신발은 하나같이 오른쪽만 굽이 닳아 있다. 그는 옷장에서 낡은 러닝셔츠를 꺼내 검지와 중지손가락에 감고는 신발을 닦았다. 그리고 닦은 구두를 차곡차곡 쌀자루에 넣었다. 부츠 안에서 흰색 봉투를 발견했다. 아내가 비상금을 숨겨두는 곳이었는지, 봉투 안에는 30만원이 넘는 돈이 들어있다.
그는 세 상자가 넘게 남은 바퀴벌레 퇴치약과 치약 상자를 택시에 실었다. 젊은 여자가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를 데리고 차에 탔다. 엄마 있잖아. 꼬마는 엄마의 귀를 잡아당기더니 무엇인가를 속삭였다. 그는 룸미러로 젊은 여자가 이를 드러내며 미소짓는 것을 훔쳐보았다. 그는 잔돈을 거슬러주면서, 바퀴버레 퇴치약과 치약을 젊은 여자에게 주었다. 이거 한번 써보세요. 돈 받는 거 아니니까 안심하시고요.
해가 저 멀리 보이는 고가다리 아래로 지고 있었다. 어! 조수석에 앉은 남자의 외마디에 그는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해를 쳐다보다 신호를 놓친 것이었다. 손님, 죄송합니다. 조수석에 앉은 남자는 콘솔박스 위에 붙여놓은 그의 아내 사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 남자는 안경을 벗었다 쓰면서 또 한번 어, 라고 중얼거렸다. 혹시, 손님 아는 사람입니까? 그는 고개를 돌려 남자를 쳐다보았다. 신호가 바뀌었는지 뒤에서 빠앙, 하고 경적을 울렸다. 아니에요. 누구와 좀 닮아서요. 아닌가? 사진 속의 아내는 유채꽃밭 가운데 서서 환하게 웃고 있다. 손님 중에서 아내의 사진을 보고 누군가와 닮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 남자가 처음이었다. 그는 비상등을 켜고 버스 정류장에 차를 세웠다. 자세히 봐주세요. 혹시 아는 사람인지. 남자는 시계를 쳐다보더니 입술을 침을 발랐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첫미팅을 했던 여자랑 닮아서요.
이사를 하기로 약속한 토요일 오후가 되었다. 104호 남자는 농에 있는 옷들을 거실로 옮겼다. 농은 오래된 자개농이었다. 어머니가 결혼을 하면서 혼수로 해온 것이었다. 농은 두 가지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나는, 결혼 혼수로 자개농을 해줄 만큼 어머니의 집이 부자였다는 것, 다른 하나는, 자개농이 들어갈 만큼 신혼집이 컸다는 것, 어쩌면 어머니는 이 두 가지 사실을 잊지 않으려 끝내 농을 버리지 않았는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태양연립으로 이사를 오기 전까지 서너 번의 이사를 다녔다. 이사를 할 적마다 집은 점점 작아졌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장롱을 버리지 않았다. 장롱에는 형이 열 살 무렵에 입던 옷들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그는 박스를 두 개 펴서, 하나에는 형이 입던 옷들을 다른 하나에는 어머니가 입던 옷들을 담았다. 504호에 사는 남자에게 전화가 왔다. 우리 쪽 장롱부터 내릴까요. 그는 좋다고, 곧 올라가겠다고 했다.
504호 남자는 무릎이 툭 튀어나온 황토색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소파 아래에는 장롱 서랍이 쌓여 있는데, 속옷 따위가 들어 있는지 신문지로 덮여 있었다. 504호 남자와 그는 농 아래에 손을 집어넣고는 천천히 당겼다. 농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젊다는 이유로 그가 앞에서, 504호 남자가 뒤에서 농을 들었다. 1층으로 내려오는 동안 그들은 세 번을 쉬어야 했다.
어, 이거 언제 그랬지. 그는 농을 1층 거실에 내려놓은 다음에야 흠집이 생긴 것을 알았다. 농에 난 흠집을 검지손가락으로 만지면서 그는 504호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괜찮아요. 원래 그랬어요. 504호 남자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자개농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거실에서 티셔츠 몇 장을 가져와 바닥에 깔았다. 들지 말고 밀어보죠. 어쨌든 현관까지만 가면 되니까. 현관까지? 그의 말에 504호 남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농은 버릴 거예요. 보세요. 너무 오래 됐잖아요. 그는 농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504호 남자가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잠깐만 기다리죠. 그는 벽에 쌓아놓은 박스 중에서 하나를 내려 504호 남자에게 앉으라고 권했다. 그런데 왜 1층이 싫다는 겁니까? 504호 남자가 물었다. 그는 거실에 걸려 있는 커튼을 보았다. 어머니는 일년 내내 커튼을 치고 살았고, 커튼보다 더 두꺼운 막을 당신 가슴에 치고 살았다. 집은 수면제 같았다. 거실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까닭 없이 졸음이 밀려왔다. 옷을 홀라당 벗고 있게요. 5층에 살면 옷을 벗고 있어도 밖에서 안 보일 거 아니에요? 그의 말이 놀라웠는지 504호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쳐다보았다.
중고가구매매라고 새겨진 트럭을 몰고 두 명의 인부가 왔다. 그중 한 명이 504호 남자에게 인사를 했다. 이런 농은 취급 안 하는데……. 504호 남자에게 인사를 했던 인부가 장롱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중얼거렸다. 다른 인부가 방에 불을 켰다. 형광등이 두어 번 깜빡거리다가 꺼졌다. 그는 거실의 불빛이 안방으로 들어가도록 문에서 한 걸음 비켜섰다. 504호 남자는 장롱을 가져가지 않을 거라면, 밖으로라도 옮겨달라고 인부들에게 부탁했다. 자개장은 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인부들은 창문을 뜯어내고 창밖으로 농을 날랐다.
농에는 다양한 그림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는 특히 이불을 넣는 쪽 문에 새겨진 그림을 좋아했다. 뒤로는 낮은 산들이 여러 겹으로 어깨를 기대고 있다. 저마다 높이가 조금씩 다른 산들 가운데서 물줄기가 뻗어나와 아래로 흘렀다. 물줄기를 따라 머리를 감는 여인, 빨래를 하는 아낙, 유유자적 노를 젓고 있는 사공, 삿갓을 쓰고 낚시를 하는 사람이 모여 있다. 그는 물줄기에 기대어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낚시를 하는 사람을, 낚시하는 사람을 발견한 건 형이었다. 이상하지 않니. 이 사람. 형은 빨래를 하는 아낙들 틈에 앉아 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낚시를 하는데 왜 하필이면 이렇게 시끌벅적한 사람들 틈에 앉아 있을까?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고, 빨래를 하는 사람들 틈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 그는 낚싯대를 손가락으로 만졌다. 낚싯대를 새긴 자개는 주변의 다른 것들보다 훨씬 은은한 색을 띠고 있다.
그는 5층으로 어머니 옷을 담은 상자를 날랐다. 계단 중간에서 화장품을 담은 플라스틱 그릇을 들고 내려오는 504호 남자와 마주쳤다. 504호 남자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지나쳤다. 혹시, 컴퓨터 있으세요. 그는 과장되게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만약 컴퓨터가 없다면 제가 하나 드릴게요. 그는 들고 간 상자를 5층 안방에 내려놓고, 504호 남자의 장롱 서랍을 들었다. 계단 중간에서 그는 형의 옷들을 담은 상자를 들고 올라오는 504호 남자를 만났다. 저기……. 그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형의 옷들을 버릴 것인지, 어머니의 옷들과 같이 태울 것인지 아직 결정을 못한 것이다. 504호 남자가 상자를 계단에 내려놓더니, 그가 들고 있는 서랍을 달라는 손짓을 했다. 그는 심술궂은 표정으로 504호 남자의 엉덩이를 툭, 쳤다.
베란다에 서서 그는 연립 입구에 서 있는 교회 버스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는 아주머니를 보았다. 그는 아침이면 베란다에 서서 동네 사람들의 아침 풍경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점에서 5층은 딱 적당했다. 사람들의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아서 좋았고, 그러면서도 그들이 하는 행동이 한눈에 들어와서 좋았다. 오늘 아침으로 이 베란다와도 이별이군. 그는 베란다의 난간을 꽉 잡았다. 차가운 기운이 몸으로 퍼졌고 그는 재채기를 했다.
104호 남자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몇 번이나 전화벨이 울려도 받지 않았다. 그는 신발을 담은 쌀자루를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104호 남자는 짐이 별로 없었다. 안방에 쌓아놓은 상자 몇 개가 전부였다. 상자에는 알 수 없는 글씨들이 적혀 있었다. 어머니, 태, 버. 형, 태. 형, 버. 형, ?. 글자들은 어서 이 암호들을 해독해 봐, 라고 그에게 속삭이는 듯했다. 아래층 남자의 짐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어제 농과 화장대와 침대를 나르면서 그는 괜히 미안했었다.
신발 자루를 104호 문 옆에 두고 다시 올라가 집들이를 할 때 딱 한번 썼던 상을 가지고 내려왔다. 아마, 상은 한쪽 다리가 삐걱거릴 것이다. 상을 산 날, 그는 조수석에서 3만 원을 주웠다. 그 돈으로 무엇을 할까 궁리를 하던 중에 좌판에 펼쳐놓은 상이 눈에 들어왔다. 다리가 삐걱거리는 것을 안 다음 물건을 바꾸러 갔지만 좌판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상을 내려놓고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려다 그는 멈칫했다. 104호 문 옆에 두었던 신발자루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104호 초인종을 눌렀다.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문을 두드렸다. 벌써 오셨어요. 그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104호 남자는 근처 해장국집에서 아침을 먹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신발이 없어졌다고요? 잠깐만 있어 봐요. 그렇게 말한 다음, 104호 남자는 한참 후에 돌아왔다. 헉, 헉. 아무도 못 봤다는데요. 자루를 짊어지고 가는 사람은.
1층 작은방에 있던 농이 5층 작은방에 맞질 않았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공간이 모자랐다. 같은 라인에 있는 집인데 왜 크기가 다르죠? 104호 남자는 천장을 쳐다보고는, 독백 같은 질문을 허공에다 했다. 농을 가로로 놓으면 침대가 들어갈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그냥 안방에서 자요. 큰방 놔두고 왜 작은방을 고집해. 그는 어떻게 하면 침대를 넣을 수 있는지를 궁리하고 있는 104호 남자에게 말했다. 104호 남자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눈 하나는 깨끗하군.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도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104로 남자의 침대에 누워 몸을 흔들었다.
그릇을 나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다른 상자들과 달리, 그릇이 담긴 상자들은 무게가 있어서 둘이 들어야 했다. 저, 형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104호 남자가 계단을 내려가면서 말했다. 나이가 어떻게 되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104호 남자의 나이를 짐작해 보았다. 많아야 스물 여섯?
「올해 서른이요. 형님은?」
「어! 서른이야? 난 서른셋인데」
「에이, 그럼 그냥 형이네」
104호 남자는 무릎을 들어 상자를 받치고는 오른쪽 팔을 털면서 말햇다.
「내가 좀 늙어 보이지」
그도 무릎을 들어 상자를 받치고는 오른쪽 팔을 털었다.
1층 거실에 앉아 자장면을 먹었다. 음식값은 내가 낸다. 그는 단무지를 씹으면서 말했다. 104호 남자의 그릇에는 반 저도 씹다 만, 반달 모양의 단무지가 세 개나 들어 있었다. 아니에요. 내가 낼게요. 그렇게 말하면서 104호 남자는 새 단무지를 집었다. 그가 젓가락으로 그릇에 있는 씹다 만 단무지를 가리키자, 104호 남자는 집던 단무지를 내려놓았다. 그는 깔고 앉은 티셔츠를 보았다. 모자가 달린 회색 티셔츠였다. 104호 남자는 그것과 똑같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똑같은 옷이 두 갠가 봐. 그의 말에, 104호 남자는 자장면을 씹지도 않고 꿀꺽 삼켰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침이 꿀꺽 삼켜졌다.
저기 있잖아……. 둘이 동시에 말을 했다. 너부터 해. 아니 형부터 해요. 서로 몇 번씩 양보를 한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냉장고를 꼭 옮겨야 하니, 괜찮다면 당부간 그냥 바꿔 쓰자. 냉장고는 아내가 혼수로 사온 것이었다. 하지만 아내가 돌아온 다음에, 그때 바꾸자고 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104호 남자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 악수해요. 형. 텔레파시가 통했다. 방금 내가 하려던 말이 그거였어요」
504호 남자는 소파를 가져가지 않았다. 니가 쓰려면 써라. 그냥 가지기 싫으면, 컴퓨터랑 바꾼 걸로 하든지. 그렇게 말할 때 504호 남자의 검은 눈동자가 깊어졌다. 그 눈빛을 보면서 그는 504호 남자가 언젠가는 소파를 찾으러 올 것이라고, 그 전까지 잠시 맡아두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벽지는 깨끗했다. 아마 도배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그는 어머니의 머리가 닿아서 누렇게 변해 버린 104호 거실을 떠올렸다. 그 자리를 가리는 데는 소파만큼 좋은 게 없으리라. 그는 소파에 앉아서 건너편 동에 불이 꺼지는 것을 보았다. 저 집이면 3동 306호겠지. 저기는 3동 402호겠지. 그런 것들을 헤아리는 동안, 단 한 집만 빼고는 3동 전체가 불이 꺼졌다. 갑자기 불이 켜져 있는 그 집이 궁금해졌다. 1층에 살 적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그들이 오늘 저녁 반찬으로 무얼 해먹었는지, 지금가지 자지 않고 무얼 하고 있는지, 이런 것들이 궁금해지기는 처음이었다.
504호 남자, 아니 이제는 104호로 이사를 간 남자에게 전화가 왔다. 불을 껐는데, 천장에서 뭔가가 빛나네.
형, 생일이 언제야? 그는 웃으면서 물었다. 천장에 야광별을 붙였던 것이다.
「3월 5일인데, 왜」
「양력? 음력?」
「양력」
「형도 물고기자리네. 그럼 그냥 놔둬요. 그거 물고기자리니까」
소파 사이에 시계가 끼어 있었다. 시계는 한시 오분에 멈추어 있었다. 일요일을 빼고, 그는 한시 오분이면 늘 커피를 마셨다. 그는 한시 오분, 이라고 소리 내어 발음해 보았다. 그러자 자신의 삶 중에서 한시 오분이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안방에 들어가 어머니, 태. 라고 적은 상자를 열었다. 거기에는 태울 어머니 옷들이 들어 있다. 분명히 옷 사이에다 넣어두었는데 어머니의 유골 상자가 보이질 않았다. 그는 다시 어머니, 버.라고 적은 상자를 열었다. 거기에는 버릴 어머니의 물건들이 뒤죽박죽으로 담겨 있다. 그 안에서 그는 어머니의 유골 상자를 찾았다. 그는 상자를 들고 베란다로 갔다. 봄인데도 베란다는 쌀쌀했다. 여긴 너무 추워. 그는 상자를 들고 작은방으로 갔다. 아니야, 나와 같이 잘 수는 없어. 어머니는 언젠가는 형이 돌아와, 당신의 유골을 뿌려주길 원했다. 그는 싱크대 찬장을 열고 그 안에 상자를 두었다. 요리하는 것을 좋아했던 분이니까. 부엌에 잇는 것이 가장 마음 편하실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을 위로했다. 그러고는 서랍에서 타이레놀 두 알을 꺼내 물도 없이 삼켰다.
그는 티셔츠를 벗고 러닝셔츠도 벗었다. 맨살이 가죽 소파에 닿는 느낌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5층으로 이사를 왔으니 이제 커튼 같은 것은 절대 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오른쪽으로 누워봤다가 왼쪽으로도 누워봤다. 거실에 소파가 있어도, 가구가 없던 1층보다 훨씬 넓어 보였다. 그는 바지도 벗었다. 재채기가 났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소파에 달라붙어 있던 살이 떨어지면서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천장에 붙어 있던 야광별은 몇 분이 지나자 저절로 사라졌다. 그는 침대에서 내려와 쪼그려뛰기를 백 번했다. 그래도 잠은 오지 않았다. 다시 팔굽혀펴기를 삼십 번했다. 뒤꿈치를 세게 내딛으며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는 아주 느려, 한발 디디고 또 다른 한 발을 디딜 때까지의 간격이 꽤 되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느린 발소리에 하루의 피곤이 섞여 있는 것 같았고, 그 피곤이 자신에게 전해지는 것 같았다. 누구의 발소리일까? 그는 궁금해졌다. 203호에 사는 여자? 아니면 404호에 사는 수험생? 이대로 일주일쯤 보낸다면 3,4호 라인에 사는 사람들의 발소리를 익힐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햇다. 시계 초침 소기가 저벅저벅, 하고 누군가의 발소리처럼 들렸다.
새벽녘에, 물을 마시러 부엌으로 가다가 그는 다시 몸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지진이 났나 싶어 문지방을 딛고는 한참동안 몸을 웅크리다가, 흔들리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자신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벽지에 나 있는 누런 얼룩을 보았다. 그는 그 아래 베개를 두 개 쌓아놓고는 비스듬히 누웠다. 그의 머리가 벽지에 나 잇는 얼룩에 닿았다. 먼저 살던 104호 남자는 이렇게 누워서 텔레비전을 본 모양이었다. 귀퉁이에 몸이 적당히 파묻히는 게,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기에는 적당한 자리였다. 그는 리모컨을 눌렀다. 건전지가 없는지 텔레비전은 켜지지 않았다. 소파를 없앴건만 그래도 거실은 좁아 보였다.
그는 504호 초인종을 눌렀다. 잠을 안 자고 있었는지 금방 누구세요, 라는 소리가 들렸다. 놀이동산엘 가자고, 가서 바이킹만 한번 타면 모든 것이 좋아질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놀이동산에 가는 동안 짙은 안개를 만났다. 우와, 마치 구름 속을 뚫고 지나가는 것 같아요. 새롭게 504호 주인이 된 남자는 과자를 먹으며 계속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렸다.
안개가 걷히면서 놀이동산 입구에 심어놓은 가로수들이 서서히 보이지 시작했다. 먼저 나무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보이고, 그 다음으로 굵은 가지들이 보이고, 그 다음으로 잔가지들과 풍성하게 솟아난 푸른 잎들이 보였다. 주차장에 차를 세울 때쯤 안개가 말끔하게 걷혔다. 그는 놀이동산을 감싸고 있는 산자락을 보았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풍경들은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것 같았다. 만지기만 해도 손자국이 날 것같이 여린 잎들이 달려 있는 나무들도 자신만을 위해 곷을 피우는 것 같았다. 주차장에는 차자 한 대도 없었다. 그는 차를 주차장 한 가운데 주차 시켰다.
놀이동산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504호 남자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왔다. 택시 안에는 우길지도에서 만드는 지도책이 있었다. 나한테 지도책이 세 권 있는데, 오직 이 책에만 태양연립이 나와 있어. 그는 지도에서 태양연립을 찾아서 504호 남자에게 보여주면서 말했다.
「형, 국도가 몇 번까지 있는지 알아요? 56번까지 있어요. 난 그 길을 모두 달려보고 싶어요」
그는 504호 남자를 운전석에 태웠다. 택시는 계속해서 주차장을 빙글빙글 돌았다. 뒤로도 갔다가 앞으로도 갔다가, 주차선 안에 반듯하게 차대는 것을 연습하기도 했다가, 다시 주차장을 한바퀴 돌았다. 멀리서 보면 택시는 운전학원의 연습용 차량 같았다.
첫 번째로 입장하는 고객이라며, 그들은 우스꽝스러운 안경을 사은품으로 받았다. 알이 커다란 노란색 선글라스였는데, 뿔테에 놀이동산의 마스코트가 달려 있었다. 그는 504호 남자를 보고 웃었다. 그들은 바이킹을 타러 갔다. 바이킹 이쪽 편에 그가, 반대편에 504호 남자가 탔다. 손님은 단 두 사람이었다. 커다란 배가, 출렁이는 바다를 가르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