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밖에서 / 이혜경
<문 밖에서> / 이혜경
무엇에든지 이름 붙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이 장면을 본다면 뭐라고 할까. L을 찾는 사람들, L찾사? L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 L생모? 한때 L의 직장 동료였던 S, L의 고교동창인 P, P의 대학 후배인 U, L의 대학 후배인 K… 이들을 모이게 한 건 이 자리에 없는 L이다. 이 자리에 나오기 위해 누군가는 멀쩡한 위장에 염증을 선사해 직장에서 빠져나왔고, 누군가는 아이를 맡아준 시간보다 생색내는 시간이 더 긴 앞집 여자에게 아이를 부탁했다.
공기청정기를 가동하고 아로마향을 내뿜는 널찍한 카페 실내엔 뉴에이지풍의 음악이 청량하다. 애써 그 음악에 마음을 팔려 해보지만, 자리에 앉은 뒤부터 묵지근해진 S의 어깨는 가벼워지지 않는다. 언젠가 꼭 한번 이런 자리에 있었던 적이 있다. 시계바늘이 숫자판 위에서 한없이 굼뜨게 움직이는 것만 같던 때가. 언제더라… 기억은 떠오를 듯 떠오를 듯 머릿속을 간질이며 감질나게 한다.
혹시나 하고 받은 소개팅에서 취향이 전혀 다른 남자와 앉아 있던 때? 남자는 한다면 하는 성품이었다. 새벽등산을 하기로 마음먹은 날 등산화를 처음 산 남자는 다음날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 다섯 시에 산에 올랐다가 출근한다고 했다. 남자의 철저함이야 본받을 만한 일이었다. 남자는 S가 별다른 취미도 없이 직장과 집을 오가며 시간을 보낸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인생은 그렇게 사는 게 아닙니다. 길이 없으면 스스로 길을 열어가야지요. 지금 S씨에게 가장 필요한 건 직업상의 일말고 열정을 느낄 수 있는 다른 일을 갖는 것입니다. 퇴근한 뒤에 학원 같은 곳에 다녀보는 건 어떨까요? 야근이 잦다구요? 야근도 하나의 습관이지요. 늦게까지 일할 거니까, 하고 있으면 낮 근무 시간에 아무래도 해이해지지 않던가요? 남자의 말은 그른 데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더 버거웠다. S를 위한 프로그램을 짜서 내밀고, S가 제대로 실행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다음 만남을 기약할 수 있을 것 같은 남자였다.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어서 들썩이는 엉덩이를 눌러앉히느라 어깨가 딱딱하게 뭉쳤다. '우리, 그만 일어날까?' 쑥 빠져나오려는 말을 자금거리다 혀끝을 깨무는 순간, 가물거리던 기억이 선명해진다..
꽉 감은 눈이 저절로 뜨일 것만 같다. 눈시울에 힘을 주자 감은 눈 안쪽에 빛의 막 같은 게 어른거린다. 몸이 자꾸만 앞으로 쏠리는 듯해서 꼬리뼈 쪽에 힘을 준다. 저릿거리던 팔엔 아예 감각이 없고 신경은 끊어질 것처럼 팽팽하다. 몸이 앞으로 쏠리면서 책상 아래로 우당탕 고꾸라질 것만 같다. 누군가의 잇새에서 한숨 같은 신음소리가 비어져나온다. 누구얏, 소리 내는 사람! 담임의 고함소리가 긴장을 찢는다. 아무리 엄살 부려봐야 소용없어. 범인이 자백하기 전엔 집에 돌아갈 꿈도 꾸지 마! 쳐든 팔이 자기의지와 상관 없이 아래로 처지고 몸이 구르는 게 아닌가 싶은 고비를 넘기자, 누군지 모를 범인에 대한 미움도 어느결에 가뭇없어지고 내가 나도 모르는 새에 급우의 등록금에 손을 댄 게 아닐까 하는 의혹이 하얗게 빈 머릿속에 떠올랐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체벌을 견디던 그때의 막막함, 돈을 훔친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안 끝내겠다는 담임의 의지가 바윗덩이처럼 누르던 교실안. 하긴 분실사건이라면 분실사건이긴 했다. 없어진 게 돈이나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만 다를 뿐.
"L에게 무슨 일 있어? 메시지 남겨도 연락 없네. 휴대폰도 꺼져 있고."
P의 목소리에는 전화기로도 쉬 감지할 수 있는 염려가 깔려 있었다. 직장일만으로도 늘 허둥거리는 S와 달리, 주변 사람에게 두루 관심을 쏟는 P의 에너지는 언제 보아도 감탄할 만했다.
"나도 연락했는데 안 되더라. 마감할 게 밀렸다니까 일하고 있든가, 아니면 일 마치고 며칠 바람 쐬러 갔든가 그랬을거야."
S가 L과 통화한 건 열흘쯤 전이었다. 휴대폰은 꺼져 있었고 집의 전화는 자동응답기가 작동중이었다. S는 메시지를 남겼다. L아, 나야. 이번 주 마감이라더니 너 아직 마감 못했나 보구나. 일 끝내면 전화해 줘. 안녕.
L이 응답이 없자 어쩌면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L에게는 제가 아플 때면 전화를 안 받는 버릇이 있었다. 며칠 동안 소식 없다 만나면, 전보다 맑은 기운이 감도는 L의 얼굴, 입가나 코 언저리에 부르튼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플 땐 연락 좀 하지 그랬니… S가 미안함 반 서운함 반으로 말하면 L은 대답했다. 미안해. 하지만 정말 아플 땐 혼자 앓는 게 가장 편해서 그래.
일을 마치고 잠깐 여행을 떠났을 수도 있었다. 돈 대신 시간을 누릴래. 직장을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일하기 시작한 뒤, L은 혼자 떠난 여행지에서 이따금 전화를 걸어왔다. "S니? 지금 통화할 수 있어? 그럼 들어볼래?" L의 목소리가 사라지면 잠깐 정적이 이어진 뒤 뎅, 데엥, 범종소리가 밀려들었다. 그 소리는 일에 휘둘리느라 뜨겁게 달아올랐던 S의 머릿속을 비우고, 그 빈 공간으로 소쇄한 기운을 물살처럼 흘려넣었다. 때로는 산새 울음소리거나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이기도 했다.
"그렇구나. L 걔, 집 떠날 때 너한테도 안 알리고 가는구나. 난 L이 너랑은 친한 줄 알았는데…"
P는 말끝을 흐렸다. S는 벙벙해졌다. 이따금 훌쩍 여행을 떠나는 L의 버릇을 우정의 밀도와 연관지어 본 적이 없었다.
L을 처음 만난 20대 초반, 그때 S는 늙수그레한 사장이 편집장을 겸하는 작은 출판사의 유일한 편집부 직원이었다. 열차 안같이 좁고 긴 편집실 양쪽 벽면, 짙은 밤색 책장을 빽빽하게 채운 책에서 나는 묵은 냄새에 절어, S의 젊음은 지린내 나는 물에 젖은 책갈피처럼 희치희치했다.
자전소설인 듯한 두툼한 소설 원고가 들어왔을 때 사장이 데려온 아르바이트생이 L이었다. 필자가 사장과 인척이라서 어쩔 수 없이 내는 책이었다. 피해의식에 짓눌려 세상 누구도 못 믿는 주인공의 망상과 집요함. 원고를 설렁설렁 넘기며 검토하다가 머리가 지끈거렸던 S는 교정을 보는 L에게 "어때요?" 하고 물었다. "[광인일기]가 생각나는데요." "루신 말이에요?" 설마, 하면서 S는 말끝을 올렸다. 편집증 환자일 아마추어가 쓴 소설에 루신이라니. "원고 총량이 삼천매잖아요. 압축하면서 이천구백매를 쳐내면 그 비슷한 단편 하나 나오지 않을까요?"
정색을 하고 듣던 S는 파슬파슬 웃었다. '2천9백매 쳐낸 광인일기'라니. 잠자리에 누워서도 웃음이 비어졌다. 자기가 웃음에 굶주려 있었다는 것을 S는 그때 깨달았다. L은 어느결에 시드럭부드럭해진 S의 감수성에 물을 주고 볕을 쪼였다.
경리 아가씨의 이름을 찾아준 사람도 L이었다. "미스 정은 왜 미스 정이에요?" 어느날 L이 뜬금없이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데요?" "다들 나는 L씨라 부르면서 미스 정은 미스 정이라고 하잖아요. 나이도 거의 비슷한데…" 사장이나 영업부장이 부르는 대로 무심코 따라 불렀던 S는 아차, 싶었다. S가 성을 뺀 이름을 부르자, 그동안 호칭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던 미스 정의 얼굴에 환한 빛살이 여울여울했다. L은 S의 사무실에서 몇 달밖에 안 머물렀지만, 같은 업종에서 일하면서 십여 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렇다고 믿어왔다. P와의 짧은 통화는 그 믿음의 뿌리에 묻은, 독성 강한 제초제 같았다. "그럼 L이 요즘 무슨 일로 고민하는지도 말 안했겠네?"
"왜, L에게 무슨 일 있어?"
"아니, 무슨 일이라기보다는… 아무튼 만나자. 만나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회오리바람에 휘말려 허공을 뱅뱅 돌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면 이럴까. 뭔가에 얻어맞아 멍이 들긴 했는데 정작 후려친 것이 무언지 모를 때의 느낌. 의혹의 뭉게구름이 뭉글뭉글 일어 S를 덮었다.
P는 조금 남은 채 식어버린 커피를 마저 마시려 커피잔을 든다. 잔을 입에 대었다 떼어내며 잔 안쪽을 들여다보는 P의 가느다란 손에 낀 반지와 귀걸이에서 투명한 보석이 반짝 빛난다. 진품이 아닌 걸 몸에 다느니 아예 아무것도 안하겠다는 P니까 모조품일 리 없다. 영롱하게 반짝이는 작은 돌이 얹힌 손을 들어 이맛전을 누른 P가 입을 연다.
"이게 뭐니? 예정대로라면 우린 지금 생일 파티를 열고 있을텐데. U, 너 L에게 날짜 분명히 말했지?"
"물론이지. 우리가 파티를 열 거라는 건 미리 말했고, 날짜는 메모로 두 번이나 남겼어."
"그나저나 L 선배에게 별일이나 없었으면 좋겠다."
"이러고 앉아 시간만 낭비할 게 아니라, 우선 L 주변인물부터 챙겨봐야 하는 거 아닐까. 혹시 우리가 모르는 사람에게서 소식을 들을 수도 있잖아."
"선배도. L선배 주변 인물이면 바로 여기 모인 우리잖아?"
U의 재치있는 대꾸에 맞아, 그러네, 하면서 웃음이 번진다. 그들은 한 줄에 꿰인 구슬처럼 결속되어 있음을 다시금 깨닫는다. 흩어져 있던 구슬을 꿴 실, P의 존재도 새삼스러워진다.
대개 한 다리 거쳐 알음알음으로 만나거나 이름만 듣던 30대 여자들이 한자리에 모이기 시작한 건 P의 급작스러운 성공 때문이었다. 평범한 독신 디자이너이던 P가 벤처 기업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스톡옵션을 받았고 P가 디자인한 제품이 동남아에서 불티나게 팔린다는 소식을 S도 들었다. 사석에서 몇 번인가 만나 이야기를 나눈 사람을 여성지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팔짱을 끼고 선 채 활짝 웃는 P는 성공에 따른 자신감으로 한결 당당하고 세련되어 보였다.
P가 자축하는 뜻으로 준비한 저녁식사에 자기도 초대받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S는 조금 어리둥절했다. 그때까지, 중간에 낀 L이 없다면 몇 년이 가도 서로 연락할 일은 없는 사이였던 것이다.
"바쁘다는 이야기 들었어요. 그래도 꼭 와줬으면 좋겠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상하게 좋은 일을 축하하는 데엔 인색하더라구요."
P가 직접 전화를 걸어 그렇게 말하자, S도 더는 사양할 수 없었다. 평범한 월급쟁이에서 주목받는 사람이 된 기분이 궁금하기도 했다.
격식을 안 갖춘 여자들만의 모임이려니 하고 들어선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들을 맞은 건 잡지의 요리 화보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상차림이었다. 풀 먹인 냅킨을 깐 바구니에 담긴 빵, 얼음통에 재운 와인이며 샴페인. 샐러드 소스만도 세 가지였다. 세상에, 이걸 직접 준비했어? 동서양에 육해공을 총망라했네. 누군가의 치하에 P는 겸손하게 대답했다. 무슨, 내가 한 일이라고는 와인을 얼음에 재운 것뿐야. 나머진 출장요리사가 했지.
큰마음 먹고 호사스러운 물건이나 옷 한 벌을 장만하면 다음달 카드대금이 나오기도 전에 후회하게 되는 그들과 비슷한 처지였다가 출장요리사를 부를 수 있게 된 P의 성공이 그들을 고무했다. 상대적인 결핍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자기도 다른 삶을 거머쥘 수 있는 건 아닌가 희망이 솟기도 했다.
"이렇게 모인 것도 인연인데, 여기 모인 우리 여성 동지들이 가끔 이런 식으로 모이면 어떨까?" 후식으로 나온 과일을 권하면서 P가 말했다. '이런 식의 모임'이라는 게 단순히 가끔 모여 얼굴을 보자는 말인지, 아니면 이렇게 데억지게 상을 차려내는 걸 뜻하는 건지 애매했다. 선뜻 호응하는 사람이 없자 P가 물었다. "U, 넌 어떻게 생각해?""할 수만 있으면 좋겠지." "그럼 U는 찬성이고? K 너는?" 은성한 초대를 받고 나서 그 주최자가 다음 모임을 기약하자는데 반대한다는 건, 판돈을 딴 노름판에서 판이 끝나기도 전에 먼저 일어나겠다는 것처럼 무렴한 일이었다. P는 와인잔을 들며 말했다. "그럼, 가부장제 사회에서 고군분투하는 우리 여성 동지들의 단합을 위해서, 건배!"
"선배,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우리끼리라도 뭔가 파티 비슷한 거 열어야 하는 거 아냐? 일단 저녁은 먹어야 할 거 아냐." 숲속 난장이들의 모임처럼 화락한 기운이 감돌자 U가 그 화기의 끝자락을 거머쥐고 P에게 묻는다. 구슬 하나가 떨어져나갔다고 해서 목걸이를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녁,이라는 말을 듣자, 이제까지 가라앉은 분위기가 허출한 뱃속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따뜻한 음식으로 뱃속을 그득하게 채우고 나면 눈이 좀더 밝아져 없어진 구슬을 찾기도 수월할 것이다. P선배가 우릴 패션쇼에 초대했어요. 다음주 화요일이에요. J가 이사해서 새집에서 모이기로 했어요. H가 장염으로 입원했잖아요. 선배도 다녀왔어요? 그래도 퇴원했으니까 그동안 못 먹었던 맛있는 음식 사주면서 축하해주자는데요, P 선배가요. 첫 만남 이후 이런 식으로 모여 친목을 다져온 '여성 동지'들은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허기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동아줄을 찾는다.
<인생에는 세 가지 길밖에 없대. 달아나든가, 방관하든가, 부딪치는 것. 영화 [시티 오브 조이]에 나온 대사야. 하지만 방관하는 게 더는 허용되지 않을 때가 오지. 그러면 달아나거나 부딪치는 수밖에. 뭔가에 쫓겨 달아나던 이가 막다른 곳에 이르러 그것과 맞대면할 수밖에 없을 때 느끼는 공포는 어떤 것일까.>
"왜 그런 이야기 있잖아. 숲속의 참나무에서 도토리가 떨어졌는데, 그 소리를 들은 토끼가 뛰고, 토끼가 뛰니까 여우도 뛰고, 그래서 호랑이까지 뛰는 이야기. 우리 지금 그런 거 아닐까. L선배는 누군가와 여행 가서 지금 파도 소리 들으며 룰루랄라하느라 전화도 꺼놓고 있는데, 우리만 여기서 안달복달하고 있는 거 아닐까."
배가 부르니까 마음도 느긋해졌는지, U의 추측은 관대하다. '여성 동지'들은 배를 채우자 좀더 느긋해져서 소파에 깊숙이 몸을 기댄 채 나른한 식곤증에 잠긴다. 접시를 절반밖에 못 비웠지만, S의 속은 더부룩하다. 스파게티 소스가 지나치게 느글거렸다.
"L선배가? 설마."
"왜, H도 P선배랑 극장 앞에서 마주치기 전까지는 시치미 뚝뗐잖아."
"그 남자 어떤 사람이니?" H는 당황한 기색이었다. "무슨 소리야?" H는 당황했다. "극장 앞에서 봤어. 뭘 어때. 나이 찬 여자가 애인이 생겼다는데 나같으면 내 입으로 자랑하겠다. 안 그래? 그건 그렇고, 누구야? 어서 불어봐." P가 장난스럽게 다그쳤다. "불긴… 그냥 평범한 사람이야. 아직 제대로 시작한 것도 아니고…" "하긴 넌 연애도 처음이잖아. 그러면 오늘 이 자리는, 왕초보 연애 입문자인 H가 연애라는, 에베레스트 등정만큼이나 험난한 산을 넘을 수 있도록 경험자들이 노하우를 풀어놓는 자리가 되겠습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니, 우선 H의 남자에 대해 알아야겠지요?" 남자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고, H가 짧은 대답과 묵비권을 대신하는 난처한 웃음으로 그 질문을 감당한 뒤 각자 노하우를 펼쳐놓았다.
처음에 너무 잘해주지 마라, 안 그러면 평생 모시고 살든가. 백날 영화 보고 차 마시고 밥 먹어봤자 소용없다, 남자의 성격은 잠자리에서 드러난다, 일단 자봐라. 뭐니뭐니해도 머니는 중요하다, 요즘 등처가가 꿈인 남자들이 좀 많으냐, 경제력을 잘 따져라… 저마다 돌려가며 한 마디씩 한 그날의 결론은 남자들은 예쁜 여자보다 섹시한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이었고, H에게 시스루 블라우스를 선물하자는 결의로 이어졌다.
"맞아, 그러고보니 H나 L선배나 평생 독야청청할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 비슷하긴 하다. 우리 또다시 돈 걷어야 하는 일 생긴 거 아닌가 몰라. 누굴까. S선배, 우리에게 해줄 말 없어요?"
더부룩하던 속이 말썽이다. S가 난 몰라,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끅, 끄윽, 트림이 나온다. 가벼운 웃음이 번진다.
"S선밴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아. 선배 그 트림, 피노키오 코 길어지는 거랑 같은 맥락 아니야?"
"누굴까? L선배 연애한다면 이건 정말 사건이다. 내가 아는 어떤 선배는…"
K의 말을 P가 자른다. "지금 이런 이야기 할 때니? L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선배, 선배가 L선배 걱정하는 건 알지만, 좀 과민한 것 같아요."
"물론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P선배가 꿈을 꿨다잖아."
U가 볼멘소리 섞인 K의 말을 잠재운다. L이 P의 꿈에 나타나 소리도 내지 않고 하염없이 울지 않았더라면 이 자리에 모일 일도 없었을 것이다.
<기억하니? 우리가 H에게 선물한 시스루 블라우스. H의 취향에 전혀 안 맞는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그 옷을 선물했어. 그 옷을 H가 한번이라도 입었을까. H가 자기의 연애를 알리고 싶어했을까. 영화관에서 P와 부딪치기 전까지 H가 우리에게 한번이라도 그 남자 이야기 한 적 있니?>
화랑을 떠올리게 하는 P의 거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복제 초상화였다. 의관을 정제한 선비의 초상은 수염의 올이 가닥가닥 느껴질 만큼 생생했다. "우리 5대조 조상이에요. 이 어른이 부원군을 지냈고…" P의 설명이었다. 크래커에 햄이며 올리브를 얹은 카나페를 집어먹으며 듣는 족보 이야기는 조선시대 선비의 초상과 그 초상을 감싼 은빛 프레임만큼이나 생경했다. "선배, 웬 조선시대야." 누군가가 비명처럼 소리쳤지만 P는 진지했다.
"언젠가 내가 아플 때, 꿈에 한 선비가 나타나서 약을 주기에 먹었는데 다음날 깨어보니 한결 개운했어. 참 이상하다 했는데, 그 뒤 고향의 재실에서 이 초상화를 뵈었어. 바로 꿈에 나타난 그분 아니겠니. 그래서 복사해왔어. 일이 잘 안 풀릴 땐 이 어른을 생각하면서 잠들면 꿈속에서 해결책을 주셔. "
"그거, [세상에 이런 일이]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잖아." 누군가가 말해서 다들 와그르르 웃었다. 하지만 P가 디자인한 아이템이 승승장구하고, 그때마다 현몽 이야기가 배경음악처럼 뒤따르자 P의 꿈이 영험하다는 것에 이견을 가질 수 없었다. 앞뒤 꽉 막힌 골짜기에 빠져 버린 듯한 누군가는 P에게 전화를 걸어 묻기도 했다. "P, 혹시 최근에 나에 관한 꿈 꾼 적 없어?" 아니면 옆에 있는 누군가가 일깨워주기도 했다. "P에게 전화해 봐. 혹시 네 꿈 꾸었을지도 모르니까." P가 직접 전화를 걸어 일깨워주기도 했다. "너 혹시 무슨 일 없니? 어제 꿈에 네가…" P는 꿈의 전편을 들려주는 친절을 베풀 만큼 한가하진 않았지만, 자기가 P의 꿈에 등장했다는 것만도 특별한 일이었다. P의 꿈에 출현한 사람은 뭔가 기막힌 상징이거나 암시를 놓친 것은 아닌가 싶어져서, 무심하게 지나친 일상의 솔기를 샅샅이 살피게 되었다.
S는 꿈을 그다지 믿지 않았다. 벗은 윗몸이 가슴 아래까지 비늘처럼 일어나 있고, 그 비늘마다 촘촘히 박힌 유리조각을 아파, 아파 하며 하나씩 빼내는 엽기적인 꿈을 꾸다 깬 적이 있다. 난방은 꺼져 있고 이불자락은 딱 꿈속에서 유리조각이 박힌 가슴 부분까지 걸쳐 있었다. 자면서 느낀 추위가 그런 꿈을 꾸게 한 것이다. 잠들기 전에 읽은 책이나 본 비디오의 내용이 꿈속에서 변주되기도 했다. 그런 S가 P의 꿈에 출현한 적이 있었다. 수화기 저편에서 P가 "S씨? 나 P예요."했을 때 S가 같은 이름을 가진 거래처 사람을 먼저 떠올린 걸 보면 P와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말도 채 트기 전이었다.
"어떻게 지내요? 응, 별일은 아니고, 뭐 좀 물어보려고. 최근에 신상에 변동 없었어요?"
전화를 주고받을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닌데다, '신상의 변동'이 무엇인지, 왜 그걸 묻는지 몰라 S는 쉬 대답하지 못했다.
"글쎄, 생각나는 게 없는데… 왜요?"
"찬찬히 잘 생각해봐요. 자리를 옮겼다든가, 무슨 물건을 새로 구입했다든가 아니면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든가 하는 일이 꼭 있을 거예요."
확신으로 단단해진 P의 말투 때문에 S는 지난 며칠을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자리를 옮겨? S의 책상은 3년째 같은 자리에 놓여 있었다. 새로 구입한 물건? 어느날 퇴근길에 충동적으로 스카프를 산 적이 있었다. 백화점의 조명 아래서는 몰랐는데, 집에 와서야 웬만한 용기를 내지 않고서는 매기 어려울 정도로 선정적인 빛깔이라는 걸 알았다. 붉은색이 좋아지는 걸 보니 정말로 늙어가나보다 하고 씁쓸하게 웃고 장롱에 넣어두었다. 새로운 사람? 도서관에서 발견한 한국 관련 사료를 번역까지 해서 들고온 러시아 유학생이 있었다.
"굳이 찾는다면… 스카프를 샀고 새 번역원고를 받았어요.."
"스카프? 무슨 색이에요?"
"빨간색 계통인데요."
"그럼 그건 아닌 것 같고. 번역 원고라… 원문이 어느 나라 거지요?"
"러시아 거예요."
P에게 업무에 관한 것까지 또박또박 대답하는 상황이 조금 우습다는 생각이 얼핏 스쳤지만, P가 워낙 진지하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서 그 질문을 잘라먹을 수는 없었다.
"러시아? 맞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네? 뭐가요?"
"내가 꿈을 꿨는데 말예요. 눈이 아스라이 덮인 평원을 걷고 있었어요. 하얀 나무들, 지금 생각하니 러시아의 자작나무네요, 사이로 진눈깨비가 죽죽 내리는데 어떤 여자가 그걸 다 맞으면서 걷고 있는 거예요. 그 여자가 어찌나 추위에 떠는지, 그걸 보는 저까지 한기가 들더라구요. 꿈에서 깨어 와인을 마시면서 누굴까 누굴까 하고 짚다보니 그 짧은 커트머리 뒷모습이 영락없이 S씨더라구요. 그런데 러시아에서 손님이 왔군요."
"그게 뭐 문제가 되나요?"
S의 말투는 저도 모르게 조심스러워졌가. P는 단어마다 매듭을 거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렇게 묻는다면… 있다고도 없다고도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겠으나, 가까이하지 않는 게 낫다고 봐야지요. 그 번역원고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네요."
꺼림칙한 마음으로 낸 그 번역서는 그런 유의 책으로는 성공적이라고 할 만큼 반응이 빨랐다. 그런데도, 한 달 만에 찍은 2쇄의 재고가 얼마 안 남았음을 확인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퇴근하던 날, 계단에서 헛디뎌 팔에 기브스를 하게 되었을 땐 잊고 있었던 P의 경고가 얼핏 떠올랐다. S의 부상 소식을 들은P는 위문전화를 했다. 적당한 위로와 격려 끝에 P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참, 그런데 그 책 결국 펴냈다면서요?
<언젠가 대학 선배가 들려준 이야기야. 그 선배, 고등학교 시절에 문제아라서 늘 학생과에 가서 매맞느라 교복이 남들보다 빨리 닳을 지경이었대. 재수 끝에 어찌어찌 대학에 들어가고, 졸업하고 나서 펀드 매니저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어. 너도 들어봤을거야, Y라고. 텔레비전에도 나오고 하니까 모교인 고등학교에서 후배들에게 한말씀 해달라고 연락이 왔더래. 옛 추억이 궁금해서 가보았대. 그랬더니 선생들이 자기를 학교 다닐 때부터 모범생이었던 다른 친구로 기억하고 있더래. 심지어 그 선배를 개 패듯 패던 학생과 선생들까지도.>
야산을 오르던 등산객의 눈에 띈, 덤불에 가려진 채 덩그마니 드러난 두 발. 닫힌 문 안, 살가죽 속에서 얼룩덜룩 썩는 시체. L에게 그들이 모르는 사생활이 있을 리 없다는 결론이 나자, 공포영화에서 본 엽기적인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마침내 한움큼 뼛가루가 된 L이 산자락에 흩어지는 모습을 본다.
"L이 최근에 이상하긴 했어. 원래 말이 들어가면 나올 줄 모르는 애이긴 하지만. 하긴 혼자서 맨날 이상한 책이나 들여다보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 그 나이에 그런 일을 하다니, 그게 뭐야."
P의 목소리에선 무언가가 희미하게 묻어난다. 그 흐릿한 가루의 성분엔 M에게 거절당한 노여움도 어느 만큼 섞여 있으리라고, S는 짐작한다.
문장을 가다듬고 교정을 보는 L에게 고정수입원이 생겼다. 번역한 하이틴 로맨스의 교정이었다. 교정지를 넘기고도 언제 돈을 받을 수 있을지 기약없는 다른 일에 비하면, 다달이 일정 분량의 일이 주어지고 일정한 날짜에 교정료가 입금되어 편하다고 했다. 아주 편한 것만은 아니었던지, 집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면 남방셔츠와 진바지 차림이던 L이 탱크탑 원피스를 입고 나타나서 S의 입이 딱벌어지게 만들었다. 둘이 만나 영화를 보기로 한 날이었다. 굽 높은 구두 때문에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운 걸음으로 나타난 L은 자리에 앉자마자 구두를 벗고 발바닥을 주무르며 말했다.
"염려 마. 어떻게 된 건 아니고, 일종의 산업재해야. 하이틴 로맨스를 한 달에 두 권씩 교정 본 후유증. 하이틴 로맨스의 공식이 어떠냐면… 어느날, 잘생기고 강하고 심지어 부자이기까지 한 남자가 짠!하고 나타나서 터무니없이 순진한 여자주인공과 티격태격 감정싸움을 벌여. 그런데 그 남자는 말괄량이 길들이기에 충분할 만큼 두뇌까지 명석한 거야. 그리하여 여자는 완벽하게 모든 것을 갖춘 남자의 넓은 품에서 완벽한 행복을 맛보면서 아침을 맞는다, 끝. 참, 그 아침에는 햇살도 유난히 밝았고 새들도 유독 명랑하게 지저귀었다더라…"
L은 장난스럽게 변사의 말투를 흉내냈다.
"그런 소설을 늘 읽다보니, 그런 남자 하나 건지지 못한 내 인생이 상대적으로 불행하기 짝이 없게 느껴지는 거야. 뭔가 노력을 해야 할 것 같고. 그런데 오늘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발바닥에 불이 나는 걸 느끼면서 결심했어. 생긴 대로 살자!"
이따금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S는 L을 먼저 떠올리고 넌지시 물어보았지만 L의 대답은 대개 비슷했다. 나중엔 어떨지 모르지만 난 지금이 좋아. 물론 경제적인 건 조금 불안하지만, 그 대신 시간 부자 아니니. 결국은 선택의 문제인 것 같아. 두 가지 다 누리면 물론 좋겠지만, 난 돈과 시간 가운데 시간을 선택한 것뿐야. 이렇게 살아도 되겠지? S는 대답했다. 그럼, 네 인생인데 누가 뭐라겠니.
"L아, 우리 거래처에서 홍보 업무를 맡을 사람을 구한다는 말 듣고 네 이야기 해놓았어. 네가 출판만 했다니까 뭐 그리 내키는 것 같진 않았지만, 내 말이면 무시할 수 없는 데거든. 다음주중에 면접 날짜 잡아서 연락해준댔어." P가 말을 꺼냈다. "선배, 그런 자리 있으면 나에게 먼저 연락해주지." U가 추임새를 넣었다. L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내가 언제 취직하겠단 이야기 한 적 있니?" 자기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는지 아물아물한 모양이었다. "아니, 네가 그 나이에 그러고 있으니까 보는 사람 마음이 편치 않으니까 그러는 거지." "미안하다. 미리 말해놓았다니 안됐긴 하지만 공연한 수고한 것 같다. 다른 사람이 가도 되는 자리지?"
<산에 나무가 한 가지뿐이라면 어떨까. 질려서 산에 오를 마음도 없어질거야. 나무만 있고 풀은 없다면? 나무와 풀만 있고 골짜기를 흐르는 물이 없다면? 그런데도 왜 사람은 그게 안 되는지. 다른 빛깔 다른 생각이 끼여들면 이물감을 느끼게 될까.>
"여기 맥주 한 병 더 주세요. P선배, 나 맥주 한 병 더 마셔도 되지?"
U는 주문부터 하고 묻는다. 찻집에서 만났을 때 P가 계산서를 집어드는 건 하나의 관례다. 다른 사람이 민첩하게 집어들고 앞서서 계산대로 가면 P는 농담했다. "너 연봉 나보다 많아? 이번엔 내가 낼게 다음에 맛있는 거 사줘." 물론 다음번에도 다른 사람에게 기회는 오지 않는다.
"누가 L의 집에 한번 가볼래? 요즘 L이 이상했다는 거, 다들 알지? 워낙 말이 들어가면 나올 줄 모르는 애긴 하지만, 거의 말이 없었잖아. 걱정…"
P의 말은 휴대폰 벨소리에 끊긴다. K의 휴대폰이다.
"응, 은재 엄마. 거의 끝나가. 응? 얼마나? 알았어, 금방 갈게."
허둥거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끊은 K는 벌떡 일어서다가 물컵을 치고 만다. 다행히 물은 조금밖에 안 남았다.
"우리 애가 데었다네요. 어째 나올 때부터 마음이 편치 않더라니. 죄송해요, 저 먼저 갈게요."
이를 어째, 이게 무슨 일이람, 입안엣말로 중얼거리며 K가 황망하게 자리를 뜬다. 이 자리가 아니었더라면 K의 아이가 데이지 않았을텐데, L이 잠적하지 않았더라면 이 자리에 모이는 일은 없었을텐데… K가 비운 자리를 그런 마음이 채운다.
"결국 우리끼리 생일 파티 하는 셈이네. L, 좀 너무한 거 아냐? 어쩜 이렇게 소식이 없을 수 있담." 중얼거리다 말고 P는 잠깐 인 소란 때문에 끊긴 말을 잇는다.
"S, 네가 한번 들러 볼래? 내가 가야 하는데 요즘 좀 바빠서 그러네."
"그러지, 뭐."
"별일은 없을테지만, 그래도 영 마음에 걸리네. L이 그렇게 살게 될 줄 몰랐는데."
"별일 아닐거야." 마음 놓으라는 듯, S가 자신있게 대답한다.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다. S는 사람들이 모여앉아 그토록 염려하는 L의 집에 들렀다 온 길이었다.
L이 사는 아파트 현관 앞은 깨끗했다. 어지러이 쌓인 신문 혹은 미미하게 떠도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냄새. 바닥에 들러붙은 껌에서 얼룩소 잔등을 연상하며 계단을 오르는 동안 어지러이 고조되던 불안이 눅었다. L은 진보와 보수로 알려진 신문 두 가지를 구독하고 있었다.
벨소리가 울렸지만 안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S는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현관문에 귀를 대어보니, 응답기가 작동될 때의 삐이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쐐애, 아파트 단지 밖 길에서 내닫는 찻소리가 그 미미한 소리를 뭉갰다. 어느 집에선가 틀어놓은 탱고 곡이 계단을 타고 흘렀다. S는 탱고가 가만가만 흘러내리는 좁다랗고 어둑신한 층계에 걸터앉았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즈음, L의 생기가 시르죽고 낯빛이 어둑해진 걸 깨닫긴 했다. 혼자 일하는 사람들의 직업병이려니 생각했다. 타인과 최소한의 관계만을 맺는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일시적인 어줍음. 가뜩이나 말수가 적던 L이 침묵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가운데에 단단한 심이 박이고 빗장이 질러진 침묵이었다. 딸깍, 등뒤에서 소리가 났다.
"S, 맞구나. 안에선 렌즈로 봐도 누군지 잘 모르겠어서. 들어와."
"L!"
L은 현관문을 열며 미소지었다. 동상에 걸려 발긋한 손을 떠올리게 하는 미소였다.
"너 어디 안 갔었어? 그럼 아팠구나. 연락 좀 하지 그랬어."
"그냥 그렇게 됐어."
L은 말을 아끼는 기색이 역력했다. 서먹해진 S는 L이 커피를 끓이고 과일을 내는 사이 눈에 익숙한 실내를 두리번거렸다. L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단서는 눈에 띄지 않았다. 눈높이보다 높은 가구를 싫어해서 비워진 벽면도 그대로였다. 쪽매 화분이 귀여워서 S가 사다준 하트아이비는 화분 위로 싱싱하게 넘쳐나고 있었다.
"전화, 여럿이 했지? 지난번 U의 생일때처럼 모이자고."
"미안해. 너한테 미리 전화할까 했는데, 내가 집에 있다는 걸 네가 알면, 너에게 거짓말을 시키게 될 것 같아서 그랬어. 난 그런 요란한 축하 받고 싶지 않았거든."
"왜, 좋잖아? 다들 기쁜 마음일텐데."
"그럴까? 너, H가 남자를 만나기 시작했을 때, 우리가 어땠는지 기억 나니? 우린 자매애를 내세워 H에게 소중한 것을 뭉갰다는 생각이 들어. 그리고 나서 H가 입어내지도 못할 블라우스나 선물했고. 별자리목걸이는 또 어떻고."
조카에게 선물할 책 목록을 골라달라는 P의 부탁을 받고 무난하다고 생각되는 책 목록을 보냈더니 그에 대한 답례였는지, 어느날 사무실로 작은 소포가 왔다. 꼬리를 치켜세운 전갈이 대롱대롱 매달린 목걸이였다. 그즈음 모임에서 별자리목걸이를 하지 않은 사람은 엄마가 물려준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S와, 몸에 무언가를 붙이는 게 싫어서 시계도 안 차는 O뿐이었다. 다음 모임에 S는 예의상 그 목걸이를 하고 갔다. 눈밝은 P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 다 별자리목걸이를 하고 있구나. O만 빼고.
"그런 일들이 여러 번이었어. 아닌데 아닌데 하면서도 휩쓸리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일들. 어떤 땐 별자리목걸이였고, 어떤 땐 {꿈풀이사전}을 갖추는 거였고, 어떤 땐 누구 한 사람에 게 관심을 집중시키는 거였고. 그것들에 연대와 애정이라는 옷을 입혀서, 내가 바라는 게 아니라 하더라도 거부할 수 없게 만들었지. 그랬어."
오래 가둬두었던 L의 말은 시냇물처럼 흘러나오다 그랬어, 하면서 여울을 이루었다.
"어렸을 적에 이웃에서 살던 친구를 우연히 만났어. 그 친구한테 옛날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깨달았어. 내가 쌍둥이 이야기 한 적 없지?"
"쌍둥이?"
"내가 어렸을 때 살던 동네에 쌍둥이 형제가 있었어. 그 친구의 바로 위 오빠니까 나보다 세 살쯤 많았을거야. 학교에서 돌아와 집으로 가려면 그 골목을 지나야 했는데, 그때, 마을 여자아이들은 골목 어귀에서부터 숨을 죽여야 했어. 그 쌍둥이가 길을 막고 못 가게 했으니까. 지들 마음에 들면 보내고 안 그러면 물을 끼얹기도 하고. 둘이 뭉치면 그렇게 되는 거지. 지들이야 장난이었겠지만, 혼자 그 길을 지나야 할 때면 어찌나 겁이 났는지, 마음속이 꺼매지는 것 같았는데…. 참, 케이크도 있다."
L은 상자를 내왔다. 상자 속에 아주 작은 케이크가 손대지 않은 채로 들어 있었다.
"누구, 손님이 왔었니?"
"아니, 내가 내 생일을 축하하려고 산 거야. 너 올 줄 알았나봐. 미리 사놓은 걸 보면."
히죽 웃는 L에게서 비로소, S가 알고 있는 L이 드러났다.
"전에 호주 원주민들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그 사람들은 우리처럼 해마다 생일 축하를 하지 않는대. 자기 생각에 지난해보다 올해 더 현명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 판단하면, 그때서야 잔치를 연댄다. 축하해줄거지?"
<언제부턴가, 우리가 모였다 헤어질 때면 그 골목이, 그 쌍둥이 형제가 생각났어. 쌍둥이가 지키는 그 골목을 지나온 기분이었어. 그런데 더 무서운 건, 그 쌍둥이가 혼자 있을 땐 그 또래 사내애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송충이 앞에서도 벌벌 떠는 아이들이었다는 거야. 쌍둥이의 동생이 그러더라니까. 내가 골목을 지난 건지, 아니면 골목을 지키는 쌍둥이인지 헷갈리더라. 와줘서 고마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