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부처 / 한 강
아기 부처 / 한 강
1
아기 부처의 꿈을 꾼 것은 이월이었다. 동남아시아 어디쯤인 것 같기는 한데 이름을 알 수 없는 먼 나라에 가 있는 꿈이었다. 그 나라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났다는 아기 불상을 보기 위해 나는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었다. 정류장에 내려보니 탁 트인 벌판에 오딧빛의 처음 보는 꽃들이 흐드러져 있고, 먼 구릉 위로는 황갈색 구름장들이 섬세한 나선(螺線) 문양을 그리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조금 걸어가다 보니 가장자리의 흰 페인트가 벗겨져 피 얼룩 같은 녹이 드러난 표지판이 눈에 띄었는데, 이상한 것은 그 표지판에 적힌 안내문이었다. 내가 가려는 그곳은 그냥 불상만 보고 오는 곳이 아니라고 했다. 약수를 뜨는 작은 동굴 속에 진흙으로 빚어진 아기 부처가 있는데, 그걸 자신의 손으로 주물러서 만들어진 얼굴을 보고 오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자기가 만든 얼굴을 보기 위해 거기까지 간다는 건가? 의아하기도 하고 그 안내문이 퍽이나 어리석게 느껴지는데, 어디서부터 걸어온 사람들인지 색색의 옷을 차려 입은 수십 명의 남녀들이 줄을 이어 동굴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줄의 끝에 섰다.
앞사람을 따라 몇 걸음 옮기기 무섭게 갑자기 사위가 어두워졌다. 어느새 나는 약수 뜨는 동굴 앞에 다다라 있었다. 고요했다. 나뭇잎 스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많던 사람들이 다 어디로 사라졌나.
나는 허리를 굽히고 캄캄한 동굴로 들어갔다.
흔들리는 촛불 아래 한 얼굴의 형상이 진흙 바닥에 어렴풋이 드러나 있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분명하지 않았으나 성숙한 어른의 얼굴인 것만은 분명했다. 마치 살아 있는 듯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걸 왜 아기 부처라고 했을까.
눈꼬리가 위로 찢어진 데다 음흉하게 입꼬리를 들어올린 그 얼굴이, 결코 부처는 아니었다. 나는 손을 뻗어 진흙 얼굴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빤히 올려다보는 듯한 눈을 지우고 다시 빚으려 했으나, 빚으면 빚을수록 눈초리는 더 날카로워졌다.
내가 보려고 한 것은 이것이 아니었다. 이것을 보려고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나는 고개를 저으며 일어섰다.
이게 뭣들 하는 짓이야?
얼굴을 든 순간 엇, 하고 비명이 터져나왔다.
동굴은 사라지고 없었다. 가없이 펼쳐진 모래 벌판 가운데 나 혼자 서 있었다. 아뜩한 빛이 눈을 아리게 했다. 모든 사물의 그림자까지 태워버릴 것 같은, 하얀 소금 가루만 남겨놓고 나를 몸뚱이째 증발시켜버릴 것 같은 뙤약볕이었다.
눈을 뜰 수 없었다. 나는 더듬더듬 앞을 향해 걸어나갔다. 어떻게든 눈을 떠야 했다. 이 벌판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야 했다.
눈을 떠라.
눈을 떠!
누운 채로 고개를 저으며 베개를 짓이기다 말고 나는 눈을 떴다.
아직 동트기 전이었다. 불투명한 창문으로 스며드는 푸르스름한 새벽빛을 받아, 벽에 걸린 내 긴 외투가 고적하게 어깨를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의 짙은 눈썹과 콧날과 입과 턱을, 쪽빛 차렵이불 위로 윤곽만 드러난 몸을 나는 마치 타인을 보듯 찬찬히 내려다보았다.
내가 운동복으로 갈아입는 동안 그는 가볍게 몸을 뒤척였다. 그 바람에 이불이 흘러내리며 그의 어깨가 비어져나왔다. 방문을 열려다 말고 나는 그것을 물끄러미 건너다보았다.
귀족적이라며 특히 여자들이 좋아한다는 그의 희고 매끄러운 살갗은 쇄골 바로 아랫부분부터 빨갛게 일그러져 있었다. 뒤쪽의 흉터는 좀더 위쪽까지 올라가 있어, 와이셔츠를 입고 고개를 숙이면 흰 칼라 위로 드러났다. 물론 브라운관에는 그 부위가 비칠 일이 없으나, 방송국 동료들을 비롯한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의 목덜미에 화상 자국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흉터가 그의 얼굴과 목의 앞부분과 두 손을 제외한 몸뚱이 전체를 뒤덮고 있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의 알몸이 얼마나 붉은지, 배 아랫부분부터 샅까지 돋은 음모들이 그 붉게 뒤틀린 피부에 대조되어 얼마나 검은지 아는 사람은 나 외에 없었다. 사고 후 퇴원한 사춘기 초입의 그를 옷 갈아입힐 때마다 아랫입술을 악물곤 했다는 시어머니는 삼 년 전 세상을 떠났다. 키가 훌쩍 크고 입매가 야무진 그녀의 모습을 나는 사진첩에서만 보았다.
완벽한 분이셨지.
결혼 전 그는 담담한 얼굴로 자신의 어머니를 회상하곤 했었다.
난 평생 어머니의 반의 반을 따라갈 수 없을 거야.
그러나 그는 거의 완벽했다. 실수라 해봤자 거개가 사소한 것이었다. 문제는 그가 그것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뿐이었다.
전날 밤에도 그는 기분이 언짢아서 돌아왔었다. 넥타이를 풀면서 곧장 냉장고를 향해 걸어가더니 내가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마시곤 하는 캔맥주를 꺼냈다. 텔레비전 앞에 놓인 소파에 앉아 그것을 단숨에 들이켜더니, 그러고도 마음이 안 풀렸는지 '배럴당 유가가 대폭으로 상승함에 따라' '배럴당 유가가 대폭으로 상승함에 따라' 하고 욕실에서, 이부자리에 누워서까지 오래된 엘피판 튀듯 똑같은 억양으로 되뇌었다. 그 대목은 그날 아홉시 뉴스에서 그가 말을 씹었던 부분이었다.
그가 말을 더듬은 그 순간에 나는 거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발톱을 자르고 있었다. 기사가 나가는 동안 발톱을 자르고, 데스크의 그가 나오면 손을 멈추고 그의 얼굴을 마주보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신문지 바깥으로 튀어나간 발톱들을 쓸어담기 위해 내가 상체를 옆으로 기울였을 때 그는 문제의 실수를 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는데,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은 듯 여전히 당당하고 신뢰감 넘치는 얼굴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 속에 희미하게 스쳐간 동요를 나는 알아보았다.
그쯤 괜찮아.
나는 브라운관 속의 그를 향해 속삭였다. 마치 그 말에 대답하듯, 삼 년 간 이마를 맞대고 살아온 내가 듣기에도 매력적일 만큼 당당한 어조로, 얇고 선이 뚜렷한 입술에 느긋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는 취재 기자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에게 '그쯤 괜찮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 하찮은 실수를 두고 그가 얼마나 자신을 괴롭힐 것인지도, 그 철저한 성격이 젊은 그를 프라임 타임 앵커의 자리까지 끌어올려주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제법 깊어진 기침을 뱉어내며 나는 가스 레인지에 물을 올렸다. 유자 재어놓은 유리 단지를 냉장고에서 꺼내 머그컵 두 잔에 세 숟가락씩 덜었다. 감기에 걸리지 않기 위해 그는 일 년을 하루같이 유자차를 마셨다. 덕분에 겨울이 다 지나가도록 별탈이 없었는데, 정작 매일 유자차를 타주던 내가 목감기에 걸렸다.
어쩌자는 거야, 내가 생방송중에 기침하면 좋겠어? 당장 병원 가서 주사 맞아.
처음 내가 기침을 시작한 날 밤 그가 뱉은 말이었다.
좀 있어보면 낫겠지 뭐.
걱정해주는 그가 고마워 웃으면서 입을 맞추려던 나는 흠칫 놀라 물러섰다. 그가 뒤로 얼굴을 빼며 언성을 높였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에는 진정으로 내 행동을 혐오하는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미련하게 버티지 말고 병원 가라니까?
그제야 약간 미안했는지 그는 얼굴을 찡그리는 듯 웃었다.
당신도 좀 조심해줘야지. 보통 여자들같이 그러면 어떻게 해?
그러더니 그는 욕실에 들어가 문을 열어놓은 채 한 시간 전에 했던 양치질을 다시 했다. 일단 보통 칫솔로 닦고 나서 부드러운 모의 칫솔에 액상 치약을 발라 구석구석 잇몸까지 마사지하고 구강 청정액으로 입과 목젖을 헹군 뒤에야 그의 양치질은 끝나곤 했다. 오한 때문에 팔짱을 단단히 끼고 서서, 나는 그날따라 더욱 길고 세밀한 그 공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욕실을 나오며 그는 재차 다짐했다.
당장 내일 병원에 가, 알았어?
그때 그가 조금만 웃어주었다면, 마치 그 일에 모든 것을 건 사람처럼 진지하지 않았다면, 나 자신이 병원체를 품은 숙주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랬다면 그답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머그잔을 들고 신 유자향을 맡으며 나는 언제나처럼 망설였다. 나는 유자차를 좋아하지 않았다. 차는 물론 달았고, 저며진 유자는 더욱 달았다. 이마를 찌푸리며 꾸역꾸역 한 움큼의 유자 건더기를 씹어 삼킨 뒤 뜨거운 차를 세 번에 나누어 들이켰다.
식탁 앞 의자에 걸쳐뒀던 파카를 입고 철제 현관문을 열었다. 네 가지 조간 신문들이 제각기 층계참에 팽개쳐져 있었다. 일면의 큰 글자들만 읽어내린 뒤 모두 현관 안으로 던져놓았다. 덩어리진 잿빛 먼지가 굴러다니는 콘크리트 층계를 밟아내려갔다.
자그마한 빌라들이 모여 있는 주택가 골목에서 삼 분만 걸어나가면 숲이 나왔다. 사실 내가 부르는 이름이 좋아 숲일 뿐 나무 이십여 그루가 심어진 산책로에 불과했다. 산책로 옆 철조망의 허술하게 찢어진 틈으로 들어가 등성잇길을 따라 올라가면 북한산 등산로에 이를 수 있지만, 나에게는 이 볼품없는 산책로가 오히려 제 모양대로 편안했다.
어두운 하늘에 닿으려고 몸을 길게 뻗어올린 나무들의 뼈대를 올려다보며 나는 천천히 걸었다. 무슨 음악 같은 오랜 침묵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청랭한 공기에는 부식된 겨울 낙엽 냄새가 배어 있었다.
간이 약수터와 목조 정자가 있는 곳에 이르러 나는 멈췄다. 일찍부터 물을 긷는 노인들의 느릿느릿한 대화를 들어가며 맨손체조와 제자리뛰기 삼백 번을 한 뒤 날이 밝을 때까지 정자에 앉아 있는 것으로 내 일과는 시작되곤 했다.
그러나 나는 그날 체조도 제자리뛰기도 하지 않았다. 늦겨울 새벽의 추위에 떨면서, 이따금씩 속 깊은 기침을 오랫동안 뱉어내면서 정자에 웅크려 앉아 있었다. 좀 전에 꾸었던 꿈의 무엇인가가 집요하게 내 마음을 언짢게 하고 있었다.
난데없이, 아기 부처라니.
저마다 날카로운 잎사귀들이 검질긴 살을 뚫고 파랗게 돋아올라온 소나무들을 나는 쏘아보았다. 바람도 없는 침묵 속에서, 그들은 철조망 너머 얼음으로 뒤덮인 계곡을 우두망찰 내려다보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날 뜻밖의 전화들을 받았다. 태교책의 삽화를 그려 불과 이틀 전에 갖다줬던 출판사에서 이번에는 아동의 언어 장애 치료에 관한 책에 들어갈 삽화 마흔네 컷을 청탁해왔다.
"신선했어요. 여태까지 우리 유아신서 삽화가 좀 따분한 편이었는데, 젊은 감각으로 그려주니까 저자도 좋아하더라구요."
가만있으면 새침한 소녀같이 입을 내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단발머리 편집장의 목소리는 유쾌했다.
뒤이어 저녁 무렵에는 재작년 가을에 바람을 맞고 쓰러졌던 어머니가 마침내 지팡이 없이 걸을 수 있게 되었다는 오빠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제는 운동장 돌 때 내 손 안 잡아도 된다면서 기뻐하시는구나."
새벽마다 어머니의 손을 붙들고 집 근처 고등학교 운동장을 세 바퀴씩 달팽이걸음으로 돈 뒤 출근하곤 했던 오빠의 목소리는 한 음조 높아져 있었다.
그의 뉴스 시간이 가까웠을 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어머니인가?
어머니의 성격으로 보아 그럴 리 없는데도 어쩐지 기꺼운 마음이 되어 수화기를 들었다. 성우처럼 아름다운 목소리의 여자가 내 이름 석 자를 정확히 발음했다. 전데요, 대답하자 여자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모르는 이름이었다.
여자가 물었다.
"그분이 얘기 않던가요?"
이 여자가 '그분'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누군지 나는 더욱 의아해졌는데, 더욱 의외의 말이 수화기 저편에서 건너왔다.
"그분하구 저, 내일로 꼭 육 개월이 돼요."
고백하자면 그때 나에게 정작 놀라웠던 것은 그 여자의 말보다, 그것에 이끌려 나온 내 마음의 반응이었다.
'뭐가 육 개월이 된다는 건가' 하는 어리석고 멍한 의문이 있었고, 이어 '그랬었구나' 하는, 잘 맞춰지지 않던 퍼즐 조각이 마침내 들어맞는 순간과 같은 작은 쾌감이 일었다. 방송만 끝나면 집으로 곧장 돌아오던 그가 몇 달째 종종 늦었던 까닭, 늦은 이유를 설명해놓고는 시간을 두고 내 반응을 살피는 기색이었던 까닭, 들떴다가 침울했다가 유달리 감정의 기복이 심했던 까닭이 한 가지 답으로 모아진 것이다. 뒤이어 나에게 엄습해온 것은 더욱 뜻밖의 것으로, 마치 강한 파도가 가슴을 치는 듯한, 여름 한낮에 한 바가지 냉수를 뒤집어쓴 것 같은 후련함, 후련하다 못해 일말의 자유까지 느끼게 해주는 통쾌함이었다.
여자와의 통화가 끝난 것은 아홉시를 알리는 시그널이 끝난 시각과 일치했다. 아마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브라운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진지하게, 그 진지함에 일생을 건 사람처럼 간절하게 인사말을 했다. 이편을 그윽이 응시하는 그의 눈을, 실은 프롬프터에 비친 자신의 원고를 읽고 있을 잘생긴 눈매를 바라보다가 나는 피식 웃었다. 입가로 비어져나왔던 웃음이 얼굴로 번지는가 싶더니, 급기야 발바닥 가운데가 간질간질한 듯한 감각이 몸 전체로 번져갔다. 웃음이 그쳤다가도 그의 얼굴만 나오면 다시 발작적으로 터져나왔다. 숨을 헐떡이며, 생리적인 눈물을 닦으며, 여전히 킥킥대며 나는 리모컨의 오프 버튼을 눌렀다.
형광등을 켜지 않았던 데다 텔레비전이 꺼지자 거실은 어둡고 고요했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것은 내 불규칙한 숨소리뿐이었다.
심호흡 세 번을 한 뒤 나는 일어서서 베란다로 다가갔다. 불투명한 안쪽 유리창을 열자 바깥유리 너머로 이 빌라의 맞은편 동이 건너다보였다. 바깥유리까지 열자 얼굴을 쏘는 듯한 바람이 밀려들어왔다.
저 불켜진 창들 안쪽에서, 모두 뉴스를 보고 있나.
변두리 산밑 주택가의 밤은 고요했다. 바람은 성에같이 차가웠다. 건너편 어느 집에선가 환기를 시켜놓고 설거지를 하는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어렴풋이 고등어 굽는 냄새가 흘러왔다.
"빨리 가자."
"왜 빨리 가?"
"감기 드니까 빨리 가야지."
"왜 감기 들어?"
"네 옷이 얇으니까! 그걸 말이라고 자꾸 대꾸를 하니?"
빌라 앞 주차장에서 젊은 엄마가 신경질적인 어조로 아이를 재촉하고 있었다. 타닥타닥 운동화를 끄는 아이의 발소리가 고스란히 울려왔다.
그때였다. 눈을 깜박이지도 않았는데 마치 암전되듯, 아니, 암전이라면 어두워지는 것일 텐데, 반대로 어둠이 꺼지고 날카로운 빛이 두 눈을 찔렀다. 마치 정수리에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았다. 동굴 속에서 나를 올려다보던 일그러진 얼굴이 그 빛 속에서 양각(陽刻)처럼 도드라졌다.
환영은 사라졌다. 바람은 여전히 선득하게 내 얼굴을 훑고 있었다.
왜 그걸 아기 부처라고 했나?
마치 생시에 본 부조리한 것들에 대해 의문을 품듯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기침이 게워져나오기 시작했다. 창문을 닫고 뒤돌아서자, 내 검은 그림자가 어두운 거실 바닥을 지나 맞은편 벽까지 길게 구부러져 있었다.
2
다음날 그가 점심 약속이 있다며 열시 반쯤 집을 나서는 것을 보고 나도 출판사로 갔다. 그의 출근 시간은 오후 두시지만, 아홉시쯤 늦은 아침을 먹은 뒤 늘 그 시간에 차를 몰고 나가곤 했다.
"최선희씨, 혹시……"
삽화가 들어갈 유아신서 초교지를 받아드는 나에게 단발머리 편집장은 유난히 뜸을 들이며 미소를 흘렸다. 삼십대 중반의 그녀는 제주도의 우도 태생이라고 했다. 그래선지 명쾌한 일솜씨나 도전적인 어투에도 불구하고 이따금씩 풋살구 같은 섬 소녀의 얼굴이 반짝 튀어나왔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곤 했다.
"혹시, 앵커 이상협씨가 남편 되세요?"
나는 어정쩡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다고 했다.
"그랬었구나! 소문이 맞았구나. 나, 이상협씨 외신부 기자 할 때부터 팬이에요."
설레는 어린아이처럼 편집장의 눈이 빛났다. 내가 어색해하는 것을 마치 눈치채지 못한 듯 그녀는 '도대체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하고 채근하듯 물었다.
언제나 사람들의 질문 순서는 비슷했다. 어떻게 만났느냐, 누가 프로포즈를 했느냐, 결혼 생활은 어떠냐, 아이는 아직 없느냐, 왜 없느냐, 안 가지는 거냐 못 가지는 거냐. 그렇게 물을 때 사람들은 내 평범한 얼굴과 키며 몸매를 유심히 살피는 기색이었다. 별유명세 없는 예술전문대를 나온 내 이력이나 평범함에도 못 미치는 집안을 아는 사람들이면 더욱 그랬다. 어쩌다가 그와 어깨를 나란히하고 거리를 걷다 보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실물이 낫다, 그치?' '키도 굉장히 크다…… 화면에선 보통으로 보였는데.' '에이, 여자는 그냥 그렇다.' '화장도 안 했네?'
편집장은 차 한잔을 권했으나, 예의 호기심 어린 질문들을 받고 싶지 않아 나는 사양하고 나왔다. 평일 낮시간인데도 붐비는 전철역 입구에서 나는 잠시 망설였다. 불광동으로 행선지를 정했다. 이런 날, 지팡이 없이 걷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들어가는 것도 나쁠 것 같지 않았다.
어머니는 눈도 들지 않고 '왔냐' 했다. 그녀는 볕이 들어오는 거실 한쪽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먹을 가는 중이었다. 깊은 먹내가 고즈넉이 현관까지 번져 있었다.
나는 손가방을 메고 원고 봉투를 두 팔로 안은 채 어머니를 내려다보았다. 목이 가늘고 허리가 구부정해 두루미 같은 내 체형은 젊은 날의 어머니를 닮았다고들 했다. 이제 노년의 태가 완연하다고는 하지만, 마치 나도 그림을 그릴 때 저럴까 싶게 고개를 길게 수그리고 먹을 가는 어머니의 모습이 내 가슴에 옹이처럼 박혔다.
"뭘 하세요, 어머니?"
"몰랐어, 불화 시작하신 거? 한 달도 더 됐는데."
오빠보다도 세 살 많으니 나와는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새언니는 언제나 나에게 다정하고 솔직한 반말을 했다. 내가 왔다고 특별하게 대접을 하는 법도 없었다. 그걸 욕하는 친척들도 더러 있다고 들었지만 사실 나는 그편이 훨씬 좋다고, 오히려 모든 여자들이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불화라니오?"
"우리 현석이 말이야, 삼월이면 학교 들어갈 녀석이 좀 주의가 산만해야지? 그래 정신 집중 삼아 같이 그려보자고, 신문사 문화센터에서 민화 배운다는 친구한테서 받아왔거든. 그런데 어머님이 더 좋아하시네."
"현석이는 어디 갔어요?"
"그 녀석이 어디 집에 붙어 있는 거 봤어? 점심때 됐으니 배고프면 제발로 들어오겠지."
마침 우유 수금 온 남자를 새언니가 상대하는 동안 나는 어머니 곁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내가 갈 때까지도 입을 떼지 않으려는 듯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던 어머니는 새언니가 영수증을 받아들고 총총히 부엌으로 사라진 뒤에야 입을 열었다. 한약을 마신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들큰한 감초 냄새가 풍겨왔다.
"……혼자 초를 그리게 되기까지는, 이렇게 삼천 장을 그대로 베껴야 된단다."
먹 갈기를 멈추고 어머니가 보여주는 흰 팔절지에는 길게 주름져 바닥까지 끌리는 중국식 옷차림의 노인이 검고 가는 선으로 그려져 있었다.
"시왕(十王)이다."
내가 자세히 보려고 고개를 빼자 어머니는 감색 주름치마 뒤켠에 놓아뒀던 몇 장의 그림들을 건네주었다. 첫번째 그림은 둥근 얼굴형의 두상이었다. 곱슬곱슬한 머리털 주변으로 꽃장식이 화려했다.
"이건 보살초다."
"그리고 이건, 부처님이네요?"
낯익은 석가모니불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래, 이건 여래초…… 그렇지만 이걸 그리려면 먼저 이 앞엣것들부터 삼천 장씩 그려야 된다. 내일 오십 장 더 그리고 모레 오십 장 마저 그리면 시왕초는 끝나니까, 하루도 안 빠지고 그린다 쳐도 두어 달은 더 있어야지."
그것들이 다인 줄 알고 내려놓으려던 나는 마지막 그림을 발견하고 미소를 지었다.
"이것부터 그리지 그러세요, 고운데요."
고요한 여인의 얼굴이 비스듬히 발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봉오리진 연꽃가지가 그녀의 손에 가볍게 들려 있었다.
"그건 관음초다. 맨 나중에 그리는 거다."
나는 어머니에게 잠깐 붓을 주어보라고 했다. 새 화선지를 펴고 세필에 먹을 묻혀 그 관세음보살의 모습을 그렸다.
"……재주가 있기는 있구나, 하지만……"
찬찬히 내 그림을 들여다보더니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나무라듯 그녀는 말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다. 부처님 앞에 절하듯이 한장 한장 그대로 베끼기부터 해야 되는 거야. 주름 하나 어깨 선 하나 다르지 않게 하려면 그렇게 해선 안 된다."
어머니는 시왕초 위에 화선지를 올려놓은 다음 자세를 단정히했다. 붓에 먹을 묻힌 뒤 직각으로 세워 정확한 자세로 붓질을 시작했다. 곡선에 따라 정성스럽게 옷을 그리고, 얼굴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을 찍은 뒤 한 장을 반듯이 옆에 놓았다. 다시 자세를 바로하고는 새 화선지를 깔고 같은 그림을 처음부터 베끼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얼굴은 사뭇 진지했다.
나는 언제나처럼 조용한 거리감을 느끼며 물러앉아 있었다. 어머니는 늘 그랬다. 깊은 산같이 속내를 알 수 없고 어려웠다. 일찍부터 아버지 노릇까지 겸한 탓이라고 당신 스스로 고백한 적이 있긴 했지만, 어린 시절 친구 집에 갔다가 사근사근하고 따스한 엄마들을 보면 부럽고도 낯설게 느껴졌다.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할 줄 모르는 내 성격은 어머니로부터 배운 것이리라.
어머니는 심지어 눈물 흘릴 줄도 몰랐다. 어쩌다가 내가 눈물을 보이면 두껍고 거친 손바닥이 날아오곤 했다. 나는 어머니 이상 손때가 매운 사람을 알지 못한다. 매를 맞으며 아파서 울면 더 세차게 손바닥이 날아왔다. 어깨에, 등짝에, 허리에.
눈물로 세상을 버티려고 하지 마라.
때리는 사람도 힘들었던지 호흡을 고르며, 그러나 당신의 매질에 감정이 없었다는 것을 보이려는 듯 침착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어머니는 되뇌곤 했다.
눈물 따위로 버틸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마.
평생 힘들다는 말 한마디 없이, 늙도록 새벽부터 밤까지 한복 짓는 일로 생계를 잇고 두 남매를 가르친 그녀는 무슨 예감이 있었는지 바람을 맞기 전날 며느리에게 말했다고 했다.
내 살아온 동안 쌓아온 것들이 고스란히 내 병이야…… 이제 와서 보니 후회가 되는구나, 한평생 칼을 품고 살아왔던 것 같으니.
"이러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한 장 더 그릴 때마다 붓이 그만큼 가벼워진다."
어머니는 벼루에 물을 조금 붓고 다시 먹갈기를 시작했다. 염색물이 빠져 희끗희끗한 가마가 어머니의 팔동작에 따라 흔들렸다.
저렇게 똑같은 그림을, 정말 삼천 장씩 베껴낼 생각인가.
"……이서방은 어떠냐? 매일 텔레비전으로 문안 인사 받으니 잘 있겠거니 한다만."
내 얼굴을 보지 않은 채 어머니는 물었다.
"네, 잘 지내요."
어머니도 나도 침묵했다.
붓질을 하는 동안 어머니는 잠시 이 세상을 떠나 있는 것 같았다. 그 그림 속으로 어머니의 말과 생각, 바람 빠진 무 같은 몸뚱어리까지 빨려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새언니가 슬리퍼 뒤축을 끌며 부엌에서 나왔을 때 나는 코트를 들고 일어섰다.
"왜 이렇게 금세 가? 점심 먹고 가, 현석이도 곧 올 텐데."
"가서 일해야 돼요."
"아까 들으니까 간혹 가다 기침도 하던걸, 내가 콩나물국 끓여줄게."
"일이 밀려서 정말 가봐야 돼요."
화선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어머니가 말했다.
"살펴 가라. 안 나가마."
지팡이 없이 걷는 어머니를 보러 갔던 나는 끝내 어머니가 일어서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열두시를 조금 넘기고 들어온 그의 얼굴을 나는 언제나처럼 낯선 눈으로 올려다봤다. 그날 밤 뉴스를 보지 않아 더 낯설어 보였는지도 모른다. 파르스름하게 면도한 턱, 감각 있게 맞춰 입은 넥타이와 와이셔츠, 깎은 듯 잘생긴 콧날을 보며 나는 내가 배신감 따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을, 오히려 그가 연애중이라는 사실을 신선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같이 술 한잔했어."
그의 입에서 엷은 맥주 냄새가 났다. 평소 같으면 '전화 한 통쯤 해주지 그랬어'라고 했을 것을,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는 넥타이를 풀고 셔츠를 벗었다. 붉은 맨팔을 드러낸 채 언제나처럼 욕실 문을 열어놓고 긴 양치질을 했다. 그는 네 가지 치약을 놓고 썼다. 죽염이 든 한방 치약과 불소가 든 치약과 항균 성분이 강화됐다는 신제품, 그리고 액상 치약이 그것들이었는데, 제각기 다른 좋은 성분들이 들어 있으므로 돌아가면서 앞의 세 가지 치약으로 닦아주는 것이 좋고 액상 치약으로는 치간에 낀 치석까지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세면대 거울에 비친 그의 얼굴은 진지하게 양치질에 몰입해 있었다. 나를 보고 있지 않은 그의 눈을 향해 지나가는 말을 하듯 물었다.
"……그 여자가 알아?"
입술 위로 넘친 치약 거품을 물고 거울 속의 그가 나를 보았다. 칫솔질을 멈춘 그의 손등으로 흰 거품이 흘러내렸다.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그에게 상처를 줄 것이 분명한 말을 꺼내기 위해 나는 망설였다.
말해야 한다.
나는 다짐했다.
망설이지 말고 지금 물어야 한다.
그는 머금었던 거품을 세면대에 뱉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라고 하는 대신 그는 눈으로 묻고 있었다. 그는 실수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내 말을 정확하게 이해할 때까지는 섣불리 대응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는 천천히,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러나 온몸의 신경이 빳빳이 긴장하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당신 몸, 그 여자가 알아?"
그의 눈시울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입술 가에 흰 거품을 묻힌 채, 타액과 치약이 함께 흘러내리는 칫솔을 거머쥔 채 그는 나를 쏘아보았다.
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가 먼저 고개를 수그리고 양치 컵에 물을 받아 입을 헹구었다. 얼굴을 수건에 닦은 뒤 고무 슬리퍼를 벗고 걸어나왔다. 빠듯한 간격으로 내 옆을 스쳐지나갔다. 그의 몸이 스치는 순간, 액상 치약의 박하 냄새와 함께 섬뜩한 한기가 끼쳐왔다.
"전화하겠다더니, 했군."
소파에 앉으려다 말고 그가 중얼거렸다. 내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덧붙였다.
"그앤 당신과 달라."
침착한 얼굴이었지만, 마치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이야기를 꺼내듯 그의 말끝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 여자는 그를 그분이라고 하고 그는 그 여자를 그애라고 하는구나, 나이 차이가 그렇게 많은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당신같이 이중적이지 않아. 내 모든 걸 다 좋아할 거야."
조금 있다가 나는 다시 물었다.
"그럼, 아직 몰라?"
별안간 그의 주먹이 벽을 내리쳤다. 그 소리가 어마어마하게 들린 것은 밤의 정적 때문이었을 것이다. 숨이 찬 사람처럼 그의 어깨가 들먹거렸다. 그는 의식적으로 음성을 낮추고 있었다.
"말했잖아, 그애는 당신 같지 않을 거야."
"……나 같은 게 어떤 건데?"
그가 마침내 고함을 질렀다.
"그걸 꼭 내 입으로 말해야겠어!"
그의 얄따란 입술이 경련했다. 단정한 콧구멍이 흥분으로 벌름거렸다.
이 사람은 화를 낼 때 입이 왼쪽으로 약간 틀어지지. 그걸 한동안 잊고 있었어.
나는 망연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난 바라는 게 없어."
그의 흥분이 식기를 기다려 나는 말했다.
"그래서 그 사람더러, 바라는 대로 하라고 했어."
그는 대답 없이 내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이 순간 그의 눈에서 번쩍이는 것이 무엇일까. 증오일까, 경멸일까, 분노일까. 나는 말없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3
성우같이 부드럽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여자는 나에게 말했다.
두 분 사이에 애정이 없으시다고 들었어요. 같은 이불을 덮고 자긴 하지만 각방을 쓰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하던데요.
그녀는 마치 쪽지에라도 적어두었던 것처럼 정확한 논리로 그녀가 전화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분은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긴 것을 괴로워하시는 것 같아요. 아시겠지만 완벽주의자시잖아요…… 그래서 얘길 꺼내는 걸 꺼리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분 모르게 제가 전화한 거예요.
그녀는 그를 사랑한다고 했다. 아니, 그녀의 말씨로 미루어보자면 존경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사는 게 좋지 않느냐고, 만일 내가 그에게 애정이 없다면 더 이상 같이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그녀는 말했다. 전화로 이런 이야기 하는 거나 듣는 거나 편치 않으니 한번 만나자고도 했다.
만날 필요가 있나요, 라고 나는 말했다. '저는 바라는 게 없어요. 그쪽이 바라는 대로 하세요'라는 말은 마치 오래 준비해두기라도 한 것처럼 순순히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녀의 말마따나 완벽주의자이고 때로 독단적인 그의 성격이, 권위적인 것이나 틀에 박힌 것을 싫어하는 내 성격과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의 지나치게 화려한 직업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진심으로 그를 사랑한다, 헤어져서는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것도 아니었다. 세간의 조명을 한몸에 받는 남자가 나처럼 평범한 여자에게 관심을 가진 데 대한 놀라움이 오히려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만큼 두 사람의 미래를 묶어서 생각한 적 없고, 혹여 그런 말이 나온다 해도 짐짓 화제를 돌리곤 하던 내가 결혼을 결심하게 된 것은 그가 살던 오피스텔을 처음으로 방문한 뒤였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함께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다가, 무슨 말인가를 꺼낼 듯 말 듯 망설이던 그는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곁으로 오려는 건가, 의아해하는 나를 건너다보며 그는 와이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 집에 불이 났었어.
마지막 단추를 풀기 위해 와이셔츠를 바지에서 꺼내며 그는 말했다.
큰 불이었어. 다행히 죽거나 불구가 된 식구들은 없었지. 아버지가 공무원이어서 도움도 제법 받았고, 뿔뿔이 친척집으로 흩어졌던 식구들은 몇 년 뒤 마련한 전셋집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었어.
그가 와이셔츠를 다 벗기 전에 나는 이미 숨을 죽이고 있었다. 러닝셔츠를 벗고 바지를 벗고 팬티만 걸친 채 그는 내 앞에 우뚝 섰다. 식탁 위에 매달린 삼십 와트 백열등이 그의 붉게 일그러진 알몸을 비스듬히 비추었다.
이제 알겠지, 내가 여름에도 긴 셔츠만 입는 이유를?
농담을 가장한 그의 목소리가 떨고 있었다.
수영장에 안 가는 이유, 와이셔츠 윗단추를 풀지 않는 이유를 알겠지?
침 덩어리를 삼키는 그의 목울대가 경련했다. 그의 눈은 헤아릴 수 없는 용기와 두려움을 함께 담은 채 번들거리고 있었다.
나는 일어서서 그에게 다가갔다. 실룩이는 뺨을 쓸어준 뒤, 떨고 있는 그의 입술 위에 입술을 포갰다.
나는 그의 흉터와 용기를 함께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니, 바로 그 흉터가 나에게 안겨준 충격 때문에, 평생 숨기고 싶었을 알몸을 보여줄 만큼 나를 신뢰해준 데 대한 고마움 때문에 그를 받아들였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우리는 몇 가지 공통점을 서로에게서 발견했다. 강한 성품의 어머니 밑에서 외롭게 자랐다는 것, 그닥 넉넉하지 않은 집안의 태생이라는 것, 피차 누군가로부터 재정적인 도움 받기를 죽기보다 싫어한다는 것. 그러나 보물 찾기처럼 발견해낸 그 귀중한 공통점들에도 불구하고, 결혼초부터 우리의 관계는 삐걱거렸다.
치밀한 성격의 그는 예상치 못했던 사소한 일로 평정이 무너져버리곤 했다. 그 무섭도록 철저한 성격의 내면에 어떤 불안이 도사리고 있었기에 그랬을까. 일단 이성을 잃으면 그는 자신의 감정을 자제하지 못했다. 나에게 싹수없고 기껏 남 좋은 일이나 하고 있다며, 무슨 보람으로 그까짓 일에 매달리는지 모르겠다고 내 작업을 비난하기도 했다. 깊은 밤이면 예전에 서너 번 만난 적이 있었을 뿐이라는 여자에서부터 광적인 여고생 팬까지 촉촉히 술에 젖은 목소리로, 혹은 울먹이는 음성으로 전화를 걸어오곤 했다.
여느 신혼의 부부들처럼 우리는 종종 다투었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다투고 난 뒤면 내 마음이 이상스러울 만치 냉정해졌고, 살의를 품지 않은 서늘한 마음으로 차라리 그가 죽어버렸으면 하고 바랐다는 것이다. 방송을 끝내고 돌아와야 할 시간이 한 시간쯤 지나면 그가 사고라도 당했기를 바라는 자신을 발견하며 놀라곤 했다. 상복을 입은 내 모습을 상상하면 어쩐지 마음이 편해졌다.
언제부턴가,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나는 그의 흉터가 몸에 닿는 것이 괴로웠다. 가슴에 닿는 감촉이 싫어 몸을 섞을 때면 상의를 벗지 않으려 했고, 그나마 나도 모르게 될 수 있으면 잠자리를 피했다. 그가 안으려 하면 잠에 취한 척하며 돌아누웠다. 그가 손을 뻗으면 잠결인 척 밀어내버리곤 했다.
싸움은 횟수를 거듭할 때마다 조금씩 격렬해졌다. 그가 화를 내면 나도 함께 화를 냈다. 시작이 어려웠을 뿐, 감정의 폭발이라는 것도 시간이 흐름과 함께 습관이 되었다. 머리가 뜨거워지며 이성이 마비되고, 분노가 끓어넘치는 대로 온몸이 그 폭발에 반응하는 순간, 그 불꽃 튀는 순간들이 지나고 나면 나는 허탈감에 잠긴 채 작업실에 주저앉아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따금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루하루를 인내하고 있는데, 네 몸을 견디며 살아주고 있는데,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니.
사람들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내 그림에서 무엇인가가 급속히 떨어져나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여유였다. 나와 세계 사이의 고요한 공간, 그 공간 속에서 한번 몸을 뒤틀었다 나오던 미소였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아침, 몸이 찌뿌드드해 운동이 필요하다는 그와 함께 집을 나섰다. 무더위가 시작되던 즈음이었다. 산책로의 철조망이 길게 찢어진 틈으로 들어가 북한산 등산로를 탔다. 말없이 오르막길을 오르다가 나는 멈춰 섰다.
왜 안 오는 거야?
위쪽 둔덕에 서서 짜증을 내는 그에게 나는 말했다.
딱따구리……
뭐?
참딱따구리를 봤어.
이렇게 천천히 걸어서 무슨 운동이 되겠어?
주먹만한 딱따구리가 나무 둥치를 쪼고 있었다. 새끼인지 부리가 연하고 작아, 바지런히 쪼아대도 나무 껍질은 까딱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를 따라잡았을 때 그는 여전히 찡그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를 여남은 발짝 앞세우고 나는 걸었다. 그때, 좁다란 등산로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남자를 봤다. 남자라기보다는 남자애라고 불러야 할, 기껏해야 스물한두 살밖에 되지 않았을 애띤 얼굴이었다. 연하게 물이 빠진 청바지를 입은 그애는 상체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눈부시게 흰 몸이었다. 근육이 붙은 것은 아니지만 군살이 없었고, 그렇다고 마르지도 않았다. 지극히 평범한 그 반라의 몸에서 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온몸의 핏방울들이 머리끝으로 몰려올라와 곤두섰다. 그 남자애의 가슴을 만지고 싶었다. 그 매끄러운 살갗에 젖가슴을 부비고 싶었다. 내 매끄러운 몸이 그애의 몸에 스치는 느낌, 부드러운 살끼리 찰지게 문질러지는 느낌을 맛보고 싶었다.
길이 좁았으므로 남자애의 어깨는 내 어깨를 가볍게 스쳐지나갔다. 새빨갛게 귓불을 물들인 채 나는 눈을 내리깔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오르막길이 끝났다. 전망이 트인 벼랑에 다다르자 예닐곱 명의 등산객들이 옹기종기 앉아 오이를 깎아 먹거나 수통의 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의 옆모습도 보였다. 그는 여전히 찡그린 얼굴로 벼랑 저편의 바위산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곁에 섰다.
그는 소매가 손목까지 내려오는 흰 폴로셔츠에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유난히 땀이 많은 체질이지만 그는 라운드 티를 입지 못했다. 폴로셔츠에 붙은 칼라는 와이셔츠보다 낮아 목덜미의 흉터가 더 넓게 드러났다. 바위 위에 걸터앉은 중년 남자들이 그것을 내려다보며 무엇인가를 수군대고 있었다. 그들은 진작 그의 얼굴을 알아봤고, 그 흉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벼랑 밑으로 빽빽히 우거진 나무들을 나는 굽어보았다. 무섭도록 둔탁한 초록색이었다. 그 무성한 잎사귀들이 마치 열대의 밀림처럼, 거대한 육식 동물처럼 대지를 집어삼키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디딘 땅이 서서히 사선으로 기울었다. 무엇인가가 벼랑 아래에서 내 몸을 흡입하는 것 같았다. 언쟁 끝에 그와 함께 말없이 차를 타고 달리던 어느 날, 그가 모는 핸들을 힘차게 틀어 중앙선을 넘고 싶었던 충동처럼, 두 사람의 운명을 일시에 끝장내버리고 싶었던 무서운 욕망처럼,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왜 그래?
나도 모르게 몸을 떨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재차 물었다.
왜 그렇게 떨어, 그 끝에서 불안하게?
항자외선 크림을 바르고 흰 챙모자를 쓴 그의 얼굴은 갓 다려 입은 폴로셔츠 위로 보얗게 피어나 있었다.
그의 셔츠를 찢고 싶은 충동이 치민 것은 그때였다. 그의 추한 몸뚱이를 햇빛 아래 발가벗기고 싶었다. 아까부터 그를 힐끔대는 중년 남자들을 향해 내보이며 소리치고 싶었다.
그 상상으로부터 물러서듯 나는 뒷걸음질쳤다.
……괜찮아. 피곤해서 그래.
그날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는 괜찮았다. 그는 먼저 씻으러 욕실로 갔다. 그와 내가 썼던 챙모자들을 장롱에 들여놓으려고 안방 문을 열자마자 나는 주저앉았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무릎걸음으로 기어 안방을 빠져나왔다. 차가운 거실 바닥에 모로 누워 눈을 감았다. 열이 오르고 있었다. 무엇으로 지지는 것처럼 정수리가 뜨거웠다. 마치 보이지 않는 짐승의 흡반이 그 지진 자리에 달라붙어 의식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따끔따끔한 감각을 뺨에 느끼며 나는 깨어났다.
어떻게 된 거야.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어 그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방금 때린 뺨을 어루만지려 하는 그의 흰 손을 밀어냈다. 고개를 돌려 안방을 보았다.
보였다. 여덟자 원목 장롱이 보이고, 그와 함께 누워야 할 마직 이부자리가 보였다.
들어가, 들어가서 누워.
그는 내 몸을 일으켰다.
그가 허리를 붙안고 이끄는 대로 안방에 들어선 순간 다시 사물의 윤곽이 지워졌다. 내렸던 열이 이마로 솟구쳐올라왔다. 토할 것처럼 명치께가 일렁였다.
놔!
나는 안간힘을 다해 그의 손을 뿌리쳤다.
제발 이거 놔!
물에 빠진 사람처럼 두 팔을 허우적대며 나는 벽을 붙들었다.
나가야겠어.
그는 놀란 것 같았다.
어딜 간다는 거야?
잠깐만,
나는 헐떡이며 말했다.
잠깐만 쉬었다가 나갈 거야.
눈을 감았다 떴다. 여전히 안 보였다. 스트레스와 같은 정신적 이유로 이런 증상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을 언젠가 들은 기억이 있었다.
침착해.
나는 자신에게 속삭였다. 심호흡을 했다.
괜찮아, 침착해.
너는 저 방에 들어가지 않아, 라고 다시 속삭였다.
평생, 다시는 저 이부자리에 눕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침착해.
조금씩 밝아졌다.
빛은 빛끼리, 어두운 것은 어두운 것끼리 엉기며 사물들이 차츰 제모습을 찾아갔다.
어딜 가는 거야, 그 몸으로?
어깨를 붙드는 그의 얼굴을 외면하며 나는 거칠게 현관문을 닫았다. 필사적으로 벽을 짚으며 층계를 내려갔다.
갈 곳이 없었다. 불광동 오빠네로는 가고 싶지 않았다. 결혼한 대부분의 친구들은 휴일이니 남편과 함께 있을 것이었다. 간혹 혼자 사는 친구들은 대부분 지방에 내려가 교편을 잡고 있었다.
저녁이 내리는 산책로를 따라 허전허전 걸어갔다. 계란 속껍질같이 희끗하고 맨질한 것이 눈자위 위로 어른거렸다. 땅 위에 무엇이 있는지, 내 발이 무엇을 밟고 가는지 알 수 없었다. 이따금씩 철책을 짚으며 쉬었다가 기력을 차린 뒤 다시 발을 내디뎠다.
노인들과 중년 여자들이 흩어져 앉아 있는 정자에 다다랐다. 거기 나무 기둥에 기대 걸터앉았다.
무성한 갈참나무숲이 내 앞에 펼쳐져 있었다. 계곡에 물 흐르는 소리, 아이들이 서로 물을 끼얹으며 질러대는 소리가 휴일 숲의 오후를 채우고 있었다. 풀벌레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그 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며 숨을 고르는 동안 시야가 차츰 맑아졌다. 온전히 사물들이 또렷해졌을 즈음, 나는 내가 돌아갈 곳이 집뿐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확인하고 있었다.
매우 중요한 진실 하나가 계시처럼, 마치 누군가 내 귀에 속삭인 것처럼 떠올랐다.
나는 처음부터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나는 그의 흉터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고, 이제 그 흉터 때문에 그를 혐오하고 있었다. 그의 흉터가 다만 한 겹 얇은 살갗일 뿐이라는 것을 나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안다는 것이 내 마음의 얇은 한 겹까지 벗겨내주지는 못했다.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죄가 있다면 모두 나의 것이었다.
삶이 얼마나 긴 것인지 몰랐던 죄. 몸이 시키는 대로 가지 않았던 죄. 분에 넘치는 정신을 꿈꿨던 죄. 분에 넘치는 사랑을 꿈꿨던 죄. 자신의 한계에 무지했던 죄. 그러고도 그를 증오했던 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가학했던 죄.
내가 현관으로 들어서자 그는 침통한 얼굴로 말없이 내 얼굴을 살폈다. 나는 타인처럼 서먹서먹하게 그의 얼굴을 보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버림받은 소년의 얼굴, 깊숙이 흉터를 숨긴 얼굴로 그는 오두마니 서 있었다.
그날 이후 우리의 관계는 바뀌었다.
나는 타인의 그것처럼 그의 흉터를 보았다. 타인에게 호의를 베풀듯이 그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세계가 다른 방식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모든 것을 낯설게, 그리고 오래 바라보았다. 선한 것과 악한 것, 의무와 책임과 방기, 진실과 거짓 따위가 내 눈앞에서 경계선을 무너뜨려갔다. 나는 그 혼란에 더 이상 놀라거나 당혹스러워하지 않았다. 다만 잠자코 바라보았다. 그 간격이 나를 구해주었다.
우리는 더 이상 싸우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하지 않았다. 다시 평화가 찾아오자 나는 다시 작업에 열중할 수 있었으며, 예전보다 더욱 내 일을 사랑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그랬듯 나는 평생 동안 손을 움직여 작업하며 살아갈 것이었다. 작업실에 온종일 틀어박혀 있으면 나는 자유로웠다. 몰입만큼 자유를 주는 것이 어디 있는가?
작업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건강을 관리해야 했다. 매일 아침 운동을 하고 작업 중간중간 스트레칭을 하고 영양소를 고려해 요리를 해먹었다. 그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항시 시한 폭탄을 운반하는 사람 같은 그의 성마른 성격이 자신의 흉터로부터 되도록 멀리 상승하려는 몸부림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했고, 그 긴장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때 폭발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화면으로 보기에 그의 얼굴은 편안하게만 보이지만 그의 귀에 꽂힌 이어폰으로는 뉴스룸의 아우성이 끊임없이 뛰어든다는 것을, 매일 치르는 전쟁과도 같은 뉴스를 마친 뒤 몰려드는 피로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온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움켜잡아 도로 던져놓을 뿐 결국 손아귀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허탈함도 이해했다.
가끔 뉴스센터에 앉아서 물고기처럼 입만 달싹거리는 꿈을 꿔…… 아무리 입을 움직여도 목소리가 안 나와. 일곱시 뉴스 할 때가 좋았어, 프라임 타임은 힘들어. 칸칸이 불켜진 아파트 창문들을 생각하면 어지러워. 그 사람들이 모두 날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시간이 흐르자 기분이 좋을 때면 어린아이와 입맞추듯 그에게 소리내어 키스할 수 있었다. 농담을 건네고 함께 웃기도 했다. 그의 몸이 추하게 느껴질 때마다, 내가 품은 혐오를 보상하기 위해 더욱 친절하게 대했다. 아주 이따금씩이었지만 불꺼진 방에서 몸을 섞기도 했다.
그렇게 조금씩 정을 붙이며 살아나갈 수 있으리라고, 어떻게든 견디어갈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끼리 사는 것은 시간 낭비잖아요'라고 그 여자는 말했다. 그런가, 나는 시간을 낭비해온 건가.
그 여자의 전화를 받은 이월에 나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뾰족한 것에 대해 비정상적으로 예민해진 감수성이었다. 이를테면 베니어판 문에 사진 엽서를 붙였다가 엽서만 떼고 압정은 안 빠져서 그대로 둔 것이 있었는데, 어느 날 아침 그것을 뜻없이 바라보다가 문득 찔린 나무의 고통을 느꼈다. 실제로 내 뒤통수 어느 부분의 피부가 아팠다. 사과 꼭지를 도려내다 말고 과도 끝이 얼마나 날카로운가에 몸서리를 치기도 했으며, 끝부분이 부러진 라디오 안테나를 보면 눈이 시렸다.
시간 낭비.
작업에 몰두해 있다가도 문득문득 와이셔츠 핀처럼 머리에 꽂히는 여자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젓곤 했다.
4
삼월 들어 유난히 자주 체를 한다 싶더니 급기야는 하루 걸러 한 번씩 토악질을 했다. 오십 킬로그램 주변을 오르락내리락하던 체중이 두 주 사이 사십삼 킬로까지 떨어졌다. 슈퍼마켓이나 세탁소 아낙들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나에게 임신했느냐고 물었다. 그런 가능성은 없었다. 위 내시경 검사를 받아봤지만 위장에는 이상이 없었다.
"백옥 같네."
내시경 모니터를 보고 있던 젊은 의사가 간호사를 향해 중얼거렸다. 마취 주사 때문에 칼칼해진 목을 다듬으며 탈의실에서 나온 나에게 의사는 말했다.
"한의학으로 치료를 받아보세요. 아니면 정신 치료를 받아보시든가."
나는 한의원에도 정신과에도 가지 않았다. 중한 병에 걸린 것만 아니라면 됐다. 정신적 이유야 내가 알 만한 것이었으니 상황에서 벗어나오면 몸도 나을 것이었다.
나는 끝을 기다리고 있었다. 매일 조금씩 짐을 쌌다. 마지막까지 작업을 하기 위해 화구 일습만 남겨놓을 생각이었다. 건강 때문에 미뤄놓은 일이 쌓여 있었다. 언어 장애 아동 치료서에 넣을 삽화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지만, 혼자 지내게 되면 아무래도 생활이 불안정할 터여서 알음알음으로 일거리들을 수소문한 탓에 동화 일러스트부터 에어로빅 책자까지 맡아만 놓고 손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 그 동안의 저축으로 작은 원룸 아파트를 얻을 비용은 되었지만, 내 일에 안정성이 없는 만큼 여유 자금이 있는 것이 좋을 듯해 단독주택 이층의 방 한 칸을 계약했다. 이삿날은 사월의 둘째 일요일이었다.
그는 거의 매일 밤 자정 너머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한데 오히려 피로를 덜 타는 것 같았다. 아침이면 예전보다 일찍 일어났고 얼굴에는 생기가 반짝였다.
여자는 그가 일하는 방송국 교향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라고 했다. 음대 대학원을 갓 졸업해 지난해 입단했으니 나이는 어리지만 맏딸이라 성숙한 성격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명문 대학의 경제학 교수에 어머니는 정신과 의사, 남동생은 의대생이라고 했다. 그에게 어울리는 사람을 이제야 찾은 것임을 나는 알았다.
그는 초라한 것을 싫어했다. 머뭇거리는 태도를 싫어했고 가난한 동네를 싫어했다. 그는 화려한 것, 아름다운 것, 깨끗하고 쾌적한 것들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는 뒤돌아보는 것을 싫어했다. 그를 후진시킬 수 있는 어떤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의 내면에는 불이 있었다. 모순되는 말 같지만 바로 그 불 때문에 그는 냉정할 수 있었다. 크렘린이니 포커 페이스니 하는 방송국에서의 그의 별명은 바로 그 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언젠가 그는 말했었다.
고등학교 때 생각했어, 대학 입시에 성공하면 내 모든 것이 보상되는 거라고. 대학 졸업반 때는 방송국에 입사하면 모든 것이 보상된다고 생각했지. 실없어 보이는 친구들과는 어울리지 않았어. 시시한 연애도 하지 않았어. 나는 더 높이 올라갈 생각이었으니까. 아주 높이 올라간 상태에서 뒤돌아봤을 때 후회될 만한 짓들은 하고 싶지 않았어.
불과 냉정함이 함께 있듯, 그에게는 또한 제스처와 진실이 함께 있었다. 때로 그의 진지한 표정을 브라운관에서 보며, 나는 그가 정말 자신이 하는 말에 저토록 모든 것을 걸고 있을지 의심하곤 했다. 그는 지나칠 만큼 단순하게 상승을 욕망했으며, 동시에 지나치게 복잡하게 계산하고 의심하고 이미지를 관리했다. 그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면들이 그의 안에서 자연스럽게 용해돼 있었다.
그는 가을 학기부터 모교의 대학원에서 신문방송학을 공부할 계획이었고, 학기가 시작하기 전까지 방송가 이야기를 써서 넘기기로 출판사와 계약을 맺은 상태였다. 일단 목표가 생기면 그는 최선을 다했다. 지금 그가 책을 쓰는 것보다 여자를 만나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는 것은, 그녀를 얻기 위해 그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예전에 나를 만날 때 그랬던 것처럼 그는 완벽한 애인일 것이다. 그녀를 얻고 나면 다시 자신의 계획에 철저히 충실할 것이다.
'그분을 사랑해요'라고 그 여자가 말했을 때 나는 그녀를 반쯤만 이해했다. 방금 카탈로그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훤칠한 키에, 협찬으로 옷을 빌려입을 필요가 없을 만큼 자신이 직접 고르고 사는 일을 즐기는 세련된 차림은 눈에 띄게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내가 매혹되었던 것처럼 그녀도 매혹되었을 것이다. 진실한 눈길에 끌리고 정확한 말법에, 은은히 스며나오는 사향(麝香)에 끌렸을 것이다. 그러나 매혹에서 사랑까지의 거리는 얼마만큼일까. 왜 나는 '그분을 사랑해요'라고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고, 그녀는 그토록 쉽게 그 말을 몸 밖으로 내보낼 수 있었을까.
나는 그가 잠들 때까지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다가 두시쯤 거실 소파에 누워 담요를 덮었다. 그것이 오히려 편안해, 한번도 깨지 않고 아침까지 꿈 없이 잤다. 그런데 왜 자꾸만 위장이 탈을 일으키는 것인지, 그것만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삼월 중순의 밤에 나는 그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위장이 조금씩 달래지고 다시 작업에 몰입하기 시작하던 즈음이었다. 뉴스를 끝내고 바로 들어온 그를 맞았는데, 그간 집에서 입을 여는 일이 없었던 그는 그제야 내 얼굴을 자세히 살핀 모양이었다.
"얼굴이 왜 그렇지?"
"……내 얼굴?"
"백짓장 같은데. 어디 이상이 있는 거야?"
"위 내시경을 찍어봤어."
"뭐래?"
"백옥 같대. 아무 이상 없대."
"다행이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는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럼 어디가 이상이라는 거야?"
"이상 없대. 마음의 병이래."
그는 멍한 눈으로 물었다.
"마음이, 괴로워?"
마치 나에게 마음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는 듯 그의 어조는 강한 의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그는 더욱 당혹스러운 얼굴로 나에게 등을 보이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응, 응, 바로 나갈게' 하는 소리가 문 안쪽에서 들리더니 그는 트렌치 코트를 도로 걸치고 나왔다.
"잠깐 나갔다 올게."
나는 현관문을 잠갔다.
까닭 없이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거실을 서성거리다가 나는 거울 앞에 멈췄다. 나에게 무심한 그가 발견해냈을 만큼 축난 얼굴을 들여다봤다. 사람의 얼굴이 짧은 기간에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 것인지, 코는 두드러지고 눈두덩도 뺨도 꺼져 생명의 빛을 찾아볼 수 없는 낯선 얼굴이 거기 있었다.
문득 나는 거울에서 물러섰다. 막연하게 몸을 이끄는 느낌에 의지해 거실 창문을 열었다.
외등이 환하게 비치는 주차장 입구에 트렌치 코트를 입은 그가 서 있었다. 신형 모델의 갈색 소형차 앞문에 기대 서서 한 여자가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길고 풍성한 갈색 머리가 곱슬곱슬하게 허리까지 흘러내린 키 큰 여자는 연회색 수트 차림이었다. 외등이 정면으로 그녀를 비추는 데다 내가 내다보는 창에서부터 직선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그녀의 뚜렷한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있었다.
목소리만큼이나 아름다운 얼굴을 한 여자였다. 눈물에 젖은 뺨이 불빛에 반짝였다. 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들은 언쟁을 하고 있었다. 여자가 무엇인가를 하소연했고 그는 변명하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음성이 조금씩 높아졌다.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봐."
고요한 밤공기를 타고 우렁우렁 그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그는 여자의 어깨를 가볍게 두어 번 두들기더니 양팔로 안았다. 그에게 안긴 그녀의 얼굴이 그의 어깨 위로 보였다. 비록 울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멀리서도 똑똑히 알아볼 수 있는 빛이 있었다. 그것은 사랑에 빠진 사람의 광채였다.
나는 창문을 닫았다. 부엌 쪽으로 걸어가다 말고 거울 앞에 다시 섰다.
내 얼굴은 조금 전과 똑같았다. 놀라지도 괴로워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평온한 얼굴에는 어딘가 균열이 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랜 인내와 자책으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금이 벌어지고 귀퉁이부터 허물어져온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왜 나는 분노를 느꼈던 것일까.
나에 대한 미안함보다 자신의 행복할 권리를 주장하는 그에게 분노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난 삼 년 동안 한 번이라도 기꺼이 나와 몸을 섞은 적이 있었는가'고 한 달 전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었다. '더러운 벌레 피하듯 몸을 피하곤 했던 사람이 누구였느냐'고, '그럴 때마다 남모르게 얼마나 비참한 기분이었는지 아느냐'고도 했었다.
그애는 날 원해. 상대방이 날 원한다는 걸 느낀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건지, 까마득히 잊고 지냈어.
나는 그의 말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뭔가.
열두 살 즈음이었다. 멀쩡하게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이 내 몸 위로 떨어질까봐 강박적으로 겁을 먹은 적이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 자는 방은 비좁아, 떨어질지도 모르는 형광등을 피하려면 벽에 몸을 붙여야 했다. 그렇게 잠을 청하고 있으면 어머니가 씻고 들어와 나를 가운데로 밀어주곤 했다. 어머니가 잠들기를 기다려 나는 다시 벽에 몸을 붙였다. 형광등이 어머니에게 떨어지는 것은 괜찮았다는 것은 아니다. 형광등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내 걱정이 다만 이상스런 불안일 뿐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데도 그 마음을 멈출 수 없었다. 내가 잠들어버린 사이 어머니가 내 몸을 끌어 형광등 바로 밑자리에 옮겨놓을까봐, 나는 밤새도록 깊은 잠에 못 들며 작은 소리에도 흠칫흠칫 눈을 뜨곤 했다.
그렇게 초조한 마음으로, 나는 그에게서 되도록 멀리 몸을 피하기 위해 장롱에 바싹 붙어 잠을 청하곤 했다. 그의 손길이 내 가슴으로 뻗어올 것을, 그의 몸이 내 몸 위로 포개어질 것을 겁내며 선잠에 들었다.
그렇게 삼 년이 흘러갔다.
내가 분노한 것은 바로 그렇게 몸뚱이를 둥글게 말고 누워 있었던 나 자신에게였다.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은 나 자신이었다. 만일 그것이 타인이었다면, 나는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
거울 속의 나는 아무런 동요 없는 사람의 침착한 모습으로 꼿꼿하게 서 있었다.
나는 작업실로 들어갔다.
내가 이제 마지막으로 그려야 할 컷은 좀처럼 말을 하려 하지 않는 아이를 위해 말타기 놀이를 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담긴 다섯 컷 만화였다. 출판사에서 준 대본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말입니다. 이히힝.'
아빠가 몸을 엎드리고 말한다. 아이, 까르르 웃는다.
'나는 말입니다, 타세요.'
아이, 아빠의 등에 올라탄다.
'이히힝, 무거워요.'
아이, 미소를 지으며 가만있는다.
'가자, 해야 가지요. 빨리 가요.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글씨는 뒤로 갈수록 커진다)
아이, 까르르 웃는다. 처음으로 입을 열어 외친다.
'가자!'
아빠의 등에 올라탄 아이가 처음으로 말을 뱉으며 두 팔을 번쩍 올리게 할지, 두 손을 아빠의 어깨에 얹고 엉덩이를 하늘로 쳐들게 할지를 고민하며 나는 갱지에 이리저리 윤곽을 그려보았다. 아이의 까르륵 숨넘어가는 웃음이 나를 위로해주었다. 첫 삽화에서부터 줄곧 아이를 위해 눈물겹게 노력해왔던 젊은 아버지의 기쁨이 나를 위로해주었다.
아이의 손을 번쩍 들게 하고 엉덩이도 약간 띄워서 아이가 펄쩍 날아오르는 것처럼 해야겠다. 아빠의 몸까지 함께 날아오르려는 것처럼 해야겠다.
선을 그려가는 동안 그가 열쇠로 현관문을 따고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오랫동안 욕실을 쓴 그가 안방으로 들어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나는 검지손가락 끝이 얼얼해질 때까지 펜을 거머쥔 채 기다리고 있었다.
고요해진 뒤 나는 거실로 나왔다.
불을 끄자 희고 서늘한 빛이 소파 위로 어렸다. 커튼을 치기 전에 창밖을 내다보자, 열하루쯤 되었을 달이 거대한 은색 거미줄 같은 빛으로 뒷숲을 에워감고 있었다.
나는 겉옷을 입은 채 소파 위에 몸을 누이고 담요를 목까지 끌어올렸다.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누군가의 발소리처럼 머리 위에서 저벅거렸다. 피로가 밀려오는데도 잠이 오지 않아, 시간 반 가까이 뒤척인 뒤에야 눈을 붙일 수 있었다.
그날 밤 다시 아기 부처의 꿈을 꾸었다. 캄캄한 동굴 속에서 흔들리는 흰 초의 불빛 아래 얼굴은 음산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었다. 얼굴 주변의 붉은 진흙을 떠 그 위에 덮었다.
널 묻어버릴 거야.
묻어버리겠어.
흙을 덮고 힘차게 밟아 도독한 무덤을 만들었는데, 발을 떼고 나자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살아난 얼굴이 나를 올려다봤다. 일그러진 이마, 입꼬리를 슬쩍 치켜올린 웃음, 차갑게 빈정대는 듯한 눈꼬리가 또렷이 도드라져 있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양손으로 얼굴 주변의 흙을 갈퀴질했다. 붉고 끈적끈적한 흙덩이를 떼어 그 얼굴 위로 뭉갰다. 일어서서 운동홧발로 짓이겼다.
묻어버리겠어.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지겨운 것, 지긋지긋한 것.
신발을 뗄 때마다 얼굴은 보아란듯이 되살아나 있었다. 땀흘리는 나를 빈정대듯 입꼬리를 치켜들고 있었다. 마치 내 운동화 바닥에 그 얼굴이 새겨져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 발로 짓뭉갤 때마다 흙 무덤 위로 그것이 찍히는 것 같았다. 나는 신을 벗어 내던졌다. 땀에 젖어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올렸다. 맨발꿈치에 몸무게를 실어 그 얼굴을 짓이겼다.
내 몸이 앞으로 고꾸라진 것은 그때였다.
발이 떼어지지 않았다. 발바닥에 엉긴 찰진 흙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아랫입술을 악물었다. 네 발로 엎드린 채 다리를 뒤틀었다.
떨어져, 당장 내 몸에서 떨어져.
몸부림치면 칠수록 흙은 외려 더 찰지게 엉겼다.
아니야.
고함치려 했으나 목구멍이 돋워지지 않았다.
아기 부처가 아니야.
입을 움직일 수 없었다. 한번도 말을 떼어보지 않은 어린애처럼 나는 입술을 다문 채 체머리를 떨고 있었다. 숨이 막혔다. 무엇인가가 목을 죄어오는 것 같았다. 나는 진흙으로 범벅이 된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입술을 거머잡았다. 온 힘을 다해 당겨 뗐다.
동굴이 사라졌다. 모래 벌판 위로 무수한 창(創) 같은 빛살이 내리꽂혔다.
5
"그 스님이 그러더라. 관세음보살은 내 속에 있다고. 내 몸이 용서하는 마음으로 그득해지면 그게 바로 관세음보살이라더라."
다섯 장째 관음초를 베끼는 나에게 어머니가 말했다. 어머니는 이날따라 말씀을 제법 많이 하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베끼는 보살초를 보았다. 고작 몇 주 사이 어머니의 붓질은 과연 더 가벼워져 있었다. 여전히 공들여 베끼기는 하지만 속도가 빨라졌고 붓놀림이 자유로워졌다.
용서라니. 마치 쇠붙이로 만들어진 사람처럼 평생을 꼿꼿이 살아온 어머니는 어디에 용서하고 말고 할 것들을 쌓아두고 있었나.
후회가 된다…… 다 후회가 돼.
이틀 만에 의식을 되찾았던 재작년 가을, 입원실 침대맡에 모여 앉은 자식들에게 어머니가 처음으로 던진 말이었다. 뭐가요 어머니, 하고 오빠가 거푸 물었으나 어머니는 대답 없이 눈을 감아버렸었다.
어머니가 후회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삼천 장씩 불화를 베끼는 것으로 무슨 마음을 달래보려고 하는 걸까.
그 가을과 겨울 동안 재활원을 통원하면서 어머니는 느린 속도로 몸을 회복해갔다. 이따금 불광동을 찾는 나에게 어머니는 우리말로 번역된 불경들을 읽어달라고 하곤 했다. 눈을 지그시 감고 귀를 기울이다가 이따금 어머니는 코를 풀었다. 우시는가, 싶어 놀란 나는 그때마다 읽기를 멈췄으나, 어머니의 눈가가 말라 있는 것을 확인한 뒤 계속해서 읽어가곤 했다.
어머니가 지팡이에 의지해 걸을 수 있게 된 것은 지난해 봄이었다. 재활원 통원 대신 오빠와 함께 운동장 돌기를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나 같은 사람도 죽어서 다시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다면……
늦은 봄날 아침, 운동장 세 바퀴를 다 돈 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어머니는 오빠에게 말했다고 했다.
……그때에는 나도 수도를 하고 싶구나.
관음의 몸을 다 그렸으니, 이제 목 위부터 마저 베껴야 할 얼굴이 화선지 아래 아련히 드러나 있었다.
어디서 이 묵묵한 인내가 나오나.
붓에 먹을 묻히며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 이토록 고요한 얼굴인가.
관음의 입술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귀가 퍽이나 예민한 이인가 보았다. 빗소리를 듣다가 깨달음을 얻었고, 늘 세상 사람들의 소리를 관(觀)하고 있어 괴로이 부르는 음성을 듣는 즉시 곧 구제해준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그이가 든 연꽃은 사람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불성을 나타낸다고도 했다. 그 꽃이 핀 것은 불성이 드러나 성불한 것을 뜻하고, 그 봉오리는 불성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장차 필 것을 나타낸다고 했다. 그러니까 내가 그리는 연꽃 봉오리는 아직 번뇌에 물들지 않은 것이었다.
얼마 전 관음재 날 아침 어머니와 새언니는 집에서 가까운 반야사에 갔었는데, 법회가 끝나고 절뚝절뚝 걸어나온 어머니는 총무처에 들러 초파일 연등을 접수하면서 관음보살이 들고 있는 연꽃이 뭘 뜻하는 것인지 물었다고 했다. 마침 주위에 다른 스님이 없어 그랬는지, 접수계를 맡은 앳된 사미승이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었다고 했다. '그러면, 관세음보살님이 내 맘에 연꽃을 시들지 못하게 해주는 거랍니까?' 하고 어머니가 묻자 사미승은 귓불을 붉히며 '그건 시들거나 죽거나 하는 게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고 했다.
"그 스님, 너보다도 네댓 살쯤 어려 뵈더라마는."
말이 길어져 숨이 찬지 어머니는 탁 하니 감초 냄새 섞인 한숨을 뱉었다.
몸 속 비밀스러운 곳에 차곡차곡 엎드려 있던 어둠이 더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오는 것 같은 저 소리를 나는 오래 전부터 들어왔다. 바늘귀에 실을 끼우고 나서, 동정을 달다가, 골무를 만들다가, 마고자에 호박 단추를 달다 말고 어머니는 저렇듯 깊은 숨을 내쉬곤 했다. 실밥을 뭉치고 놀며 옆에서 뒹굴던 어린 나는 그때마다 어쩐지 내 몸의 기운까지 다 빠져나가는 듯해 거꾸로 숨을 들이쉬어보곤 했다. 허공에 토해져나온 어머니의 몸 속 어둠이 도로 내 목구멍 속으로 몰캉몰캉 삼켜지는 것 같은 기분은 딱히 좋지도 싫지도 않은 야릇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새 화선지를 보살초 위에 얹었다. 허리를 바로 세우고 붓질을 시작했다. 나는 관음의 턱과 갸름한 얼굴 선을, 미소를 머금은 입술을 베꼈다.
"아직 끝나려면 멀었어?"
마당에 묻어둔 김치를 꺼내가지고 들어오던 새언니가 물었다. 나는 붓질을 멈췄다.
"김치 좀 가져갈래?"
"아니오."
"몇 포기만 가져가. 더 시어지기 전에 냉장고에 넣어놓고 먹어."
새언니의 주황색 고무장갑에 묻은 빨간 김칫물이 금방이라도 거실 바닥에 떨어질 듯했다.
"정말 괜찮다니까요."
"뭘 준다고 하면 '그럼, 그럴까?' 하고 좀 받어. 원, 주는 사람 성의도 생각해야지!"
그녀의 얼굴은 진심으로 서운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날 오전, 마감 기한에 겨우 맞춰 출판사에 도착한 나는 원고만 건네주고 바로 거리로 나왔었다. 앓기 시작한 뒤 시내에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길고 스산했던 겨울이 어느 사이 끝나가고 있었다. 여자들의 옷은 얇아져 있었고, 대기에는 은밀한 기쁨의 기운이 번져 있었다. 아직 나무들은 앙상하게 말라붙어 있었고 푸른 것들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무엇인가가 달라진 것만은 분명했다. 철 지난 겨울 코트 주머니에 두 주먹을 찔러넣은 채, 나는 부신 듯 눈살을 찌푸리며 인도 가운데 서 있었다.
내가 연락도 없이 불광동 대문 앞에 다다랐을 때, 마침 쓰레기를 내놓으러 나왔던 새언니는 내 얼굴을 보고 '뭐야!' 하고 흡사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혹시 임신한 게 아니냐며 가게 아낙들과 똑같은 질문을 했고, 그 아낙들과 똑같이 실망했다.
"큰 병원에 가서 제대로 종합 검진을 받아보든지 하지, 이게 무슨 일이야?"
함께 현관에 들어서며 그녀는 언성을 높였다.
"의료 보험료는 괜히 내? 이럴 때 쓸려구 내는 거 아냐."
나는 웃었다.
"다 나은 거라니까요, 아무렇지도 않은데 병원에 가서 뭐 하게요."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어머니는 수초 간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을 뿐 눈을 내리깔고 불화 그리기를 계속했다. 내가 어머니 옆에 나란히 신문지를 깔고 먹을 갈기 시작하자 새언니는 근심스러운 얼굴로 뒷짐을 지고 서서 나를 내려다봤다. 한참 있다가 그녀는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진달래 꽃눈 나왔던데, 그림 다 그리면 바람 쐴 겸 어머니 모시고 능선 따라 천천히 가봐, 어머니 요새는 산길도 잘 다니셔."
산길은 외지고 질척질척했다. 어머니의 희끗희끗 센 머리털을 보며 나는 따라 걸었다. 십팔 개월 전 바람을 맞아 절뚝거리는 어머니도, 체중이 한꺼번에 빠진 나도 느리기는 마찬가지여서, 팍팍한 걸음으로 한발 한발을 힘겹게 내딛고 있었다.
"이 길을 따라서 계속 가면 너 사는 동네가 나온다더라만. 이렇게 걸어서는 닷새가 걸릴지 엿새가 걸릴지 모르겠구나. 되돌아가려고 하면 꼭 산 저쪽에 너를 남겨두고 가는 것 같아서 마음이 짠할 때도 있었다."
나무 등걸을 잡고 쉬는 나를 돌아보며 어머니는 뜻밖의 말을 했다.
"집에서도 이 산을 보고 있으면, 저 뒷자락에 네가 살고 있으려니 싶으니…… 이 산이 너를 나하고 이어주는 것 같아 고맙기도 하고, 더 커 보이기도 하더라."
평생 딸에게 곰살궂은 말을 건네본 적이 없는 어머니였기에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몸둘 바를 알 수 없었다. 어머니가 북한산을 볼 때마다 내 생각을 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어머니두,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나는 땀을 닦는 척 어머니의 눈길을 피했다.
계곡을 따라 오르며 길은 점점 가팔라졌다. 질척한 흙바닥에서는 썩은 낙엽 냄새라고만은 할 수 없는 독특한 흙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새로운 계절의 냄새였다. 냄새를 깊이 마셔보려고 잠시 걸음을 멈췄을 때, 어머니는 돌아보며 나를 향해 조용히 웃어 보였다.
자신도 힘들면서 지어 보여주는 그 웃음을 나는 오랫동안 보아왔다. 그것은 너무도 강인하고 속내가 깊어, 오히려 보는 사람을 한 발짝 밀어내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중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나는 내가 어머니의 친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곤 했었다. 친엄마라면 저렇듯 나를 쓸쓸하게 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 의심을 더 이상 하지 않은 것은, 내 이목구비나 체형이 어머니를 고스란히 빼닮았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나이가 된 뒤부터였다.
'조금 더 천천히 걸으세요, 어머니도 힘드실 텐데' 하고 혀끝까지 치밀어오른 말을 삼키며 나는 후들거리는 걸음을 재촉했다. 겨드랑이만 땀에 젖었던 것이 이제 등허리까지 젖었다. 이마에 맺혔던 땀이 귓가를 타고 내려와 목덜미로 떨어졌다.
이 산행에서 나는 어머니에게 말할 참이었다. 그와의 관계가 끝나가고 있는 것을 새언니가 듣지 않는 곳에서 간략하게나마 털어놓고 싶었다. 어머니가 까닭을 묻는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되었어야 했던 것을 어리석게 버텨왔을 뿐이라고 대답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무슨 말로 그 이야기의 처음을 끄집어내야 할까.
한 얼굴이 불현듯 눈앞의 진흙 바닥에 나타났다.
눈을 비볐다. 선명하게 드러났던 그 얼굴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긴 얼굴에 치켜올라간 눈, 빈정대는 입매. 탐욕과 증오에 찬 표정. 빚으면 빚을수록 냉혹하게 굳어가던 얼굴. 마치 생시에 보았던 것처럼 생생한 얼굴이었다.
"어떻게, 늙고 병든 나보다 더 못 오는 거냐?"
열댓 발짝쯤 위에서 돌아보고 있는 어머니의 구부정한 몸을 올려다봤다. 커렁커렁한 그녀의 음성이 이명처럼 귓속에서 울렸다.
바람이 일었다. 마른 오리나무 가지들이 흔들렸다. 어디선가 솔향이 날아왔다. 서늘하게 흔들리는 나목들의 뼈대를 나는 봤다.
"먼저 가세요, 어머니."
"조금만 더 가면 약수터가 나온다. 거기서 물만 떠먹고 내려가면 된다."
"금방 따라갈게요."
어머니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올려다보며 나는 서 있었다.
어머니는 냉정한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고통을 호소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어린 내가 덥거나 춥다고 칭얼댈 것 같으면 '너는 참을성이라고는 없구나' 하고 정색으로 나무랐다. 그녀는 내 어리광을 받아준 적이 없었다. 아이가 한 잘못이라고 해서 특별히 용서해주지도 않았다. 혀를 쏙 빼거나 손톱을 질겅질겅 씹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아홉 살쯤이었나, 열이 끓어 어머니와 함께 소아과에 갔을 때 주사를 맞기 싫어 내가 뒷걸음질을 치자 어머니는 '겁내지 마라'고 무뚝뚝하게 타일렀다. 마치 아이가 아닌 어머니 또래의 여동생에게 말하듯이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나가는 아픔 하나 견디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나는 흙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이렇게 체력이 떨어질 수도 있나.
내 얼굴을 보며 백짓장 같다고 하던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외등 빛을 받아 반짝이던 그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여자를 힘껏 끌어안던 그의 뒷모습이, 하루하루 눈에 보이게 활기를 띠어가고 밝아져가던 그의 표정이 떠올랐다.
나는 행복할 거야, 라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행복할 거야, 그앤 당신과 달라.
당신하고 수속이 끝나는 대로 곧 그애를 아버지께 보일 생각이야.
나는 고개를 수그렸다. 바짝 마른 내 몸뚱이가 마치 공중에서 조감하듯 눈앞을 스쳤다. 나는 한갓 짐승이었다. 땀에 젖어 산비탈에 엎드린, 누더기 같은 한 겹 가죽만 남은 병약한 짐승이었다. 그 가죽 안에서 악취 나는 거품처럼 부글거리고 있는 것은 오래 묵은 분노와 후회와 증오, 억울함과 자책과 부끄러움이었다. 그것들이 내 살을 속에서부터 조금씩조금씩 부식시켜왔다.
"선희야."
무성한 마른 나뭇가지에 얼굴이 가려진 어머니가 등성이 위에서 나를 불렀다.
"……선희야?"
내 얇은 마음 한 겹, 누덕누덕 기워진 죄와 후회들을 짊어진 채로는 더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을 그때 나는 알았다. 그것들이 쇠로 만든 추처럼 내 몸에 올라타고 있었다. 내 허리를 굽게 하고 허파를 쭈그러들게 하고 등짝을 식은땀으로 적셨다.
아까부터 내 앞에 서 있었을 키 작은 진달래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새언니의 말대로 과연 밝고 붉은빛이 붓 같은 꽃눈 끝에 맺혀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옆으로 단단하게 뻗어간 굵은 상수리나무 뿌리를 거머쥐었다.
생각을 하지 마라.
아무 생각도 하지 마.
그러자 발에 힘이 갔다.
그날, 결국 그에 대해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한 채 나는 어머니를 앞세우고 산을 내려왔다.
6
사월이 가까웠다. 에어로빅 책자의 컷은 성공이었다. 조악한 그림 원본과 동작 설명에만 의지해, 저마다 다른 미소를 띤 여자들을 힘찬 동작으로 그려넣었다. 별기대 없이 빈약한 삽화료로 작업을 맡겼던 작은 출판사의 사장은 흡족해하며 다음 일거리를 예약했다.
올 컬러로 들어가는 동화 일러스트도 내 손을 바쁘게 했다. 환상적인 내용이라 흥미를 끌었으며, 다채로운 색감을 좋아하는 내가 마음껏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좋은 점이었다.
생각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리라는 단순한 다짐이 내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단순하게 살아갈 것이다, 라고 나는 다짐했다. 규칙적으로 일어나고 밥 먹고 작업에 몰입하며 감정의 기복 없이 살아갈 것이다. 그와의 생활로부터 스며나왔던 모든 착잡한 감정과도 이제 작별이었다.
살아 있는 동안은 이런 순간이 오지 않을 줄 알았다. 내가 그를 버리지 않는 한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그리고 나는 누군가를 버릴 만한 인간이 못 되니 이 생활이 끝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둘 중 한 사람이 죽지 않는 한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얼마나 어리석었나. 그 어리석음으로 서로를 망쳐가면서도 그것을 몰랐나. 그것을 인내라고, 혹은 연민이라고 부르며 믿었으나, 과연 누구를 위한 인내였나.
그와 나는 이미 법률적으로 타인이었다. 당장 다음날에라도 떠날 수 있도록 화구 일습과 옷 몇 벌만 남겨두고 짐을 모두 꾸린 채 이사일을 기다렸다. 막상 떠나려고 하니 이 동네에 꽤 정이 들어 있었던 것을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저축이 불어가면서 그는 신도시의 아파트로 들어가고 싶어했었다. 바쁘게 살아가는 그에게 이 동네는 갑갑하고 불편한 곳이었다. 용역 회사를 운영한다는 주인이 집을 담보로 대출해간 돈이 아니었다면 전세가 진작 나갔을 것이고, 그랬다면 아마 일 년 전쯤 이사를 했을 것이다. 한 달 두 달 기다려달라는 주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여태까지 끌려온 것이 그에게는 큰 불만이었다.
그러나 마을버스 한 대가 지하철 역으로 연결될 뿐인, 마치 지방의 소읍(小邑)처럼 고요한 이 변두리 동네는 나에게 편안한 공간이었다. 여름날 오후 모래 먼지 속에서 털털거리며 내려오는 마을버스를 기다리고 있자면 더욱 그랬다. 시내로 외출하면 마치 시골 사람이 오랜만에 대처에 나간 것처럼 피로했다. 탁한 공기며 질주하듯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이며 도로마다 빼곡이 들어찬 자동차들의 소음이 내 얼을 빼놓았다. 그때마다 나는 이 동네의 적요한 저녁을 생각하곤 했다. 어서 내 방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 방에서 하다 나온 작업을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바쁜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해 쫓기듯 잰걸음을 치곤 했다.
동네가 조용한 만큼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성격도 태평스러운 편이었다. 들락거리는 아이들의 이름을 모두 외고 있다는 것이 자랑거리인 슈퍼마켓 주인 여자, 웃을 때 고춧가루 낀 앞니가 드러나는 세탁소 남자, 늘 빨갛게 튼 뺨을 하고 사십의 나이에도 소녀처럼 말꼬리를 흐리는 채소가게 여자, 손두부와 비지를 만들어 파는 욕쟁이 노파, 비디오 대여점의 화장기 없는 젊은 여자까지, 지난 삼 년 동안 특별히 정을 들이려 애쓴 바도 없었던 그들이었으나,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혀끝이 씁쓸했다.
나에게는 그렇게 어리석고 약한 면이 있었다. 끝내는 일에 대체로 미숙했다. 친구를 만나면 먼저 일어나자는 말을 못 했고,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드러내지는 않으나 필요 이상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쓰지 못하는 물건들을 과감히 버리지 않아 집 안은 어딘가 무질서했고, 옷이나 신을 사면 모양이 변할 때까지 입고 신었다.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죽음을 잘 받아들이지 못해, 오랫동안 은밀한 충격으로 그 마지막 모습들을 기억했다. 얼굴도 희미한 아버지를 잃은 나이가 다섯 살이었기 때문일까. 내가 먼저 그를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도 그 우유부단한 습성 때문이었을까.
그를 처음 소개받았던 오후, 채광이 좋은 커피 전문점의 창가 테이블에 두 사람만 남고 나자 그는 '말없고 착하고 따뜻한 분이라던데…… 실은 그게 제 이상형입니다'라고 말했었다. 그의 표정은 퍽 진지했다. 중개 역할을 맡은 남자 선배의 그 상투적인 소갯말에 이끌려 그는 그 자리에 나온 모양이었다.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요'라고 내가 해명하듯 말하자 그는 웃었다. 느긋한 듯하나 어딘가 예민하고 초조해 보이는, 따라 웃어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웃음이었다.
착하고 따뜻한 게 아니라, 고지식하고 우유부단한 걸 거예요.
글쎄요, 그걸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도 있긴 하겠지요.
약간 긴장한 음성으로, 그러나 정확한 말씨로 그는 대꾸했다. 정색을 한 그의 눈이 어렴풋이 반짝였다. 자칫 못 보고 지나칠 수도 있었을 만큼 희미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진 그 빛은, 연애감정보다는 희망에 가까운 것이었을까.
"당신, 그런 줄은 알았지만 정말 얼음장 같은 사람이군. 아무리 잠깐이라고 하지만 이런 식으로 같이 산다는 게 끔찍하지도 않아? 내가 나가든 당신이 나가든, 떨어져 있는 게 낫지 않겠어?"
어느 날 그는 출근하려다 말고 나에게 말했다.
"당신은 어떨지 모르지만 난 숨이 막혀, 당신 냉정한 얼굴만 보면."
그는 내 얼굴을 뚫어지게 들여다봤다. 방금 면도한 그의 턱에서 풍겨오는 것은 얼마 전에 바꾼 셰이브 로션 냄새였다.
그는 내 얼굴에서 무슨 표정인가가 떠오르기를, 그래서 그가 그것을 읽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의 심각한 표정에는 어떤 종류의 단호함이 어려 있었다. 그는 단정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 관계의 모든 것이 내 과오였다고 명백히 결론 내리고 싶은 것이다. 아마도 그의 결론은 옳을 것이다.
그 여자는 알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의 이런 면을 알까. 스스로의 논리 속에서 자신의 입장이 완벽해지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면을 알까. 그것이 그의 내면 깊숙이 숨겨진 약한 마음에서 비롯된 강박인 것을 알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냉정한 게 아니라 단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뿐이야'라고도, '이 차가운 마음이 아니었다면 여태까지 버텨오지도 못했어'라고도 변명하지 않았다. '노력했어, 내가 선택한 것이라서 책임도 지고 싶었던 거야'라고도, '어쩌겠어, 그게 내 한계였는걸'이라고도 하지 않았다. 시선으로 사물을 꿰뚫을 수 있다고 믿는 듯이, 그의 얼굴 뒤편에 단단히 버티고 선 철제 현관문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날 밤 여덟 살 난 조카 현석이 전화를 걸어왔다. 마침 오랜만에 일찍 들어온 그를 바꿔달라고 했다. 무선 수화기를 건네받은 그는 계속 '그래'라고만 했다.
"그래."
"그래."
"그럴게."
수화기를 충전기에 꽂아놓은 뒤 그는 팔짱을 꼈다. 뭐래, 라고 묻는 대신 그의 얼굴을 보고 있는 나에게 그는 말했다.
"내가 고모부라고 하니까, 반 친구들이 사인을 받아달라고 했다는군."
침묵이 흘렀다.
"끔찍하군."
팔짱을 풀어 바지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며 그가 중얼거렸다.
"뭐가?"
"당신은 끔찍하지 않아?"
나는 그가 꽂아놓은 무선 수화기에 들어온 두 개의 붉은 불을 보고 있었다. 끔찍하다. 마치 처음으로 들은 뜻모를 단어인 양 나는 그 말을 오랫동안 곱씹고 있었다.
7
비가 퍼붓고 이따금씩 벼락이 하얗게 창밖 북한산 숲을 뒤덮던 밤에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금요일이었다. 열흘 만에 한 번씩 돌아오는 외신부 당직 근무가 지난 주에 지났으니 그에게는 오랜만에 맞는 주말 휴무였다.
딱히 그를 기다린 것도 아닌데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거친 빗소리에 줄곧 자다 깨다 하다 보니 머리를 창밖에 내놓고 자는 것 같았다. 빗줄기가 밤새 내 얼굴을 때리는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에야 빗발은 가늘어졌다. 비 그치고 오후에 나가보니 봉오리졌던 진달래들이 일제히 만개해 있었다. 숲에서 날아온 산까치들이 마당 있는 집 살구나무 위에서 울어댔다. 붉은 벽돌 담장 위로 목련 송이들이 툭툭 피어나 있었다.
목련은 나무에 핀 연꽃이라 목련(木蓮)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올려다보자, 하오의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그 봉오리들은 마치 꽃잎 안에 흰 등불들을 감추고 있는 것 같았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어떻게 지내나 싶어 전화했어, 통 소식 없길래."
수화기 저편에서 새언니가 생글거리고 있었다.
"많이 바빠?"
"마음만 바쁘죠, 뭐."
갑자기 새언니의 말이 빨라졌다.
"바쁜 거야 알지만 어려운 일 아닌데…… 서방님 사인 말이야. 현석이가 여간 채근을 해야지? 요새 서방님도 많이 바쁜 모양이야. 전에는 그래도 두어 달에 한 번은 왔잖어? 현석 아빠도 궁금해하는데."
나는 말을 돌렸다.
"어머니는요?"
"어머니야 여전하시지. 매일 불화 그리시고."
"아직도 보살초 그리세요?"
"앞으로 열흘은 더 그려야 삼천 장 채우신다고 그러네. 그건 그렇구……"
식은 밥에 김치와 양파를 넣고 볶아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다가 나는 코피를 흘렸다. 오래 전 출판사에 일하던 때 한 달에 한 번 꼴로 코피를 쏟았었는데, 그때 이후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고개를 쳐드는 건 좋지 않은 민간 요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목을 뒤로 젖혔다. 들큰한 피가 혀뿌리를 적시며 식도를 타고 내려가도록 두었다. 멈춘 듯했던 피는 고개를 수그리자 다시 흘러, 두루마리 휴지 다섯 쪽을 적신 뒤 멎었다.
비명처럼 전화벨이 자지러졌다. 셔츠 자락에 손을 닦으며 거실의 전화기 쪽으로 몇 발짝 걸어가던 중 소리는 끊겼다. 엉거주춤 서 있다가 몸을 돌렸을 때 다시 새된 벨소리가 터져나왔다.
수화기 저편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다시 걸어보세요, 전혀 안 들립니다."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전화는 다시 걸려오지 않았다.
그는 자정을 넘기고 돌아왔다. 열쇠가 없는지 철제 현관문을 거세게 두들겼다. 옆집을 생각했다면 초인종을 눌렀을 텐데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문을 열어주고 바로 뒤돌아서려는데, 내 옆얼굴을 향해 그가 침을 뱉듯 말했다.
"날 경멸하고 있군."
그의 혀는 형편없이 꼬부라져 있었다. 토한 술 같은 역한 냄새가 그의 몸에서 뿜어져나왔다.
"실컷 경멸해. 침이라도 뱉어봐."
내가 그를 향해 몸을 돌리자, 그는 마치 따귀라도 내갈기려는 듯 오른팔을 쳐들더니 이내 맥없이 내려뜨렸다. 그의 눈은 풀렸고 입가에는 하얀 침자국이 말라붙었다. 그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발을 옮겨디뎌가며 중심을 잡고 있었다.
"씨팔 더러운, 더러운……"
말을 채 맺기 전 그의 눈에서 거짓말 같은 눈물이 쏟아져내렸다.
"다 똑같아."
그는 주먹으로 눈을 문질렀다. 꺾일 듯 꺾일 듯 욕실로 향하던 그의 다리가 벽에 부딪히며 고꾸라질 뻔했다.
"여자들이란…… 씨팔, 인간들이란 다 똑같아."
그를 부축하지 않은 채 나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놀라지 않았다. 오래 전 점쳤던 카드들 중 하나가 나왔을 뿐이라는 담담함으로 그의 울고 있는 얼굴을 봤다. 그는 비틀거리며 벽을 짚고 균형을 잡고 있었다. 저렇게 일그러지나. 그토록 조화롭던 얼굴이 저렇게 흉해지나.
바지춤을 끄르고 일도 보지 않은 채 멍하니 변기 앞에 서 있던 그는 도로 지퍼를 올렸다. 세면대의 찬물을 틀어놓고 마개를 잠그지 않아, 콰르륵콰르륵 소리를 내며 투명한 물이 모조리 흘러내려갔다.
"당신을 존경한대."
물줄기에 손을 적셔 눈자위를 문지르다 말고 그는 돌연 키득키득 웃었다.
"우스워…… 우스워 못 살겠어. 씨발, 당신한테 자기가 큰 잘못을 했다는군!"
그의 허리가 직각으로 꺾였다. 중심을 잃어 그런 줄만 알았는데, 그는 두 팔로 세면대 모서리를 붙들었다. 단단한 둥근 면에 머리를 짓찧기 시작했다.
술에 취해 통각이 마비된 것일까. 그는 연신 씨발, 씨발 하고 악을 써댔다. 소리가 커지면서 찧는 힘도 무시무시하게 강해졌다. 나는 욕실을 향해 달려갔다.
"그만 해."
입술을 악문 그의 얼굴이 세면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만 해!"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감쌌다. 미처 눈치채지 못한 그의 머리가 격렬한 힘으로 내 손등을 세면대에 짓이겼다. 비명이 내 목구멍을 뚫고 뛰쳐나왔다.
제풀에 그의 몸이 타일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나도 모르게 눈이 화끈거렸다. 반사적으로 어머니의 무지막지한 손바닥이 떠올랐다. 아프지 않은 손등으로 젖은 뺨을 문질러 닦으면서 나는 흥분하지 않았다. 그 눈물이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내가 전혀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그의 반의 반만큼도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늘어진 그의 몸뚱이를 힘겹게 밀고 끌어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겉옷과 양말을 벗긴 뒤 이불을 덮어주면서 나는 그의 어머니에 대해 생각했다. 사춘기 초입의 그를 옷 갈아입힐 때마다 그녀는 우는 대신 입술을 물었다고 했다. 자신의 눈물이 그를 더욱 비참하게 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그의 입술에 핏자국이 맺혀 있었다. 내일 아침이면 암록색으로 물들 것이다. 젖은 앞머리 아래 찢어진 이마에서 피를 닦아내고 과산화수소수를 발랐다. 어차피 이런 얼굴로 방송을 하기도 어려울 테지만, 지워지지 않는 머큐로크롬보다는 나을 것이었다.
비상약 상자를 서랍장에 들여놓은 뒤 그의 베개맡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는 오래 전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녀 앞에서 옷을 벗었을까. 그의 몸을 봤을 때 그녀의 얼굴이, 그 아름답게 빛나던 얼굴이 어떤 모양으로 일그러졌을까.
손바닥과 손등이 얼얼하게 아파왔다. 중지 마디의 살갗이 까지긴 했지만 피는 흐르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통증을 외면하며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통증을 달래기보다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여기도록 나는 길러졌다. 어머니의 두꺼운 손바닥 세례를 피하기 위해, 울지도 않고 어떤 허튼 소리도 뱉지 않도록 길들여졌다. 어린 딸에게 그만큼 엄정했던 대신, 어머니는 언제나 내 말을 마치 성인의 그것처럼 존중해줬다. 재수를 포기하고 전문대학에 간 것도,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는 출판사 미술부를 그만두고 프리랜서가 된 것도, 어머니는 다만 내 뜻이라는 이유로 한마디의 이견 없이 받아들였다. 그는 물론 잘난 신랑감이었으나, 설령 그렇지 않았다 해도 어머니는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내가 처음 꺼냈을 때, 그의 직업이나 학벌, 집안 따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어머니는 '네가 알아서 할 일이다, 내가 뭘 알겠느냐'고 마치 남의 일처럼 말했었다.
넌 어릴 때부터 좀 숙성한 편이었다.
진달래 꽃눈을 보러 갔던 그날, 산을 내려오며 어머니는 뜻밖의 말을 했었다. 그것은 내가 태어나서 어머니로부터 처음 듣는, 칭찬이라면 칭찬이랄 수 있을 말이었다.
……아이들이란 그저 보살핌받기만 바라는 법인데, 내가 무거운 것을 들고 오면 못 들어줘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되고, 내가 바늘에 손톱 밑이라도 찔리면 제 손이 아픈 것같이 어쩔 줄을 모르곤 했다.
나무 둥치를 한 손으로 짚으며 바위에서 내려서는 어머니의 얼굴은 쓸쓸히 수그려져 있었다.
난 그게 싫었다…… 네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약한 마음으로는 세상을 버틸 수 없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언제나 너한텐, 제 앞가림 잘하는 네 오빠한테보다 더 엄해지곤 했던 모양이다. ……네가 덜 웃고, 덜 울고, 덜 상처받길 바랐다.
기억을 더듬는 듯 어머니는 이맛살을 모았다.
……그게 가끔 내 마음에 걸린다.
조금 쉬었다 가자, 하며 어머니는 긴 숨을 몰아쉬었다. 각진 바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절뚝이던 왼쪽 무릎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살다 보면 너한테도 언젠가 그런 날이 있을 거다…… 수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후회되는 날이. 그날이 빨리 오면 좋은 거고, 너무 늦게 오면 후회해도 늦은 거고.
어머니의 우묵한 눈길이 먼 등성이에 우거진 마른 나뭇가지들을 더듬었다. 그녀의 귀밑머리 아래 연한 빛깔의 검버섯들이 자잘하게 박혀 있었다. 주름진 눈두덩 위로 먹빛 눈동자가 번쩍였다.
……하지만 그걸 말로 남한테 설명할 수가 있나. 자식한테라고 설명할 수 있겠나. 자기가 느끼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는걸. 너희 외할머니가 눈감으시기 전에 나더러 '돌아보기가 부끄럽다, 부끄러워 어떻게 가나' 하시던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으니.
거실 소파에 내던져진 그의 양복 상의를 들다가, 지갑이 휴대 전화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허리를 굽혔다. 펼쳐진 가죽 지갑 안쪽에 엄지손가락 반만한 팬시 스티커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와 그 여자가 사진 속에서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좀처럼 너털웃음을 웃지 않는 그의 얼굴은 희고 고른 치열을 드러낸 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자의 활짝 피어난 미소는 자목련같이 우아한 데가 있었다. 사진의 배경으로 그들이 택한 것은 보리알만한 눈사람 한 쌍이 어깨를 포개고 서 있는 창틀이었다.
8
그날 밤 다시 꿈을 꾸었다. 그것을 아기 부처의 꿈이었다고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먼 나라를 여행중이었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아기 불상을 보려고 버스에 실려 하염없이 달리고 있었는데, 정류장에 내리고 보니 끝간데 없이 모래 벌판이 펼쳐져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내 몸뚱이를 그림자째 증발시켜버릴 것 같은 햇빛뿐이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나.
멀리 황금색의 거대한 모래 구릉이 있는 쪽으로 걸었다. 걷다 보니 바람이 뒹구는 대로 아득한 모랫길이 뱀 기어가듯 이리저리 휘어지고, 돌아보면 눈을 벌릴 수 없는 모래 안개 너머 버스며 정류장은 물론 방금 전에 찍혔을 내 발자국도 사라지고 없었다.
거대한 무덤의 밑바닥 같은 구덩이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리로 발을 내려딛자 급사면을 따라 마치 빨려들 듯 내 몸뚱이가 굴러내렸다.
흔들리는 촛불 하나가 구덩이의 둥근 안쪽 면에 내 그림자를 여러 겹으로 겹쳐 흔들리게 하고 있었다.
아무런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주춤거리며 촛불을 향해 다가갔다.
아기 부처가 어디 있나?
아기 불상이 어디 있어?
어둠에 채 길들지 않은 눈을 비비려고 모래 묻은 손을 털자, 손가락째 모래알이 되어 부슬부슬 허물어졌다.
옷을 입은 채 그의 머리맡에서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푸르스름한 박명이 안방으로 스며들어와 있었다. 그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면도를 하루 걸렀을 뿐인 그의 턱은 억센 수염으로 거뭇거뭇했고, 흘러내린 이불 위로 그의 맨어깨와 가슴이 드러나 있었다.
밤사이 그의 이마에는 검푸른 피멍이 익어 있었다. 부어오른 자리를 조심스럽게 쓸어보자 잠결에도 아픈지 고개가 외틀어졌다. 어느 겨를에 다쳤는지 그의 붉은 목덜미에도 상처가 있었다. 무엇인가에 삼 센티미터쯤 베인 자국이 일그러진 흉터 가운데 갈라져 있었다. 응고된 먹피를 향해 나는 손을 뻗었다. 그곳에 내 떨리는 손이 닿은 순간, 가느다란 신음과 함께 그의 어깨가 소스라쳤다.
나의 아침은 언제나와 같았다. 냉장고에서 유리 단지를 꺼내 거기 재어놓은 유자를 머그컵 두 잔에 세 스푼씩 덜었다. 한 잔은 뜨거운 물을 붓지 않은 채 탁자에 두고, 남은 한 잔은 눈을 감고 세 번에 나눠 들이켰다. 네 가지 조간 신문에 일면 제목들을 훑어 읽은 뒤 현관 안으로 던져넣었고, 간이 약수터까지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 목조 정자에 걸터앉았다.
생강향 같은 나무 냄새가 촉촉히 번져 있었다. 갈참나무들은 아직 헐벗은 나뭇가지들을 허공으로 뻗어올린 채 침묵에 잠겼지만, 저 검은 나무껍질 속에도 봄 대지의 즙이 흘러올라와 있을 것이다. 일주일쯤 더 지나면 잎눈이 피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얼음 풀린 봄 계곡을 향해 허리를 구부린 소나무들을 바라보다가 나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겨울부터 저 날카로운 솔잎들은 초록빛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보니 같은 푸른색이지만 분명하게 달랐다. 방금 나온 어린 싹 같은 연푸른빛이 생생하게 차올라 있었다.
겨울에는 견뎠고 봄에는 기쁘다.
누군가가 속삭여준 듯 문득 떠오른 말을 속으로 되뇌며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새벽빛은 천천히 가셔갔다. 꽁지가 푸른 산까치 한 마리가 마른 울음을 뱉으며 철조망 너머로 날아갔다. 바람이 일 때마다 벌거벗은 나뭇가지들이 몸 스치는 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