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봉산성(胎峯山城) - 부여 홍산
태봉산성(胎峯山城) - 부여 홍산
-. 고려말인 1376년(우왕 2년) 최영(崔瑩) 장군이 대규모의 왜구를 무찌른 전투지로 비정하는 곳이다.
-. 홍산대첩 - 고려 말기에 왜구의 침입이 잦아 폐단이 많았으며, 특히 1376년 7월에는 대규모의 왜구가 부여를 침공하고 공주까지 함락시켰다. 왜구가 또 석성(石城)을 침공하고, 연산(連山)의 개태사(開泰寺)로 향했다. 이를 막기 위해 양광도의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가 군사를 이끌고 나섰으나, 패배하여 전사했다. 이에 최영이 나서서 왜구의 토벌을 자청하고 출정하여 양광도 도순문사 최공철(崔公哲), 조전원수 강영(康永), 병마사 박수년(朴壽年) 등과 함께 급히 홍산으로 갔다. 먼저 도달한 곳은 3면이 모두 절벽이고 길 하나만이 통하는 곳이어서 모든 장수들이 겁을 먹고 나서지 못했는데, 최영이 선두에 서서 정예부대를 동원, 진격하여 왜적을 대파했다. 이 전투는 1380년에 이성계(李成桂)·변안렬(邊安烈)이 거둔 황산대첩, 1383년에 정지(鄭地)가 거둔 남해의 관음포전투 등과 함께, 고려 말기에 왜구를 크게 무찌른 대첩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인하여 최영은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으로 봉해졌으며, 다른 장군과 병사들도 등분에 따라 상을 받았다.(출처- 다음 백과사전)
-. 충남 부여군 홍산면 북촌리에 있는 전형적인 백제 테뫼식 산성으로 조선시대까지 이용됐다.
-. 태봉산성(胎峯山城)은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368호이며, 해발 90m 내외의 높지 않은 야산을 삭토해 만든 이른바 토축산성이다.
-. 산성을 체육공원으로 조성해 놓았으며, 벗꽃이 피는 4월이면 홍산대첩문화제를 거행한다.
-. 아래는 태봉산성 정상에 있는 홍산대접비문이다.
홍산대첩비문(鴻山大捷碑)
서기 1376년(고려 우왕 2년) 7월 국정이 어지러운 틈을 타 충청도, 전라도일대에는
때마침 여름이라 불어난 강물을 이용하여 왜구가 대규모로 내륙 깊숙이 쳐들어 와 공주를
점령하고 연산의 개태사(開泰寺)일대까지 침범하여 마을마다 불을 지르고 약탈과 살상을
일삼았다.
이 때 고려원수 박인계(朴仁桂)가 말에서 떨어져 전사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육도
도순찰사였던 최영 장군이 왜구 토벌에 직접 나아가 싸울 것을 왕에게 간청하였으나,
당시 군사가 훈련되지 않고 60세였던 최영장군의 늙음을 염려해 출정을 만류 하였으나,
장군은 "지금 왜구의 뿌리를 뽑지 않으면 뒷날 반드시 후환이 될것이다 비록 몸은 늙었지만
의지는 상하지 않았으니 꼭 보내 달라"고 간청하자, 왕은 장군의 피끓는 애국애정을 이기지
못해 출정을 윤허하였다. 장군이 밤새워 전지로 갈때 왜구들은 넘친 금강물을 타고 홍산
까지 쳐 들어와 살륙(殺戮)과 노략(擄掠)질을 하여 페허화 되었으나 누구 하나 대적하는
자가 없었다.
장군은 양광도 도순문사 최공철(崔公哲),조전원수 강영(康永), 병마사 박수년(朴壽年)
등과 함께 험준하고 삼면이 절벽인 이곳 태봉산(胎封山)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수백명의
왜구들이 홍산 벌에 몰려들자 워낙 많은 숫자와 어마어마한 기세에 눌려 장군의 공격 명령
에도 군사들은 겁을 먹고 싸움을 피하고 있었다.
이를 본 장군은 맨 앞에서 적진에 뛰어들어 돌진하자, 왜구가 쏜 화살이 장군의 입술에
꽂혔다. 장군은 그 화살을 뽑지 않고 피를 흘리며 달려가 활을 쏜 왜구를 죽인 후에야
화살을 뽑았다. 질풍노수(疾風怒壽) 같은 장군의 모습을 본 군사들은 사기중천하여
적진을 덮치자, 왜구들은 순식간에 풍비박산되어 서천쪽으로 달아났다.
이 소식을 판사 박승길(朴承吉)로 하여금 왕에 보고하자 왕은 어의 어백평(魚伯評)을
보내어 상처를 치유케 하며, 그가 개경에 개선(凱旋)하자 왕은 조서(詔書)를 맞이하는
의식으로 장군을 환영하였다.
전공으로 벼슬을 내리자 장군은 "왜구를 완전히 섬멸하기 전에는 어떠한 벼슬도
받는게 옳지 않다" 하여 사양하자 부득이 철원부원군을 봉하였다.
그후 왜구가 강화도에 침입하였을 때 왜구는 최영장군을 백수(白首) 최만호(崔萬戶)라
하여 가장 두려워 하였으며, 후에 왕이 홍산파진도(鴻山破陣圖)를 그리게 하고, 그 찬문은
목은 이색(李穡) 선생에게 짓게 하였다.
홍산에서 대첩이 있은 후 602년만에 장군의 혁혁한 전승비를 세우는 뜻은 최영 장군의
위대한 호국정신을 후손에 길이 전하고, 오늘에 이어받아 나라와 겨레를 수호하는
국민정신을 드높이고자 함이다.
서기 1977년 12월 일
홍 사 준 지음
유 희 열 씀
부여군수 정 연 달 세움
▼ 홍산 태봉산성 위치 (클릭 시 - 원본 큰사진)
▼ 태봉산 정상으로 가는 산책로
▼ 산성의 흔적들
▼ 산성 보루를 향해 오르는 돌계단
▼ 산성 정상에 있는 최영장군 홍산대첩비
▼ 태봉루와 홍산대첩비
▼ 정상에서 만난 산호랑나비
▼ 태봉산성에서 바라본 홍산면 소재지 - 멀리 보이는 능선이 부여군과 서천군의 군계인 저령
▼ 산성에서 내려다 본 홍산객사 주변 풍경
▼ 산성에서 바라본 홍산동헌 풍경
▼ 산성에서 바라본 비홍산과 날으는 새 모양의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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