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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몽학의 난[李夢鶴 ── 亂]

소설가 구경욱 2010. 3. 2. 21:26

이몽학의 난[李夢鶴 ── 亂]

 

 

▲ 이몽학이 병사들을 조련했다는 무량사

▼ 이몽학군이 가장 먼저 쳐들어간 홍산관아 

 

 

이몽학의 난[李夢鶴 ── 亂]은, 임진왜란 중인 1596년(선조 29) 7월에 충청도에서 이몽학 등이 일으킨 민란이다.

 

  전쟁으로 인하여 전국의 농촌은 황폐화되고 은결(隱結)은 증가되었으며, 관리·토호 들의 부정행위가 속출하고 일본의 재침략에 대비한 산성의 축조 등으로 농민들은 피폐해 있었다. 또한 전쟁 초기에 큰 활약을 했던 각지의 의병들은 전쟁이 장기화되고 유능한 의병장들이 관인이 되거나 전사함에 따라, 의병으로서의 기능이 약화되었다. 그리하여 1594년 4월 제도(諸道)의 의병을 충용장(忠勇將) 김덕령(金德齡)의 지휘하에 소속하게 했지만, 이미 명목상 조직되었을 뿐 국가에서 이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특히 의병 중에는 관군을 기피한 피역자들이 많았기에 기근과 질병이 닥치자 군도(群盜)로 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 중 대표적 경우가 호서지방의 의병 모집과정에서 하급장교들이 농민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봉기를 꾀한 이몽학의 난이었다.

  이몽학은 전주 이씨의 서얼로 아버지에게 쫓겨나 충청·전라 지방을 전전하다가 임진왜란중에 호서지방의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과 함께 의병모집을 구실로 홍산(鴻山:지금의 부여) 무량사(無量寺)에서 동갑계회(同甲契會)를 조직해서 군사조련을 실시했다. 그런데 한현이 아버지의 상을 당해 홍주로 가면서 이몽학에게 지금이 민심이 이반되고 방비가 소홀한 때이므로, 먼저 봉기하면 내포(內浦)에서 합세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하여 이몽학은 김경창(金慶昌)·임억명(林億命)·이구(李龜)·장준재(張俊載)와 사노(私奴) 김팽종(金彭從), 승려 능운(凌雲) 등을 거느리고 스스로 선봉장이 되어 홍산 쌍방축(雙防築)에서 군사 600~700명을 모았다.

  7월 6일 이몽학군은 홍산현에 쳐들어가서 현감 윤영현(尹英賢)을 붙잡아 인신(印信)을 빼앗은 후 다시 임천군(林川郡)에 쳐들어가 군수 박진국(朴振國)을 포박했다. 이어 7일에 정산현(定山縣), 8일에 청양(靑陽), 9일에 대흥(大興)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이 과정에서 강제징세에 시달리던 민들이 대거 합세함에 따라 며칠 동안에 수천 명으로 불어난 이몽학군은 10일 홍주성(洪州城)으로 진격했다. 이에 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은 시간을 벌기 위하여 주관속(州官屬) 이희수(李希壽)·신수(申壽)를 이몽학군에게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하게 하고, 그동안 인근 수령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순찰사 신경행(辛景行)·최호(崔湖)·박동선(朴東善)·황응성(黃應聖)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홍주성으로 가서 이몽학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동안 도원수 권율(權慄), 충청병사 이시언(李時言), 중군(中軍) 이간(李侃) 등이 홍주 주위로 향했다. 이때 판관아병 윤계(尹誡)가 10여 명을 이끌고 밤에 이몽학군 진영에 들어가 총포를 쏜 다음 곧 모두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 하며, 이몽학의 머리를 베어오면 상을 주겠다고 했다. 이에 이몽학군 중 김경창·임억명·태척(太斥) 등이 이몽학을 살해하자 이몽학군은 일시에 흩어지고 관군들은 추격전을 벌여 봉기민들을 죽였다. 한편 모속관 한현은 홍주에서 수천 명을 모병하여 이몽학군과 합세하려 했으나 관군의 공격을 받아 패주하다 잡혀 서울로 압송, 선조의 친국(親鞫)을 받고 처형당했다. 이때 서울에서 처형된 봉기민은 33명이며, 지방에서는 100여 명에 달했다. 그런데 한현의 친국 과정에서 김덕령·홍계남(洪季男)·최담령(崔聃齡)·곽재우(郭再祐)·고언백(高彦伯) 등이 공모했다는 얘기가 나와 김덕령과 최담령은 고문 끝에 죽고 말았다. 뒤에 김덕령은 무고당했음이 밝혀져 신원되었으나, 민란의 수습과정에서 호서지방의 많은 민들을 '반도'로 색출함으로써 민란 후에도 조정에 대한 호서민들의 불만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