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문화 탐방]/**** 부여 탐방

청일사(淸逸祠) - 부여 홍산

소설가 구경욱 2010. 3. 12. 15:32

청일사(淸逸祠) - 부여 홍산

 

- 문화재자료 제93호 (부여군)

- 충남 부여군  홍산면 교원리 190

-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과 단종의 폐위로 홍산에 은거했던 우옹(迂翁) 김효종(金孝宗, 1414∼1493)의 뜻을 기리기 위해 광해군 13년(1621년)에 세운 사우이다. 김시습은 조선 전기 학자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지은 인물이다. 청일사는 1621년(광해군 13년) 당시 홍산 현감으로 있던 심완식(沈完植)이 무량사 옆에 조그만 사우를 세우면서부터인데, 현재의 위치로 이건된 것은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홍산 현감이었던 권흔(權 頭)에 의해서다. 1704년(숙종 30년)에 사액(賜額) 받았고 1866년(고종 3)에 철폐되었으나 1970년에 현 자리에 이건 되었다. 애초에는 김시습만 배향하다가 이건 당시 유림들의 의견에 따라 김효종도 함께 배향하게 되었다

 

김시습 (金時習. 조선시대 문인)

   본관은 강릉.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등이며 법호는 설잠(雪岑)이다. 신라 태종무열왕의 6세손인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이다. 무반 계통으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김일성(金日省)의 아들이다.

 

  생후 8개월에 글뜻을 알았고 3세에 능히 글을 지을 정도로 천재적인 재질을 타고 났다. 5세에는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후일 중용하리란 약속과 함께 비단을 하사받기도 했다. 나아가 당시의 석학인 이계전(李季甸)·김반(金泮)·윤상(尹祥)에게서 수학하여 유교적 소양을 쌓기도 했다. 그의 이름인 시습(時習)도 〈논어 論語〉 학이편(學而篇) 중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과거준비로 삼각산 중흥사(三角山 中興士)에서 수학하던 21세 때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대권을 잡은 소식을 듣자 그 길로 삭발하고 중이 되어 방랑의 길을 떠났다(→ 생육신). 그는 관서·관동·삼남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했는데, 〈매월당시사유록 每月堂詩四遊錄〉에 그때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31세 되던 세조 11년 봄에 경주 남산(南山) 금오산(金鰲山)에서 성리학(性理學)과 불교에 대해서 연구하는 한편,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37세에 서울 성동(城東)에서 농사를 직접 짓고 환속하는 한편 결혼도 했다. 벼슬길로 나아갈 의도를 갖기도 했으나 현실의 모순에 불만을 품고 다시 관동지방으로 은둔, 방랑을 하다가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59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그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 속에서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못한 채 기구한 일생을 보냈는데, 그의 사상과 문학은 이러한 고민에서 비롯한 것이다.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얻은 생활체험은 현실을 직시하는 비판력을 갖출 수 있도록 시야를 넓게 했다. 그의 현실의 모순에 대한 비판은 불의한 위정자들에 대한 비판과 맞닿으면서 중민(重民)에 기초한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상을 구가하는 사상으로 확립된다. 한편 당시의 사상적 혼란을 올곧게 하기 위한 노력은 유·불·도 삼교(三敎)를 원융적(圓融的) 입장에서 일치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불교적 미신은 배척하면서도 조동종(漕洞宗)의 인식론에 입각하여, 불교의 종지(宗旨)는 사랑(자비)으로 만물을 이롭게 하고 마음을 밝혀 탐욕을 없애는 것이라고 파악한다. 또 비합리적인 도교의 신선술(神仙術)을 부정하면서도 기(氣)를 다스림으로써 천명(天命)을 따르게 하는 데 가치가 있다고 한다. 즉 음양(陰陽)의 운동성을 중시하는 주기론적(主氣論的) 성리학의 입장에서 불교와 도교를 비판, 흡수하여 그의 철학을 완성시키고 있는데, 이런 철학적 깨달음은 궁극적으로는 현실생활로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저(遺著)로는 〈금오신화〉·〈매월당집 梅月堂集〉·〈매월당시사유록〉등이 있다.

 

 

김효종(金孝宗 - 조선 전기의 문신)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절신, 호는 우옹(迂翁)이다. 아버지는 현감 집(緝)이며, 어머니는 의인 여산송씨로 직제학 운(雲)의 딸이다. 학문이 고매하여 학행으로 벼슬길에 올라 사복시정에 이르렀다. 1452년(단종 1년)에 문종이 죽고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양대군이 인륜대의를 버리고 1455년에 왕위를 찬탈했다. 이 때 세조로부터 국록을 받는 것을 꺼리고 곧 사퇴하여 부여 홍산지방으로 내려 와 은거했다. 그 후 영월에서 단종이 승하(昇遐)하자 서운산(栖雲山)에 들어가 초가집을 짓고 해가 뜨면 매일같이 궁검대에 올라가 영월을 바라보며 3년을 지냈다. 매월당 김시습과 도의로 사귀었고 평생 검소한 옷과 음식으로 끝까지 절의를 지킨 것으로 유명하다. 묘는 부여군 구룡면 상곡에 있다.

 

 

▼ 분홍색 원이 청일사이고. 노란색 원은 홍산향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