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미륵리사지(中原彌勒里寺址) - 충주시 상모면
중원미륵리사지(中原彌勒里寺址)
-. 사적 제317호
-. 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 58
-. 통일신라시대
이 사지(寺址)는 미륵대원지(彌勒大院址)라고도 하며 석조(石造)와 목구조(木構造)를 합성(合成)시킨 석굴사원(石窟寺院)으로 석굴(石窟)을 금당(金堂)으로 한 북향(北向)의 특이(特異)한 형식(形式)을 취한 유일(唯一)한 유적이다. 현재 석굴(石窟) 상부(上部)의 목구조(木構造)는 남아있지 않으나 하부(下部) 석굴(石窟) 구조물(構造物) 중앙(中央)에는 주존불(主尊佛)인 미륵여래(彌勒如來)가 안치(安置)되어있으며 1977년 발굴(發掘)에 의해 전실(前室)에 해당되는 구역에서 초석(礎石)들이 발견(發見)되어 평면(平面)의 구조(構造)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석굴(石窟) 앞쪽에는 석등(石燈)을 비롯하여 오층석탑(五層石塔)·귀부(龜趺)·당간지주(幢竿支柱)·불상대좌(佛像臺座) 등 석조물(石造物)들이 많이 남아있는데 이들은 그 수법으로 보아 고려초기(高麗初期)인 10세기경(世紀頃)의 유물로 추정되고 있다.
발굴조사시(發掘調査時) 「미륵당(彌勒堂)」「명창삼년금당개개와(明昌三年金堂改蓋瓦)」등의 명문와(銘文瓦)가 출토(出土)되어 고려(高麗) 명종이십이년(明宗二十二年)(1192년) 금당(金堂)의 기와를 새로 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석굴(石窟)과 전실(前室)의 목구조(木構造)가 소실된 것은 13세기(世紀)였고 그 후 곧 복원(復元)되었다가 조선초기(朝鮮初期)에도 대중수(大重修)가 있었고 또다시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소실되었던 것을 18세기 때 다시 수리(修理)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폐사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1936년에 있었던 큰 수해(水害)로 크게 피해를 입어 법등(法燈)이 끊기지 않았나 생각된다.
경내(境內)에는 현재 보물로 지정된 석불입상(石佛立像)과 오층석탑(五層石塔)이 있고 그 외에 석등(石燈)·삼층석탑(三層石塔)·귀부(龜趺)·당간지주(幢竿支柱)·불좌대(佛座臺) 등 많은 석조물(石造物)들이 남아있어 창건당시(創建當時)의 사격(寺格)을 말해주고 있다.(문화재청 홈)
▼ 보물 제95호 - 괴산미륵리오층석탑(槐山彌勒里五層石塔) - 고려시대
이 곳에는 고려시대의 석불과 석굴이 만들어졌던 흔적이 남아 있고, 그 앞쪽에 석등과 더불어 이 석탑이 남아 있다.
석탑은 기단부(基壇部)의 아래부분이 땅 속에 파묻혀 있어서, 그 구조가 어떤지를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드러난 부분은 자연석에 가까운 네모난 돌로 특별하게 장식을 하지 않았으며, 그 위로 기단의 맨윗돌이 올려져있다. 탑신(塔身)은 1층 지붕돌이 2장일 뿐 몸돌이나 다른 지붕돌은 모두 1장의 돌로 되어 있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몸돌의 넓이에 비하여 좁은 기둥을 모서리에 새겼다. 지붕돌은 급격하게 좁아져 석탑 전체의 균형과 미관을 손상시키고 있다. 지붕 밑면의 받침은 5단이지만 추녀가 짧아서 6단인 것처럼 보인다. 처마는 수평이고 지붕돌의 경사는 매우 급한데 귀퉁이의 치켜올림은 거의 없는 편이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남아 있는데, 노반은 6층 지붕돌로 보일 만큼 큼직하고, 복발은 반원 모양이다. 정상에는 머리장식의 중심을 지탱하기 위해 세운 긴 쇠꼬챙이모양의 찰간(擦竿)이 남아있다.
5단의 지붕돌 밑면받침과 직선의 처마는 신라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른 것인데, 지붕돌의 급경사와 형식적인 기둥새김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보인다.
▼ 보물 제96호 - 괴산미륵리석불입상(槐山彌勒里石佛立像) - 고려시대
고려 초기 이 부근에서 많이 만들어진 일련의 커다란 불상들과 양식적 특징을 같이하는 석불입상이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말 마의태자가 나라의 멸망을 비통하게 여기며 이곳까지 와서 불상을 만들고 개골산으로 들어갔으며, 그 여동생은 덕주사마애불(보물 제406호)을 만들었다고 한다.
모두 5개의 돌을 이용하여 불상을 만들고 1개의 얇은 돌로써 갓을 삼았다. 둥근 얼굴에 활모양의 눈썹, 긴 살구씨 모양의 눈, 넓적한 코, 두터운 입술 등은 고려 초기 커다란 불상의 지방화된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신체는 단순한 옷주름의 표현이라든가 구슬같은 것을 잡고 있는 손의 묘사 등에서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간략함을 느낄 수 있다.
이 불상의 대담하고 거대한 모습으로 보아 새로 일어난 국력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임에 틀림없을 것 같다.
▼ 참고자료 - 중원미륵리삼층석탑(中原彌勒里三層石塔) - 시도유형문화재 제33호 (충주시)
▼ 월악산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