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로 / 한유주
1
나는 달로 간 사람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는 어느 날 달 속으로 홀연히, 잠겨버렸다. 그 광경에 너무나 놀라서, 나는 그만 주저앉지도, 반사적으로 두 손을 치켜들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붙박여버리고 말았다. 놀랐던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던지, 그가 늘어뜨리고 간 무게의 흔적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시간은 그때 이후로 손톱만큼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그가 지나간 궤적만이 허공에서 길게 몸을 떨고 있을 뿐이었다.
달은 아마도 차가울 것이다. 달의 뒷면에는 앞면보다 아름다울 무수한 바다가 있고, 많은 시인과 소년들이 그곳에 발을 담그고 싶어했지만, 발아한 문장들은 너무 무거웠고, 소년들은 너무 어렸으며 나이를 먹은 후에는 어느 순간 노인이 되어 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모든 일들이 타박이기만 했다.
예전에도 달에 간 사람은 있었다. 그들 중 몇의 이야기를 나는 어디선가 전해 들었는데, 그들은 달에 잠시 들렀다가, 길을 되짚어 돌아왔다. 달에 들렀던 이들 중에는 어린아이도 있었다. 아이는 외로웠고, 그래서 달로 갔지만 달에 도착했을 때 달은 삭아버린 나무토막 한 조각일 뿐이었다. 쓸쓸한 이야기였다. 아이가 음습한 이끼에 젖어 돌아왔을 때, 지구는 그저 깨진 화분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미국인으로 암스트롱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아마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쥐 열세 마리와 함께 달에 도착했다. 검은 하늘에 지구가 파랗게 돋아나 있었다. 그 지구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우주복에 달린 둥글고 반투명한 헬멧과, 지구에서보다 가벼운 몸으로 달의 몸 위에서 둔하게 움직이는 우주인을 보았다. 모든 것이 텔레비전의 화면 안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화면 밖에서 어떤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고, 어떤 사람들은 성호를 그었다.
나는 암스트롱과 만난 적이 있다. 우연이 엎지른 만남이었다. 하늘색 셔츠에 자주색 골이 파인 넥타이를 매고 성긴 줄무늬가 있는 진한 회색 재킷을 입고 있었다. 먼지 냄새가 단장 끝에서 흩어졌다. 이탈리아로 갈 거라고 했다. 나는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그래, 달은 어떻습디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어깨 너머만 멀거니 들여다보다가, 왼손에 들고 있던 모자를 머리에 얹고 인사도 없이 가버렸다.
2
지금까지 세계는 분명히 경계 지어져 있었다. 나는 세계의 모든 이야기를 어디선가 전해 들었다. 바깥에서는 사람들이 수백만씩 무리 지어 살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공기총 침대 탄약 꿈 양상추 물풍선 개구리알 가로와 세로를 종횡무진 달려나가는 문자와 마침표들. 그들은 기다란 고속도로와 저 멀리 닿아 있는 지평선을 끝내 넘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그 지친 팔 다리와 폐는 혼성 교배를 통해 제이 제삼의 자손으로 옮아갔고, 그들의 뼈가 무럭무럭 자라는 사이 세계는 한 발짝씩 뒤로 흘러갔다. 그중에 단어를 한 글자 한 글자씩 읽는 사람들이 있었다. 혼자 무언가를 먹고 있는 사람들, 같은 문장의 낱낱의 음들은 입 안에서 잠깐 구르다가 서서히 삼켜졌다. 혼자 무언가를 먹고 있는 무언가를 먹고 무언가를 계속 읽다 보면 글자들이 모두 흩어지고 혀끝에 문자의 감각만이 남았다. 그러면 그들은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혼자 무언가를 먹고 있는 사람들 혼자 무언가를 먹고 먹고 무언가를 먹고, 흐트러진 채로 휘발된 글자들은 공기 속을 떠돌다가 바다로 갔다. 그곳에는 지구의 모든 소리들이 음성을 잃고 당도해 있었다. 소리들은 햇빛이 부서뜨리는 바다의 흰 포말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고요함은 때때로 바닷바람을 타거나, 비구름에 묻어 육지로 되돌아갔다. 육지 위에는 곳곳마다 도시가 누워 있었고, 이 모든 이야기를 나는 어디선가 전해 들었고, 도시는 항상 밤이거나 낮이었다. 고요함은 빛이거나 어둠이었다. 생활의 잊혀진 틈마다 빛처럼, 어둠처럼 고요함이 스며들었다. 사람들은 베개 속에 얼굴을 파묻고도 고요함의 긴 울림을 떨쳐낼 수 없었고, 아침이면 태연하게 드러난 간밤의 흔적에 진저리를 쳤다. 오후의 느지막한 해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낯설게 보였다. 먼지 신문 의자 화분 가로수 젓가락 동전의 뒷면에서는 아무도 바다를 찾을 수 없었고 아무도 바다를 찾지 않았다. 교묘하게 비틀린 시간의 바닥부터 고요함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고, 그 키는 어느 날 작은 집들의 지붕과 전신주가 이리저리 걸쳐 멘 검은 전선들을 넘기 시작했고…… 아직도 베어지지 않고 남은 유달리 키 큰 나무들과 ……을 넘어서서 ……했고, 19층 아파트와 이런저런 높은 건물들을 넘어서서…… 사람들은 그 안에 깊숙이 갇히고 말았다. 아무리 올라가도 적막이었다. 생활이 뱉어내는 활기찬 소음들은 스스로의 가벼움을 탓하지도 못하고 사라졌다. 고요함이 품고 있는 도시는 어딜 가나 닮은꼴이다. 사람들은 일직선 거리를 날아가는 전파에 몸을 꿰인 채 거리에서 층계참에서 어느 지붕들 밑에서 서로를 확인했고, 그러고 나면 다음번에 서로를 다시 확인하기 위한 것처럼 헤어졌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만이 기억하는 장면들을 몇 개씩 가지고 있었다. 그것들은 뇌의 한 주름 속에 곱게 개켜져 있다가, 어느 순간마다 틈을 비집고 나와 사람들의 눈앞에서 재생되고는 했다. 아파트의 어두운 복도에서 ……가 어떻게 ……던가, 집 뒤에서 마주쳤던 고양이가 어떻게 등을 세웠었던가, 달걀을 부칠 때 그 말캉한 덩어리가 어떻게 깨진 알 껍질 사이로 흘러내렸었던가, ……라고 화를 내던 사람의 미세하게 떨리던 눈썹과, 뒤꿈치에 막 올이 나가던 스타킹, 높은 건물의 창가에서 내려다본 방금 오후 12시를 맞이한 거리, ……그런, 일 초가 채 흐르기도 전의 기억이 아련한 일상을 때때로 집요하게 파고들었고, 대개는 느리고 긴 파동을 타고 곧 흩어졌다. 슬픈 일들이 무수히 일어났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슬픔은 고개를 떨구었고, 일들, 은 세탁된 빨래처럼 곳곳에 가볍게 널렸다. 누구나 단 불로 삶은 빨래 같은 생활을 갖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런 청정한 일상의 뒷면에서는 아무도 바다를 찾을 수 없었고, 아무도 바다를 찾지 않았다. 그곳에는 깊이를 모를 구덩이가 여기저기 파여 있었고, 해가 갈수록 발을 헛디뎌 떨어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어쩌다 다시 돌아온 적은 수의 사람들은, 그래 구덩이는, 어떻습디까, 하고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지만, 입을 꼭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함구하라, 옛날 옛날을 살던 착한 첫째 공주는 말을 할 때마다 꽃과 보석이 쏟아져 나왔고, 마음씨 나쁜 둘째 공주는 말을 할 때마다 뱀과 개구리와 벌레와……, ……그런, 마구 쏟아져 내렸고, 우리는 함구해야 한다, 는 이야기를 나는 어디선가 전해 들었고, 먼지를 쌓아 만든 책꽂이에 길게 꽂힌 책들 중에는 물음표만 일렬로 찍힌 것이 있었다. 책장의 뒷면마다 물음표들이 날카로운 갈고리로 책장을 물고 놓아주지 않았고, ……, 여간해서 넘겨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면 물음표가 책장을 갈기갈기 찢어놓았고, 텅 빈 책의 껍데기만이 덩그러니 남아서 습기에 천천히 녹았다. 수치스러운 역사와 치기 어린 독백들과 밤낮이 열네 번 오가는 동안에 씌어진 문장들이 그런 식으로, 책꽂이가 놓인 바닥으로 흘러넘쳤고, 마른 후에는 더러운 얼룩으로 남았다. 그런 책들을 집어들었던 사람들은 물에 부풀어 솜처럼 풀어진 종잇장 속에서 긴 헤엄을 쳤다. 아무리 팔을 저어도 눈앞의 수평선을 넘을 수 없었다. 그들의 겨드랑이에서 발가락 사이에서 양 옆구리에서 버섯이 자라났다. 거무스름한 버섯이 일상의 모든 잊혀진 틈마다 자라났다. 둥근 차양을 쓴 버섯들이었다. 부서지기 쉬운 몸통은 물살이 닿을 때마다 가루가 되어 날렸다. 지겨운 이야기들, 처음의 몇 페이지를 넘기기 어려운 이야기들과 빛 바랜 수사와 다닥다닥 붙은 행간들이 버섯의 몸이 되어주었다. 몸, 몸들, 몸, 몸에서 돋아나 몸을 먹어치운 입, 입들, 입, 입으로 삼켜져 다시 몸이 된 몸, 몸들, 몸, 몸에서 몸으로 많은 이야기를 전해준 입, 입들, 입, 입이 탐했던 몸, 몸이 탐했던 입, 입들, 입과 몸, 몸, 몸들에게서 나는 많은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3
밤은 낮의 거대한 그림자였다. 밤은 언제나 낮이 잊혀지는 순간에 소리 없이 잦아들었다. 더 이상 내밀할 수 없는 검은 하늘이 모든 사물의 뒷면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낮이 되고 사물이 만들어낸 그림자의 각도가 조금씩 달라지면, 태양 아래 발각된 안식은 지친 제 몸을 애써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태양 아래에서, 햇빛 사이에서, 아침이 오면, 먼 옛날 이야기로, 아침 해와 눈이 마주치면 먼지로 부서져버렸던 사람들처럼, 아니면 물처럼 녹아 모래 사이로 스며들었던 사람들처럼, 혹은 사람이 아니었던 사람들처럼, 그림자와 그림자들은 아무런 이야기도 내뱉으려고 하지 않았다. 단지 눈을 감고 귀와 입을 틀어막고 온몸으로 퍼진 말초 신경의 스위치를 내린 채로 대기 속에 아스라한 얼룩이 되고 말았다. 많은 날들이 지나갔고, 들쭉날쭉하게 교차 편집된 밤과 낮들도 지나갔다. 얼룩 위에 다른 얼룩이 생겨나고, 그 위로 다시 얼룩이 지면, 세계는 더 깊고, 더 옅은, 계조를 자연스레 갖게 되었지만, 누구도 그 계조를 수치로 환산해낼 수 없었고, 그 대신 온갖 숫자와 문자와 표상과 기호 들이, 바다 속을 부유하는 무수한 종류의 물고기와 바다 생물들처럼 뒤섞인 채로, 빛에 드러난 찬란한 세계에, 명과 암으로 자리 잡고 있었고, ……, 한 세기와 1790년대, 2천 5백 년 전, 50년 후, 기원전을 떠돌던 많은 사람들의 역사는 사슬처럼, 영화의 장면들처럼, 소설의 페이지처럼 무수한 점이 모인 선이 아니라, 어느 왕이 앉던 왕좌에는 그의 아들딸들이, 혹은 그의 신하가, 혹은 그의 백성들이 모두 앉았고, 누군가의 광장에는 다른 누군가의 조그만 광장들이 들어서고, 어느 숲의, 어느 산의 어떤 나무는 부지런히 발을 조금씩 뻗어 다른 대륙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발견되거나, 그 스스로 다른 사람들을 발견했고, ……, 같은 도시에서 열한 번의 지진이 일어났으며, 같은 항구에서 수천만 번의 해일이 매번 거친 발톱으로 육지를 할퀴어댔다. 시간은 하늘을 향해 흘렀고, 궤적은 구부정한 나선을 그렸다.
내가 한 자리를 점하고 있던 곳의 강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물을 담고 있었고, 그 물은 넓이를 알 수 없는 강의 폭 위로, 수면의 위쪽과 아래쪽을 모두 비춰내면서, 사방으로 흘러갔다가, 언제고 다시 돌아왔다. 내 시야에는 강의 시작과 끝은 보이지 않았고, 강 건너편에 흐릿한 형상은, 운집해 있는 사람들인지, 혹은 강가의 나무들인지, 긴 모래사장인지도 알 수 없었고, 심지어는 야트막한 산인지, 고대의 유적들인지도 모를 일이었고, 마치 화가가 고의로 마지막 붓질을 뭉개놓은 것처럼 외곽선도 없이 모호하게 떠올라 있었다. 아무도 강 건너를 꿈꾸지 않았다. 무수한 물방울들이 모여 수면을 이루고, 세월이 지나고 수면이 쌓여 강의 깊이를 더해가는 동안 누구도 강을 건너가거나, 건너오지 않았고, 강은 거대한 물의 덩어리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잊혀지고 말았다.
4
나는 가끔 그 강으로 다가가서, 물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고는 했다. 섬세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내 얼굴 위에 그림자는 새겨져 있지 않았고, 일곱 개의 틈이 살짝 벌어져 있을 뿐이었다. 일곱 개의 구멍이 섬세하게, 가만히 벌어져 있었다. 그 구멍들 가운데 검은 눈동자가 두 개, 슬몃 떠오른 것을 보았고, 어느 별에서 하늘을 바라보면, 달이 두 개, 아니면 일곱 개, 아니면 열여섯 개가 보인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기억났다. 모호한 얼굴이었다. 이런 얼굴의 윤곽을 더욱 흐리면서, 한 방울의 물과, 이 강과 저 강, 머나먼 어느 강에서 흘러 들어온 강이, 실타래처럼 뒤엉켜 흘렀고, 먼 옛날의 이야기로, 이 강물을 마시면 불사의 몸을 얻고, 저 강물을 마시면 지금까지의 기억이 모두 사라지고, 머나먼 어느 강의 물을 마시면 영원한 안식을, 가는 비에 씻기는 듯한 죽음을 소유, 하게 된다는, 그런 강과 강들이 실타래처럼, 뒤엉켜 흘렀다.
5
그 강은 가끔, 나 외에 다른 사람을 바라보았다. 강 이편의 숲에서는 텅 빈 속을 가진 대나무들이 잎사귀를 내치면서 종일 울었고, 그는 키 큰 대나무 장대를 손에 들고 강둑을 어슬렁거리고는 했다. 공기는 그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았고, 가끔 그는 매우 빠르게 달려서 장대로 땅을 박차고 뛰어오르고는 했다. 그는 유일하게 시간을 거스르는 속도를 갖고 있었다. 시간은 과거를 향해 움직였고, 열광하는 관중도 없었으며, 가장 순수한 움직임의 전조만이 살아 있었다. 그가 뛰기 시작하면, 뜀박질 소리가 가슴 한켠에서 울리기 시작하고, 모든 환영이 걷히며, 몽상과 사유가 사라졌다. 세계의 기억에는 순간만이 보관되어 있다. 그의 장대가 지면을 파고들 때, 마침내 숲이 잠식해 들어온 도시의 폐허는, 텅 빈 하늘로 외마디 소리를 내질렀고, 그 원시적인 비명은 깊은 숲 사이에서 오래도록 머무르다가, 비라도 오는 때가 되어서야 빗물에 녹아서, 강으로 스며들었다.
그가 뛰어오르기 전의 마지막 한 걸음은, 발뒤꿈치가 땅에 닿아 있지 않았으므로, 먼 옛날의 이야기로, 불사의 강에 몸이 담겨졌던 어느 사람처럼, 드러나는 아찔한 순간과 마주쳤고, 모든 영화에서, 가장 긴박한 순간들이, 한없이 길고 느린 시간성을 갖는 것처럼, 내 몸에 가짜로 존재하는 심장과, 혈관과, 동공과, 세포와, ……그런, 확장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한껏 부풀고는 했다. 그의 몸에서 떨어져나간 장대는 허공을 잠깐 휘돌다가 천천히 땅으로 꺾였다. 그의 모습은 새도 물고기도 무엇도 아니었다. 중력은 무게를 가진 모든 것들을 모두 끌어안으려는 오랜 습관이 있다. 그는 중력을 두 팔로 맞으며 착지했다. 그는 정지하고, 다시 정지한다. 여기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로, 천 개의 태양을 간직하고 온몸의 미세한 구멍까지도 하나의 우주였던 어느 신을 이야기했던 사람이 가졌던 시간처럼, 어느 찰나를 한 장의 사진에 담듯이, 나는 그 순간들을 망막에 가두었다.
6
최초의 사진은 은을 입힌 판 위에서 나타났다. 두꺼운 은판을 공을 들여 문지르고, 요오드 증기를 씌운 다음 사진기의 구멍에 갖다대고 얼마간을, 조금 오래, 기다린다. 피사체 또한 긴 시간을 인내해야만 한다. 은판 위에 상이 맺히고 나면, 그 밑에서 수은을 달인다. 가장 밝은 곳으로 수은 증기가 모여들고, 소금물에 담겼다가 꺼내지면, 잠상의 양성 반응이 나타난다. 가장 은밀한 기억의 순간들은 이렇게 가장 세밀하게 보존되었다. 오래되어도 상하거나, 변해버리지 않았고, 다만 아득하고 덧없는 그리움이 더해갈 뿐이었다. 언젠가의 이야기로, 떠돌이 집시들로부터 은판 사진술을 전해 들었던 어떤 사람은, 그러나 끝내, 모든 것들을 은판으로 옮길 수 없었고,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베껴댔지만, 은판 사진은 한 장 이상으로 복제될 수 없었다. 사진과 사진처럼 정지한 순간들의 말없는 고요함은 언제나, 실제의 풍광을 밀어냈고, 기억된 순간들은 세계의 끝이 몸을 일으킬 때까지도 지속되었다. 그는 몸의 어느 뼈가 부러지기라도 한 것처럼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묵직한 공기의 덩어리는 지면 위와 물살 사이를, 다른 공기 덩어리를 미끄러지며 움직이고, 공기는 제 몸을 들이마시는 것으로 호흡한다. 어떤 사람들은 누군가의, 무엇인가의 사진을 품에 감추기도 한다. 그들은 그렇게 스스로의 기억을 훔친다. 모든 사람들은 페이지 수가 고르지 않은 사진첩을 하나씩 둘씩, 혹은 몇 개씩 갖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이 사진첩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진첩이 사람들을 소유한다는 사실을 아무도 애써 알려고 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았다. 사진첩의 두터운 겉장이 혹자의 비밀스러운 시간에 살그머니 들쳐질 때, 그간 켜켜이 쌓인 먼지가 한순간에 피어올랐고, 사진첩을 펼쳤던 사람은 시간의 그 지독한 증거에 코를 박고, 시야가 흐려져서, 마치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고개를 돌리면서 눈에 먼지가 들어갔다고 말하는 사람처럼, 한동안 말을 잊고는 했다. 그러나 그들은 말을 잊은 것이 아니라, 말하는 방법으로부터 잊혀진 것이었다. 사람들은 소리로, 체취로, 뿌연 영상으로 모든 것을 기억한다. 피부와 피부가 맞닿는, 세포와 세포가 맞닿는, 입을 열고 나온 단어들이 공중에서 얽히는, ……그런, 아슬아슬하게 연결된 객차가 이어진 기차와, 기차가 밟고 지나가는 철로가 하나의 줄기에서 서넛이 유연하게 가지를 치고, 다시 본래의 몸으로 돌아갔다가, 또다시 비어져 나오는, 그 끝없는 관계를 인식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말 아닌 모든 것을 기억했다. 기억은 망각의 뒷면이었고, 망각은 기억의 뒷면이었다. 수도꼭지를 비틀면 어디서 흘러왔는지 모를 강물이 쏟아졌다. 모든 강은 하나의 강을 향해 물살을 재촉한다. 그 강에는 세찬 물살 대신 거친 파도가 일고, 섬 대신 대륙이 가라앉아 있다. 대륙은 아주 오래전에, 이별을 고하지도 못하고 여러 조각으로 갈라졌다. 대륙의 기억 속에 뿌리를 뻗어 무리를 이룬 어느 나무의 종자는 머나먼 건너편을 평생을 두고 그리워한다. 어느 때에, 그들의 억센 후손이 바다의 저편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어느 화가의 그림처럼, 기억은 가끔 그렇게 억척스레 고집을 부린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씩 가지고 있는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강물에는 죽음의 품에 안기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건넌다는 강의 줄기도 섞여 있었다. 그 강의 다른 이름은 망각이었다.
7
언젠가 우주로 유영을 떠나는 사람들을 위해 우주복을 만드는 곳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곳의 재봉사들은 눈이 부시도록 환한 조명 아래에서 장갑의 이음매를 정교하게 꿰맨다. 우주인들은 철제 링으로 연결된 장갑을 끼고 손가락을 구부려 동전을 줍는 연습을 한다. 인간의 몸이 우주 공간에 그대로 노출되면, 질소가 혈액 속으로 녹아들어 폐는 기능을 멈추고 만다. 우주의 비정한 손길로부터 인간을 감싸안기 위해, 우주복에는 스물두 겹의 새로운 소재의 옷감이 겹겹이 누벼지고, 이만여 개의 부품이 고정되며, 우주인의 배설로부터, 우주의 배설로부터 보호하는 장치가 덧입혀진다. 이런 까다로운 작업은, 작은 조각들을 바느질해서, 옛날의 이야기로, 어느 박사가 사람의 각 부위를 오려다 만든 괴물의 슬픈 얼굴처럼, 우주복을 만들어낸다. 이들은, 가까이 이웃한 별을 선회하거나, 뒤편으로 아득한 행성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멋진 사진을 찍고, 지구로 돌아와서 온몸을 구석구석 닦인 뒤에, 다시 다른 우주인을 태우거나, 혹은 재활용품으로 쓰이거나, 아니면 학교로 팔려가서 아이들의 장난감이 되었다.
우주의 텅 빈 몸 안 어떤 부분들은 모체의 유령처럼 광활한 공간 속에서 길을 잃었고, 어느 순간에는 깊은 틈으로 변해 있었다. 근처를 지나던 빛줄기가 허리춤부터 꺾여서 틈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처음에는 시력을, 그 다음에는 자신을 잃었다. 우주를 유영하던 어느 거친 속도는 언젠가 자신의 발을 한없이 잡아끌던 별의 무게를 결코 잊지 못했고, 그 기억을 떨치기 위해 스스로 검은 틈 속으로 순식간에 잠겨 들어갔다. 그 안에는 시간과 속도와 실체가, 일직선으로 씌어진 이야기들과 많은 신들이, 허공을 떠돌던 영상과 소리가, ……그런, 이미 사라져 존재하지 않았고, 그들의 그림자마저도, 뒤틀린 공간 안에 도사리고 있던 끝없는 어둠의 어느 한 몸이 되었다. 언젠가 우주가 흘렸던 눈물의 흔적은 아직 어느 하늘 위에 마르지 않고 남아 있다. 아마도 먼 훗날에, 인간의 손가락으로는 셀 수 없을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 눈물의 흔적은 닫혀 있던 눈꺼풀을 열고, 아득히 고여 있는 검은 자위 속으로 몸을 담그는 것으로 자신을 비울 것이다. 그것은 내가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8
기억나는 것은, 어느 허름한 극장 뒤켠에 앉아, 영화의 필름이 질러대는 소리보다 더 큰, 영사기가 차르륵,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있던, 어느 오후의, 토막으로 잘려진 기억으로, 왜 이런 가짜의 기억, 들이 머리 속에 들어 있는지,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 실재가 아니었던 실재와, 실재가 아닌 실재와, ……그런, 되짚어 돌아가고만 싶은, 지난 세기와, 여자들이 종아리까지 긴 양말을 신었던 시대를, 손바닥에 반쯤 타들어간 담배를 눌러 끄고, 끝없이 그물처럼 펼쳐진 어느 길을 따라서, 긴긴 밤을 지새우며, 세월에도 빛 바래지 않은 누군가의 최초의 기억들을 찾아……
먼 옛날의 이야기로, 북쪽 금지된 탑의 문고리를 잡아당겼다가, 방 안에서 천천히 돌아가던 물레에 손가락을 찔린 까닭으로, 긴긴 잠에 가느다란 목을 내주었던 어느 왕의 딸처럼, 사람들은 자신과 마주한 환영에 쉽사리 내민 손을 거둬들이지 못했다. 지난 어느 세기에 새로이 만들어진 수많은 다른 것들처럼, 시네마토그라프, 영사기의 고안은 저 앞에 내걸린 스크린의 뒷면에서 다른 세계가, 다른 시간이 움직이고 있을 것이라고 믿게 했다. 스물네 장의 일련의 사진들이 일 초 분량의 필름을, 스물네 장의 일련의 사진들이 일 초의 시간을, 시간은 각각의 정지된 순간들로 채워졌고, 정지된 순간들, 그 순간순간들의 간극은 눈을 가리고 지나간 잔상들이 슬며시 파고들어왔다. 영사기의 릴이 돌아갈 때마다, 거대한 직물의 성긴 무늬처럼, 영상이 촘촘히 짜여졌고, 어느 사람들의 회고담과, 어느 두 사람만의 내밀한 대화가, 누군가의 고백이, 누군가의 사살을 지시하는 냉혹한 장면이, 두 손을 맞잡고, 혹은 두 손을 떨쳐내는 장면들이 사람들의 눈 앞에서 재생되었다. 오래전까지 영화의 어느 규칙은 등장인물의 눈과 카메라가 마주치지 않는 것이었다. 관객들을 매혹시키고, 그 스스로 자신에게 취했던 최초의 영화들은 결코 관객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 영화들 가운데에는 영화를 만들기 전까지 요술쟁이였던 멜리에스의 영화도 있었다. 어느 날 그의 카메라가 고장을 일으켰고, 그 와중에 암전과 명전을, 필름이 어떻게 빛을 받아들이는가, 그런……, 새로운 직조 기술들은 이렇듯 우연히 발견되었다. 시간의 거대한 흐름이 군데군데 잘려나가기 시작했고, 이 시간과 저 시간이 거리낌없이 같은 공간을 차지했다. 이제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란 없는 것처럼 보였다. 흘러간 시간 속으로, 사람들은 곳곳에서 두려움 없이 다이빙해 들어갔고, 얼마 후에는 전혀 다른 곳에서 물기를 훔치며 수면으로 떠오르고는 했다. 그리고 다시 다른 시간 속으로, 다른 강물 속으로 몸을 곧게 편 채로 뛰어들었다. 어느 도시의 한복판에는 드높은 건물들이 일제히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 건물들이 뿌리를 뻗어 내린 길은 꿈의 공장이라고 불렸다. 세계는 같은 시각에, 같은 내용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아련한 추억들은 활짝 젖혀진 어느 공장에서 조금씩 가공되었다. 사람들의 열광과 환호와, ……그런…… 고대로부터 전해진 매혹과, 삶과 죽음의 희비극들은 도시의 곳곳에서마다 되풀이되었고, 도시를 떠돌던 악취와 오염된 공기는 습한 극장의 구석으로 모여들었다. 일상의 뒷면에는 육화된 꿈이 고여 있었고, 사람들은 부푼 가슴을 내리누르며 일상의 뒷면을 찾아갔지만, 그곳에는 옛날의 이야기로, 누군가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금기의 상자를 열었던 때처럼, 텅 빈, 세계를 기록한 지나간 시대의 이미 상해버린 필름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슬픈 일들이 무수히 일어났다. 슬프고 광포한 일들이었다. 잔상들은 사람들의 시신경을 휘어잡고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 기억은 모두에게서 잊혀졌다. 잊혀진 기억들은 모두에게 등을 돌리고, 무수한 기록 장치의 차가운 뒷면으로 파고들어가서, 다시는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 슬픈 일들이 무수히 일어났다. 슬프고 비참한 일들이었다.
9
종종 가는 비가 내렸다. 실낱처럼 가느다란 빗줄기였다. 강은 바다가 되고, 바다는 다시 비가 되어 내린다. 비가 오면 시야를 채운 색깔들은 물기에 젖어 눅눅해지고는 했다. 그림자를 품은 무수한 색깔들, 빛, 빛깔들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태초에는 어둠이 있었다, 라고 말을 시작했다. 그런 사람들에게 사물이 내비치는 색깔들은 하나의 경이였다. 빛이 자리한 곳마다 기적이 일어났다. 우주는 아름다운 연한 모래의 색을 지니고 있었다. 우주 공간을 부유하는 모든 빛들을 혼합하면 우주의 색은 모래가 되어 손가락 사이를 가는 비처럼 흘러내렸다.
10
강의 이편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 우리, 는 모두에게서 잊혀진 최후의 두 사람이었다. 그는 장대를 손에 쥐고 가끔 강가를 거닐었다. 강물의 바닥에는 아마도 도시가 있고, 높은 건물들과 야트막한 언덕길, 공중에 떠 있는 오래된 도로 뭉치 사이로 물고기들이 비늘을 반짝이며 지나갈 것이다. 먼 옛날의 이야기로, 어느 강을 지나는 어부들의 눈앞에 나타났던 노래하는 마녀들처럼, 금빛 머리카락을 반짝이며 노래하던 아름다운 마녀들처럼, 도시를 떠돌던 매혹으로 가득 찬 이야기들, 이야기의 끝장을 찢어내고 싶던 손길들은, 햇빛조차도 파고들지 못한 가장 어두운 물 속에 잠겨 있다. 다른 옛날의 이야기로, 이야기를 팔아 하루 목숨을 살았던 어느 나라의 나이 어린 왕비처럼, 강은 몰락한 도시의 흔적을 팔아 사람들을 매혹시킨다. 물길이 거센 강이었다. 강은 깊은 바닥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그 안에 잠긴 옛 도시의 그림자를 훔쳐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들은 물살의 흐름이 내미는 집요한 손길에도 결코 강가를 떠나지 않았다. 사람들을 매혹시킨 가장 오래된 이야기였던 달은 강의 어느 저편에 흐린 얼굴로 잠겨 있었다. 달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먼 옛날이야기로,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최초의 순간들을 문득 저릿하게 그리워하기도 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고 혹자들은 말을 시작했다. 인간의 귀에 울리던 음성들은 모체가 숨을 들이쉬는 소리였고, 달로, 달로, 그러나 아무도 그 소리를 다시 귓가에서 재현해낼 수는 없었다. 슬픈 일들, 달로 갔던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달에서 긴긴 안식을 몸에 두를 수 없었다. 그들은 잠시 달의 몸에 취했다가, 다시 일상의 세계로 돌아왔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달의 뒷면에 고여 있을 바다를 그리워했다. 막연한 그리움이었다. 달로, 달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그늘 밑에서만 살았다. 모두가 서로의 그림자였다. 서로가 한 발짝씩 멀어질 때마다, 어떤 사람들은 기나긴 적막의 시작을 견뎌내지 못했고, 삶의 주변을 맴돌면서 저편을 흘긋거리다가, 스스로를 살해하고는 했다. 길가에서 귓가로 맴돌던 음악은 무수한 음으로 만들어졌고, 무수한 음 사이에는 무수한 침묵이 있었다. 그런 텅 빈 일, 들은 일상의 곳곳마다 자리하고 있었다. 일 초, 일 초, 일 초, 수많은 일 초, 들이 흐르고 나면 세계는 조금씩 마모되어 있었고, 날이 갈수록 무게가 줄어들었다.
도시 안에서 일상의 활기찬 소음들은 기나긴 적막 속으로 삼켜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어느 무대 위에서 누군가가 뱉어놓은 독백처럼 덩그러니 남았다. 표정 없는 말들이었다. 일직선 거리를 가로지르는 전파처럼 어느 누구의 그림자든지 꿰뚫고 지나갔다.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로 투명한 거미줄처럼 짜여 있었다. 줄이 흔들릴 때마다 해가 뜨기 전 맺혔던 물방울이 흩어지는 소리가 났다. 줄마다 빨래처럼 매달린 사람들은 잠깐 내비친 태양 빛으로 젖은 몸으로 광합성을 하다가, 곧 어느 거미의 입 언저리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는 숲과 강이 맞닿은 끝에서 오래도록 몸을 뒤척이지 않았다. 그 위에 오랜 시간과 오랜 그리움이 스쳐 지나갔다. 달로, 달로, 먼 옛날이야기로, 어느 왕들의 무덤은 무수한 바위를 깎아 만들어졌고, 그 안에는 끝이 없는 미로와 바닥이 없는 함정이 있다는, ……그런, 비정한 고대의 시간처럼, 달의 뒷면에는 어느 바다가 있고, 그곳에 발을 담그기 위해서는 비정한 긴긴 시간을 거꾸로 헤엄쳐서, ……, 그는 몸을 세워 일으켰고, 장대를 손에 쥐었다. 가짜로 흐르는 강과, 가짜로 떠 있는 하늘과, 가짜로 바람에 울먹이는 대나무 숲과, ……그런, 호흡을 멈추기 위해 입을 다물었고, 달로, 달로, 울리던 음성과 사물들의 어깻죽지에서 비어져 나오던 소리들이 사라졌다. 그는 천천히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지면이 발길에 걷어차이는 소리가 심장이 부푸는 소리처럼 울려오고, 그의 장대는 몽상을 걷고, 백일몽을 걷고, 환영을 걷고, 기억나지 않는 꿈들과 희미한 이야기들을 걷고, ……, 허공을 한 아름 휘돌다가, 땅으로 떨어진다. 장대에서 벗어난 그는 일 초, 일 초, 일 초, 어느 한 순간이 흐르는 동안 허공을 떠돌다가, 달로, 달로, 흐름이 느려진 강의 몸속으로 모습을 감춘다. 더 이상 내밀할 수 없는 검은 하늘에는 달이, 달의 밑을 흐르는 강의 피부에는 희미한 달의 뒷면이 떠올라 있다. 끊임없이 자신을 훔치는 물의 흐름에도 그 자리에 붙박여 있던 달은, 잠시 창백한 몸을 열고, 달로, 달로, 뛰어든 그를 조용히 받아들이고는, 다시 울음을 울 것 같은 얼굴로 돌아갔다.
11
먼 옛날의 이야기로, 화산이 불붙은 자신의 몸을 뱉어냈을 때, 불길에 잠겼던 무수한 사람들이, 녹지 않고 남은 뼈와 무너져 내리던 벽돌과 기왓장에 마지막 순간의 비명을 새겨놓았던 것처럼, 물길을 헤치고 들어서면, 물속에 잠긴 달의 음성과 달 속에 잠긴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세계는 숨을 죽인 채 적막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공기는 얼음처럼 살갗을 미끄러지면서 지나갔다. 어떤 사람들은 가보지 못한 어느 나라를 그리워했다. 바다에 안겨 있는 어느 먼 나라의 파랑이 마구 칠해진 바다의 바닥 그 밑에 반짝이는 비늘이 돋아나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어느 이야기는, 사람들을 매혹시켰고,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찾아 바닷속으로 뛰어들고는 했다. 그러나 아무리 물에 잠겨 들어가도, 부드러운 지느러미에 뺨을 대어볼 수는 없었고, 길게 자라난 해초에 물길을 따라 곤두선 머리카락과 두 팔과 다리를 빼앗기고, 물의 몸 위에서 긴 호흡으로 끌어온 공기가 모두 사라져갈 즈음에서야, 저 멀리, 줄무늬가 새겨진 물고기떼 사이에서, 서로 다른 강에서 흘러 들어온 물길이 휘감기는 사이에서, 누군가가 긴 지느러미를 흔들며 지나가는 듯한 모습을 보았다. 죽음의 순간보다 더 기나긴 환영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두 눈을 감긴 채로, 두 팔이 묶인 채로 새빨간 총구 앞에 서기도 했다. 그들은 감긴 눈 앞에서 번져나가는 붉은 피 위로 조금 전에 울리던 총성이 다시 한 번 몸을 떠는 소리를 들었다. 슬픈 일들이 무수히 일어났다. 슬픈 일들은 어떤 사람들의 기억하지 못하는 꿈과 기억하고 싶지 않은 꿈들을 환영처럼 드리우고 세계의 뒷면으로 숨어 들어갔다. 세계의 뒷면에는 먼 옛날의 이야기로, 빛나는 해의 몸을 그리워하다가 밀랍의 날개가 녹아 끝없이 추락했던 어느 아이의 후손들과, 아침이 되면 햇빛에 몸이 발기발기 찢겼던 사람들의 후손이, 끝없는 미로와 함정들이 뒤엉킨 미궁 속에 아무렇게나 파묻혀 있었다. 사람들은 건너편에 묻힌 무덤의 주인에게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가끔 거대한 그림자가 지구의 몸을 뒤덮고는 했다. 낮에도 빛이 틈입할 수 없었다. 달의 거대하고 비정한 그림자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림자 속에서 태양을 보려다가 망막을 다치기도 했다. 불에 그슬린 유리 조각들이 사방에서 쟁강거리며 깨져나갔다.
나는 가만히 두어 발걸음을 옮겼다. 저 먼 강의 건너편에 어느 화가가 고의로 마지막 붓질을 뭉개놓은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림자가 사라진 내 얼굴을 떠올렸고, 누군가의 기억이 지배하는 검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로, 달로, 세계는 현재를 그대로 간수하려는 오랜 습관이 있다. 세계의 의지대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어느 인간이, 이 좌표에서 저 좌표로, 몸을 조금 움직인 것뿐이었다. 몸을 한껏 크게 비틀자, 질감이 다른 공기가 손끝에 와 닿았다. 나는 곧바로 강의 건너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잠시 후, 어느 검은 테가 둘러진 액자를 빠져나와, 내가 걸어나온 궤적을 눈으로 좇고 있었다. 검은 액자 안에는 어느 물살이 거센 강과, 검은 하늘과, 강 이편의 바람에 흔들리는 숲과, ……그런, 어느 타박이는 붓으로 칠해져 있었고, 거친 강의 표면에는 윤곽이 이지러진 달이 한숨처럼 잠겨 있었다. 누군가의 움직임을 찾아보았지만, 아무런 흔적도 찾아낼 수 없었고,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침묵이 조용히 자신의 얼굴을 지우고 있었다.
0
어느 먼 날의 이야기로, 지상 4층, 어느 기차역 주변에 서 있던 한 건물 전체를 집어삼킨 어느 식당의 세번째 계단 위 구석진 창가 자리에 앉아 거대한 구름이 흩어지는 좁은 삼거리와 이제 막 불 밝히기 시작하는 간판들 굽은 눈길 아래 지나치는 빗길 젖은 자동차의 휘황한 붉은 등이 열 지은 사이로 떠오른 창백한 얼굴과 그 뒤로 총총히 켜진 실내등의 그림자가 섞여들 때가 있다. 가끔 저 멀리 길게 누운 역 광장에서 비둘기들이 손 한 뼘만큼 날아올랐다. 그때마다 유리벽에 떠오른 얼굴 사이로 검고 흰 잿빛의 새떼가 어른거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여러 개의 가방을 가지고 있었고, 그 가방의 개수만큼 기차를 타고 멀리 왔거나, 아니면 멀리로 갈 모양이다. 역 광장의 한켠에, 비둘기떼를 망토처럼 휘감고 선 시계탑의 바늘이 흔들릴 때마다 기차가 도착했고, 내린 사람만큼 다시 사람들을 태우고 짐을 싣고 떠나갔다. 그 기차들이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해는 점점 사위어들었고, 붉은색 초록색의 네온 불빛이 조금씩, 조금씩 빗물에 번져갔다. 가끔씩 생각난 듯이 가는 비가 내릴 때마다, 사람들은 우산을 받쳐들거나 종종걸음으로 지붕 밑으로 달려들었고, 유리벽 바깥으로 물길이 주욱, 비껴 그어져서 비친 얼굴, 얼굴들을 조각내고는 했다.
이 기차역에서는 마흔네 가지 방면의 기차표를 살 수 있었고, 이 모든 이야기를 나는…… 어디에선가 전해 들었고……,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그 다음의 도시로, 그리고 그 다음의 도시로 갈 수 있었다. 이 가는 비가 그쳐야 지붕 밑을 벗어날 수 있었기에, 몸이 씻겨져나갈 것이 두려웠으므로, 모든 도시로 가기 전에, 내 몸에 묻어난 누군가의 기억들이, 옛 기차의 기적 소리, 달음질 소리와 망각의 손아귀에 머리채를 잡히지 않도록, 긴, 어느……, 시간을 들여 차표를 점검한다. 지나쳐온 선로 위에 스스로의 궤적을 떨구면서, 달의 뒷면에는 앞면보다 아름다울, 먼……, 무수한 바다가 있고, 어느 누군가가 그 바다에 몸을 담그고, 가는 비에 씻기는 듯한 안식에 잠겨 있는지, 거친 속도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그 다음의 도시로 가기 위해, 어느 옛날, 검은 테두리의 그림 속을 빠져나왔던 것처럼, ……훗날, 텅 빈, 작은 개찰구를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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