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포장마차에 처음 들어간 건 이 항구도시로 이사온 지 닷새인가 엿새째 되는 날이었다. 밤 산책을 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산책로는 바다를 매립해서 만든 미나리꽝 두렁이었다. 미나리꽝은 마을 하나만큼 넓게 펼쳐져 있는데다 멀지 않은 산에서 들려오는 밤부엉이 소리도 들을 수 있어 생각 없이 두어 시간 걷기에는 그만이었다.
포장마차는 목재소 옆 공터에 있었다. 컨테이너 하나 크기의 공간에 네 귀퉁이마다 철기둥을 박아 포장을 두른 임시 구조물이었고, 그 안에 예닐곱 개의 허름한 나무 탁자들이 적당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한쪽엔 제법 큰 냉장고와 텔레비전까지 있었는데 누군가 버린 걸 주워 온 게 틀림없다 싶게 낡아 있었다.
내가 들어갔을 땐 꽤 이슥한 시간이었는데도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주인은 텔레비전을 켜 놓은 채 주방 가까운 곳 탁자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실내 중앙에 있는 철판난로가 벌겋게 달아 있지 않았다면 그냥 돌아나갔을 것이다. 나는 성냥개비를 난로 위에 그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검정색 코트를 입고, 입에는 담배를 물고, 알전구의 차가운 빛 아래에 서서 물끄러미 잠든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나는 자신이 꼭 심야의 킬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냉혹한 여자 킬러.
얼마 후에 주인남자가 무엇에라도 놀란 양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다. 사십대 중반. 피부는 탁하지만 그만하면 호남형이었다.
"혼자 오셨어요?"
기지개를 켜며 남자가 물었다. 대개 이렇다. 술집, 여관, 영화관...이런 장소는 여자 혼자 가는 곳은 아니라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혼자예요."
"뭐 좀 드릴까요?"
남자가 콩나물국과 오이 한 접시를 탁자에 놓으면서 물었다.
"소주 한 병 주세요."
"안주는...?"
"뭐가 있지요?"
"여러 가지예요. 닭갈비, 대합, 꽁치...저 안에 한번 보실래요?"
"알아서 주세요"
남자가 준비한 안주는 조기찜이었다. 콩나물국은 시원했고 조기찜도 담백했다. 을씨년스럽던 실내가 조금 달라 보였다. 우연히 들른 포장마차에서 깔끔한 안주를 만난다는 것도 인생의 한 행운이다. 나는 조기 네 마리 중 두 마리를 소주 석 잔만에 먹어 버렸다. 남자는 몇 번인가 내게 말을 붙여 보려고 힐끔거리는 듯하더니 텔레비전이 있는 자리로 돌아가 등을 보이고 앉았다.
마지막 잔을 비울 때쯤 한 여자가 들어왔다. 크, 씨발...여자는 내 옆자리에 앉아 소주를 맥주컵에 따라서는 사이다 마시듯 단숨에 들이켰다. 키가 작고 몸집이 실팍한 여자였다. 화장이 매우 짙은데도 기미가 드러났고 눈가의 잔주름은 더 선명하게 보였다. 오십은 되었을 나이였다. 남자가 오이 접시를 들고 여자 앞에 앉았다.
"벌써 웬일이야? 문 닫았어?"
"애들이 있어야 장사를 하지, 날 샜어."
"자꾸 문 닫으면 단골까지 놓쳐."
"아이구, 단골은 무슨."
크으으...여자는 계속해서 맥주컵 가득 소주를 마셨다.
"오늘은 안 왔나 보지?"
흘깃 내쪽을 바라보며 여자가 남자에게 물었다.
"누구?"
"누구긴, 자기 이거."
여자가 새끼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으응, 집에 있겠지..."
저 여잔 누구야? 하는 표정으로 여자가 남자에게 턱짓을 했고, 손님...하고 남자가 낮게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마지막 조기 살점을 목으로 넘긴 다음 일어나 술값을 계산했다. "또 오세요" 하고 등 뒤에서 남자가 말했다.
그 날 이후로 사나흘에 한 번씩 포장마차에 들렀다. 단골이 된 셈이었다. 차츰 주인남자하고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길목이 안 좋아서인지 포장마차는 늘 한가했다. 가끔 긴 머리에 청색 스카프를 두른 여자 하나가 와 도와주는 걸 보았다. 마른 체구에 수줍음이 많아 보이는 여자였다. 주인남자가 아내라고 소개했지만 어쩐지 부부 사이로 보이지는 않았다.
담배를 빌리러 어느 날 자정이 넘어 포장마차에 갔다. 남자는 텅 빈 실내에서 혼자 화투패를 돌리고 있었다. 나는 집에서 피울 것까지 다섯 개피를 빌리고는 난로 옆자리에 앉아 커피를 얻어 마시며 잠깐 쉬었다. 난로에 장작을 넣고 돌아서던 남자가 물었다.
"고스톱 칠 줄 아세요?"
"조금이요."
"금방 갈 거 아님 한번 칠래요?"
"둘이서도 칠 수 있나요?"
"그럼요. 뭐 돈은 안 걸어도 되구요."
"고스톱은 돈내기 안 하면 재미없지요."
"그럼 걸구요."
우리는 구석진 자리에 마주앉아 고스톱을 치기 시작했다. 점에 백 원이었다. 내가 이만 원인가 땄고, 나는 그 이만 원으로 포장마차에서 가장 비싼 안주를 두 개나 시켜 먹었다. 주인남자의 고스톱 실력은 상당했다. 내가 무엇을 들고 있는지,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를 환히 꿰고 있었다. 혼잣말처럼 슬그머니 던지는 말 - "삼광 기다리지요?" "비를 두 장이나 들고 있으니 패가 마르겠군요" 하는 말들이 거의 틀릴 때가 없었다. 내가 이길 수 있었던 건, 내 실력이 워낙 형편없어 패를 고르고 내주는 순서가 남자의 노련한 예측을 자주 벗어남으로 해서 그를 혼란시켰기 때문이었다.
그 날 이후로 갈 때마다 고스톱을 쳤다. 손님이 있으면 혼자 화투를 만지작거리며 기다렸다. 가끔 나를 보고 수군거리는 손님들이 있었다. 신경 쓰지 않았다. 담배는 어쩔 수 없다니까 그럼 술이라도 꼭 줄이세요, 하고 말하던 의사의 충고를 생각했다. 고스톱을 치면 술을 덜 마시게 되었다. 글 쓰다 지치면 오토바이를 타고 산악을 질주하며 머리를 비웠다는 어느 일본 작가의 말도 떠올렸다. 그 정도의 목숨 건 스릴은 아니라도, 아무튼 '못 먹어도 GO!'를 외치며 털어 버려야 될 정도의 찌꺼기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남자의 아내라는 여자도 함께 치기 시작했다. 여자의 수준은 나와 비슷했다. 하지만 여자는 고스톱이라는 게임 자체를 매우 즐긴다 싶었다. 장사를 거들고 있을 때는 벙어리인가 싶게 말이 없는데 일단 화투판에 앉았다 하면 얼굴에 생기가 돌고 말이 많아졌다. 판이 돌아갈 때마다 그 상황에 딱 맞는 재미있는 비유를 툭툭 잘도 던졌다. 속담 사전이나 국어용례사전 어디에도 나와 있을 것 같지 않은 말들이었다. 주인남자는 여자가 귀여운 수다를 떨 때마다 헤부죽 웃었다.
여자가 합류하고부터는 내가 돈을 잃는 날이 더 많았다. 둘이 무슨 담합을 해서가 아니라 그때쯤 내 실력도 마구잡이 수준을 벗어나기 시작해 남자의 노련한 패읽기가 마침내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해서였다. 그렇게, 서서히 돈을 잃는 날이 더 많았지만 나는 늘 판을 벌렸다. 돈 따자고 하는 일이 아니었고(하기야 무슨 일로든 돈을 좀 벌 수 있으면 좋기는 했다), 겨울밤은 아득히 길었으니까.
몇 번은 포장마차가 문을 닫는 새벽 여섯 시까지 패를 돌렸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 무릎이 먼저 휘청거린다. 허리와 목의 근육을 차례로 조심스럽게 풀고, 손가락 관절을 풀고, 길게 하품을 하며 포장마차 문을 나서면 거리는 아직 적막히 잠들어 있다. 먼 곳부터 움터오는 희미한 박명, 몸에 달라붙는 새벽 찬이슬, 정신이 투명해진다. 목재소의 긴 담장을 지나 주택가 좁은 골목에 들어서면 지난 하룻밤이 벌써 꿈결처럼 아련한데, 그러면 아무 집 대문 앞이나 잠시 쪼그려 앉아 비감한 척 해 봐도 좋은 것이다. 돌아온 가출 소녀처럼.
겨울이 깊어지면서 포장마차 손님도 조금씩 늘어났다. 자리가 꽉 차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 주인남자와 목례만 나누고 집으로 돌아와 밀린 원고를 처리하고 있으면 새벽 두세 시경에 전화벨이 울린다. 다음과 같은 말이 조심스럽게, 한편 당연한 보고라도 하듯 싹싹하게 날아온다.
"아직 안 자지요? 손님 다 빠졌는데..."
자고 있다고 해도 되지만 그래야 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노트북을 끄고, 옷을 갈아입고, 백 원짜리 동전과 천 원짜리 지폐를 적당히 지갑에 챙긴다. 문을 나서다 말고 돌아서 만원 권 푸른 지폐도 두어 장 더 집어넣는다. 흔들고 쓰리고에 피박을 연거푸 몇 번이나 당하는 아주 황당한 날도 가끔 생기는 법. 화투판에서 돈 떨어졌다며 먼저 일어나는 건 조금은 서글픈 일인 것이다.
그렇게 불려나간 어느 날에는 주인남자의 친구라는 사람과 합석하기도 했다. 갑자기 몰려온 단체 손님 때문에 주인남자는 정신이 없었다.
"이 친구도 방금 왔는데 같이 이야기나 나누시죠."
꽁지머리에 청바지를 입은 남자였다. 꽁지머리는 자기 자리에서 소주와 닭똥집을 들고 오며 전부터 아는 사람이기라도 한 양 환히 웃었다. 우리는 가벼운 통성명을 하고 서로 각자의 술잔을 채워 주었다.
"이사온 지 얼마 안 되셨다구요? 말씀 많이 들었슴다."
"아, 네에..."
"미인 단골이 한 분 계시다고..."
"다른 사람 얘긴가 보네요."
"무슨 말씀을요, 정말 미인이심다."
"오래 된 친구 사인가 보지요?"
"하문요, 부랄 보면서 자랐으니까...이런, 숙녀 앞에서..."
"이 친구는 예술가라 입이 험해요."
내가 주문한 맛살을 번개탄에 구워 오던 주인남자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예술은 무슨..."
"너가 늘 하던 말 아니냐...예술!"
"빌어묵을 놈! 오늘 안주는 나냐?"
"예술가라 이렇게 수줍음도 많이 타구요."
주인남자가 나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나는 꽁지머리에게 물었다.
"어떤 예술인데요?"
"기타리스트 아닙니까" 하고 대답한 것은 이번에도 주인남자였다. 꽁지머리가 바로 덧붙였다.
"하하, 시내 모 단란주점에서 전속으로 연주해요. 젊을 땐 정말 멋진 예술가가 되고 싶었는데. 웬만한 악기는 다 만지걸랑요. 피아노도 치구, 섹소폰도 불구, 물론 기타를 따라올 악기는 없지만서두."
"기타를 가장 좋아하시나보죠?"
"하문요, 젤 먼저 손댄 악기이기도 하구요."
"나도 하모니카는 부는데."
"하모니카, 좋죠. 하모니카만 잘 불어도 훌륭한 예술가 충분히 돼요."
한 무리가 빠져나갔다. 손님은 아직 세 탁자나 되었다. 얼마 후에 전에 본 키 작은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와는 벌써 여러 번 마주쳐 서로 목례를 주고받는 정도의 사이는 돼 있었다. 여자는 스스럼없이 우리 자리로 와 앉았다. 꽁지머리와 여자가 아는 체를 했다. 여자는 분홍빛 모직 투피스에 까만 하이힐까지 신고 있었다. 화장은 여전히 짙었다. 색깔 있는 조명 아래에서 보면 10년은 젊게 보일 차림이었다. 그녀는 이번에도 맥주컵에다 소주를 마셨다.
"또 문 안 열었어?"
포장마차 남자가 물었다. 10시 넘어서 문을 여는 곳은 어딜까, 나는 잠시 생각했다.
"묻지마, 열불 나. 한잔 마시고 문 열러 갈 거야."
여자는 비어 있는 내 잔에 소주를 따랐다. "고스톱 재미있어요?" 하고 그녀가 물었다. 나는 대답대신 웃으면서 그녀의 빈 잔을 채워 주었다. "건배합시다!" 하는 그녀의 말에 쨍, 하고 우리는 각자의 잔을 부딪쳤다. 그날은 좀처럼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화투를 만지작거리는 내게 여자가 말했다.
"우리끼리 한판 돌릴까?"
"술이나 하지요."
"하긴 나도 금방 가야 돼."
여자의 술 마시는 모습은 불안정해 보였다. 씨발, 문 열기 싫어...하면서도 시계를 빈번히 보았다.
마지막 손님은 2시경에 나갔다. 주인남자가 합석하자 드디어 고스톱이 시작되었다. 여자는 이제 시계를 보지 않았다. 한 사람이 광을 팔 수 있게 되자 판 돌아가는 게 여유있었다. 나는 자주 광을 팔며 뒤로 물러나 담배를 피웠다. 판에 끼어 있을 때보다 난롯가로 한 걸음 물러나 혼자 피우는 담배가 더 맛있었다.
"고리 모아서 이따 우리 가게로 가자."
꽁지머리가 주인남자에게 제안했다.
"여기나 팔아주지 거긴 뭣하러 가!"
키 작은 여자가 퉁명스레 쏘았다.
"아, 이차 가자는 거 아니우. 분위기 바꾸고 노래도 때리고, 오케이?"
"나야 괜찮은데..."
주인남자가 내 눈치를 살피자 꽁지머리가 짐짓 단호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거기도 같이 가는 겁니다?"
"어딘데요?"
"코앞이에요. 택시 타면 기본요금 거리니까. 이런 것도 다 인연 아닙니까. 겸사겸사 우리 가게도 구경하시구."
"너 가게냐?" 하고 주인남자가 가볍게 조소했다.
"누가 내 가게래. 이거 사장 아닌 인간 서러워서 살겠나. 가는 거죠?"
"그래요. 고리 묻으려면 열심히 쳐야겠네."
"하문요, 자꾸 광만 팔지 말고 본격적으로 붙어 봐요. 광값 아무리 높아도 고스톱에선 광만 팔아선 돈 못 따요."
"이 분은 너처럼 꾼 아니여."
주인남자가 핀잔을 주었다.
"누가 꾼이래. 꾼은 너지. 이 친구 왕년엔 그래도 큰 가게 했어요. 화투 땜에 패가망신 했지만."
"별 말 다 하구 있네."
"창피할 것 뭐 있냐. 지금 이렇게 맘 잡았으면 그만이지. 안 그래요?"
"화투들 안 쳐! 패는 안 돌리고 무슨 말들이 그렇게 길어."
여자가 소리지르자 꽁지머리는 얼른 화투를 섞었다.
4시에 판을 걷었다. 여자가 많이 따고 주인남자가 가장 많이 잃었다. 택시를 타고 오 분만에 도착한 단란주점에서 모두 돌아가며 두어 곡씩 노래를 불렀다. 여자의 노래는 힘이 있고 구성졌다. "옛날에 국악을 했대요." 하고 주인남자가 말해 주었다. 꽁지머리는 트위스트를 추었다. 매우 오래 된 춤...하고 나는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멋있는 제목이다.
"작년에 교통사고를 당했걸랑요. 그래서 허리가 잘 안 돌아가요."
자리로 돌아와 앉으며 꽁지머리가 말했다.
"잘 돌아가던데요."
"그러니까 하는 말 아닙니까. 옛날엔 훨씬 죽여줬다 이거죠."
"그랬겠어요."
노래 부르고 있는 포장마차 남자를 멀뚱하니 바라보던 꽁지머리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요즘엔 요리학원을 다녀요."
"누가요?"
"저요."
"아..."
"나중에 큰 레스토랑 하나 갖는 게 꿈이걸랑요. 그때 주방을 내가 직접 맡을라구요."
"네에."
"요리도 예술이더라구요. 근데 재료가 비싸서 집에서 연습을 못 해요. 그게 문제예요, 집에서 많이 해 봐야 되는데. 요리 잘 하세요?"
"전혀요."
갑자기 조용해졌다. 어느새 노래가 그치고 여자와 주인남자가 멀뚱하니 서 있었다. 꽁지머리가 나가 노래방 기계를 끄고 전자올갠 앞에 섰다.
"자아, 지금으로부터 본인 연주 시작함다."
주인남자와 여자는 꽁지머리의 밴드 반주에 맞춰 블루스를 추기 시작했다. 춤추는 도중에 여자의 손이 슬며시 주인남자의 사타구니 불룩한 곳으로 들어갔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여자가 씨익 웃었다. 나도 웃어 주었다. 얼마 후에 화장실에 다녀오다 보니 밖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의 머리에 눈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나는 거리로 나가서 한참 동안 눈을 맞았다. 첫눈이었다. 눈을 맞으며 그대로 집까지 걸어가고 싶었지만 잠시 생각하다 실내로 다시 들어갔다. 홀에는 두 남녀가 여전히 끌어안고 있었다. 그 날의 술자리는 날이 훤히 밝아서야 끝났다.
그 며칠 후에 포장마차에서 또 여자를 만났다. 그 날도 포장마차에 손님이 많았다. 여자와 나는 처음부터 합석해 함께 술을 마셨다.
"우리 가게에 가서 마시자. 내가 살게."
소주병이 비었을 때 여자가 말했다.
"거긴 무슨 술 있어요?"
"맥주, 양주. 여자가 오는 술집은 아닌데, 뭐 그런 데 있잖아?"
"가요."
여자의 가게는 다섯 평이 될까말까한 작은 술집이었다. 조악한 무늬의 벽지는 군데군데 얼룩이 져 있고, 실내에 곰팡내가 물씬했다. 칸막이를 한 테이블이 세 개였고 조명이라곤 희미한 색전구뿐이었다.
여자는 맥주 세 병에 과일을 대충 썰어 내왔다.
"예전에는 돈 좀 만졌어. 가게를 다섯 개나 가지고 있었거든. 여자애들도 많았고."
"여긴 어떤 사람들이 와요?"
"남자들이지."
"어떤 남자들?"
"남잔 다 똑같아. 뭐 특별한 놈 있는 줄 알아. 이 사장, 박 사장, 공무원, 학교선생, 건달 다 와."
쨍, 건배를 했다. 과일은 오래 돼서 하나같이 시들시들했다. 소주는 잘 마시던 여자가 맥주는 입만 슬쩍 대고 있었다.
"여긴 술값 비싸지요?"
"계집 끼고 마시려면 그만한 값 해야지. 어떤 치들은 돈값 한다고 별 지랄을 다 떤다니까. 휴, 그나저나 애들이 있어야지 장살 하지. 몇 년 전만 해도 나 혼자도 됐는데, 이젠 암만 화장을 떡칠해도 나이가 보이나 봐. 자기가 보기에도 나 완전 갔지?"
"예뻐요."
"아이구, 예쁜 년들 다 어디 갔어? 나도 내 주젠 알아. 나이를 누가 이겨. 한때야 예쁘단 소리도 정말 들었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그러다보니 이 꼴 되더라구."
"언니, 노래 잘 부르데요."
"언니? 기분 좋네. 자기 정말 내 동생 해라. 우리 가끔 보자. 언니 동생 하는 년들이야 많지만 마음으로 얘기할 애들이 없어. 옛날엔 이 바닥에도 순정이란 게 있었는데 요즘엔 정말 날라리들뿐이야. 하기사 순정 가진 년들은 나처럼 되고 마니까. 옛날엔 가게가 다섯 개나 됐는데, 그게 다 어떻게 날라갔는지, 인젠 정말 기억도 안 나네, 씨발놈의 세상."
여자의 시선이 자주 열어놓은 문 쪽을 향했다. 자정이 되도록 손님이 없었다.
"이런 덴 늦게들 와. 이차 삼차 잔뜩 꼴아서들 오거든."
여자가 공허하게 웃었다. 쨍, 다시 건배를 했다.
"맥주 더 할래?"
"됐어요."
"음악 좀 틀까?"
"아니요. 언니 좋으면 틀고"
"그럼 우리 춤추러 가자."
"춤?"
"응, 괜찮은 나이트 있거든."
"장사는?"
"일어나기나 해."
택시를 타고 간 곳은 '한국관'이라는 나이트클럽이었다. 클럽 웨이터들은 여자를 아는 듯했다. 여자와 웨이터 한 사람이 무언가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우리는 스테이지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여자가 딤플과 과일을 시켰다. 여자가 이끌어서 나는 스테이지로 나가 함께 춤을 추었다. 현란한 조명 때문에 스테이지에서의 여자 모습은 마흔도 안 돼 보였다. 한 곡이 끝나 자리로 돌아왔을 때 담당 웨이터가 우리 자리로 왔다. 웨이터가 여자에게 손으로 한 좌석을 가리키자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웨이터의 웃옷 주머니에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찔러 넣었다.
"잠시만 여기 있어."
옷매무새를 고치며 여자가 일어났다. 여자가 가고 난 후 얼마 후에 웨이터가 오더니 "오시라는데요" 하면서 나를 여자가 간 좌석으로 안내했다. 여자는 오십대로 보이는 남자 두 명과 큰소리로 대화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상당히 취한 상태였다.
"우리 것 여기로 날라줘요."
여자는 웨이터에게 부탁하면서 나에게 찡긋, 의미심장해 보이는 윙크를 했다. 나는 두 남자 사이에 앉아 술을 마셨다. 블루스 곡이 흐르자 여자와 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남자가 나에게도 춤을 추자고 했다. 나는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고 일어나서는 테이블과 먼 곳에서 여자가 춤추는 모습을 보기만 했다. 그녀는 한 남자와 추고 난 후, 소파에 반쯤 쓰러져 있는, 나와 춤을 추자고 했던 남자를 끌어내어 또 춤을 추었다. 얼마 후에 여자가 남자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거리를 두고 뒤따라 나갔다. 여자는 남자들을 택시에 밀어 넣더니 현관에 서있는 나를 향해 아까처럼 찡긋, 윙크를 했다. 택시가 떠난 후 나는 술도 깰 겸 집까지 천천히 걸었다.
다음 주에 포장마차에서 여자를 만났다. 여자는 지난번에 70만 원이나 매상을 올렸다면서 나에게 술을 샀다.
"점잖은 분 끌어들이지 마."
주인남자가 시들하니 책망했다. 여자가 발끈 목소리를 높였다.
"누이 매부에 처제 형부까지 두루 다 좋은 일인데 자기가 왜 나서! 동생 안 그래?"
"예에." 하고 나는 웃어 주었다.
여자를 본 건 그 날이 마지막이었다. 한동안 나타나지 않기에 주인남자에게 물었더니 오래 전 이야기라도 하듯 희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가게 내놓고 딴 데로 갔어요."
"이사간 거예요?"
"네, 장사가 워낙 안 됐나봐요. 한때는 돈 긁더니..."
"가게를 다섯 개나 했다면서요?"
"그랬지요. 데리고 있던 여자애들만 한 다스가 넘었으니까...한순간이더라구요."
"그랬군요."
"네, 금방이더라구요."
해가 바뀌었다. 설연휴가 끝나고 나서 포장마차에 갔다. 그날은 고스톱을 칠 수 없었다. 주인남자가 아내와 싸우고 있었다. 내가 들어섰을 때 주인남자는 막 후라이팬 하나를 내동댕이치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는 걸 보자 휙 돌아서 밖으로 나가 버렸는데 어쩐지 다행스러워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난로가로 가 가만히 서 있었다. 손을 비비며 불을 쬐다가, 장작 몇 개를 집어넣었다.
"미안해요. 앉으세요."
돌아서서 눈물을 닦고 난 여자가 억지로 조금 웃었다. 나는 안주 없이 맥주만 한 병 시켰다. 입술을 깨물고 설거지를 하던 여자가 잠시 후에 잔 하나를 들고 내 자리로 왔다.
"저도 한잔 줄래요? 이건 돈 안 내셔도 돼요."
"내가 살게요."
나는 여자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단숨에 잔을 비우고 나서 여자가 쓸쓸히 웃었다.
"우리, 비슷한 나이 같은데...그쪽은 분위기가 참 좋아요...이런 곳에 안 어울리는 사람 같은데, 어찌 보면 너무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하고...뭐 하시는 분이세요? 주부는 아닌 것 같은데."
여자의 눈빛은 충혈되어 있었고, 입에서 술 냄새가 많이 났다. 전작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미소만 지으며 그녀의 빈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조금 취했는데...미안해요, 제 얘기 좀 해도 돼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세 여자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두서없는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정리하면 이랬다. 포장마차 주인남자는 간질을 앓고 있는 큰아들과 딸 둘이 있다. 원래의 아내는 7년 전에 도망갔다. 주인남자와 자기는 5년 전부터 사귀어 왔는데 자기에게는 남편이 있으며 포장마차 남자도 그것을 알고 있다.
여자가 또 울었다. 나는 천장에 매달려 있는 두루마리 휴지를 떼어 그녀에게 건넸다.
"개새끼, 지만 힘드나, 나보구 당장 어떻게 하라구"
여자는 이제 아예 탁자에 엎드려 흐느꼈다. 한참 후에 남자가 돌아왔다. 나는 머쓱하니 서 있는 남자에게 술값을 계산하고 밖으로 나왔다.
며칠 후에 다시 포장마차에 갔는데 이번에도 고스톱을 치지 못했다. 두 사람이 또 싸운 모양이었다. 탁자 두어 개가 쓰러져 있었고, 여자는 난로 옆에, 남자는 텔레비전 앞에 우두커니들 앉아 있었다. 남자는 나를 보자 저번처럼 말없이 나가 버렸다. 여자는 지난번과 달리 내내 말없이 땅바닥만 보고 있었다. 나는 혼자 맥주 한 병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에 다시 갔을 때는 고스톱을 칠 수 있었다. 이날은 주인남자 혼자뿐이었다. 손님이 많아 나는 모처럼 혼자 화투장 만지작거리는 시간을 가졌다. 조금 한가해졌을 때 주인남자와 마주앉았다. 여자의 말 추임새가 없으니 판이 어쩐지 시들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열심히 고스톱을 쳤다. 손목에 힘을 주며 단호한 동작으로 패를 뿌렸다.
그 날 이후 아내라는 여자는 다시 포장마차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갈수록 어쩐지 고스톱이 재미없었다. 주인남자도 그런 것 같았다. 눈이 몇 번 내렸고, 날씨는 바짝 추워져 갔다. 아무튼 고스톱은 계속됐다.
겨울비가 장맛비처럼 내리는 날이었다. 내가 포장 안으로 들어서자 막 단체손님이라도 다녀갔는지 주인남자가 그릇들을 수북히 쌓아 놓고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곧 끝나요."
"천천히 해도 돼요."
"마셔 보세요. 어머니가 직접 담근 거예요."
남자가 턱으로 내 옆의 탁자를 가리켰다. 손님들 오기 전에 혼자 마시고 있었는지 막걸리 주전자와 김치 한 보시기가 있었다.
나는 설거지 끝나기를 기다리며 혼자 막걸리를 마셨다. 남자가 켜 놓은 텔레비전에서는 대기업이 나오는 경제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다. 텔레비전을 끄자 빗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아니, 빗소리뿐이었다. 달그락거리는 설거지 소리도 어디 먼 데서 들리는 소리 같았다. 한참 후에 남자가 김치전 한 장을 부쳐 왔다. 함께 막걸리 잔을 부딪치고 나서 우리는 바로 판을 벌렸다.
밤일낮장, 남자가 선을 잡았고, 익숙한 동작으로 패를 섞었다. 판이 시작되었으니 할 말은 이제 없었다. 빗소리만 포장을 두들겨댔다. 우리는 싸우고 난 사람처럼 묵묵히 패를 돌렸다. 난로가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손님은 더 이상 올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어쩐지, 백 년 전부터 계속 이 자리에서 고스톱을 쳐 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자정이 넘어 갔다. 비는 계속 거세졌다. 우리는 어쩐지 유령 같았다.
어느 순간 나는 무심코 여자가 하던 너스레 하나를 흉내냈다. 청단을 노리며 패 하나를 내리치고 난 다음이었다.
"청단이다! 아님 말고."
아님 말고! 그 말이었다. 여자가 던지던 다른 재미있는 말들에 비하면, 그건 다른 데서도 흔히 들을 수 있는 평범한 말이었다. 그래도 여자가 할 땐 그렇게 재미있어 보였는데, 내 말은 스스로도 어색하기만 했다. 나는 공연히 머쓱해 힐긋 주인남자를 보았다. 주인남자는 웃지 않았다. 그 대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다음부터였다. 남자의 패 돌리는 동작이 갑자기 빨라졌다. 늘 신중하던, 노련한 승부사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때부터 차츰 내 자리 밑에 깔린 돈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새벽 3시쯤 되었을 때 마침내 남자의 돈이 바닥났다. 금고엔 어떤지 몰라도 남자의 호주머니는 텅 비어 버렸다. 남자는 빈 호주머니를 털어 보이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일어나 포장 밖으로 나갔다. 여전히 비가 퍼붓고 있었다. 남자는 멀지 않은 저쪽에 비를 맞으며 멀거니 서 있었다.
나는 내가 딴 돈을 세기 시작했다. 그때 바지주머니에서 호출기가 울렸다. 거의 몇 달만에 처음 울리는 호출음이었다. 나는 포장마차 전화로 호출기의 번호를 눌렀다.
"뭐해?"
시 쓰는 선배였다.
"고스톱 쳐."
"세월 좋으네."
"그래..."
"집들이 한번 안 하니?"
"자취방도 집들이 하나."
"그럴수록 사람 냄새 피워야지. 참, 그 동네 수철이 살지?"
"응"
"자주 만나니?"
"아니."
"왜? 집도 가까운데"
"내가 싫대."
"누가?"
"여자가."
"젠장...글은 잘 되고?"
"아주 잘 돼."
"다행이네. 조만간 한번 내려갈게. 몸 좀 챙겨라."
"응."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담배 한 대를 길게 피웠다.
주인남자는 아직도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나는 탁자 위의 담뱃갑과 돈을 챙겨 일어났다. 나오면서 내가 딴 돈을 모두 주방의 도마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나왔는데도 주인남자는 돌아보지 않았다. 빗소리 때문에 하기야 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의 젖은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우산이 없었으므로 나도 온몸이 젖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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