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 천방산] 천방사 승려 변란
천방사 승려들의 변란사건은, 현종 5년(1664 - 조선조 18대 왕) 실록 12월 13일조 기사에 처음 기록 되어 있다.
한산 천방사(현재 서천군 문산면 음적사 일원)의 승려들이 관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충청도관찰사 이익한(李翊漢, 1609년 - 1668년)이 한산군수 신숭구(申嵩耉)로 하여금 그 우두머리 승려를 잡아들이게 하였는데, 천방사의 승려 수백 명이 조총과 활로 무장하고서 지형이 험한 천방산 정상을 거점으로 거세게 저항하였다. 이에 관군은 천방사를 불태웠고, 천방사의 승려들은 서천 일대 벼슬아치의 집을 불을 질러 그 분을 풀었다. 그러자 충청도관찰사 이익한은 조정에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공주영장 양일한(楊逸漢)을 한산으로 보내 천방사를 공격해 승려들을 모두 붙잡도록 명령하였다. 이 때 양일한은 자기소관이 아닌 한산(韓山)·임천(林泉) 등의 군병(郡兵)을 동원하여 승려들을 체포 진압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체포한 승려들에게 죄를 명백히 자백을 받지도 아니한 채 곧장 효시 할 것을 관찰사 이익한에 청하하기도 했다.
그 당시 조정에서 파견된 순찰사가 한산과 서천 두 고을의 유향소 색리들을 문초해 파악한 정황은 대충 이러하다. 처음에 충청도관찰사가 관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천방사의 승려를들을 체포하라 한산 군수에게 명하였다. 이에 승려들이 당황하여 세 패로 나뉘어 산 정상으로 올라가 한데 모였다. 그러자 공에 눈이 어두운 양일한은 천방사의 승려 세 명을 붙잡아 혹독히 형문하여 그 자리에서 죽게 만들었고, 군사들로 하여금 천방사 승려들을 만나면 모두 죽이도록 명령하였다. 진압 후 승려들의 진술까지 거짓으로 만들어 뒷날 증거로 채택되도록 꾸몄는데, 이러한 사실이 충청도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모두 놀라 분하게 여겼다.
이 사실은 병마절도사에 의해 조정에 알려지게 되는데, 현종6년(1665) 2월 12일 충청도관찰사 이익한은 분명하지 못한 죄상을 적어 이들의 중형(重刑)만 계청(啓請)한 죄로 선천(宣川)에, 공주영장 양일한은 철산에 각각 정배(定配-죄인을 지방이나 섬으로 보내 정해진 기간 동안 그 지역 내에서 감시를 받으며 생활하게 하던 형벌)되었고, 한산 군수 신숭구는 파직하므로 이 변란사건은 마무리 됐다.
※ 현재 서천지역에는 천방사에 관련된 구전으로, 나쁜 중들이 시주하러 온 아녀자를 겁탈하는 등 갖은 횡포를 다하던 중 뜻하지 않은 빈대의 습격을 받아 이를 구제하기 위해 절에 불을 질러 망해버렸다는 설화가 있는데 이는 관의 폭정을 무마하려 의도적으로 만들어 퍼뜨린 이야기로 추정된다.
천방사 추정지 탐방
▼ 화살표는 천방산 탐색 결과 필자가 천방사가 있었을 것으로 비정하는 곳이다.
▼ 노란색 선은 필자가 처음으로 천방사 대웅전 주춧돌로 추정되는 암석과 와편이 발견되는 곳이며. 점선 지역에서도 다수의 와편이 발견된다.
▼ 와편이 다수 발견되는 곳 - 얼마 전까지 민묘가 있었으나 파묘되었다.
▼ 대웅전 추정지 석축
▼ 대웅전 추정지로 8개의 주춧돌이 유관으로 확인되는 곳이다.
▼ 주춧돌로 추정되는 암석
▼ 쉽게 눈에 띄는 다수의 와편과 토기편
▼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붕괴된 석축
▼ 석축 아래 평탄지 - 이 곳에서도 와편이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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