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산서원(七山書院) - 부여 임천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2호.
-. 충남 부여군 임천면 칠산리 286-3번지
-. 1687년(숙종 13)에 창건되었으며, 시남(市南) 유계(兪棨 1607∼1664)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1697년에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 되었다가 1966년 현재의 위치에 복원되었다.
시남 유계(兪棨) - 1607(선조 40)~1664(현종 5).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의 학통을 잇는 서인(西人) 학자로서, 성리학에 밝았고 특히 예론에 정통했다.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무중(武仲), 호는 시남(市南). 아버지는 참봉 양증(養曾)이며, 어머니는 의령남씨(宜寧南氏)로 병조참판을 지낸 이신(以信)의 딸이다. 김상헌(金尙憲)·김장생에게 성리학을 배웠고,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윤선거(尹宣擧)·윤문거(尹文擧)·이유태(李惟泰) 등과 교유했다. 1633년(인조 11)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시강원설서로서 예조판서 김상헌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하다가, 이듬해 화의가 이루어지자 척화죄로 임천(林川)에 유배되었다. 1639년 풀려났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금산의 마하산(麻霞山)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이때 송시열·송준길 등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학문을 논했고, 주자의 〈가례 家禮〉에 대한 여러 경전과 예서(禮書)를 바탕으로 〈가례원류 家禮源流〉를 지었다. 그후 다시 기용되어 1646년 무안현감이 되고, 1649년 인조가 죽자 홍문관부교리로서 왕의 장례절차를 상소하여 예론에 따르도록 했다. 이어서 인조의 묘호를 정할 때, 조(祖)의 사용을 반대하고 종(宗)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다가 선왕을 욕되게 했다는 죄로 온성과 영월에 유배되었다. 1652년 유배에서 풀려나 송시열·송준길의 추천으로 시강원문학이 되었고, 1659년 병조참지·대사간·부제학 등을 역임했다. 효종이 죽은 뒤 일어난 예송(禮訟)에서, 서인의 입장에 서서 송시열의 기년설(朞年說)을 지지하고 남인의 3년설을 논박했다. 1662년(현종 3) 예문관제학, 1663년 대사헌·이조참판이 되었다가 병으로 사직했다. 1715년(숙종 41) 손자인 상기(相基)가 〈가례원류〉를 간행했는데, 권상하(權尙夏)의 서문과 정호(鄭澔)의 발문에 이 책의 저자와 간행의 문제를 둘러싸고 소론인 윤증(尹拯)을 비방하는 내용이 있어서 이후 노론·소론 사이에 치열한 당쟁이 전개되기도 했다. 저서로는 〈시남집〉·〈가례원류〉·〈여사제강 麗史提綱〉·〈강거문답 江居問答〉 등이 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임천 칠산서원(七山書院), 무안 송림서원(松林書院), 온성 충곡서원(忠谷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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