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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 장계선[張繼先] 정려 - 문산면 금복리

소설가 구경욱 2011. 5. 30. 18:19
충신 장계선[張繼先] 정려 - 문산면 금복리

 

-. 장계선(張繼先) - 조선시대 무관

-. 본관은 예산(禮山)이고, 자는 효백(孝伯)이다. 장석린(張石麟)의 아들로 1570년(선조 3년) 부여군 임천에서 태어났다. 1603년(선조 36년) 무과에 급제하고, 1609년(광해군 1년) 부장(部將)에 임명되었다. 1611년 파직되어 임천으로 낙향하였다가 1618년(광해군 10년)에 다시 기용되었다. 그해 여진족이 세운 후금(後金 = 1636년 국호를 대청(大淸)이라 함 = 청나라 = 초대 황제 누르하치)이 세력을 팽창하여 명나라를 압박하자, 명나라는 이들을 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한다.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의식하여 이듬해 2월 5도도원수 강홍립(姜弘立)에게 조선군 1만 3000여 명을 이끌게 하였고, 공도 함께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출정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정과 강홍립이 이끄는 조명연합군이 부차전투(富車戰鬪)에서 기상 악화로 패배하게 된다.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은 편제를 좌영, 우영, 중영 삼영으로 나눴는데, 강홍립은 조총과 장창으로 전면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화공을 폈으나, 강한 역풍으로 인해 불이 꺼지고, 화기와 연기에 시야를 빼앗겼다. 이때를 틈 타 후금군 기병이 돌격하여 선봉부대가 돌파 당한다. 하여 좌영을 방어하던 조선군 3,000명이 6만의 후금군에 포위 되었고, 장수 김응하(金應河), 장계선 등이 전사 하는 등 크게 패하였다. 1649년(효종 1년) 병조참의에 증직되었으며, 1681년(숙종 7년)에는 서천군 문산면 지원리 명곡에 정문(旌門)이 세워졌으나 1951년 후손들에 의해 서천군 문산면 금복리로 옮겨왔다.

 

※예산장씨(禮山張氏)안동장씨(安東張氏) 도시조인 충헌공(忠獻公) 장정필(張貞弼)의 10세 손인 예산군(禮山君) 장위영(張英暐)를 시조로 받들고 예산을 관향으로 하는데, 일부에서는 장영위의 아버지인 장유(張裕)를 시조로 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