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작품]/***** 좋은 단편

<정안길 단편소설> 무지개 영혼

소설가 구경욱 2008. 9. 20. 01:57

 

 

<작가프로필>


소설가 정안길(鄭安吉)
*1943년 부여출생
*1963년 월간 소설문예 추천
*한국문인협회 부여지부장
*한국신문학협회 충남지부장
*단편소설집 '무지개 영혼'발간
*장편소설 '백마강' '종이새의 지평'발간
*민속발굴서 '꼬댁각시 놀이'
*풍수서 '정산풍수지리학강론' 6권
*장단편소설 80여 편 발표
*일붕문학상(소설부문). 매월당문학상(소설부문). 허균문학상(소설부문). 충헌문화상(문화부문)외 수상

 

 

<정안길 단편소설>  무지개 영혼

동쪽 하늘로 불끈 솟은 태양 빛이 골안개 속으로 깊이 스며든다. 안개는 불꽃처럼 피어오르고 붉은 안개에 휩싸인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여울이 줄곧 졸졸졸 소리를 낸다.
어엉 씨의 집은 안개가 걷힌 뒤 마당으로 아침 햇살이 밝고 환히 내리 깔린다. 아침상을 물리고 방을 나온 어엉 씨는 대뜸 마당을 질러가서 헛간 문을 열어제치고 안에서 분무기와 500시시들이 농약 한 병을 꺼내들고 나온다. 그때 뒤따라 방을 나온 응아 댁이 밥상을 부엌에 내다놓고서 재빨리 밖으로 나와 이운 동작으로 어엉 씨에게 뜀박질로 달려가 그의 등을 두들긴다. 적이 놀란 그는 들고있던 분무기와 농약을 일단 땅바닥에 내려놓고서 그녀의 눈치를 살피는데 그의 동공이 갈피를 못 잡고 흰자위를 헤엄치며 맴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해서이다.
"어엉? 어엉?"
그러자 응아 댁은 춤추듯이 손짓 몸짓을 한참 해가며 수화한다. 해가 높이 솟아오르면 안개도 거치고 이슬도 마를 터인데 왜 이른 아침부터 농약 일을 서두를 게 뭐냐고 따지는 품이 다분히 신경질적이다.
"응아응아!"
응아댁은 방금 자신이 쏟아 논 말을 그에게 알아들었느냐고 다짐까지 재촉한다. 그러나 어엉 씨는 그녀의 투박한 인상과 불퉁거리는 꼬락서니가 못마땅하게 느껴지는지 대뜸 눈을 부릅뜨며 반박하고 나선다. 열 마지기 논을 열 손가락으로 헤아려 보이면서 해가 져서 어두워지면 잠을 자야하는데 해가 떠있는 동안 어떻게 일을 전부 끝내라고 생트집을 잡느냐 면서 얼굴을 찌푸린다. 그렇게 내지른 그는 응아 댁이 뒤에서 뭐라던 개의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땅바닥에 놔두었던 분무기를 등에 걸머지고 농약 병을 챙겨든 뒤 훌쩍 밖으로 나간다.
어엉 씨가 형님 집을 나와 따로 살림을 차린 건 지난 이른봄이다. 결혼한지 십여 년에 다섯 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낳아 거느리고 형님 집에 빌붙어 함께 어울려 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부지런하고 마음씨 착한 어엉씨를 형님은 내보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남들처럼 멀쩡하다면 잡아둘 겨를 없이 제풀로 벌써 따로 살림을 차리고 나갔을 터이다. 그러나 따로 내보낸들 내외가 모두 사람 구실을 제대로 못할 터에 늘 마음이 안 놓인다면 차라리 한 집에서 데리고 사는 게 마음이 편할 거라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형과 아우가 낳아놓은 아이들 10여 명이 온 집안을 들썩거리는 마당에 길래 함께 어울려 산다는 건 불가능한 고통일 수밖에 없어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이 살아간다.
그런데 눈치 빠른 응아 댁은 벌써부터 남편에게 자꾸 충동질을 치고 볶아댄다. 그게 여러 해를 거듭해왔는데 지난봄에는 그 동안 벙어리 냉가슴만 앓던 그녀가 결국 시숙 앞에 나서서 하고싶은 말을 건네게 되었고, 따로 살게 해달라고 호소하면서 안달을 떨기에 이른 거다. 어엉 씨는 마음도 착할 뿐 아니라 강철 같이 건강하고 부지런하여 무슨 일이든 빈틈없이 해치우는 게 되레 정상인 못지 않다. 하지만 비록 약지 못하고 둘림이 없어서 약삭빠르지 못했는데 응아 댁은 그렇지 않다. 비록 말은 못하지만 눈치와 속셈이 빨라서 한 살림 쪽찌게 잘하리란 말이 나돈다. 게다가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가 예뻐서 미모를 갖춘 그녀는 늘 태도와 옷맵시가 단아하고 품위 있어 보인다.
그녀는 한번 대화가 터지더니 줄곧 그리로 달라붙어 시숙을 들볶아댄다. 그래 견디다 못한 어엉씨 형님은 기어이 세집뫼에 집을 한 채 사서 열 마지기 논과 함께 살림을 따로 내준다. 그러나 그는 동생내외가 늘 물가에 내 놓인 아이처럼 마음이 불안하고 개운치 않아 꺼림하다.
아무튼 따로 살림을 차린 그네는 정상인 못지 않게 깔끔하고 알뜰한 살림살이를 잘 꾸려나가는 듯 보인다. 비록 헌 집이지만 허물어진 토방과 낡은 벽에 시멘트를 바르고 부엌과 지붕을 새로 개량하여 고칠 곳을 고치고 바를 데를 발라서 새집처럼 단장한다. 그리고 빈터에는 축사를 짓고 채소밭도 일궈놓는다. 축사에는 돼지 닭 토끼 같은 가축들을 사다가 가둬 키웠고, 채소밭에는 계절에 맞춰 쑥갓 아욱 상추 같은 걸 골고루 심어서 언제나 싱싱한 소채를 뜯어먹는다. 또 뒤란에는 감나무를 심었고 집 앞의 빈터에는 복숭아 자두나무 대추나무 같은 유실수를 심어 온갖 정성을 다해서 가꾼다. 그네는 늘 정겹고 화사한 낯으로 얼굴을 맞대고 웃음을 잃지 않았으며 언제든 손맺고 가만히 있지 않고 집안 일이 아니면 전장으로 나가 논밭 일에 묻힌다. 모처럼 얻어낸 독립가정으로 모두가 내 것 같아서 풍요하고 자유로워 즐거움이 실실 넘치는 삶이다. 그네가 거느린 오 남매의 아이들도 큰집에서 사촌들과 찌들고 큰아버지 큰어머니 눈치보며 살 때보다 훨씬 활발해지고 생기가 돋아 보인다.
그렇지만 오늘 어엉 씨는 기분이 좋지 않고 착잡하여 속에 검정 연기 같은 그름이 가득 채워진다. 그래 불규칙한 발길을 옮겨놓으면서 붉게 물든 안개를 헤치고 개울을 건너 논둑 길을 걸으면서 이슬 머금은 파란 벼 잎을 넌지시 본다. 아직 벼 잎은 파랗게 성성한 게 농약이 급한 건 아니지만 으레 그렇듯이 병충이 생기기 전에 미리미리 손을 써야 피해가 적다는 걸 그는 너무 잘 알아서 오늘쯤 농약 하는 일은 마땅하다고 깨닫는다.
그런데 문득 그의 뇌리를 스치는 불쾌한 생각이 찜찜하게 달려든다. 이제껏 그녀의 말을 어긴 적이 없었고 마음이 좀 내키지 않아도 따라주곤 하였는데 오늘따라 고집을 피우고 여기까지 뛰쳐나온 것도 이상하지만 그렇다고 남편을 혼자 나가게 버려 둔 채, 멋대로 하라는 식으로 따를 생각을 하지 않는 그녀가 문득 의문의 꼬리가 솟구쳐서이다. 따로 살림을 차린 뒤 그녀는 늘 어엉씨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모든 행동을 같이한다. 농사일이고 집안의 모든 잡다한 일을 언제나 정겨운 원앙새처럼 얼굴을 맞대고 붙어 다니며 해낸다. 다만 그녀가 오일장을 보러 갈 때만 이웃의 방환을 딸려보냈는데 외모는 아름답고 예쁘게 생겼으나 말을 못하는 속사정 때문에 장바닥에서 행여 놀림감이 되지 않을까 하여 방환과 동행하게 한다. 허나 그도 읍내 시장은 시내버스를 타고 갔다오면 되지만 그녀는 오가며 사람들 만나기가 싫어서 번화한 곳을 일부러 피하여 고개를 두 개나 넘는 시골 장을 보러 다닌다. 이전에는 시숙이 있고 동서가 있어서 시장을 갈 일이 없었지만 이제는 집에만 틀어박힐 수가 없는 노릇이다. 사람이 가정을 갖고 살아가려면 시장 안 갈 수 없으니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어서 그렇게 한다.
그래 어엉 씨는 방환에게 늘 고마운 생각을 잊지 않는다. 그렇듯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면 하루살기도 어려울 거란 생각이다. 방환도 마침 군대에서 제대하여 집에 와 있으면서 어중이로 농사일도 못하고 늘 빈들거리며 놀고 있는 터라 그네에게는 아주 맞춤처럼 잘 된 일이기도 하다. 그래 방환은 응아 댁과 시장에 가서 장보기를 도와주고 오는 일만 아니라, 어엉 씨네의 모든 집안 일을 거들어주면서 밥도 함께 먹으니 한 가족이나 다름없이 살게된다.
어엉 씨는 개울물을 퍼다가 분무기 통에 부어넣고 거기다 농약을 적당량 풀면서 생각해보니 집에서 일찍 뛰쳐나온 게 뉘우쳐진다. 응아 댁 말마따나 아직 이슬에 흠씬 젖어 벼 잎에 물이 줄줄이 흐르는데 거기에 농약을 뿌려서 무슨 약효가 있을까. 그는 약물을 그렇게 타놓고 물고 쪽으로 논두렁을 타고 걸어간다. 위 물고는 막아두고 아래 물고는 활짝 터서 논바닥의 물을 말려야한다.
그리고 아무리 눈여겨봐도 벼논에 피 한 포기 눈에 띄지 않았고 논두렁도 말끔히 깎았으니 할 일이 별로 없다. 그는 잠시 안개가 거친 뒤에 벼 잎에 축축한 이슬이 마르기를 기다릴 셈으로 잠시 무료히 논두렁에 앉는다. 응아댁이 뒤를 밟아올 것도 같아서 이따금 집 쪽으로 눈을 보내봐도 그녀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의 머릿속은 어느덧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다. 어젯밤에 있던 일과 오늘 아침 일이 줄줄이 이어 머릿속에 떠오르는데 응아 댁의 대하는 눈치가 이전 같지 않아 서운한 마음이 개운치 않게 보글거린다. 오늘 아침도 안개가 거치고 이슬이 마른 뒤 느지막하게 일을 나가라고 수화를 거듭하던 그녀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꽁꽁 얼어붙은 얼굴로 숫제 사람을 모멸하고 얕잡아보는 멸시의 눈초리이다. 그는 아까 그녀의 말이 옳다고는 생각하였으나 얼굴에 감춰진 저주와 증오의 꼬리가 그의 눈을 자극한 나머지 마음이 한정 없이 쓸쓸하고 비애마저 느껴지던 거다. 게다가 어젯밤은 어떠한가. 방환과 셋이서 방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데 그녀는 줄곧 방환의 곁에만 찰싹 달라붙어 앉아서 서로 희희낙락할 건 뭔가. 하기야 그가 없다면 시장 가기도 찜찜하고 온갖 크고 작은 집안 일들이 그에 도맡겨져서 좌지우지되는 터에 그의 비위를 잘 맞춰서 도움이 되게 할 건 뻔한 일이고 그게 바로 남편과 자식을 위한 길일지는 모르지만 그토록 눈에 거슬리게 할 것도 아니란 생각이다. 그런데 그녀는 으레 얼굴을 맞대고 자신을 부둥켜안다 시피 하던 잠버릇조차 저버리고 숫제 팽 돌아눕는 일까지 생긴 게 아닌가. 그는 원망스러움은 말할 것 없고 가까이 있던 사람이 갑자기 멀어져 가는 듯싶어서 분명한 거리감을 느끼게 하였고 이게 정령 예삿일이 아니란 생각마저 자아낸다. 그래 그는 어젯밤 꼬부라진 심사가 오늘 아침까지 풀어지지 않는다.
안개가 거치더니 불덩이 같은 태양의 뜨거운 열기가 온 누리를 삶아대기 시작한다. 그러자 벼 잎에 물기가 바삭 마르면서 일을 시작한 게 벌써 네 통째 농약을 뿌리는데 온몸에 땀이 휘감아서 끈적거린다. 정오가 좀 못되었다는 생각이 들 때이다. 설핏 보니 몸맵시를 깔끔하게 단장한 모습의 응아 댁이 점심밥을 함지박에 담아 머리에 이고 온다. 그녀는 집을 나와 개울을 건너고 둑길을 걸어와서는 으레 그렇듯이 머리에 이고 온 것을 아카시아 그늘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함지박 위에 덮인 보자기를 걷어내고 속에 있는 밥과 반찬들을 하나씩 내놓더니 그가 한창 농약을 뿌리고있는 논둑을 달려간다.
그녀는 어엉 씨와 시선이 마주치자 어서 나와서 밥을 먹으라고 손짓으로 말한다. 그런 그녀의 표정은 아침에 보였던 표정과는 달리 유난히 밝고 화사한 게 정겨워 보인다. 그는 아침 안개가 거치듯이 마음속에 갇혔던 찜찜한 그을음과 앙금들이 금새 말끔히 가시는 듯 하여 선뜻 하던 일을 멈추고 논둑으로 나온다. 그의 등에 지워진 분무기를 그녀가 대뜸 달려들어 걸 방을 풀어줘서 얼른 내려놓도록 거들어주고 미리 가져온 타월로 목덜미에 흥건히 흐르는 땀을 닦아내 준다.
그는 어쩐지 산란하고 복잡하던 머리통이 홀가분해지는 기분이 들어 마음이 개운하다. 그래 개울로 들어가 흐르는 물로 팔다리에 덕지덕지 묻은 시커먼 논흙을 대강대강 닦아내면서 생각해보니 불만을 품었던 일이 뉘우쳐지고 되레 그녀가 가엾어져서 분노와 원망이 일순간 싹 가신다. 그는 이전보다 그녀가 더욱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적이 연민의정마저 느껴지는 걸 어찌할 수 없다.
그는 아내가 기다리는 아카시아 그늘로 다가간다. 안개가 거칠 무렵, 부엉산마루에 걸쳐있던 한 점의 구름마저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산봉우리는 온통 푸른빛이 짙게 아른거린다. 그런 하늘가로 하얀 뭉게구름이 뭉실뭉실 피어오른다.
그가 나뭇그늘에 앉자 그녀는 그의 앞에 마주앉아 밥그릇뚜껑을 열어주고 수저를 손에 들려준다. 그러자 그는 그녀가 들려주는 수저를 손에 들고 넋 나간 사람처럼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다.
"응아! 응아!"
그녀는 자신을 무심코 바라보는 그에게 손짓한다. 일하느라 어려울 텐데 배부르게 많이 먹으라고 연신 손놀림을 해댄다.
"어엉! 어엉!"
그는 웃음을 피우면서 알았다고 고개를 마구 끄덕거리더니 밥을 입으로 우겨 넣기 시작한다.
그녀는 그가 한 그릇 밥을 다 먹어치울 무렵, 옆에 놓인 술 주전자를 들어 보이면서 농약을 다한 뒤에 한 잔하라고 이른다. 그리고 오후에는 장을 보고 오겠다고 일러준다.
"어엉! 어엉!"
그는 그녀의 수화를 알아들었다는 듯이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술 주전자와 안주거리만을 남겨두고, 먹다 남은 반찬과 빈 그릇을 함지박에 챙겨 넣은 뒤 그걸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녀가 집안으로 들어서자 방환은 벌써 닭 두 마리를 닭장 안에서 끌어내어 비닐 끈에 다리를 묶어들고 기다린다. 그를 본 그녀는 화사한 웃음을 피우면서 곧장 부엌으로 들어가서 이고 온 함지박을 급히 부뚜막에 내려놓고는 밖으로 튀어나왔는데 방환은 어느새 문간을 빠져나가 저만큼 걸어간다. 그걸 본 그녀는 잽싼 걸음으로 앞서가는 그를 따라간다. 그네는 곧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어느덧 마을을 벗어난다.
부엉산을 오르다가 산모퉁이를 돌아서니 환히 내려다보이던 마을이 시계에서 감춰진다. 그네는 새절고개로 이어지는 오르막 굽이 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한낮의 불볕더위는 교목이 울창한 산길에서도 그 턱으로 식지 않은데다 가녀리게 불어오는 바람조차 후덥지근하다. 너무 뜨겁고 후끈거리니 나뭇잎조차 삶은 배추 잎처럼 힘을 잃고 늘어져서 생기가 없어 보인다.
앞서가던 방환이 턱에 닿는 거센 숨을 몰아쉬더니 웃옷을 벗어들었고 응아댁은 저만큼 뒤쳐진 채 안간힘을 다해 앞서가는 방환을 따라 올라간다.
"응아! 응아!"
드디어 고갯마루가 눈앞에 다가와 보이는데 응아댁이 방환을 부른다. 그가 넌지시 돌아보자 그녀는 덥기도 하고 다리도 아프니 나무그늘에 가서 쉬었다가 가자고 손짓 머리 짓을 해댄다. 그녀는 텃골을 의식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방환은 그녀의 속을 알아차리고 텃골을 생각해낸다. 고갯마루를 한 턱 못미처 있는 골짜기인데 그곳은 교목과 넝쿨 숲이 울창하게 들어선 데다 맑고 청량한 물이 골짜기를 흘러서 아무리 더운 날씨에도 아래에서 거슬러 오르는 시원한 바람은 늘 서늘한 느낌이다. 게다가 물가에는 좁다란 풀밭이 펼쳐져서 호젓하다. 그네는 이 고개를 넘을 적마다 사람들이 미처 모르는 그 곳을 숨어 들어가 몰래 쉬며 놀던 밀회의 장소이다. 고갯길에서 멀지도 아니하였고 길을 다니는 사람들의 눈에 얼른 띄지도 않을 테니 무던히 아늑한 곳이다.
응아댁은 방환을 부르면서도 지금쯤 논배미에서 줄줄이 흐르는 땀으로 멱을 감고 온몸을 적셔가며 불볕에 몸을 새까맣게 그은 채, 무거운 분무기를 걸머지고 농약 일을 하고 있을 남편의 칙칙한 모습이 눈을 어지럽히며 떠오른다. 그럴 때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자신의 몹쓸 심사를 나무라면서 뉘우친다. 남편도 자신과 꼭 같은 병신이니 동병상련의 연민이 속으로 검정 잉크 물처럼 번진다. 남편은 어디까지 자신이 돌봐줘야 가까스로 기쁨을 얻고 보람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 뜸뜸이나마 남편과 함께 장을 보러 다닐 수 없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불연 듯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생각이 추호도 이뤄질 수 없는 꿈인 줄을 안다. 해서 방환과 같이 시장을 본다던가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그와 어울려 추슬러야 하는 건 어찌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또 두어 달 전 처음 방환과 몸을 같이 한 뒤로는 일찍이 남편과 느껴보지 못한 짜릿하고 달콤한 맛이 속에 감춰져서 흥분을 고조시켰으니 이제 두 남편과 살아간다는 착각에 빠진다. 처음 방환은 진정으로 이웃의 정으로 장을 보는 일과 집안 일을 도와줬지만 이제는 장날이 아니라도 별 볼일 없이 방환과 함께 장 길을 가는 척하고 쾌락에 빠지곤 한다.
그네는 마침내 길을 버리고 숲을 헤치며 텃골로 파고든다. 예의 풀밭에 다다르자 방환은 들고 온 닭 묶음을 소리나지 않게 가만히 한쪽에 놔두는데, 응아댁은 그의 앞에 마주서더니 얇은 천의 재킷을 거침없이 벗어 풀밭에 내던진다. 그리고 버릇처럼 지퍼를 여니 스커트는 자연 발치로 흘러내린다. 브레지어와 팬티마저 재빨리 벗어제친 그녀는 내던진 스커트와 재킷을 주어다가 풀밭에 깔고 자신의 알몸을 그리로 발랑 뉜다.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오는 골바람이 살랑거린다. 바늘처럼 따가운 불볕 햇살이 간헐적으로 나뭇잎 사이를 뚫고 내리 꽂힐 적마다 눈이 부신다. 그녀는 아이를 다섯이나 낳은 여자 같지 않게 탄력 있는 몸매가 유연하고 날렵하다. 알몸의 그녀는 수목들이 폭염으로 무르익는 풋내와 함께 원시의 신성한 여체 같다.
방환은 대뜸 따라서 아랫도리를 벗고 그녀의 알몸으로 밀착한다. 그리고 손을 뻗쳐 방금 새로이 원초로 부풀어오른 듯한 작고 야무진 한 쌍의 젖무덤을 연신 쓸어댄다. 그러자 그녀의 여린 숨결이 거칠게 치솟더니 기어이 몸체가 걷잡을 수 없이 뒤틀리고 꼬인다.
"으응아! 으으응-아!"
그녀의 몸부림은 신음소리와 함께 안간힘으로 숲을 삐어져 나오려는 발버둥 같았으나 차츰 그녀는 되레 더 깊은 곳으로 빠져드는 듯 싶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그녀는 윗몸을 불끈불끈 일으켜 남자의 목을 두 팔로 휘감는다. 남자는 목에 매달린 그녀의 알몸에서 향긋한 몸 냄새가 코끝에 스치는 대로 두 팔이 그녀의 파도치는 허리를 꼼짝 못하게 안으로 감아들인다. 남자의 얼굴은 이제 그녀의 젖무덤 사이에 묻힌다. 그러나 그네는 그런 짓으로 끝내지 않는다. 그건 허리를 감은 남자의 팔 밑에서 미친 듯이 맴돌던 팡파짐하고 둥근 엉덩이의 나부끼는 바람결 때문이다. 그래 남자의 한 팔이 그녀의 허리에서 매듭을 푼 뒤, 이내 아래쪽을 감아들인다. 다음 순간 처음 그녀가 발랑 누었던 자리에 아기 눕히듯이 내려 뉜다. 그러나 그녀의 알몸은 남자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남자의 몸은 그 위에서 여체를 송두리째 덮쳐 누른다.
용광로처럼 이글거리는 무더위에 온 누리는 고적이 깃들여 풀벌레소리나 매미소리도 죽은 듯이 적막함을 함부로 깨지 못한다. 그만큼 태양은 악랄한 열기를 사정없이 뿜어댄다. 오직 벌거벗은 두 남녀의 거친 호흡과 용트림으로 빚어내는 샅 고리 걸리는 소리만 연신 숨막히게 들려올 뿐이다.
시간이 흘러 그런 소리마저 적막 속으로 잠겨들었을 때는 해가 이미 서녘으로 훨씬 기운 뒤이다. 그네는 벌거벗은 원시의 몸을 풀밭에 뉜 채로 잠에 빠져든다. 그리고 얼마를 잠들었는지 해가 서산너머로 사라지고 붉은 저녁노을만 곱게 물들어 피어오른다.
"푸드득, 꼬꼬"
이제껏 놔둔 대로 조용하기만 하던 닭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소리에 방환이 눈을 떠보니 옆에 놓인 두 마리의 닭이 날개 짓을 하고 소리를 내며 버둥거린다. 그는 몸을 일으켜 풀밭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옷들을 하나씩 주어서 몸에 끼운다. 그리고 알몸인 채 아직도 깊은 잠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응아댁을 흔들어 깨운다.
"응아! 응아!"
그녀도 눈이 떠지자 버릇처럼 입소리를 되뇌면서 얼른 몸을 세우고 허둥지둥 풀밭에 널브러진 속옷과 방금 깔았던 스커트와 재킷을 부리나케 꿰어 입은 그녀는 묶인 닭을 들고 앞장서는 방환의 뒤를 따라간다.
온종일 찜통 같던 더위가 해진 뒤에도 얼른 식지 않고 지열이 후끈거린다. 어슴막인데 산 속은 어둠이 빨리 찾아와 땅거미 지는 산비탈을 터벅터벅 걸어 내려온다. 어느덧 그네가 마지막 산모퉁이를 돌아설 때이다. 대뜸 눈에 와 닿는 세집뫼를 보니 괴이하게도 어엉씨 집 안팎으로 전등불이 환하게 밝혀진 게 꽃밭 같게만 보인다.
"응아? 응아?"
그러나 갑자기 섬뜩한 생각이 든 응아댁은 철렁 내려앉는 가슴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적이 울먹거리는 소리를 내며 무심코 앞서 걸어가는 방환의 뒷덜미를 냉큼 낚아챈다.
"푸드득, 꼬꼬"
그녀가 방환을 낚아채자 들고있던 닭이 놀라서 또 날개 짓을 하며 소리를 낸다. 응아댁은 돌아보는 방환의 얼굴을 황당한 눈으로 쏘아본다. 의문과 분노에 찬 그녀의 동공이 잠시 허둥거리며 흰자위를 헤엄친다.
"응아?"
그녀는 뭔가 방환에게 알아낼 것이 있는지 다시 한번 다그친다. 그러나 방환은 바위처럼 선 채로 무슨 표정도 나타내지 않는다. 그녀는 어떤 반응도 보여주지 않는 방환의 얼굴을 한참 쏘아보더니 그를 뒤로 제치고 앞질러 집을 향하여 허겁지겁 달려간다.
그녀가 냇물에 발을 빠져가면서 정신없이 건널 때 언뜻 보니 밝혀진 여러 개의 전등불빛 아래에 큰 마을사람들이 전부 모여든 모습이 보인다. 그렇다면 큰 일이 났을 거라는 느낌이 들어 대뜸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몸이 얼어붙는 듯하다.
(무슨 일일까?)
냇물을 건너서부터 집안에서 아이들 울음소리와 마을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사방으로 떠돌았지만 그런 소리를 그녀가 알 턱이 없다. 그녀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이 의문을 안고 무작정 문간을 들어선다. 눈치 빠른 그녀는 그때 마을사람들이 쏘대는 따가운 눈총을 느끼며 휑 하게 열어제쳐진 문간을 지났을 때, 방문 앞을 메우고 방안을 채워든 오 남매의 자식들과 큰집식구들의 어수선한 모습, 이런 정황은 그녀의 가슴속을 더욱 콩볶듯 하면서 정령 큰일이 터졌다는 눈앞의 사실을 확실히 밝혀준다. 그러면 필시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이 스치자 그녀는 사람들을 헤치고 총알처럼 방으로 뛰어들었는데 아랫목에는 반듯이 누어있는 남편의 모습이 눈을 가득 메운다. 얼굴은 희다 못해 푸른빛을 띄었고 언뜻 보면 깊은 잠에 빠져든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식들과 조카들, 그리고 시숙내외가 그리로 엉겨붙어 울부짖는 모습만 봐도 다시는 눈을 뜰 수 없는 머나먼 죽음의 길을 떠나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얼른 깨닫자 갑자기 가슴이 메인다.
그녀는 잿빛으로 변한 어엉씨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한 순간 풀썩 몸을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히더니 실성한 사람처럼 손을 뻗쳐 얼굴을 부여잡고 흔들었으나 그는 이미 차디찬 돌이 되어 손끝에 냉랭한 기운이 감돌뿐 무감각하게 흔들린다. 그녀는 흔들어도 움직일 줄 모르는 주검을 놓고 이게 바로 죽음이란 걸 알아차렸고 절망감이 문득 앞으로 막아서 눈망울이 뜨거운 눈물로 채워지더니 이내 주르륵 주르륵 쏟아진다
"으으응아 -으응아 으응-."
그녀는 기어이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는데 그때 뒤에서 그녀의 광경을 보던 동서가 갑자기 이를 갈며 그녀에게 달려들어 머리채를 낚아챈다.
"이런 불여우 같은 ×년! 사람을 잡아먹은 년! 낯짝에 똥을 바른 년! 지어미지아비가 죽었냐? 눈물은 찍찍 짜! 요년 눈깔을 쏙 쏙 빼버리고 대가리를 메로 작신 바숴서 개골창에 내쏴야 혀!"
그녀의 동서는 날카로운 쇳소리로 외치면서 움켜잡은 머리채를 사정없이 끌고 밖으로 내닫는다. 그때 아빠를 외쳐대며 울부짖던 오 남매의 아이들이 그래도 저희 어미라고 죄다 방향을 바꿔 끌려나가는 그녀를 따라나가며 울부짖는다. 이렇게 방 안팎으로 떠들썩하고 시끄럽더니 마당에서도 외마디소리가 터진다.
"사람을 죽인 살인마는 나와라! 그 놈을 이 참나무 작대기로 목을 쳐서 당장 죽일 테니! 당장 앞으로 나와라."
죽은 어엉씨의 형님은 분함을 참지 못하겠는지 작대기 하나를 두 손으로 다부지게 잡고서 허공을 향하여 마구 휘두르며 인사불성으로 마당 한 가운데를 미친 사람처럼 펄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악을 쓴다. 그는 속으로 집히는 데가 있던 모양이다. 필시 그 놈이 독약을 탄 막걸리를 동생에게 줘서 죽게 한 것이 틀림없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누가 언제 지펴놓았는지 마당에서는 굵은 통나무 화톳불이 화드득 화드득 요란한 소리를 내지르고 불똥을 튀면서 활활 타오른다. 동네사람들은 펄펄 뛰면서 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동네방네 폭로하면서 분노가 뜨거운 불길처럼 달아오른 그들 내외를 붙잡고 타이르며 진정시킨다. 농약을 살포하다가 술을 마시고 죽은 농사꾼이 얼마나 많고 농약에 중독 되어 논배미에 쓰러지고 병원인세를 지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닌데 뚜렷이 밝혀지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나름의 짐작만 대고 누구한테 사람을 죽였다고 뒤집어씌우면 무엇으로 증거를 삼겠느냐- 괜히 잘못하면 무고죄를 뒤집어쓸지 모르니 일삼아보았자 결말은 뻔한 일이다. 잃어버린 놈이 죄인이라고 되레 망신당하는 꼴이 될지 모르니 범인을 잡더라도 깊이 생각을 곱씹고 침착하게 자제하라고 일깬다. 더욱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누가 알겠느냐- 죽고 사는 게 죄다 운명 탓이고 타고난 제 명도 있으니 누구를 무작정 원망할 일이 아니다. 또 죽은 사람은 기왕 죽었어도 살아있는 사람이나 살게 놔두는 게 바로 덕이 아닌가. 괜히 이 사람 저 사람 생사람 끌어다가 걸어 대봤자 인심만 사나워진다. 경찰에서 나오면 검시를 하느니 배때기 해부를 하느니 하여 죽은 사람을 두 번 세 번 죽게 만드는 꼴을 보기도 꺼림하니 더욱 상서롭지 못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무작정 참는 게 약이라고 마을사람들이 혀가 달토록 설득을 시킨다.
또 동네여론도 그렇게 하나로 떠도는 터에 발끈하던 그네도 가까스로 분노의 감정을 삭히고 술렁거리던 속을 수그려들여 진정시켜서 이 일을 더는 문제삼지 않기로 마음을 다잡는다. 그렇지만, 불쌍한 병신동생이 억울하게도 비명으로 세상을 떴다는 뼈저린 아픔은 엿물처럼 끈끈히 핏속을 흐르고 사람을 죽인 놈을 당장 밝혀내서 마땅히 벌을 줘야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동네사람들을 봐서도 솟구치는 감정을 억눌러 참아 넘길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다지 쇳덩이처럼 건강하고 우람차던 동생이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논두렁에 쓸어져 홀로 쓸쓸히 죽어갔다는 사실은 도시 믿어지지 않는다. 극한의 뙤약볕에서 폭염을 맞으며 농약을 살포하다가 술을 마셔서 죽었다는 말도 딱 부러진 사인이 못 될 것만 같다. 농약 일은 말할 것 없고 농약으로 멱을 감는다 해도 까딱없을 만큼 강철의 사나이일 뿐 아니라 몸 다치게 술을 푼수 없이 퍼마실 사람이 아니다.
그는 동네여론에 밀려 이 일을 다시 입에 올리지 않기로는 했지만, 동네사람들이야 무작정 탈없이 조용하게만 할 생각이지 누가 누구에게 피해를 입히고 억울함을 당한지는 굳이 시비를 가려 따지려들지 않는 게 속성이다. 그러나 속으로 곰곰 생각하면 할수록 방환의 짓이 틀림없다는 결론이다. 제아무리 남들 눈을 피해서 몰래몰래 숨어 다니며 지랄을 해 싸도 남들이 다 그렇고 그런 걸 이미 다 아는 터인데- 정령 그놈이 막걸리에 독약을 넣었을 게 틀림없다. 그런 생각이 들면 몸이 부르르 떨려오고 가슴에서 메질을 해댔지만 이제 죽은 놈이 되살아날 턱이 없으니 꾹 참는 수밖에 없는 일이다. 더욱 그의 아내는 이 끔찍한 일이 여편네 때문이라고 들고일어나 응아댁을 몰아붙인다.
(그년이 술에 약을 타서 시동생을 죽였다)
이렇게 뒤집어씌워도 응아댁은 할말을 잃고 만다.
이튿날 아침 며칠을 두고 불볕더위로 온 천지가 부글부글 끓더니 하늘에는 검정구름이 무섭게 채워들기 시작한다. 금방이라도 굵직한 빗줄기가 숫제 땅을 파이게 쏟아질 듯 대지가 어둠에 휩싸인다.
느닷없이 허망하게 죽음을 당한 어엉씨의 주검은 경찰에 알리지도 않은 채 읍내 장의사에서 곱게 지어 맞춰온 꽃상여에 실려 세집뫼 뜸을 떠나려한다. 분가한지 다섯 달만의 일이다. 한창 살림 맛에 겨워 재미를 느낄 무렵이다. 어느 멀쩡한 부부가 이처럼 정답고 재미있게 살아갈 수 있으랴. 오 남매의 자식을 키워내기만 하면 저희 엄마아빠 병신시정 알아주고 가엾은 줄 가슴속에 느껴 오래오래 간직하면서 남다른 효심이 솟구칠 테지만 어엉씨는 이것저것 모두 팽개치고 어린 자식들만 무정하게 떼어놓고 다시 못 올 머나먼 곳으로 떠나간다.
-딸랑딸랑 요령소리가 상여소리와 한데 어우러져 부엉산 골짜기로 메아리친다.
"구르릉 그르르릉 쿵-."
마을사람들이 길게 상여 뒤를 따르는 장례행렬은 마음씨 착하게 살아간 그의 짧은 인생역정이 알알이 새겨진다. 그런데 상여가 막 여울목을 건널 무렵이다. 검정구름 속에서 기어이 공포의 천둥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붉으래 상기된 요령잡이는 하늘이 무너지든 구름장이 내려앉든 모름지기 자기 흥에 겨워 요령을 연신 거세게 흔들어댄다.
"말못하는 벙어리로 이세상에 태어나서 -에헤야 어헤
말한마디 못해보고 속절없이 떠나가네 -어헤야 어헤
억울하다 원통하다 말못하는 이뿐아내 -어헤야 어헤
남겨놓고 난못가네 토끼같은 어린자식 -어헤야 어헤
뉘가고이 키우려나 나는나는 못가겠네 -어헤야 어헤
원통해서 난못가네 발이무거 못가겠네 -어혜야 어혜
상여가 부엉산기슭로 가까이 다가갈 무렵, 날카로운 번갯불이 바로 상여 앞에서 작렬하더니 장작을 패는 듯한 위력의 천둥소리가 대지를 뒤흔들고 만다. 소리를 먹이던 요령잡이는 천지개벽이라도 할 듯한 천둥소리에 놀라 문득 기세를 죽이더니 기여 입을 꾹 다물고 말았는데 이어서 장대비가 쏟아져 내리자 그제야 잽싸게 상여를 이끌고 산비탈을 기어올라 부엉산에 오른다.
한낮인데도 사계는 캄캄한 어둠으로 휩싸였고, 비는 줄곧 세차게 쏟아진다. 상여는 거센 비를 맞아 곤죽이 되었고, 상여꾼과 마을사람들도 모두 비에 젖어 흙투성이가 된 채 부랴부랴 질흙 탕이 된 땅속에 가까스로 주검을 묻는다. 이렇게 벙어리 어엉씨의 장사가 끝난 날밤, 응아댁은 아이들이 잠든 사이에 몰래 어둠을 타고 집을 빠져나가서 방환과 얼싸 함께 어디론지 사라지고 만다.
이튿날 아침잠에서 깨어나 눈을 뜬 아이들이 저희 엄마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렸으나 엄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꿩 새끼 풍기듯 아이들은 집을 뛰쳐나가 마을고샅 고샅으로 흩어진다. 아직 못다 내린 비가 구질구질 내리고 있어 비를 흠씬 맞아가며 동네고샅을 샅샅이 헤맸으나 멀리 도망친 엄마의 모습이 아이들 눈에 나타나 줄 리가 없다. 아이들은 물에 빠진 생쥐처럼 비를 맞고 허탈감을 안은 채, 하나 둘 하릴없이 집으로 돌아온다.
좀 뒤는 다섯 아이가 모두 집으로 돌아와 툇마루에 제비새끼처럼 나란히 걸터앉는다. 저마다 머리칼과 옷이 흥건히 빗물에 젖었는데 머리에서 얼굴로 연신 흘러내리는 물방울과 까칠한 파란입술이 초점을 잃은 눈동자와 함께 그보다 더 깊은 우수가 깃들인다.
그런 아이들은 마주 보이는 새절 고갯마루에 괜한 눈길을 하염없이 던져놓고 시무룩한 표정이다. 그때 문득 세 살배기 막내아이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입을 삐죽거리더니 칭얼칭얼 울음을 터뜨린다. 막내가 그렇게 칭얼거리자 모두들 따라서 눈물을 짠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연신 손등으로 닦아내면서 아이들은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다섯 아이의 칭얼거리는 소리는 마치 육성변주곡 같다.
비가 멈추기 시작하자, 곧 구름이 거친 부엉산은 푸른 나무숲이 마치 초록물감을 진하게 칠한 그림처럼 짙푸름이 또렷하다. 그런 산골짜기에 무지개가 꽂힌다.
"야! 무지개다! 무지개다!"
한 아이가 하늘로 치솟아 오른 무지개를 먼저보고 외친다. 그러자 아이들은 젖은 눈망울을 비벼대면서 생경한 얼굴로 신기한 듯 무지개를 향하여 모두 일어나 밖으로 달려가면서 눈길을 그리로 향한다. *

<작가의 말>
인간사회는 서로 도우며 따뜻한 정감으로 산다고 한다. 그건 강자와 약자를 같은 삶의 대열에 동등한 입장으로 서게 하는 적자생존의 한 방법일 수 있고 흔히 말하는 더불어 살기와 다를 게 없다. 하지만 그런 사랑과 희생이 진정한 것이냐 하는 의문을 제기해 볼 때 많은 문제를 야기케 하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인간은 간혹 습관적으로 동물의 본성을 들어내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 야릇한 생각의 꼬리를 잡고서 장애인 부부의 독자적인 삶이 과연 인간 속에서 가능할지 가늠해 보았다.

 


<작가프로필>
본명 정안길(鄭安吉)
*1943년 부여출생
*1963년 월간 소설문예 추천
*한국문인협회 부여지부장
*한국신문학협회 충남지부장
*단편소설집집 '무지개 영혼'발간
*장편소설 '백마강' '종이새의 지평'발간
*민속발굴서 '꼬댁각시 놀이'
*풍수서 '정산풍수지리학강론' 6권
*장단편소설 80여 편 발표
*일붕문학상(소설부문). 매월당문학상(소설부문). 허균문학상(소설부문). 충헌문화상(문화부문)외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