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 대 곤 
출 생 : 1940년 군산 출생 약 력 : 1980년 月刊自動車에 단편소설 공범자로 작품 활동시작 한국문인협회이사, 한국 펜클럽 본부이사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현. 수필과 비평사 회장, 계간문예 회장 저 서 : 수필집『한번만이라도』『취해서 오십년』『물안개 속으로』『황홀한 유혹』
소설집『악연의 세월』『굴 레』『선 물』 장편소설『아름다운 이별』『망둥어』
(라대곤 단편소설) 공 처 가
큰일이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해결 방법이 없다. 바보같이 순한 아내도 이번에는 그냥 속아 넘어가 줄 것 같지가 않다. 가슴 이 답답하더니 숨이 턱턱 막힌다. 넥타이를 풀어 던져 보지만 매 한가지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깊게 들어마신 담배연기를 천정으 로 길게 뿜었다. 어떻게 한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좋은 방법이 떠 오르지 않는다. 일 할 마음이 아니다. 벽시계를 보았다. 오전 열한시다. K 경찰서 수사과 사무실은 오전 내내 붐볐다. 도둑놈, 강도, 사기꾼, 가지각색의 인간이 다 모였다. 김형섭 형사 책상 앞에 웅크 리고 앉아있는 도둑놈은 어젯밤 구 시장에서 잡아온 장물아비 유가다. 벌써 한 시간을 그냥 앉아만 있다. 김형사가 조사는 뒷전이 고 초조하게 몸을 꼬면서 딴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형사님 빨리 좀 끝내주세요.” 오히려 도둑놈이 성화다. “시끄러워.” 형사가 왕짜증을 부린다. “야! 김형사 오늘 중으로 잘 좀 해봐.” 김형사의 사정을 알리 없는 반장이 또 채근이다. “임마 똑바로 앉아.” 정신이 화들짝 나서 얌전히 앉아있는 유가를 쳐다보고 애꿎은 고함을 지르고 반장 쪽을 쳐다보았다. 다리를 꼬고 앉아서 한가하 게 코털을 뽑고 있었다. 반장은 김형사가 오전 내내 조사도 하지 않고 그냥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아직 눈치 채지 못한 것 같다. 오늘따라 사무실이 너무 덥다. 벽 모퉁이에서 감기 걸린 듯 쿨쿨거리면서 돌아가는 낡은 선풍기 한 대다. 오뉴월 염천이 아니라 고 해도 도둑놈들과 싸움하는 열기로 달아오른 조사실을 냉각시키기에는 역부족이다. “김양아! 어름 냉수 한 컵 주라.” “김형사님 저도 바쁘거든요.” “뭐야?” “반장님이 이 서류 오늘 중으로 복사 끝내라고 했어요.” 평소에도 김형사를 싫어하는 그녀다. 도둑놈 속에서 살더니 어린것이 보통 영악해진 것이 아니다. 일부러 일러바치듯 반장 쪽까 지 힐끔거리면서 큰소리로 대꾸를 했다. “그러니까 평소에 주변관리를 해야 하는 겁니다.” 옆자리 박형사가 비웃듯 말했다. 그녀가 사무실에서 말을 제일 잘 듣는 사람은 박형사다. 가끔씩 퇴근하는 그녀 손에 만 원짜리 한 장씩을 쥐여 주기 때문이다. 박형사 논리는 비료를 주어야 나무가 큰다는 것이다. “염병 헐! 저 주먹만 한 것까지 사람 무시하네.” 투덜거리면서 일어나 물주전자를 들었다. 벌써 빈 주전자다. “시팔, 이 고생을 하는데 어떤 놈이 정수기하나 놓아주면 팔 부러지냐?” “야, 김형사 네가 하나 사서놓아.” 염병 헐 반장은 귀도 밝다. 볼일도 없이 화장실에 들려 서성이다가 수도 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미적지근한 물로 입을 헹구고 나 니 기분만 더 엉망이다. “야! 이 새끼 너 끝까지 오리발 할래?” 애꿎은 장물아비에게 화풀이를 해보지만 유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눈만 멀뚱거린다. 사실 전과 핑계 대고 중고 T.V 하나 샀 다고 장물아비로 끌어온 것은 무리다. 유가를 이용해서 요즈음 극성스럽게 날뛰는 차떼기 도둑놈들을 잡아보자는 계산이었다. “찬물 없습니까?” 오히려 더 느물거린다.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재미랄 내일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오늘 할 일은 이 장물아비를 닦달해서 도둑 놈을 잡아내야 하는 것이다. 반장 말대로 실적이 없어 형사질도 못해 먹을 판이다. 팔을 걷고 의자를 앞으로 당겨 앉았다. “너? 이 새끼 이번에는 영영 세상 구경 못하게 뒤집어쓰기 전에 빨리 불어?” “말도 아닌 소리 그만두시오. 사실 말이지 나는 오다가다 지나는 놈 모르고 산 것 뿐이오. 내가 도둑놈들을 어떻게 압니까? 나 야 정상적으로다 전자대리점을 하는 놈 아니오? 막말로 죄가 있다고 해도 까짓 장물아비 뻔한 한바퀴 아니겠소? 그것도 조금 봐주 면 반 바퀴요. 서로 모르는 처지도 아닌데 우리 이렇지 맙시다.” “시끄러워 이 새끼야. 장물아비도 도둑놈이야. 끝까지 오리발이면 장사고 뭐고 넌 끝장이야.” “민주 경찰이 이렇게 공갈을 쳐도 되는 겁니까?” “이걸 그냥 팍 조져?” “내가 가만히 보니까 김형사님께서 아침부터 신경질이 나신 모양이요. 한데 말이요 날씨가 푹푹 찌지 않소? 이런 날은 서로 양 보를 해야 하는 것이오. 우리가 초면도 아니고 필요 없는 정력낭비는 그만두자 이겁니다. 나도 마음이 바뀌려면 뭔가 명분이 있어 야 할 것 아니오?” 형사보다 도둑놈이 더 말이 많다. 그러고 보니 이 인간 처음이 아니다. 이 바닥에 이골이 난 놈이다. 쉽게 다뤄질 놈이 아닌 것이 다. 다른 직원들과도 형이야 아우야 하는 눈치였다. 옆자리 박형사는 노골적으로 봐 주라고 부탁까지 했다. 사실 이런 친구에게서 정보를 얻어내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잡혀온 죄목은 고사하고 빠져나갈 구멍까지도 환히 알고 있다. 저에게 불리한 진술은 눈깔이 빠져도 오리발이다. 공갈도 통하지 않고 매질은 더욱 할 수가 없다. 필요 없는 압박을 했다가는 당장 변호사를 불러서 허위자백을 하라고 공작 수사를 했다고 물고 늘어질 것이 뻔하다. 한데도 반장이 닦달을 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달래든 타협하든 체면 좀 세워달라는 이야기다. 며칠 전에 서장과 인척인 전자제품대리점에서 차떼기로 몽땅 도둑을 맞았다. 전자제품 도둑놈들은 서로 연계가 되어 있기 때문 에 장물아비 한 놈만 입을 열어준다면 쉽게 해결이 되는 것이다. 그러려면 공갈보다 타협을 해야 한다. 박형사가 봐주라는 소리도 반장이 시킨 작전인지도 모른다. 빤히 알면서도 오늘은 그러고 싶지가 않다. 머릿속이 온통 그 빌어먹을 냉장고 생각뿐이다. 짜증 이 난다. 담배연기를 길게 뿜었다. “무슨 인심이 그러쇼? 그 아까운 연기라도 이쪽으로 뿜어 주쇼.” “담배도 공범이냐?” 김형사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유가에게 던졌다. 이마에 진땀이 난다. “무슨 고민이요?” “있으면?” “동포끼리 서로 머리를 맞대면 해결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소?” “팍! 이걸 그냥.” 옆자리 박형사 눈치만 없다면 귀싸대기라도 한 대 올려붙이고 싶다. 이제 이 짓도 지겹다. 도둑놈이라고 괄시할 처지도 아니다. 형사질 이십 년에 냉장고 하나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오히려 불쌍하다. 일이 이 지경이 될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아내에게 털어놓았어야 했다. 아내를 너무 만만히 본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사실 아내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매사에 잘도 속아 주었다. 형사 마누라치고는 나서지도 않고 이해심도 많았다. 그 덕분에 김형사가 매사에 엉뚱하고 무모한 짓만 하고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아내의 편한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처음부터 가볍게 생각한 것도 사실이다. 매사 복잡한 일이 있으면 적당히 거짓말을 하다가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서야 털어놓으면 아내는 또 며칠 등을 돌리다가 그냥 속 좋은 웃음을 쿨쿨 웃고 말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번 일도 처음부터 아내를 속일 생각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시작부터 웃겼다. 까짓 냉장고가 아무리 품귀라고 하지만 철 장사 다. 더워지면 쏟아져 나올 게 뻔한 것이다. 그때쯤이면 못 팔아서 안달이 날 물건이다. 아내가 준 돈을 없앴다고 해도 대신 적당히 외상으로 주워다 놓으면 되는 일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별일도 아닌 냉장고 하나로 아내가 밥상머리에서 시끄럽게 노래를 부를 때마다 오히려 더 큰 소리로 기를 죽여 놓곤 했었다. 내용을 알지도 못하는 마누라가 징징거릴 때마다 오히려 더 신경질을 낸 것이다. 어제 아침도 그렇다. 출근을 하는데 염불을 외우듯 또 냉장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대꾸하기도 싫어서 눈만 한 번 흘겨 주고 나오고 말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순하고 착해서 바보 같기만 하던 마누라가 엉뚱한 짓을 하리라고는 꿈에조차 생각을 못했었다. 그놈의 냉장고 사건을 이야기하려면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었던 이른 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잔설도 가시지 않은 늦추 위가 옷 속으로 파고들 때였다. 연일 야근에 지친 김형사가 조금 일찍 퇴근을 했다. 일년에 한 번 있을까말까 한 시간이었다. 아내 가 반색을 했다. 밥상에 소주까지 한 병 올려준 아내는 마냥 행복한 얼굴이었다. “여보 피곤하지?” 평시에는 애교라고는 개 코딱지만큼도 없는 여자다. 한데 그 날은 영 판 아니었다. 해롱거리는 것이 보통이 아니다. 모처럼 일찍 퇴근해서 그런 줄 알았다. 한데 얼굴까지 너무 환하다. “당신 무슨 좋은 일 있어?” 모처럼의 아내의 환대에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아내가 좋아하는 통닭이라도 한 마리 사서 들고 올 것 그랬 다. 웃는 아내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잔주름이 부쩍 늘어났다. 그동안 도둑놈들 잡는다고 너무 무관심했던 것이 미안해서 슬그머 니 손을 잡아주었다. “당신 열무김치 좋아하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금년 여름에는 걱정 말라 그 말씀!” “냉장고가 있어야지.” “짠~” 아내는 등 뒤로 감추었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신문지로 싼 돈 뭉치가 들려 있다. “어? 이게 무슨 돈이야?” “오늘 곗돈 탔어요.” 아내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얼만데?” “오십 만원.” “무슨 곗돈이 겨우 그거냐?” “이 양반이 눈만 뜨면 도둑놈들과 함께 살더니 이제 허풍만 늘어났구려, 내가 이 곗돈 붓느라고 얼마나 큰 고생을 했는데 그딴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래? 큰돈이다.” “냉장고 하나 살려고 일 년이나 죽자사자 모은 돈입니다.” 작년 여름 아파트로 이사한 반장 집들이에 함께 갔었다. 집들이 음식이 너무 맛있었다. 특히 이빨이 시린 열무김치 맛은 환상적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사모님 음식 솜씨가 너무 좋다고 했더니 아내는 비웃듯 냉장고 맛이라고 일축하고 말던 기억이 난다. “금년 여름은 밥맛이 좀 나겠군.” 냉장고 하나 사주지 못한 김형사는 멋쩍고 미안했다. 아내는 냉장고를 장만하려고 생활비를 줄여 계를 들었던 모양이었다. “부탁이 있어요.” “뭐야? 돈이 모자라?” “ 당신이 무슨 돈이 있어요? 그게 아니고 금년 여름은 날씨가 몹시 더울 거래요. 그래서 말인데 냉장고 품귀 현상이 일어날 것이 틀림없거든요. 철이 되기 전에 일찍 부탁을 해야 하거든요.” “아는 것도 많다.” “당신이 좀 부탁을 해봐요.” “내가?” 사실 지금까지 김형사는 가재도구 따위를 구입하는데 자신이 직접 나선 적이 없다. 직장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집안일은 모두 아내가 도맡아 하고 있었다. 담장이 무너지고 지붕에 물이 스며들어도 모두 아내의 몫이었다. “당신 알고 있는 전자대리점에 부탁을 좀 해봐요. 거저 달라는 것도 아닌데 설마 형사 부탁을 거절하겠어요?” “그래볼까?” 모처럼 아내의 기분을 깨고 싶지가 않았다. 더구나 전자 대리점이라면 알만 한 곳이 있었다. “빨리 해야 되요. 주문이 많이 밀렸대요.” “알았어.” 아내는 행복한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김형사도 오늘따라 기분이 좋았다. 꼭 냉장고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생만 하는 아내 에게 무언가 해 줄 수 있다는 것이 오늘따라 마음이 가벼웠다. 뿐만 아니다. 반장 집 냉장고가 은근히 부러웠었다. 이가 시리던 열 무김치 생각을 하니 입안에 침이 고인다. 금년 여름에는 어름을 채운 수박화채도 먹을 수 있겠다. 까짓 것 거저 달라는 것도 아닌 데 그딴 부탁 하나 들어주지 않을까? 사실 형사라는 직업이 크게 존경받는 자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전자대리점 사장쯤에 무시당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정사장에게 부탁해 볼 터이니 돈이나 내놔.” “아! S전자 대리점 말이죠?” “응 어제도 술 마시자는 걸 간신히 떼 놓았는데 당신 때문에 할 수없이 부탁을 해봐야겠다.” “잘 됐다. 옛 수. 오십 만원.” 아내는 망설이지도 않고 돈을 넘겨주었다. “모자라면 어쩌지?” “그거야 당신이 채워야지요.” 그녀가 재미있다는 깔깔거렸다. “그렇게 기분이 좋아?” 아내가 건네주는 돈을 벗어놓은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내일은 출근하는 길에 정사장을 만나야겠다. 아내가 끓여준 김치찌개에 소주 한 병을 마셨다. 얼큰한 기분이 나른하다. 열무김치를 생각하면서 잠이 들었다. 건망증일까? 잠들기 전에 몇 번이나 다짐을 했는데도 이튿날 냉장고 건을 까맣게 잃어 먹고 말았다. 허겁지겁 출근을 해서 밀린 업무에 시달린 덕분이었을 것이다. 오후에는 도둑놈을 잡는다고 쫓아다니다 보니 바지 뒷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돈까지 잊어버리 고 만 것이다. 밤늦게 집에 들어와서 아내의 얼굴을 보고서야 겨우 생각이 났다. “아차. 깜빡했네.” 깜짝 놀라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았다. 다행이다 싶게 돈은 고스란히 그대로 있었다. “휴~” “얼마나 바쁘셨으면 주머니에 돈 있는 줄도 모르고 돌아 다녔수?” 그때까지만 해도 아내는 너그럽게 웃었다. “새끼들이 말야. 양심도 없어.” “누가요?” “도둑놈들은 시끄러운 판이 좋다고 대통령이 총 맞아 돌아가시니 더 기승을 부리는 것 있지? 거기다가 데모하는 놈들까지 우리 보고 해산시키라고 하니 형사질도 못해먹겠어.” 냉장고 하나 때문에 마냥 행복해 하는 아내를 배신한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으로 변명 삼아서 푸념을 했다. “그런 소리 말아요. 당신이 형사라고 내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워하는데요. 냉장고만 들여오면 당신이 좋아하는 열무김치 시 원하게 얼려서 밥상에 올려 줄 놓을 것이니 짜증 내지 말고 힘 내세요.” “아유. 고맙다. 고마워!” 아내는 오히려 그를 위로했다. 하지만 김형사는 다음날 또 다음 날도 바지 뒷주머니에 그냥 돈을 넣고 다녔다. 성의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잊어버린 날도 있었지만 두 번은 대리점 정사장을 찾아 갔다가 만나지를 못했다. 훌떡 한 달이 지났다. 기다리다 지친 아내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사실 형사가 소변보고 무엇 볼 시간도 없는 직업이다. 그래도 너무했다 싶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까짓것 아무리 냉장고가 품귀라고 한들 돈이 없지 냉장고가 없으랴? 그때까지만 해도 김형사는 태평이었다. 4월이 다 가고 언뜻 더위가 시작되는가 싶을 때 드디어 아내가 눈을 허옇게 뜨더니 삿대질을 하고 나섰다. 할말이 없어진 김형사다. 오늘은 만사 제쳐놓고 주문을 하겠다고 아내와 철석같이 약속을 하고 조금 이르게 집을 나왔다. 헌데 일이 꼬아지려고 이상하게 되고 말았다. 출근 길목에서 군대 동기였던 수철이를 만난 것이다. 제대하고도 실업자 시절에 형제처럼 지낸 친구다. 경찰에 들어오고 소식이 끊어져서 궁금했는데 십수년 만에 만난 것이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경찰서 앞에서 서성거리 고 있었다. “수철이 아니냐?” “오랜만에 얼굴이나 한 번 보려고......” 일부러 찾아온 것 같았다. 멋쩍은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있었지만 한가한 표정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목소리까지 힘이 없어 보 였다. “무슨 일이냐?” 출근 시간에 몰리고 있었지만 오랜만에 찾아온 옛친구를 차마 따돌리고 돌아설 수는 없었다. “해장국 한 그릇 할 시간 있겠냐?” 오랜만에 만난 친구다. 거절할 수도 없는 일이다. 마음이 급했지만 초라한 녀석의 모습 때문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잠깐만 기다려라. 출근부에 도장만 찍고 나오마.” 도둑놈 냄새를 맡았다고 반장에게 거짓말을 했다. 냉장고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경찰서 문 앞에서 기다리는 수철이를 데 리고 근처 해장국집으로 갔다. 콩나물국을 혼자 우물거리는 녀석이 딱해서 소주 한 병을 더 시켰다. 소주병이 다 빌 때까지도 녀석 은 입을 열지 않았다. 반장과 약속한 시간이 훨씬 넘었다. 엉덩이를 들썩거리면서 팔목시계를 보았다. “바쁜 모양이구나.” “일이 좀 밀려서…… 끝나고 대포 한잔하는 것이 낫겠다.” “네 얼굴 보았으니 갈련다.” 녀석이 체념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초라한 꼴이 보기 싫었다. “너 무슨 일 있구나.” “별일 아니다.” “임마! 이렇게 불쑥 찾아왔다가 그냥 가면 내가 편하지가 않다.” “나는 이웃 C시에서 택시 운전한다.” “소문에 들었던 것 같다.” “어젯밤 교통사고를 냈다.” “사망이냐?” “늑골이 나갔는데 8주란다 구속하겠다고 하는데 다행히 피해자 쪽에서 합의를 해주겠다고 한다.” “얼마를 달라고 하는데?” “백만 원......” 이제 녀석이 찾아온 목적을 알 것 같다. 괜히 짜증이 난다. 친구가 아무리 좋다지만 오랜만에 찾아와서 할 짓이 아니다. “마누라는 아파 누었고 챙겨놓은 돈이 있어야지.” “아주머니가 아파?” “췌장암이란다.” “본인도 알고 있냐?” “5년이나 된다. 죽는 날만 기다리는 거지.” 새삼스럽게 녀석의 얼굴을 쳐다보았더니 검버섯이 까맣게 끼어있다. 알 수 없는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아침부터 왜 이런 타령을 듣고 있어야 하는 것인가?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졌다. “이거라도 가져가거라.” 순간이었다. 마음으로 결정한 일이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손이 바짓주머니로 간 것이다. 녀석의 눈앞에 내밀고 있는 돈 봉투를 보면서 자신도 놀랐다. 녀석의 불행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해도 이 돈을 내놓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다. 아내가 얼마나 고생을 해서 만든 돈인가? 냉장고 계약을 하라고 돈을 건네줄때 환하게 웃던 아내의 행복한 얼굴이 새삼 떠오르면서 마음이 부르르 떨렸다. “웬 돈이냐?” 순간 녀석의 눈에 광채가 일어났다. 돈 봉투를 얼른 뒤로 감추고 싶었다. 마음은 그런데 손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미안해서 어쩌지 너에게 신세지러 온 것은 아니었다. 그냥 하소연이나 하러 왔는데.” 입으로는 주절대면서도 돈 봉투를 잽싸게 채가는 녀석의 손힘에 무기력하게 손을 놓고 말았다. “마누라 곗돈이다.” 하지 않아도 될 소리를 맥없이 웅얼거렸다. 시뻘겋게 부어오른 아내의 얼굴이 떠오른다. 마음이 콩닥콩닥 두 방망이질을 한다. “은혜 갚으마.” 아내의 곗돈 따위에 신경 쓸 녀석도 아니었다. 볼일 다 본 녀석 이 서둘러 일어서고 있었다. 김형사 마음이 변할지 모른다는 불안함 때문인 것 같았다. “죽음길이나 편히 가게 해주는 수밖에......” 오히려 제 마누라 푸념을 늘어놓았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라.” “여부가 있겠냐? 정말 고맙다.” 도망가듯 황급히 달아나는 녀석의 굽은 등을 보면서 안쓰럽고 아쉽다는 생각보다 오히려 알 수 없는 분노가 밀려 왔다. 무얼 잃어 버렸을까? 허전한 마음으로 무게를 잃은 바짓주머니를 더듬었다. “대책 없는 놈!”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쫓아간다 해도 엎어진 물이다. 터덜터덜 걸어서 사무실로 들어갔다. “어이. 김형사 냄새 맡은 놈은 잡았냐?” 반장이 이죽거렸지만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온종일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아내의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 행복한 얼굴 을 생각하면 냉장고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한다. 궁리를 해봐도 뾰족한 수가 없다. 오후가 되면 서는 머 리까지 지근거린다.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 되겠지. 시간이 지나면 무슨 수가 생길것이다. 지금껏 냉장고 없이도 잘 살아왔다. 품귀라고 하고 그럭 저럭 더위가 지나면 그만이다. 더위가 지나고 나서 실토하면 아내는 또 몇 번 눈이나 흘기다 말 것이다. 그날 밤 김형사는 아내에게 또 거짓말을 했다. “냉장고가 당신 말대로 품귀가 되어서 작년 겨울부터 주문 받아 놓은 것이 밀려 있다는구먼.” “내가 뭐라고 했어요? 그래서 빨리 주문하라고 했잖아요? 그래 뭐라고 해요?” “출고되는 대로 먼저 준다고 했어.” “잘됐다, 그것 봐요. 그래도 당신이 형사나 되니까 일찍 준다고 하는 거요.” 아내는 속도 모르고 자랑스럽게 어깨까지 으쓱대면서 환한 얼굴로 퍽 좋아했다. “형사 아닌 놈은 냉장고도 못 사겠다.” “그렇다니까. 내친김에 한 번 더 단단히 못을 밖아 두어요.” “알았어.” 할 말이 없어서 애꿎은 담배만을 뻑뻑 빨았다. 아내는 틀림없이 제풀에 지칠 줄 알았다. 계산대로 한동안 조용했다. 첫여름으로 들어서면서 조금씩 신경질을 내는가 싶더니 어제 초복 날은 노골적으로 덤벼들었다. “여보. 당신 형사 맞아요?” 아내는 출근하는 김형사 앞을 막아서더니 비웃듯 말했다. “왜 또 그래?” 냉장고 따위는 까맣게 잊고 있다가 아차 싶었다. “여름 지나가고 나면 냉장고를 무엇에 쓰죠?” 아내는 처음부터 시비조였다. 사실 미안하다. 할말이 없어서 일부러 큰소리로 엉뚱한 핑계를 댔다. “어느새 여름이냐? 정사장 그 친구 웃기는 놈이다. 장사하는 놈들은 믿을 수가 없다니까. 인제 보니 여름 다 지나겠네.” 애꿎은 전자 대리점 사장만 욕을 해주면서 어물어물 도망 나오듯이 집을 나오고 말았다. “내가 당신 형사 노릇 하는데 돈 벌어 오라고 앙탈을 했어? 누구를 빼달라고 부탁을 했어? 곗돈 타서 냉장고 하나 순서 좀 당겨 달라고 했는데 그것 하나 못해? 내가 오늘은 결판을 내고 말아야겠어” 그때까지만 해도 등 뒤에서 악을 써 대는 아내의 속셈이 무언지 몰랐다. 저녁때 일찍 퇴근해서 달래면 그만 이라고 생각했다. 한 데 사건은 엉뚱한 쪽으로 번졌다. 아내가 S 전자 대리점 정사장을 찾아간 것이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다. 순해 터져서 남의 앞에 나서기조차 꺼리는 그녀다. 결코 단 한 번도 남편 하는 일에 나서 본 일이 없었다. 냉장고에 한이 맺혔나 보다. 전후 사정을 따지지도 않고 정사장의 멱살을 잡고 늘어진 것이다. 상상도 못한 일이다. “김형사님 빨리 와보세요. 사모님과 우리 사장님이 싸워요.” 대리점 여직원 전화를 받고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초지종을 듣고 대리점으로 달려갔을 때는 이미 아내의 손톱이 정사장의 얼굴의 몇 군데 상처를 내고 난 다음이었다. 처음부터 아내가 몰상식하게 덤벼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냉장고 어쩌고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아내에게 미친년이라고 먼저 모진 말을 했다는 것이다. “여보! 나 분해서 못살아요.” 김형사가 달려가자 힘이 생긴 아내는 정사장 얼굴의 생채기 따위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살기등등하게 오히려 삿대질까지 하면서 펄펄 뛰었다. 일이 참으로 난처해지고 말았다. 영문을 모르는 정사장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김형사를 쳐다보았다. 난처한 일이 다. 그렇다고 남편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아내에게 그 자리에서 사실대로 까발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정사장 내가 뭐라고 했소? 빨리 하나 달라니까 왜 안주고 일을 벌린 거요?”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내용을 모르는 정사장이 금세 달려들 듯이 악을 썼다. 시치미를 떼고 엉뚱한 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더 떼거 지를 쓸 수도 없는 일이었다. 더 큰 망신을 당하기 전에 아내를 그곳에서 끌고 나와야만 했다. “정사장 내가 우리 마누라 성질 건들지 말고 했지?” “나 참 미치고 환장하겠네. 아무리 형사지만 무슨 소리인지 뜻이나 알고 넘어 갑시다.” “장물 말이야 장물?” 엉뚱하게 나왔다. 장물이라는 소리에 기가 질려 주춤하는 사이 정사장을 흘겨보는 체하면서 서둘러 아내의 손을 잡아끌었다. 모 든 사실이 들통 나기 전에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평생 처음으로 남자 얼굴에 생채기를 내놓은 아내도 은근히 겁이 난 터라 못이기는 체 따라 나서고 말았다. 엉뚱한 봉변을 당하고 쉽게 물러날 정사장이 아니었지만 평소에 김형사에게 기가 죽어있던 정사장이었기에 땡감 씹은 얼굴로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아내는 뒤에 대고 한소리 더했다. “삼일 안에 갖다 놓지 않으면 또 와요.” “당신 왜 그렇게 사나워졌어?”
모퉁이를 돌아 나오면서 정사장이 보이지 않자 김형사는 겨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내에게 이렇게 사나운 성격이 있었던가? 새삼스럽게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나쁜 놈! 나보고 미친년이라고? 어디 두고 보자. 손해 배상을 하지 않으면 가만두는가 봐라.” 아내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남자들끼리 한 일인데 왜 당신이 나서는 거야?” “형사라는 사람이 얼마나 깔보는 짓을 했으면 그 따위로 괄시를 해요? 나보다 한달 늦게 곗돈 탄 사람도 벌써 냉장고 들여놓았는데 아무리 품귀라고 해도 그렇지 저만 장사를 해먹으면 다예요.” “한 달 전에 나온 것은 S 사 제품이 아니라니까. 신품으로 줄려고 그러는 것 아냐?” 궁색한 변명을 했지만 이미 돌아버린 아내는 아무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 깐 놈. 장사꾼 말을 믿게 됐어요?” 아내의 분기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녀가 계속 분통을 터트리고 있는 동안 김형사는 심한 갈등을 느껴야 했다. 이제 아내와 정 사장 싸움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차라리 아내에게 실토하는 게 나을 것 같다. 한데 마음과 달리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허둥대다가 또 기회를 잃고 말았다. “여보! 그만 화 풀고 시원한 냉면이나 한 그릇 먹자.” 점심까지 사주면서 간신히 달랜 아내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사무실로 들어왔지만 영 일할 기분이 아니었다. “여보 정사장이 고발한데.” 밤에 할 말이 없어서 아내에게 공갈을 쳤다. 사실 아무리 영문도 모른 여자에게 얼굴을 긁힌 정사장이라 한들 어쩌지는 못할 것 이다. 아내의 말대로 형사라는 직업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다. 특히 전자 대리점이라는 것이 먼지 나는 구석이 많은 장사다. 차마 어쩌지는 못할 것이다. 아내에게 한 말은 지어낸 것이다. “더러운 놈이네. 지 잘못은 모르고?” 아내는 조금 켕기는 것 같았다.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형사인 남편을 믿고 있을 것이다. 정사장에 게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해 주어야겠다. 수화기를 들어 S 전자대리점으로 다이얼을 돌렸다. “정사장 미안합니다. 사실은 말이오. 마누라가 D 전자대리점과 혼동해서 그리 한 것이니 이해해 주시오.” “나 참 기가 막힙니다. 김형사 사모님만 아니면 당장 고소를 하겠지만 참는 겁니다. 얼굴까지 긁혔으니 우리 집 안사람에게 무어 라고 변명을 해야 할지 걱정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잔뜩 불어 있었지만 애써 참는 것 같았다. 평소 꽤 까다로운 성격이다. 하지만, 약점이 많은 장사 때문인지 생각 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다. 마음이 놓인다. “그나저나 봐 주는 김에 부탁 하나 더 들어주시오.” “또 무슨 소리하려고요?” “중고라도 좋으니 냉장고 하나만 외상으로 얻읍시다.” “냉장고 소리는 하도 마시오. 내가 얼굴을 긁혀서가 아니라 금년에는 벌써 품절된 지 오랩니다. 작년 겨울에 주문 받은 것도 아 직 다 못 주고 있어요.” 언제 받을지 모르는 형사에게 외상으로 물건 줄 인간이 애초에 아니었다. 더구나 마누라에게 망신까지 당하고 뭐가 좋다고 외상 을 줄까? 마음이 급하다 보니 좋은 말만 귀양살이 보내고 말았다. 수화기를 놓고 허탈한 마음으로 담배에 불을 붙여 물었다. “담배 한 꼬치만 적선하시오.” 장물아비 유가가 갈증 난 눈으로 애절하게 올려다보았다. “적선? 좋지.” 눈을 허옇게 흘기다가 생각을 하니 그놈도 불쌍한 놈이다. 다먹고살려고 하는 짓인데 순간적으로 안쓰러운 생각에 불 붙인 담 배를 유가 입에 물려주었다. “그러니까 냉장고가 문제였군요?” 정사장과 통화 내용을 들은 장물아비 유가가 담배를 깊게 빨아들여 허공에 연기를 뿜으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렇다, 이 자식아! 너 지금 누구 약 올리는 거냐?” “무슨 섭섭한 말씀을 그렇게 하쇼? 내가 생각이 있어서 하는 소리 아닙니까?” “그래서? 네놈이 냉장고라도 한 대 주겠다. 이거야?” “못 줄 것도 없죠. 나야 어차피 한바퀴는 돌아야 하는 놈인데 갖고 있으면 뭘 할꺼요?” “어디서 났어?” “도둑질 한 것 아니니 염려 놓으시오” “신품이냐?” 고개를 디밀고 도둑놈 말에 은근히 귀를 기울이는 자신이 한심스럽다. 하지만, 어젯밤 아내의 얼굴이 떠오르자 또 냉장고가 눈 에 아른거린다. “쓰던 걸 선물합니까? 딱지도 떼지 않았습니다.” “어느 회사 제품이냐?” “지금 그딴 것이 문제입니까? 듣고 보니 사건이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에 있어?” “또 장물 취급하는 거요?” “임마! 나 그렇게 치사한 놈 아냐. 네 입으로 미리 말 해주었는데 추가 뜨겠다고 장물 취급하겠냐? 안심하고 말해봐.” “S 대리점에 보관해 두었어요.” “시끄러워! 이 새끼야. 조금 전에 전화한 것이 S 대리점 정사장인데 냉장고는 품귀라고 했어.” “후후후..... 그거야 내가 팔지 않고 보관한 것이니까 그렇지요. 값 올려 팔아먹으려고 색 쓰는 것이오.” “왜 맡겼어?” “처음에는 넘기려고 했지요. 헌데 정사장 그 치가 그저 먹으려고 반 값도 안 쳐주려고 하는 겁니다.” “새끼야. 장물이니까 그렇지?” “아따! 그 소리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나 같은 놈은 장사도 못합니까? 내 직업이 전자제품 도매상인 것 다 알지 않아 요.” “그럼 왜 네 점포에 두지 않고 정사장에게 맡겼어?” “점포가 있으면 뭘 하려고 정사장 대리점에 맡깁니까? 원래 나는 점포 없이 장사를 하는 중간상입니다. 서울에서 부도나는 회사 덤핑 물건 떼다가 도매로 넘기는 거지요. 정사장, 그치도 간판만 S 대리점이지 나한테 덤핑으로 물건 많이 받아요.” 순간 머릿속으로 번개같이 지나는 생각이 있었다. 아내에게 미친년이라고 한 정사장 놈을 잘 닥달하면 한 건 올릴 수 있겠다 싶었다. “사기 치는 것 아니지?” “아니지요, 소비자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값을 깎아 주는데 무슨 사기가 됩니까?” “너? 제법이다.” “들은 풍월이지요.” “네가 갖고 있는 것은 상표가 뭐냐?” “메이커가 무슨 소용입니까? 위에다 S 자 하나만 붙이면 명품이 되는 거지요.” “상표법 위반 아니냐?” “도둑질보다는 윗 질이지요.” “얼마 주면 되냐?” “흐흐흐....까짓 것 하나 선물할 테니 서류나 잘 꾸며 주시오.” “이 자식. 너 물귀신 하려고 그러지?” “그렇게 못 믿겠으면 그만 둡시다.” “그만 두자. 도둑놈과 무슨 거래를 하냐?” “그러지 말고 우리 정식으로다 돈 주고 거래를 합시다. 나야 마찬가지니 정사장이 먹으려한 금액만 넣어 주시오.” “얼만데?” “십만 원.” “오십만 원에도 없는 물건이 겨우 십만 원이냐?” “전자제품은 부르는 게 값이오.” 오십만 원짜리 십만 원에 사면 만사 끝이다. 아내의 곗돈을 당당히 갚을 수 있다. 하지만 도둑놈 말을 믿을 수가 없다. 몇 번이 나 머리를 흔들었다. 한데 시간이 지날수록 냉장고가 눈앞에 아른 거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아무리 정상적인 거래라고 하지만 도둑놈과는 아무래도 마음이 걸린다. “장사 한두 번이오? 뭘 망설이는 거요? 어차피 나야 한바퀴 돌아야 나올 것인데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 아니요? 냉장고 잘 돌아 가면 기분으로다 사식이나 한 번 더 넣어 주시오.” “정사장이 십만 원 준다 이거지.” “도매가격으로 정상거래 금액이라니까요.” 어제 비웃듯 아내를 쳐다보던 정사장의 얼굴이 떠오른다. 또 담배 한 꼬지를 또 뽑아 유가에게 던져 주었다. “고맙습니다.” 유가가 웃었다. “시작한 김에 타협하자.” “또 뭐요?” “차떼기 한 놈만 불어 주라.” “집에 보내 주면 냉장고고 차떼기고 모두 정상거래요.” 우르르 쾅…… 갑자기 창밖에 섬광이 지나가더니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니기미 씨팔, 장마철이라고 매일 비만 쏟아지면 지붕 새는 놈은 어찌 사냐?” 앞자리의 박형사가 투덜대고 있었다. “박형사 느네 집 지붕도 새냐?” “지붕은 멀쩡한데 마누라 마음이 새는 것 같아서 걱정이오.” “이 자식이 거래하자고 한다.” “큰 놈 잡읍시다. 일찍 끝내고 술이나 공범 합시다.” “공범? 흐흐흐…… 오늘은 모두 공범이다. 좋다. 도둑질하는 놈들 심정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니기미 이 세상에 마누라 무섭지 않 은 놈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나는 공처가다. 김형사는 미친 듯 웃었다. 박형사도 웃고 앞자리의 유가도 함께 웃었다. 뜬금없는 공처가 타령에 사무실 직원들 이 멀거니 쳐다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