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한실 이야기]/**** 한실 소개

내고향 은곡리 역사 이야기

소설가 구경욱 2008. 12. 17. 14:43

내고향 은곡리 역사 이야기

 

우리 한실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정황으로 보아 고대국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마을 곳곳에 그 흔적들이 남아 있는 데 그 대표적인 것이 일명 대명암이라 부르는 고인돌군이다. 이로 미루어 이미 청동기 시대에 군장을 중심 세력으로 주민들이 모여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마한시대엔 54국 중 아림국(兒林國)에 속했으며, 백제시대엔 설림군(舌林郡)에 속했었다. 그 이후 (삼국사기)에 따르면, 통일신라 경덕왕 때 이르러 서림군(西林郡)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는데 그 명칭이 고려시대까지 이어진다. 이조 태종 13년에 서천군에 속했다가 이조 말엽엔 서천군 두산면동 지역에 속하게 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현재의 지명으로 바뀌게 되는데, 문장면동과 두산면동이 병합되어 문산면이 되었고, 우리 마을에서는 은적리와 대곡리가 병합 돼 은곡리라 하여 문산면에 편입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러면 옛날 우리 마을엔 도대체 몇 가구의 집이 있었고, 어느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까. 1659~1674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東國與地志]에 보면 자세히 기록되 있다. 대곡동리엔 36호에 남자가 73명에 여자가 78명, 은적동리엔 14호에 남자가 26명에 여자가 10명이라 기록되 있다. 그 이후의 기록인 서천군지를 살펴 봐도 이 범위를 크게 벗어난 적은 없는 것 같다.

 마을 내 역사적 유물로는 마을회관 건너편(안산)에 고인돌 2기가 있는데, 이 중 한기의 북측 면엔 28자의 한자가 음각되 있다. 오랜 세월 풍화되 잘 보이지 않은 데, 이는 조선 초기 하천에 대명교를 건립한 뒤 그 기금을 내놓은 화주명과 그 날자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인돌은 소류지 주변에 한기가 더 있었는데 1988년 하천 정비 사업을 하면서 훼손되 무척 안타깝다. 또다른 유적으로는 소류지 좌측 산(태봉산)을 태뫼라 부르고, 우측 산을 새태라 하는데 정상 부근에 오르면 백제 퇴뫼식 산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작은 육굴 기슭에서 다수의 와편들이 발견되는데 이는 퇴뫼산성의 군사들이 말을 타고 활을 쏘며 훈련하던 사장터였기 때문이다.

 마을 내 역사 유적 중 가장 큰 훼손은, 70년대 소류지를 만들면서 훼손된 5M 높이의 백제 토성이다. 퇴뫼와 새태 산성을 잇는 토성이었는데 , 무지한 우리 후손들이 이 역사적인 유적 위에다가 소류지 제방을 만들어 버렸다. 어쨌든 기벌포로 상륙한 당나라 소정방이 진군하지 못하고 천방산에 군막을 설치한 뒤 백제군과 대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우리 마을이 계백의 황산벌과 더불어 백제 최후의 격전장이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백제 멸망 후 부흥운동의 근거지가 인근에 있는 한산 건지산성이었고, 최영 장군이 왜구를 물리친 홍산대첩이 우리지역에서 있었던 만큼, 이 토성의 훼손은 못내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