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한실 이야기]/**** 한실 소개

문산면 은곡리 지명의 유래 - 박상굴

소설가 구경욱 2009. 1. 7. 15:39

 

* 박상굴(朴床굴)

  -. 옛날에 박氏가 터 잡고 살았다 하여 박상굴이라 부른다. (굴)은 골의 방언이다.

  -. 옛 샘안집을 경계로 윗뜸과 아랫뜸으로, 큰박상굴 쪽을 큰고랑이라 하고, 뫼살메 쪽을 작은고랑이라는 소지명도 있다. 

  -. 2009년 현재 12호가 살고 있으며, 마을회관 및 장수관, 교회와 방앗간이 있다.  

 

 

 

  박상굴에 얽힌 일화

 

  이 마을에 박장자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부를 믿고 풍류만 찾아 즐기며 세월을 보냈다. 그런 터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술벗을 청해 잔치를 벌이곤 했는데, 특히 이 집의 젊은 여자 종은 어려서부터 술을 빚어 그 솜씨가 유달랐다. 때문에 그 맛을 잊지 못해 박장자의 집을 찾는 이의 발길이 밤낮 끊이지 않았다. 그랬으므로 여종은 매일같이 잔치에 쓰일 술을 도맡아 빚어야 했는데, 너무 오랜 동안 많은 술을 빚어야 했기 때문에 두 손이 짓물러 고통스런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마른 장마가 후터분하게 이어지던 어느 여름 날이었다.

 원통산 고등사(高嶝寺)의 노승이 마을에 탁발을 나왔다. 박장자의 집 대문 앞에 이르러 목탁을 두드리며 목청을 돋구어 염불을 외었지만 허사였다. 대청 술판의 박장자는 오히려 목탁소리에 맞춰 덩실덩실 어깨춤을 출뿐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았던 것이다.

 "거 참, 인심 한 번 드럽게 사나운 집구석이네 그려."

 노승이 지쳐 돌아서려 할 때였다. 잔칫상에 올릴 술을 걸르고 있던  젊은 여종이 보다 못해 술 한 바가지를 들고 뒷문으로 뛰어 나와 내밀었다.

 "스님, 종 년 처지에 시주할 건 읎구유, 그저 날도 뜨거운디 목이나 축이시고 가셔유."

 한여름 땡볕과 염불에 지쳐 버린 노승은, 타는 속과 마른 목을 넙죽 받아 든 술 바가지를 비워 달랬다.

 "이런 꿀맛 같은 곡차 허고는..." 

그리고는 입맛을 다시며 빈 바가지를 되돌려 주려고 하는데, 여종의 눈에서 뭔가 뚝뚝 떨어져 마른 땅을 흥건히 적시고 있는 게 아닌가. 눈물이었다.

 노승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런 제미럴... 쥔 늠은 저리 하늘이 무너져라 궁딩이 흔들믄서 흥겨운디, 니 년은 뭐가 그리 서러워 찔찔 짜고 있는 겨?"

 그 말에 어깨를 더욱 들먹거리던 여종이 술을 빚느라 엉망이 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눈물에 섞어 여차저차 내뱉었다.

 묵묵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노승이 혀를 찼다.

 "쯪쯪... 듣잖이 참말로 기맥힌 팔자로구만..."

 여종의 이야기가 끝나자 노승은 웬지 부아가 일었다.

 "그럼 술을 맹글지 않아도 될 방법을 찾았어야지. 몹쓸 늠에 팔자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이 다 있는디 말여?"

 노승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종이 되물었다.

 "팔자를 고치는 방법을 유?"

 "그려..."  

 여종은 격앙된 목소리로

 "스님, 어떻게 허믄 누룩에 절여 놓은 요 년의 기구한 팔자를 고칠 수 있데유? 세상에 그런 방법도 있었어유?" 했다.

 노승이 생각에 잠겼다. 한 눈에도 말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러지 말아야 하는가 갈등하고 있음이 역력했다. 허나 노승의 고민은 그리 오래지 않아 끝이났다.

 노승이 별안간 대청 술판의 박장자를 흘끔 하고는 여종을 향해 무겁게 닫혀 있던 입술을 뗐다.

 "암, 있지... 있구말고..."

 "...?"

 "맘만 먹으믄사 방법이야 아주 간단 혀... 박장자가 쫄딱 망하믄, 니 년은 더 이상 술을 안 맹글어도 될 거 아닌 감?"

 이 말에 여종은, 반색을 하며 마른 침을 삼켰다.

 '"스님, 그 게... 워떤...?"

 노승이 사방을 훑어 본 후, 여종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지금부터 내가 허는 소릴 잘 들어 봐. 요늠에 동네는 생긴 게 우렁성곡이라서... 본래 우렁이란 늠은 말여, 껍데기 안에 물을 담고 있어 가뭄에도 끄떡 읎지만... 껍데기에 구멍을 뻥 뚫어 놓으믄, 그 안에 있던 물이 쏙 빠져버려 말라 죽게 되거든..."

 "우렁성곡...? 껍데기에 구멍을 유...?"

 "그려. 동네 대가리(큰박상굴로 가는 길)에 구멍을 내고, 허리토막과 아랫도리 두군데(음산으로 가는 길과 청령의 교회 앞으로 나 있는 엉고개) 만 째 놓으믄, 천하의 박장자 죽은 할애비가 와두 별 수 읎지. 암, 망하고 말구... 그것 뿐이 것어? 이 집이서 머슴살이 허는 총각 늠의 지팽이처름 꼬부러진 팔자도 대나무처름 반듯이 펴지구..."

 그 말을 들은 여종은, 박장자 몰래 광에 들어가 백미를 퍼다가 후하게 시주를 했다. 또한 동구 밖까지 따라나오며 연신 굽신거렸다.

 

 그날 밤이었다. 여종은 그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던 노총각의 침소가 있는 바깥채를 찾았다. 행여 누군가 치맛자락 펄럭이는 소리라도 들을까 양손으로 허벅지를 움켜 쥔 은밀한 발걸음이었다.

 "아니, 니가 웬 일여? 그것도 육굴 말랭이서 송장 파먹던 여수, 달 보구 캑캑 울어 대는 이 밤중에 말여?"

 평소 여종을 마음에 담고 있었던 머슴이었다. 허나 늘 술을 빚느라 피곤해 얼음처럼 차갑게 굴던 터라 몹시 의아했다.

 "소원 하나가 있어 찾아 왔구먼."

 여종은 망설임 끝에 낮에 있었던 애기를 누가 들을까 속삭였다.

 그러자 머슴은

 "니 소원이라믄사, 내 못 들어줄 것 읎다만... 에이. 그건 날도 더운디 고얀히 헛심 쓰능 겨."

 여종의 처지를 안타까워 하는 머슴의 심정이었다. 허나 그의 말 끝에는 별소릴 다 듣겠다는 듯 콧방귀가 곁들여져 있었다.

 "부탁이구먼... ..."

 오랜 시간 머슴에게 애원하다시피 하던 여종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뭔가 결심이라도 한듯 비틀어 물었던 입술을 열었다. 

 "내 소원만 들어주믄..."

 "소원만 들어주믄...?"

 머슴이 기다리리다 못해 되묻자, 여종의 볼이 사시나무에 바람 닿듯 미세하게 떨렸다. 

 "나한티... 시집이라도 오라믄... 내 그리 할 거구먼."

 사뭇 비장함까지 묻어 있는 뜻밖의 제안이었다.

 "그게 정말여? 그렇게 하믄 나한티 시집을 온다능 게?"

 "그럼, 참말이잖고서... 옷고름을 풀고 약속하라믄... 아니, 그렇게 만 해준다믄야... 고까짓거 당장 속곳도 벗어 줄 수 있어... "

 머슴은 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 길로 삽과 괭이를 메고 뛰쳐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는 삼일 낮밤을 쉬지 않고 노승이 가리켜 줬다는 곳에 길을 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가뭄 끝에 홍수가 났다. 여기저기에서 산이 떨어져 내렸다. 유독 박장자의 논밭 만 휩쓸고 지나갔다. 또한 믿었던 인척과 벗들에게 돈을 떼이고, 자식들이 병을 얻는 등 집안에 온갖 우환이 겹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박장자의 가세가 시간이 흐를수록 차츰 기울어 갔다. 물론 삼년 후엔 손이 짓물러 고통 받던 여종이 더 이상 술을 만들지 않아도 될 만큼.***

 

 (이 이야기는 고 구장수님과 은말의 구기완, 백대현님의 구전을 바탕으로 재 구성한 것임.)

 

▼냇둑에서 바라본 박상굴 초입 사진

 

옛 박장자의 집터(옛 샘둑 윗편) 

 

옛 샘안집에서 바라본 아랫뜸 사진

 

안산 위에서 내려다 본 박상굴 풍경

 

옛 상여집이 있던 곳에서 바라본 박상굴

 

교회 앞에서 올려다 본 풍경

 

 

 ▼박상굴 뒷산에서 내려다 본 마을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