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작품]/***** 좋은 단편

공사장 / 마르그리뜨 뒤라스

소설가 구경욱 2009. 1. 10. 09:04

공사장 / 마르그리뜨 뒤라스

그녀는 오솔길을 따라 그 남자가 있던 방향으로 걸어가더니, 그를 지나쳐버렸다. 그리고 나서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와서 그 남자의 옆을 지나, 그 길의 반대쪽으로 끝까지 걸어가더니 총총히 숲 속으로 사라졌다.
때는 초저녁, 저녁 식사시간이 되기 조금 전이었다.
그 남자는 바캉스용 호텔의 정원에 둘러쳐진 철책과 한창 공사 중인 한 장소 중간에 나 있던 오솔길에 놓인 침대 식 긴 의자에 편안한 자세로 드러누워 있었다. 누운 자세로 그는 그 처녀가 숲 속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기계적인 시선으로 그녀를 쫓으며, 틀림없이 그녀가 호텔로 돌아오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도로 쪽에 쳐진 철책에서 약간 떨어진 지점에 우뚝 멈춰 서더니 왔던 길을 되돌아 자신이 방금 나왔던 그 숲 속으로 다시 사라졌다.
잠시, 저녁시간을 알리는 호텔 종소리가 울렸다.
남자는 여전히 침대 의자에 누워 있었다. 이런 시간에 그녀가 숲 속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녀는 두 번씩이나 그 남자의 곁을 지나가면서도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처음엔 그녀가 급히 서둘러 호텔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한데 그녀는 철책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가 방금 빠져나온 숲을 향해 다시 걸어갔는데, 역시 서둘러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호텔 쪽으로 갈 때나 숲 쪽으로 갈 때나 그녀는 마치 어떤 미지의 힘이 자기를 숲과 호텔의 철책 사이에 가두어 두기라도 한 것처럼 똑같이 빠른 걸음으로 걷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 앞만 똑바로 쳐다보고 걸어가면서 그 남자를 쳐다보지 않았지만, 남자의 양다리를 스치며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침대용 의자가 그 오솔길 폭을 반 이상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도 남자는 그녀가 돌아오는 것을 볼 수 없었다.
한참 동안 그에게는 마치 숲이 그녀에 대한 그의 추억을 삼켜버리기라도 한 듯이 그녀가 오솔길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사이 날은 점점 더 저물어갔다. 저녁식사 시간도 지났다.
여전히 남자는 처녀가 숲에서 나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그녀가 유달리 시선을 끄는 처녀에서도 아니고, 그가 전에 그녀를 본 적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한데 그 오솔길은 숲 속과 연결되어 있으면서, 호텔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한 마을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계속 숲 속에 남아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자 남자에게는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어떤 흥미로운 구경거리가 이처럼 그녀를 숲속에 붙들어놓고 있을까? 아니, 이런 늦은 시간에도 호텔에 돌아오지 않고 그녀가 숲 속에서 할 수 잇는 일이란 어떤 것일까?
시간이 흐르고 어둠이 짙어감에 따라 그의 호기심은 점점 커갔고, 그렇게 되자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호텔로 돌아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윽고 억제할 수 없는 강렬한 호기심에 사로잡혀 그는 벌떡 일어나, 그녀가 사라져간 숲을 향하여 몇 발자국 떼어놓았다. 그처럼 그녀의 행방을 궁금히 여겨온 그로서, 이 정도의 행동마저 자제해야 한다면, 그건 자연스러운 것이 못되리라. 삼십분도 훨씬 넘는 시간 동안 그는 일체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똑똑히 기억할 수 잇듯이 사실 그녀는 빼어난 미녀는 아니었다. 그건 이상야릇한 행동, 즉 이처럼 늦은 시간까지 혼자서 숲 속에 있다는 사실과, 뚜렷한 이유 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 방금 나왔던 그 숲 속으로 다시 들어간 사실, 또 여느 때 같으면 호텔 같은 자기 숙소로 돌아와 있어야 할 시각에 계속 홀로 숲 속에 머물러 있다는 그런 사실만 없었다면 그녀에게는 특별히 남의 시선을 끌만한 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남자는 계속 오솔길을 따라가 보았다. 그가 공사장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그녀가 숲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 역시 오솔길을 따라 마주 오고 있었는데, 잠시 후 그 공사장 가까이에 이르자 발걸음을 멈추는 것이었다.
남자는 기다렸다. 그녀가 아직 그를 보지 못한 것은 분명했다. 두 남녀는 각각 공사장 양쪽 끝에 서 있었다. 그는 가던 길을 멈추고 그녀 쪽을 향해 서있었다. 그녀는 공사장 쪽으로 몸을 돌리고 서 있었는데, 그녀의 밝은 색 드레스가 어두컴컴한 숲을 배경으로 선명하게 눈에 띄었다.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그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오직 공사장을 향하여 우뚝 서 있는 그녀의 몸이 드리우고 있는 희미한 프로필뿐이었다. 그가 그녀를 그 호텔에 묵고 잇는 다른 손님들 이상으로 더 잘 알고 잇는 것은 아닌데도 이렇게 늦은 시간에 홀로, 겉으로 보기에는 공사장에 매혹되어 서 있는 듯한 그녀를 보게 된 순간, 그로서는 자기가 꼭 그렇게 하고자 한 것은 아니지만, 왠지 생의 가장 은밀한 순간에 도취되어 있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고, 또 비록 그녀를 앞으로 더 잘 알게된다 해도 그런 순간을 맛보기란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단 둘이 서 있지만, 서로 떨어져서 공사장 앞에 서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자는 아직도 자기를 곁눈으로 훔쳐보면서, 시선으로 그녀를 강간하는 사내가 옆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이 사실은 자연히 남자에게 자신의 모습을 그녀에게 드러내 보이고 싶은 욕망을 충동질했다.
그들의 뒷 쪽, 호텔과 그들 사이에 나 있는 국도 위에는 자동차들이 헤드라이트를 환히 밝히고 쉴새없이 달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불빛이 번쩍대는 소란한 대로와 어둡고도 조용한 숲 사이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녀 앞에 나타나기 전 남자는 잠시 기다렸다. 공사장 한쪽 긑에 꼼짝 않고 서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앞으로 나아갈 작정을 하고 발걸음을 옮겼을 적에는 너무 천천히 걸어서 그녀는 그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요란한 자동차 소음이 발자국 소리를 덮었던 것이다. 그는 적절한 때를 계속 기다렸고, 한편 그녀는 그 자리에 누군가가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넋을 잃고 있었다.
그녀의 귀에는 호텔의 종소리도 들리지 않았을까? 아니면 숲 건너편 마을에서 오는 길일까? 총총걸음으로 걸었다면 거기까지 갔다올 수도 있었을 게다. 그녀가 숲 속으로 들어간 지도 족히 십오분은 되었으니까.
한데 그녀는 전혀 급히 달려온 사람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직접 그 마을과 통해있는 길은 이 오솔길이 아니며, 아직 그녀가 알지 못하고, 설사 알고 있다 해도 어두워지면 찾기가 힘든 샛길 하나 밖엔 없었다. 그러니 그녀가 그 마을에까지 갔다왔다고는 거의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다 그녀의 정신을 혼란시킨 것은 그 공동묘지 공사장임에 틀림없었다. 그녀는 그 공사장을 완전히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지 않았던가! 그가 그녀의 바로 옆에 다가섰을 적에 그는 강한 집중력으로 얼굴 모습이 완전히 굳어버린 것을 볼 수 있었다. 바로 그때 그는 그녀가 쳐다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이 공사장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했다. 남자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이때까지 한 번도 그 공사 현장을 본 적이 없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녀가 공사장을 처음 목격하던 바로 그 순간에 운 좋게 현장에 와 있게 된 것일까?
호숫가에 자리잡은 바캉스용 호텔, 가까이에 세우는 그 공동묘지 공사장은 황량했고, 어딘지 모르게 독특한 공허감을 안겨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밝은 색깔의 담벼락 사이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 만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여하간 별다른 것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묘지였다.
"실례합니다." 하고 남자가 말을 걸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며 뒤돌아 그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두 눈을 크게 뜬 채였으나 그녀의 시선은 이미 남자에게로 옮겨져 있었다.
"용서하세요. 저는 이 호텔에 묵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녀는 "그러세요!" 라고 말하며, 기계적으로 소리내어 웃으며 남자 쪽을 향하여 다가왔다.
'놀라게 해드려서 미안합니다." 하고 남자가 말했다. 그리고는 그도 그녀처럼 웃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남자가 그런 식으로 접근해온 데 대하여 두려워하지도, 귀찮아하지도 않는 듯 했다. 오히려 그녀는 그것을 퍽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전에도 공사장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고 남자가 물었다.
"아니, 처음이에요. 지금까지 저는 이 공사장이 다른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참 이상한 생각이지만...." 하고 그녀가 말했다.
"이상한 생각이라니요?"
"끔찍스런 일이에요. 그것도 바캉스용 호텔 바로 옆에다..."
남자는 잠시 망설였다.
"이렇게 여쭈어봐도 좋을지 모르겠는데요...." 하고 남자가 드디어 말을 꺼냈다. "실은 제가 조금 전에 아가씨를 멀리서 뵈었거든요.... 일단 이곳을 지나가셨다가 어째서 다시 이 자리로 되돌아오셨나요?"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제가 이 공사장을 잘못 알고 있었어요.... 잘못 알았던 거죠. 바보같이. 저는 호텔을 곧 떠날 생각이에요."
남자는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보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질 않았다. 그녀는 반대쪽으로 얼굴을 돌린 채 무심한 태도로 걸었다. 물론 그녀는 조금 전만 해도 남자를 쳐다보지 않았었다. 그는 계속 소리내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 호텔에 든 사람들 모두가 이 공사장을 잘 알고 있지요."
그들을 철책이 있는 곳까지 왔다. 호텔과 큰 현관에 달린 외등의 불빛으로 그는 그녀의 얼굴을 좀 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건 흔히 있는 일이죠. 때로는 잘못 보고, 잘못 아는 것도 필요하니까요." 하고 남자가 더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여자 쪽에서 웃었다. 그녀의 웃음은 비웃음이나 당황함, 또는 교태 같은 것을 나타내고 있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녀가 던진 마지막 말과도 관계가 있는 어떤 불확실한 그 무엇을 뜻하는 듯 했다. 하지만 누가 그 내심을 알 수 있었겠는가!
두 사람의 관계는 이런 식으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사흘 전 일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로 그는 단지 식사시간에 멀리서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처음 만난 그 날 밤, 남자는 호텔 옆에 공동묘지 공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녀가 호텔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같은 염려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의 기다림일 지도 몰랐다. 단지 묘지공사가 옆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호텔을 떠날 만큼 그녀가 까다롭게 군다해도 그로서는 불쾌한 생각이 들진 않았다.
기다림이란 모순적인 것이어서, 만일 그것이 충족되어졌다 해도 그 남자에게는 다시 한 번 그녀를 만날 수 잇는 기회는 거의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에는 그녀가 호텔을 떠나리라는 생각을 별로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서로 만나게 된 그 다음날부터 그는 오솔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정오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멀리서 식탁에 앉은 그녀를 볼 수 있었는데, 그가 보기에 그녀는 적어도 외관상으로, 다시 말해서 얼굴표정이나 행동에서는 서둘러 호텔을 떠나겠다는 의사를 표현하는 설렘 같은 것은 나타나 있진 않았다.
그녀에 있어서 가장 괴로운 일이란 단지 그 공동묘지 공사장을 본다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래서 그 전날 밤, 두 사람이 만나게 된 이후로 그녀는 아마도 골짜기 저 너머로는 다시 가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그곳에 되돌아가 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직은 그녀가 호텔을 떠나가지 않았고, 그렇다고 그대로 머물러 있지도 않겠다는 결심을 한 것 같지도 않은 걸 보니 아마도 그녀가 바로 옆에 공동묘지가 있다는 생각을 어느 정도는 극복하기에 이르렀음에는 틀림없었다.
이와 같은 성공, 즉 자신의 불안을 극복했다고 하는 그 보잘 것 없는 승리는 남자의 눈에 그녀가 가진 어떤 평범한 면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두 사람이 만나고 난 다음날, 식탁에 앉은 그녀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 남자 쪽에서 약간 실망을 느낄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실망은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남자는 생각했다.
"어떤 평화로운 장소이건 간에 어디에서나 공동묘지 공사장과 비슷한 그 무엇과 마주치기 마련이라는 것을 그녀가 생각하지 못하다니, 그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야."
하여간 그녀도 그만한 일은 알고 있어야만 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비록 이와 같은 공동묘지 공사장이 흔히 볼 수 있는 종류의 장소는 아니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는 그와 비슷한 성질의 장소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니 그녀가 어떤 곳에서 안식처를 구했다고 해도 곧 그곳에서 도피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진실을 이 기회에 깨달았어야만 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공동묘지 공사장이 옆에 있다는 생각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것은, 곧 그녀가 위의 진실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그녀가 그런 일에 어느 정도 익숙해 있었다는 사실과, 또 그 묘지 공사를 피하여 단지 그런 장소가 옆에 있다는 이유로 자신이 묵고 있던 호텔을 떠나간다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고 부질없는 것임을 그녀 자신도 잘 터득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보여준 태도는 용기였을까, 아니면 인내, 내지는 예민함의 표현이었을까?
그것은 전혀 별다른 어떤 무엇도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일이었다.
그들이 만난 지 이틀이 지나자,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은 그의 욕망은 점점 더 강렬해졌다. 이제 그가 그녀를 볼 수 있게 되는 곳은, 전날 저녁처럼 그녀가 다시 지나가기를 기다리던 그 오솔길에서가 아니고, 오직 식사시간에, 식당에서였다.
식사시간이 되면 그때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극복하게된 데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고, 그 시간이 없었던들 다시는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없었을 것이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그는 그녀가 남아있어 준 그 점에 만족하고 있음을 스스로 시인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만약 그녀가 그 공사장과 비슷한 것들을 보게 됨으로써 그녀의 마음 속에 생긴 동요를 극복할 수 없었더라면, 그녀는 아마도 그들 두 사람의 상봉이 있은 이날까지 살아 있지 못했으리라고 까지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 공동묘지와 같은 종류의 온갖 장소로부터 도망칠 생각만 하다보면, 결국에 가서 그녀는 죽음 그 자체 이외에 또 다른 도피처를 찾을 수는 없었을 것임이 아주 분명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 역시 자기 나름의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만날 수 있을 가능성은 정확히 말해서, 그가 처음으로 그녀를 만나고 난 다음날 식당에서 보게 되었을 때 느낀 약간의 실망과, 또한 그녀가 가진 결점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도 있을 것 같은 그녀 자신의 일면에 달려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처음에 느낀 가벼운 실망이 그에게 오히려 여운을 남겨놓긴 했어도 그것이 가진 성격은 점점 수정을 가해갔다. 그들이 처음 만나고 난 다음날, 그녀는 그가 온종일 그랬으면 하고 바라면서 기다리던 그런 여성이 아님이 밝혀졌으며, 또 그러한 사소한 결점은 오히려 그 남자의 눈에 그녀가 보다 개성 있는 여성으로 돋보이게 되었고, 보다 현실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친근한 사람으로 느끼게 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녀는 점차 그에게 보다 놀라운 존재로 되어가고 있을 뿐이었는데 이처럼 그 두 사람의 만남은, 어느새 그 남자에게는 그의 정신상의 한 사건이 아니라, 그 생애의 한 중대한 사건으로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그는 이 사건을 완벽함을 기대하는 한 까다로운 관객의 눈으로 보진 않았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완벽함은 오직 예술에서만 기대할 수 있을 테니까.

이제 그에겐 그녀를 사귀고 싶다는 욕망이 매일같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그녀가 공동묘지를 받아들이는 용기를 가졌었던 것처럼, 그가 단지 최초에 느낀 실망을 받아들이는 용기를 가지던 그 순간부터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공통적인 실추로부터 생겨난 이상적인 공범관계는 그러한 실망을 충분히 보충해 주고 있었다. 아니, 최초에 느낀 실망 그 자체가 오히려 더 고무적이었다. 그것이 가능성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아무리 빨리 그런 생각을 했어도 소용이 없었다. 계속 그는 전날 저녁과 같은 광경을 다시 보게 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았던가. 그는 매일 아침, 또 매일 오후, 공사장 맞은편에 나 있는 오솔길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가 공사장을 보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도 그는 고집스레 공사장 바로 정면에 놓인 침대의자에 드러누워 그녀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는데, 그것은 마치 그가 한 번 시작된 그 행위가 그때와 똑같은 배경 속에서 다시 전개되는 것을 보는 유일한 기회를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것과도 같았다. 사흘을 연달아 그런 식으로 기다려 보았건만, 나타나지 않았고 오직 그가 그 사흘 동안 그녀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식사시간에, 그것도 먼 거리에서였다.
한 번도 그녀는 그 오솔길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식당의 테이블들은 유리로 덮인 테라스와 연결된 네모 반듯한 홀 안에 놓여 있었고, 한 줄에 일률적으로 식탁 네 개씩 놓여, 합계 여섯 줄로 배치되어 있었다.
테라스는 둥그스름한 모양이었다. 그곳에 놓인 식탁들은 식당 안의 테이블보다 약간 작았는데, 그것들은 동행이 없는 손님들을 위해 남겨둔 것들로, 테라스의 모양과 마찬가지로 동심원을 그리며 놓여 있었다.
문제의 처녀가 앉아 있던 테이블도 바로 그 식탁들 중 하나였다. 그 남자가 앉았던 테이블도 역시 같은 것이었지만, 다행히 그것은 그녀의 맞은편, 호텔에 가까운 쪽에 놓여있었다. 그래서 유리창으로 햇빛을 듬뿍 받고 앉아있는 그녀는 자연히 바깥을, 호텔 앞에 설치된 테니스 코트 쪽을 바라볼 수 있었지만 그 누군가가 자기를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눈치챌 수 없었다.
처녀가 앉은 옆 테이블에는 사내아이를 데리고 혼자 온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 아이는 변덕이 심해서, 어머니는 아이에게 밥을 먹이려고 쉴새 없이 그를 어르거나 아니면 꾸짖곤 했다.
이따금 변덕이 가라앉았을 때에는 그 소년이 혼자서 먹기도 하였다. 그러면 처녀는 그 아이의 방심한 태도를 유심히 바라보곤 했는데, 그럴 때면 남자는 마음 푹 놓고 그녀를 쳐다볼 수 있었다. 그러다가 그 소년이 식탁에서 일어나, 양 테이블 사이에서 놀기 시작하면 처녀는 그 아이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해지는 것이었다.
이럴 때면, 남자는 그녀가 눈치채지 않도록 조심스레 그녀를 관찰했다. 게다가 두 사람이 차지하고 있는 식탁의 위치 관계로 그의 시선엔 그녀만이 들어오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눈만 위로 들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있던 곳에서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제일 먼 거리에서, 두 숙박객 사이로 드러나는 옆얼굴이었다. 그러나 양쪽에 앉은 손님들이 그녀를 보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녀를 마주보게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기들 사이로 지나가는 시선을 눈치챌 순 없었고 오히려 그것을 더한층 보호해줄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보통 사람들이 예감으로 느낄 수 있는 것, 예를 들자면 자기 자신에게 쏠린 시선 같은 것에 그녀가 예민한 편은 못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제 아무리 교묘하게 감추어진 눈길이라 해도 다른 여자 같으면 벌써 눈치챈 지 오래였을 테니까 말이다. 한데 그녀는 그렇지가 못했다.
그렇긴 해도 그는 자기가 그녀를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에게 눈치 채이지 않도록 퍽 신경을 썼다.
그에게 있어서 식사시간은 그녀에 관한 여러 가지를 관찰하게 해주는 기회가 되었다. 예를 들자면 그녀가 어떤 식으로 식사를 하는지를 관찰해 보는 것 등등. 그녀는 왕성한 식욕을 가지고 조심성 있게,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였다. 무심한 태도로, 규칙적으로 게걸스럽게 음식을 집어삼키는 그 육체가 그녀로 하여금 공동묘지 공사장을 보았던 생각을 물리칠 수 있게 하였다는 사실이 오히려 남자를 기쁘게 해주었다.
비록 공동묘지에 대한 불안감이 다름 아닌 그녀 몸 속에 잠겨 있었다 해도 그와 같은 그녀의 건강한 육체와 거부행위와의 결합은 그를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 넣었다. 식사 때마다 그것을 새삼 확인하면서 그는 한순간 똑같은 도취와 똑같은 안도감을 맛보는 것이었다.
그처럼 보기 드문 감수성이 그만큼 풍요하고 자연스런 힘을 갖고 잇다는 것은 하나의 경이였다. 이와 같이 그녀의 불안 그 차제는, 어떤 병적인 처신으로 여겨지기는커녕, 그와 같은 동물적인 정력의 약동과 또한 그녀가 타인에게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그와 같은 탐욕의 가장 귀중한 극한점 같은 것이었다.
끈질기게 탐욕스럽게 식사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식당 안에서, 자기 주위에 일어나는 일들을 진정 육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어느 대상을 정하고 시선을 던졌다가는 그만두고, 곧 이어서 다시 그 대상에 도로 시선을 고정시켰는데, 이번에는 그녀에게 가벼운 근시증세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 같은 일종의 부드러운 눈초리로 그 대상을 샅샅이 탐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 부드러운 시선은 첫 번째 시선을 뒤잇는 제 2의 시선에 불과하다는 것과, 그것이 놀라울 정도로 맑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 시선은, 마치 그녀가 무엇을 주시한 다음에는 즉시 자기가 방금 본 것이 자신에게 미치는 내면적인 효과를 규칙적으로 점검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리고 난 다음 그녀는 시선을 바깥으로, 테니스 코트 쪽으로 옮기는 것이었는데, 그때에는 한참 동안 시선을 방황하게 내버려두는 것이었다. 이렇게 그녀가 보는 것이 어떤 장면이건, 사물이건, 남의 얼굴이건 간에 잠시 후에는 곧 그것에서 눈을 떼고 다시 테니스 코트 쪽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철책이 둘러쳐진 몹시 넓은 사각형 마당 안에는 테니스 코트가 여섯 개 있었는데, 세 개씩 나란히 짝을 짓고 있었다. 그 테니스 코트들은 대개 아침나절 내내, 그리고 그 후 늦게까지도 사용되고 있었다. 때로는 점심시간에도 테니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계속 치는 적도 있었다.
호텔의 식당은 그 테니스 코트 위로 살며시 튀어나와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테니스 치는 사람들이 득점을 알리는 무미건조하고도 기계적인 소리를 거리 관계로 작기는 하여도 퍽 똑똑하게 들을 수 있었다.
모두가 짧은 흰 바지와 반소매 셔츠를 입고 있어서 누가 누군지 거의 구별되진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먼 거리에서는 각 선수들의 특징은 보이지 않고, 끊임없는 공들의 왕복, 번쩍거리는 라켓들, 그리고 겉으로 보아서는 아무런 의미 없는 그들의 몸짓들만이 뒤섞이는 것이었다.
테니스 코트에 쳐진 철책 밖에는 항상 구경꾼들이 모여 있었다. 그 사람들은 거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테니스 경기 중 어느 하나를 눈으로 열심히 쫓고 있었다.
그러나 호텔에서는 오직 전체적인 정경밖엔 볼 수 없었다. 전에는 식사를 하면서 그 남자도 대부분의 호텔 손님들, 특히 동행이 없이 와 있던 손님들처럼 이따금 정구장을 바라보곤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곳을 내다보았지만, 그때까지는 그곳이 그에게는 단지 무의미한 정경으로만 보였는데, 지금에 와서는 정구장을 바라보는 것이 즐거운 일과가 되었다. 왜냐하면 항상 그곳에는 어느 시각에나 일종의 투철한 열정의 훈련에 정신이 빠져 있는 테니스 선수들이 있어서 끊임없이 가슴 조이며 그녀를 기다리는 그의 시간을 메워주었기 때문이다.
식당 안에서 그녀가 그 어린 소년을 바라보지 않을 때 쳐다보는 것은 남자들이었는데, 특히 유리로 된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있는 외로운 사나이들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도 그 남자를 주시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의 테이블은 테라스 저쪽 맨 끝에, 식당의 입구 쪽으로 약간 움푹 들어간 장소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이미 식당의 내부의 희미한 불빛에서는 벗어나 있긴 하여도 이처럼 빛으로 가득 찬 유리 테라스 안에서는 제일 눈에 뜨지 않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남자, 그녀를 애타게 기다리고, 종국에는 그녀와 맺어지도록 운명지어진 <그>가 그녀와 함께 그곳에 있지 않는가. 그래도 그녀는 그가 자기를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과, 자기에게 걸맞는 남자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다른 남자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면 그는 은근히 속으로 기뻐했다. 그것은 그 남성들 중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꼭 들어맞게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에게 그 사실을 알게 해주려면, 그가 테라스 안에 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그녀를 쳐다보며 웃어 보여 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 미소는 전에 공사장 옆에서 서로 만났던 그 날 저녁의 웃음과 똑같은 것이어야 하고, 또 그동안 그 미소가 중단되었던 것은 오직 그것을 밖으로 나타내지 않으려고 한 그의 의지의 결과였지만, 실은 그 웃음은 그들이 만난 날부터 고이지 않는 샘물이 되어 두 사람 사이를 계속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사흘 전, 공동묘지 공사장 근처에서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에 겉으로 보기엔 전혀 무관심한 듯한 그녀의 모습은 한층 그녀를 더 순진하게 보이게 하였을 뿐 아니라, 오직 그만이 느낄 수 있는 일종의 망각 기능을 가지고 그녀의 머리 위에 후광을 씌우는 것 같았다.
그와 같은 관찰은 그에게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더욱이 그 며칠 사이에 그녀에 관해서 행할 수 있었던 관찰 하나 하나는 그에게 안도감을 안겨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놀라운 점도 많았는데, 그것은 그 모든 관찰이 첫날부터, 이런 여자였으면 하고 그가 바라던 영상에 그녀를 접근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그가 바라던 영상 그대로였다. 그녀는 도망치듯 호텔을 떠나지도 않았고, 할 수 있는 한 그가 꿈꾸던 한 여인의 영상에 일치해 가고 있었다.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진 이래로 그가 그녀의 음성을 들은 적은 없었지만, 그 오솔길에서, 공사장을 마주 보며 그녀가 내뱉었던 몇 마디와 그 말들의 어순이 그의 기억에 자주 되살아났다. 그녀가 던진 몇 마디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려는 무익한 시도는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음성과 시선, 그리고 그 말들을 토할 때 자기 옆에 있던 그녀의 몸짓 등이 스며들어 있는 낱말 그대로를 기억해 내려고 오랜 시간을 보낸 것이다.
그가 그런 말을 듣는 행운을 갖게된 곳이 바로 공동묘지 공사장 바로 옆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아닌 다른 남자라도 그 날 저녁에는 그녀에게로 다가가 말을 걸었을 것이 분명했고, 또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그와 똑같은 처신하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로서도, 그 날 저녁, 바로 그 장소에서 누군가가 자기에게 접근하여 말을 걸명 대답을 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내도, 첫날 저녁에 그가 그녀를 기다렸듯이, 그리하여 계속 그 날부터 다시 한번 그녀에게 말을 걸 수 있는 기회를 노리듯이 애타게 그녀를 기다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가 전에 그에게 들려준 자기의 속내이야기를 고백할 수 있는 사나이로서 그보다 더 나은 상대를 만날 수는 없을 것이며, 또 그러한 종류의 고백을 받아들이기에도 그보다 더 적합한 상대는 없을 것이라고 그는 자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만난 지도 다섯 밤, 다섯 낮이 흘렀다. 그녀가 점심을 끝내고 식당을 떠나가도 그는 그녀의 뒤를 따라나가지 않았다. 단지 그는 식사시간에만 그녀를 보는 것이었다. 유리로 된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그녀를 그가 관찰한 지도 이로서 아홉 번째가 된다. 게다가 호텔에 묵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아직 아무도 그녀를 주시해 보는 것 같지 않았다.
그가 식당에 들어서면 그녀는 항상 먼저 와 있었다. 닷새 동안 매 식사 때마다 그녀가 먼저 와 앉아 있었는데, 그것도 항상 혼자서, 늘 같은 테이블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녀는 특별히 사람들의 시선을 끌만한 여성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해서 그녀가 미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행동거지로 보아서도 자기가 미인이라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보이고 싶어하는 여성 같지도 않았다. 호텔에는 그녀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여자들이 많이 와 있었고, 사내들은 그 여자들을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문제의 그녀로 말하자면, 그녀 자신이 이미 한 남성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미인이라고 생각하는 그 여자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미인으로 보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채, 다른 호텔 손님들처럼 그 여자들을 쳐다보면서 그녀들이 미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면 그녀는 어떻게 생겼을까? 키는 크고, 머리는 흑발이었다. 두 눈은 맑았고, 걸음걸이는 약간 느린 편이었으며 몸집은 건장했지만 약간 둔한 편이었다.
그녀는 이 호숫가에 와서 휴가를 보내는 다른 여자들처럼 항상 밝은 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사실 말이지, 그는 첫날, 어둠 속에서 그녀를 본 것을 제외하면 한번도 충분히 가까운 거리에서 똑똑히 그녀를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그녀에 대해 그가 확실히 얘기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눈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녀가 그때 공동묘지에서 그에게로 눈길을 돌렸을 적에 꼭 한번 목격하게 된 그녀의 시선이라고 해야할 지 어쨌든 그것뿐이었다.
그가 잊을 수 없는 것도 바로 그 시선이었다. 그녀를 만나기 이전에, 그처럼 자연스럽게 시선을 놀리는 여성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생각이 잘못된 것 같지는 않았다.
"어째서 처음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담?"
하고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엇 때문에 그녀가 처음 보는 여성이어서는 안될까?

매일 아침과 오후, 그것도 몇 시간 동안 그는 책 한 권을 들고 공동묘지 공사장의 벌판을 산책하러 갔다. 그는 항상 그녀가 오솔길을 따라서, 그녀가 겁을 먹은 그 장소에 다시 찾아와 주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나타나질 않았다.
새로 쌓는 탐의 일부가 올라가고 있었지만 아직도 공사장 내부는 훤히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담의 일부는 그 전부터 있던 것이었다. 한쪽으로는 낡은 담과 그 안에 포함되어 이미 사용되고 있던 공간과, 또 한쪽으로는 새로 쌓는 담은 -- 일꾼들이 기존 담에다 붙여 쌓아올리고 있는 새로운 담 때문에 나날이 확실한 경계가 지어져가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 아직 그 전에 사용되었다는 표시가 전혀 없어서 처녀지로만 보이는 공간이 뚜렷이 구별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담은 네 번째 면에 가서는 그 안쪽으로 쌓아질 것이 분명했지만 앞으로 쌓아질 그 담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도 정확히 표시해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은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흔한 공사장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특수한 용도에 국한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 공동묘지 공사장은 인간이 가진 예견능력의 발달을 퍽 잘 설명해주고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그 능력이 꽤 놀라울 정도로 평온한 분위기에서 활용되고 있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노무자들은 다른 곳에서 토목공사나 미장공사에 종사하는 일꾼들 마냥 아주 태연스럽게 작업을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명랑하고 평온한 모습이었다. 이따금 그들 중 한 사람이 잎담배를 말아서는 돌멩이 위에 앉아서 피우기도 했다. 그때가 점심식사와 함께 갖게되는 그들의 유일한 휴식시간이었다.
어떤 일꾼들은 그 오솔길을 따라 흐르던, 지금은 물이 마른 개울에서 모래와 자갈들을 실어 나르고 있고, 또 다른 일꾼들은 시멘트를 붓고 있었다.
그들 중 몇 명은 세심하게 가느다란 끈들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 몇 명만은 어떤 신비스런 의지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오직 그들만이 이 새로운 건축공사가 어디까지 펼쳐질 것이며, 그것이 어떤 모양일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기존 건축물의 경계선 밖에 있는 초원의 이 지점에서 저쪽 지점으로 밧줄로 줄을 치고 있었다. 그러고 나면 다른 일꾼들이 그 밧줄을 따라서 삽질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초원의 일부분이 이미 돌담과 웅덩이, 그리고 끈들이 만든 모양을 따라 그 안에 갇히게 되었다. 공동묘지는 그 초원의 일부를 영원히 가둬 두려는 담공사에 국한되어 있는 듯 했다. 이처럼 둘러쌓기로 작정된 부분의 초원 넓이는 그때까지 낡은 담이 수용하고 있던 부분과 거의 맞먹었다. 헐린 한 쪽 돌담이 낡은 담의 내부를 훤히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그 일꾼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남자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어서, 일하는 그들을 보아도 전혀 마음이 언짢지가 않았다. 기껏해야 그 자신이 얼마나 무관심한가를 확인할 때야만 입안에 쓴맛이 솟아날 따름이었다.
나이도 나이려니와, 경험도 많았으므로, 그는 이처럼 사소한 일로 마음이 동요되는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아가씨를 만난 이후로, 그 공사가 그에게는 현실에 흔히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이 생각되었기에 더욱 더 그런 동요를 느낄 일은 없었다.
그는 이제 이 공동묘지에 대한 의미를 그녀와 떼어놓고 생각해 볼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그녀를 감동케 한 공동묘지가 아니었던가! 측량을 맡은 기사들은 그의 공범자와 다를 바 없었다. 일꾼들이 내는 삽질 소리는 그의 귀에 노래 소리 마냥 들렸고, 그들이 환기시켜 주는 죽음이라는 낱말은 그녀가 느낀 마음의 동요를 읊는 것 같았다. 표현을 바꾸면 이처럼 평온한 전망에서 그녀가 그렇게 충격을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공동묘지의 광경이 그에게 불쾌감은커녕 오히려 더 큰 열광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그는 그녀가 느낀 동요의 이유를 정확하게 말해줄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이유들을 제 자신을 알 듯이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길게 얘기해 줄 수도 있었다.
물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그 이유들은 모두 그의 마음 속에서, 그날 그날의 삶의 동요 속에서 서서히 잠들고 있다.
하지만 옆에 공동묘지가 있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는 것을 목격하며 큰 충격을 받은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곧, 만약 그녀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 자신이 그녀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면서 그 이유들을 쓸데없이 되새기고 싶어했을 유혹에서 구출되었다는 말과도 통했다.
그리하여 그녀가 공동묘지를 보았다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그곳을 보아야 한다는 의무감마저 갖게 했다. 그는 이처럼 어떤 사물을 다른 사람의 영상으로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행운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그 남자의 정신은 차츰차츰 흐려만 갔다. 명료한 생가고가 명확한 의미의 세계를 등지고, 그는 매일 매일, 서서히 환상의 붉은 숲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남자는, 단지 그 자신에게만 관계가 있다면 그를 굴복시켰을지도 모를 어떤 현실에서 해방되어, 점점 사물들 속에서만 의미를 찾으려 들게 되었다. 모든 것이 그녀에 대한 의미, 내지는 그녀를 위한 의미로 되어갔던 것이다. 그에 대한 그녀의 무관심, 혹은 그녀의 사물에 대한 무관심의 의미로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의 마음 속에 그녀가 살아가는 낮과 밤이 스며들어와, 그가 그런 식으로 그녀가 낮과 밤을 보내리라고 상상하는 모양으로 변형되어 그에게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틀 전부터, 그가 식당으로 들어가면, 그녀는 아직 식사를 시작하진 않았지만 벌써 자기 테이블에 와 앉아 있으면서도, 기계적으로 그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분명하게 그에게로 시선을 보내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무심하게 분명치 않은 시선을 던지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아직 그를 알아본 것 같지는 않다고 그는 판단했다. 정말 그녀가 전혀 그를 알아보질 못한 것일까? 그 어두운 오솔길에서 그녀가 그의 얼굴을 잘 보지 못한 것이 아닐까? 그녀는 그 만남에 대한 기억이나마 간직하고 있을까?
퍽 기이한 일이지만, 그는 어쩐지 그녀가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설사 그녀가 그를 알아보게 되더라도 다른 기회였으면 더 좋겠다고 생각되었다. 이처럼 그녀는 그에게 진취적인 생각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가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기회에 그녀가 자기를 알아봐 주었으면 했다. 그리고 어차피 그녀가 조만간 그를 알아보게끔 되어 있긴 하지만, 그 필연적인 사건이 이루어지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오직 자기에게만 달려 있는 것 같이 생각되어 불안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는 여느 때의 그 태만한 버릇들을 하나씩 버리고 있었다.
식당에 들어설 때마다 그는 그 사이에 그녀가 호텔을 떠나지 않았을까 하고 겁이 났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녀가 제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앞으로 한동안은 머물게 되나보다 하고 안심이 되는 것이었다. 그녀가 도착한 것은 두 사람이 만나기 며칠 전이었으니까. 그래도 불안할 뿐이었다. 하긴 그녀에게 접근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겠는가?

어떤 날 밤에는 그녀가 어느 때나 떠날 수 있다는 문제가 특별한 확신을 가지고 그에게 엄습해왔다. 그는 그녀가 떠나면서 내세울 수 있을 온갖 이유들을 생각해 보았다. 거기에는 공동묘지가 바로 옆에 있다는 이유도 있고, 또 그것이 주는 불쾌감을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난처함도 있을 수 있었다.
그럴 때면 남자는 아직도 그녀에게 접근하지 않았고, 결정을 내리지 못한 데서 맛볼 수 있는 엉큼한 쾌락을 이처럼 계속 즐기고 있는 자기 자신을 책망했다. 그에게는 그 순간을 늦출 하찮은 구실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항상 그 순간을 나중으로 미루는 것만이 가능할 뿐이었다.
그 날 밤 그 일이 생각나면 그는 불안했다. 이러다가는 그 처녀를 영원히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그러면 그 자신의 고독한 환영이 어둠 속에서 떠올랐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완전한 포기상태, 즉 그가 택하였을는지도 모를 철저한 포기상태에 다시 빠지게 됨으로써, 그에게는 혹시 그 자신을 증오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마저 들었다. 그러면 그는 그 두려움이 오히려 명확하게 전개되기를 바라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의 심정을 농락하는 편이었다.
바로 이것이 아마도 그가 공동묘지를 보고도 느끼지 못하던 두려움에의 다른 형태의 귀결이 아니었을까? 그렇다. 밤중에 느끼는 이와 같은 불안은, 그녀가 공동묘지를 마주보며 느낄 수밖에 없었던 두려움과 같은 성질의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안정을 되찾았다. 그녀는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떠날 수 없을 것이고, 또 그 일이란 더 이상은 지연되지 않고 일어날 것이며, 또 그가 방금 느낀 불안은 바로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하나의 신호라고 그는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날 밤도 그는 안정을 얻긴 했지만, 여느 때보다 훨씬 더 시간이 걸려서였다.

끽연실에서, 그녀에게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그가 자리를 잡게된 것은 그 이튿날 점심식사 후였다. 보통 그녀는 식사가 끝나면 꾸물거리는 일 없이 자기 방으로 돌아가던가, 점심이 끝나면 곧장 외출하러 나가곤 했다. 그 날은 웬일인지 그녀가 끽연실에 남아있었다. 혹시 심심해서 그랬을까?
그녀는 그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그는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목덜미 아래로 느슨하게 묶여 있는 것을 주시했다. 그들이 만난 이후, 처음으로 이렇게 그녀 가까이에 있어보는 것이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는 그가 손을 내밀면 닿을 수 있을 거리에 있었지만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설 생각은 하질 못했다.
그렇지만 지금도 그가 마음만 먹으면 자리에서 일어나, 끽연실을 나오면서 안락의자의 팔걸이에 옮겨져 있는 그녀의 팔꿈치를 슬그머니 건드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짓은 하질 않았다. 그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유달리 그 날에만 그녀가 머리모양을 아무렇게나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녀는 항상 머리 손질을 소홀히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그녀의 머리 단은 곧 풀어질 듯이 느슨히 묶여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머리를 조금만 움직여도 그 머리채도 따라 움직였고, 일부 감추어진 그녀의 목덜미를 애무하듯 어루만지는 것이었다.
어떤 순간, 그녀가 앞으로 몸을 숙이면 머리카락들이 위로 치켜 올랐다. 그러면 그는 그녀의 블라우스 깃이 목에 스쳐 약간 때라 묻어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광경은 별안간 그에게 큰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목에 스쳐 때가 묻고 구겨진 깃을 본 사실, 머리카락에 반쯤 가려진 그 목덜미, 블라우스, 그리고 그 옷을 더럽히고 있는 머리카락과 그녀의 목, 그리고 오직 자기 혼자만이 보고 있고, 그녀는 그가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그녀보다 그가 더 잘 보고 있는 것 등등....., 이 모든 것은 공동묘지를 마주 보면서 그들이 처음 만나게 되었던 그 날 저녁에 그가 경험한 상황을 생생하게 재현시켜 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그들 두 사람이 그녀가 소유하고 있는 그 육체 속에서 같이 살고 있으나, 그녀가 아직도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같이도 생각되었다.
그 날 밤, 그 순간의 추억은 그의 내부에 욕망 비슷한 형태로 떠올랐다. 그 속에서 그는 단지 그녀에 대해서 상상하고 있던 사실과 부합되는 어떤 형태의 태만의 표적만을 본 것이 아니었다.
이와 같은 자세한 특징은 그때까지 그녀가 갖지 못했었던 어떤 임박한 현실성을 그녀에게 부여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로서는 그 현실성에 대한 생각에서 거의 빠져나올 수 없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첫날, 그들이 어두운 오솔길에서 단둘이 있게 된 그 첫 순간부터 그가 그녀에게 욕망을 품게된 것은 틀림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욕망이 너무도 격렬하게 불타오르기에, 그녀만은 그녀 내부에서 일고 있는 생명의 불꽃을 보다 은근히 피워주기를 그는 바라고 있었다.
그래야, 그때가 오면, 그가 보다 완전히 그녀를 기습하고, 보다 열광적으로 그녀를 다루고, 지금까지 그가 본 여성들 중에서 최고로 나태로움에 빠진 그 육체를 보다 철저히 독점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 날 밤, 그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는 욕망에 사로잡힌 자신의 육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보고 있노라니, 그의 육체가 마치 그녀에게 이미 속해 있는 것을 보는 듯 했고, 그의 품안에서 그녀의 가슴이 녹아들고 있는 듯 하였다.
이렇게 그는 욕망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었다. 그의 육체는 그 나름대로의 의지와 언어를 갖추고 있어서, 그녀를 간절히 원한다는 말을 조용히 토하고 있었다. 그가 입으로 내뱉는 말보다 훨씬 더 침착하게, 그리하여 격한 욕망의 충동이 가라앉음과 동시에 그가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일찍이 느껴보지 못한 자기 자신과의 일체감이었다.
그로 말하면 다른 여성들에게서 그런 감정을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정도의 숙맥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기억 속에서, 이번에 느낀 감동과 견줄 수 있을 만한 것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충만한 욕망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 행복하기만 했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오늘날 그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몹시 빈약한 생의 경험만을 간직하고 잇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어도 별로 불쾌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 날 밤도 그가 그네에게로 다가가서 얘기를 걸 결심을 하기에 충분한 여건이 되질 못했다. 호텔 생활이 그럴 기회를 거의 주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더구나 그에게는 아직도 그녀에게 말을 걸 결심이 되어있질 않았었다. 그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평상시의 그의 무기력함과는 성질이 달랐다. 그것은 마치 그가 별안간 인내의 미약(媚藥), 아니 인내의 쾌감을 느긋이 맛보고 있는 것과도 같았다.
점심식사가 끝나면 호텔 손님들의 태반이 끽연실에 모여서 오후 한나절을 보내곤 했다. 며칠 전부터 그녀도 그곳에 와서 잠깐 시간을 보내는 습관을 갖게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 두 사람에게 있어서 그 장소는 남자가 그녀에게 접근할 수 있기에 적합한 곳으로 보여지지는 않았다. 언제고 그녀를 놓치고 말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무릅쓰면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녀에게로 접근하여,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주목하게 될 위험을 야기할 생각은 그에겐 추호도 없었다.
호텔 안에서는 아직 누구도 외로이 그들 속에 섞여 있는 그 처녀를 주의 깊게 보는 것 같진 않았다. 아마도 그녀의 허술한 옷차림과 행동거리를 제외한다면, 무심히 던지는 뭇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들일 만한 점이라곤 전혀 없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그녀 편에서 일체 사람 접촉을 피하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도 전혀 없었다. 그녀가 취하는 퍽 알쏭달쏭한 태도는 그녀가 오직 그에게만 보여주는 은밀한 매력의 성격을 띠면서 완전히 그의 마음을 안심시켜 주고 있었다.
그녀가 무심한 시선을 던지는 그 사람들의 눈에 그녀가 별로 띄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실이 그로 하여금 수상쩍은 생각을 품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은밀한 그녀의 매력 속에는 오묘한 그 무엇이 담겨 있었다. 호텔 손님들은 그녀가 있는지 없는지 그 존재도 알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가 그녀를 알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처럼 그녀에게는 누구의 눈에도 드러나지 않는 특징이 있어서,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의 눈에 뜨지 않는 그녀의 요술에 걸려들어 도저히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묘하게 얽혀든 공범관계로 그녀와 떼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아직도 그들 두 사람의 관계가 별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볼 때, 공범관계라는 말 자체가 놀랍기 짝이 없지 않은가!
그렇다. 그녀를 잃는 위험까지 무릅쓰고까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가 그녀에게 접근하여 말을 걸지는 않았다.
장소도 장소려니와, 남자가 생각하기에 그들의 만남에 적합한 순간도 드물었던 것이다.
현재로서는 한밤중 몇 시간이 가장 좋은 시간으로 여겨졌다. 호텔이 완전히 조용해진 새벽 몇 시간 동안,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열린 창문으로 들어와 아직도 밤이라는 사실을 더 확실하게 해주는 그 몇 시간 동안이, 아직도 그가 규칙적으로 오전 한 때와 오후 한 때를 오솔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지만, 여느 때보다 인기척이 제일 적은 깊은 밤 시간이 가장 알맞은 시간인 것 같았다.
그런 시간이 오면, 남자는 설레는 마음으로 눈을 번쩍 뜨고는, 분명히 한밤중이라는 것을 인식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반 벌거숭이인 채로 어둠 속에 우뚝 서서, 그녀의 방안으로 들어가 "실례합니다, 저는 지난번에 뵌 적 있는 이 호텔 투숙객인데요, 누군지 기억하실 테죠...." 하고 그녀에게 말해볼 수는 없을까 하고 안타까워하곤 했었다.
두 사람의 두 번째 만남을 갈라놓고 있는 장애물들, 그에게는 꼭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믿게 되는 여러 가지 상상력에 기인하는 것이어서 더욱 더 극복하기 힘든 온갖 상상적인 아니 현실적인 장애물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고 그녀와의 성공적인 해후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히려 그가 그 만남을 생각하고, 자문하기를 중단하게 되면, 매일 매일 그 자신이 그 해후의 시간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을 갖게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초조하게 군다든가, 욕망에 못 이겨 한밤중에 성황하는 몽상에 자신을 떠맡기기라도 하는 날이면, 지금까지 애써 쌓아올린, 항거할 수 없는 필연의 진행을 흩뜨려놓고 말리라는 것을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은 항상 그가 그런 생각을 그만두었을 때뿐이었다.
그 일의 진행과 더불어, 이상하게도 그의 생의 종말도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이 생각되었다. 지난 두 주일 동안, 그가 거듭 생각한 것인데, 그 종말은 마치 아득한 동시에, 보다 확실한 지불기한처럼 여겨지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기한은 그가 그녀를 잘 알게될 시기와 일치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이 가까워오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생의 종말이 가까웠다는 것은 실감나지 않는 일이었다.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그 순간, 그가 자신의 온갖 의무와 걱정 근심에서 해방된 그런 상태로 오래 살기를 바라는 것과 같았다.
그의 미래는 넓은 바다처럼 터져 있었다. 그것은 보통 죽음의 순간, 아니면 풀리지 않는 소망에의 의무에서조차도 해방되어 나타나는 것이었다. 사실 우리는 죽음에 의해 혹은 타인에 의해 생명을 잃어야 할 경우 소망 따위가 무슨 소용 있겠는가?
그러므로 겉으로 보기엔 그는 절망에 몸을 맡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어서 그의 앞에는 모든 종말 중에서도 맨 나중의 죽음 밖에는 남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으리라.
이미 그는 스스로 외로움을 달래며, 그 호텔에서 사귄 모든 사람들을 의식적으로 피했고, 식사를 할 때도 꿈속에 잠겨있는 듯했다. 그리고 온종일 공동묘지 공사장을 지켜보며 지냈고, 그의 얼굴에는 치명적인 번뇌의 주름살이 선을 긋고 있었다.
그럼 이것도 그녀와 죽음이 친밀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란 말인가?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이처럼 그가 그녀에게 도달하는 순간이 그에게는 죽음의 진정한 종착역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그녀에게 도달하는 순간은 미래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이 보였다.
그는 여전히 그녀가 자기를 주시하였는지 아닌지 알지 못한 채였다. 그녀의 태도에서는 그를 인식한 것 같이 생각해도 좋을만한 것이라곤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같은 불확실성 때문에 신경을 쓸 사람은 또한 아니었다.
그는 그녀가 자기를 원하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는 특히 공동묘지 공사장 앞에서 불안감을 느끼게 된 이래로, 자기를 원하는 남자면 누구이건 거의 무조건 원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기에 그 점에 있어서 그는 걱정할 것은 없었다.
그는 그 처녀가 자기 자신에게로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기 위해 무슨 짓을 할 수도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또 자기의 상대를 골라잡을 줄 아는 여자도 못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 두려움 마냥 폭발적이고 수동적이며, 또 거역할 수 없는 감정들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았다.
저녁에 그가 자기 방으로 돌아오면, 이제는 그의 풍요한 하루가 지나간 것 같이 생각되었다. 매일 밤, 그는 그녀의 무엇인가를 얻어 가지고 제 방으로 돌아갔고, 밤늦게까지 공상에 잠겨 잠을 이루질 못했다.
매일 밤, 그는 때로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 아니면 벌겋게 밝아오는 새벽 하늘, 또는 침대 위에서 허우적거리는 텅 빈 자신의 손이 한 계기가 되면서 다시금 그녀를 상상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는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제는 책도 읽게되질 않았다. 가지고 온 책들도 펴보지 않게 되었다. 단 일분도, 현재 그 자신의 신상에 일어나고 있는 것, 즉 그녀와의 해후 이외의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다른 일이라는 것이 제아무리 훌륭하고 고상하며 중대하다해도 그에게는 추호도 관심거리가 되질 못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이따금 그 자신도 양심의 가책을 받긴 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어떤 만족감을 수반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그녀를 만난 것은 어느 날 저녁, 그것도 우연한 기회였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공동묘지 공사장 앞에서 몹시 소박하게 그녀 자신의 심적 갈등을 강렬하게 표현하던 그 순간과 그 자신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가 사랑할 만하다고 판단한 순진성 때문에, 그녀의 내적 드라마는 어떤 다른 갈등보다 압도적인 것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그의 눈에 비친 그녀의 표현은 여태까지 발음되어온 그 어떤 언어표현보다도 더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그도 어쩔 수 없었다. 더구나 그 자신이 이 드라마를 위해서 다른 모든 드라마를 등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가 맛본 쾌감은 또한 통쾌한 것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는 내심으로 그때까지 자신이 타인의 드라마에 관심을 가질 때 갖게 된 만족감 역시 그 자신의 생활에 심적 갈등이 결여되어 있음과 연관이 있을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그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라곤 별로 없고, 아주 사소한 일들밖엔 모르지만, 그것은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를 알기엔 충분한 것들이었다. 그녀는 호텔 바로 옆에 공동묘지가 있다는, 그로서는 말할 수 없던 얘기를 간단하게 언급하지 않았던가. 사실 모든 얘기는 간단명료했었다. 그래서 남자는 두 사람이 만날 때 서로 주고받게 될 몇 마디는, 그들의 몸짓이나, 그들의 시선이 지닌 중요성에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일은 그가 생각한대로 되어갔다.
이윽고 그녀가 다시 그 오솔길을 지나갔던 것이다.
때는 정오가 가까웠었다. 아직도 일꾼들은 일터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철책의 문을 열고 그 남자가 열흘 전부터 매일같이 아침저녁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그 오솔길로 들어섰다. 그녀가 나타나자, 그는 그녀가 꼭 돌아오리라는 것을 결코 의심하지 않은 자신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첫날부터 그는 이처럼 호텔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공동묘지 공사장을 그녀가 한번 더 보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지 못하리라는 것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여러 가지 역설적인 잡념도 많았지만, 오솔길에 그녀가 나타나기를 끝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그녀가 그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동안 그는 긴 침대용 의자에 누운 채로 있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그의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는 것이었다. 그녀는 일꾼들을 바라다 볼 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그녀의 모습은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려고 애쓰는 사람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녀의 시선은 두 사람이 만난 첫날밤의 그것과는 달랐는데, 그때처럼 고정되어 있지는 않았으나, 그때보다는 좀더 긴장되고, 자제하는 눈초리였다.
골짜기마다 화창한 날씨였다. 일꾼들은 햇빛을 받으며 담을 쌓아올리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 중 몇 사람은 셔츠를 벗었고, 웃통을 벗은 채로 모래를 운반하고 있었다.
공사는 많이 진척되었다. 돌담의 기초공사는 이미 며칠 전에 끝났고, 지금은 그 담을 완성하고, 좀더 높이 쌓을 수 있도록 단단하게 고정시키는 일을 하고 있었다. 기초공사의 가는 밧줄을 치던 사람들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계속 일을 진행하고 있군요." 하고 그 처녀가 말했다.
그 날, 그녀 목소리에는 비통한 여운이 있었다. 남자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고, 그녀처럼 공동묘지의 공사장을 바라고만 있었다. 초원의 한 부분이 새로 담으로 둘러싸여 이제 보이질 않았다.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었던 초원이 점점 없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밧줄로 줄을 치던 사람들이 사라진 걸 보면, 공사는 더 이상 해결해야 할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덤프트럭으로 적어도 스무 번은 흙을 실어 날랐겠어요." 하고 그녀가 계속 말했다.
이윽고 남자는 공동묘지 쪽에서 눈을 떼며 그녀 쪽으로 몸을 돌리고 말했다.
"담들이 너무 놓아져서 이젠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되었군요."
처녀는 무언가를 생각해 내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그녀가 공동묘지에 관한 일을 이제 잊어가고 있음을 그는 알아차렸다.
그가 그녀에 대한 추억을 더듬듯이 그녀 역시 그에 대한 기억을 명확히 찾아내려고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가 그녀를 쳐다보고 미소지었다. 그랬더니 그녀도 미소지어 보이며,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정말 그렇군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그녀는 지나친 주의력을 가지고 계속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역시 미소지으며 그녀를 쳐다보곤 있었지만, 그녀처럼 직접적인 강렬한 시선으로 쳐다보진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에게 어울리는 역할이 아닐 뿐 아니라, 설사 그렇게 하라고 해도 해낼 수도 없었을 것이었다.
그는 자기가 그녀를 완전히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차츰 깨달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약간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음이 틀림없을 테니까, 그녀는 그의 창백한 모습을 주시했을 것이리라.
연방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그녀는 어째서 그가 그처럼 똑똑히 자기를 기억하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다시 호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녀는 오솔길 이상을 벗어나진 않았다. 분명히 그녀는 무엇 때문에 자기가 그곳에 왔는지를 잊고 있었고, 공동묘지의 일도 그녀의 관심에서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남자는 그녀에게로 달려가 그녀를 붙들고, 이 공동묘지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며, 기쁜 일이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런 짓은 하질 않았다. 그로서는 더 이상 좀 더 거기에 있어달라고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쫓아갈 수도 없었다. 이러한 무력함 역시 그에게는 야릇한 만족감을 가져다 주었다. 심장이 고동칠 때마다 그의 전신은 욕망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 날부터 그들은 서로 인사를 하게 되었다.
그가 식당에 들어가면, 그녀는 약간 고개를 숙이면서 미소짓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그의 테이블로 오는 것은 아니었고, 그 역시 그녀의 식탁으로 가는 것도 아니었다.
두 번째로 그들이 만난 이후 사흘 동안, 아마도 그녀는 다섯 번이나 이렇게 아는 척을 해 보였을 것이다. 그녀의 미소는 항상 똑같지는 않았다. 처음으로 그가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본 것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식당에서였는데, 그녀가 그 오솔길을 지나가고 난 몇 시간 후였다. 그때도 그녀는 그에게 웃어 보였는데, 그것은 수줍은 미소였다. 좀 더 크게 웃으려고 마음먹었지만 안나오는 웃음. 그래서 그 웃음은 그 날로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 첫 번째 미소는 그 남자의 마음에 들려고 애쓰는 것과 동시에 약간 어색하긴 해도 그의 마음을 떠보는 웃음이었음을 그는 확신하였다. 그녀는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나기 시작한 것에 대해서 아직도 확신을 얻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저녁, 끽연실 입구에서 그녀가 그에게 던진 미소는 남자가 보기에 그녀의 의혹이 더 한층 증대하였다는 사실과, 그것이 거의 당황에 가까울 정도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그에게 건방지게 처신하여 그녀로 하여금 더욱 더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가 그녀에게 접근하기에 이처럼 뜸을 들이는 것이 지난날의 그것과는 성질이 다르다는 것을 그녀가 알고 있는 이상, 그도 자연히 수법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그녀 쪽에서 견디다 못해 어느 정도의 인내를 보이면서 그를 따라오게끔 하려고 일부러 들이는 망설임일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와 같은 인내심을 발휘하지 않을 지도 모를 일이긴 하였다. 그녀는 일을 급하게 서두는 편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 그가 어떤 짓을 하든 수 사람의 최후의 만남은 더 이상 지연될 수는 없을 것이었다.

두 번째로 그들이 서로 만난 그 다음날, 그가 식당으로 들어가자 그녀가 또 미소를 지었다. 그때 그는 즉시 두 사람의 사이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그녀가 분명히 알고 있음을 직감했다. 비록 그녀가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해도 그녀의 태도는 그가 바라던 것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 날의 그녀 태도는 마치 어떻게 춤을 추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여자와도 같았다. 그녀는 텅 빈 홀 안에 기다리고 섰는데, 남자는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고 아직 춤추는 방법에 대한 어떤 지시를 내리지 않은 채로 조용히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날도, 그 다음날도 그는 그녀에게 접근하려 들지 않았고, 이제는 더 이상 오솔길에서 그녀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식사 중에는 그녀는 약간 걱정스런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대개는 활기에 차있는 편이었다. 그녀는 그가 자기에 어울리는 남자라는 것을 의심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어떤 억눌린 안타까움에 괴로웠던지, 그녀는 퍽 자연스러우면서도 노골적인 시선으로 그를 쏘아보는 것이었다.
바로 그 날, 그는 호텔의 다른 남자들도 그녀를 주목하기 시작했음을 확인했다.
사흘째 되던 날, 그녀의 미소는 엄숙하였으며, 약간 꾸며서 짓는 웃음이었다. 그것을 보자, 그녀도 그의 기다림을 표현하는 완만한 저력과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미래의 개화(開花)를 이해했으므로 그녀 스스로가 그가 지난 침묵의 공범자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생각을 그로서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미소는 그가 어떤 찬동하는 표시도 해 보이질 않자 즉시 그녀의 얼굴 위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일종의 패배를 알려주었을지도 모를 그 식사시간이 끝날 무렵, 그는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진지하고도 집요한 태도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앞으로는 더 이상 그에게 미소를 던져봐도 아무 소용이 없으며, 그의 마음에 들려고 애써봐도 헛된 수고임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즉 두 사람의 만남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느 기간에만 의존하고 있어서, 그 기간의 흐름을 중단시킨다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때가 되기 전에 시간의 흐름을 중단시킨다는 것은 그녀가 방금 당한 패배보다 더 심각한 패배를 초래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미소짓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녀는 때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으니. 이제, 둘 다 자유로운 몸으로 이 여름 휴가용 호텔에 와 있는 그들이, 혹시 사랑이 죽음이라는 형벌을 받게되는 경우 두 사람이 똑같이 상대방을 저주하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하게까지 된 것이었다.
이제 그녀는 오직 그에게만 흥미를 가진 것이 분명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기의 관심을 끌던 그 아이도 더 이상 쳐다보질 않았다. 그리고 그 남자 이외에는 누구도 자신의 관심을 끌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추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그녀가 아직도 바라볼 수 있던 것은 오직 테니스 코트 밖엔 없었지만 그것도 주의 깊게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방 번호를 알아냈다. 그녀는 그의 바로 아래층, 그 자신의 방과는 정 반대편의 방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호텔 밖으로 나와서 그 뒤쪽으로 돌지 않으면 그녀의 방 창문을 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가 그녀의 방을 알게된 바로 그 날 밤에 이렇게 해 보았다. 그는 그 창이 어두워질 때까지 밖에서 지켜보았는데, 그녀가 상당히 늦게 잠을 잔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몹시 초조해 하고 있으며, 여느 때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음을 즉시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두 번째로 만난 이후 사흘 동안, 남자는 공동묘지 옆의 그 장소에 가지 않았다. 가볼 생각조차 하질 않았다. 그 공동묘지가 효용가치가 있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과거 속에 파묻혀 버린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는 단 한 번도 그 오솔길에 다시 나가보지 않았으며, 자기를 찾으려고 그녀가 거기에 갔었는지 어떤지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점심을 끝내면 그는 호텔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골짜기를 찾아가곤 하였다. 산책을 하면서 그는 불안을 느끼지 않고 그녀를 생각할 수 있었다. 며칠 사이에 호수 위로 뻗어있는 산 위에는 눈이 조금 내렸었다.
이제 그들의 기다림도 종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사실을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단지 그들이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그것이 어떤 식으로 끝날 것인가, 또 언제 어디서 그들이 거기에서 빠져나오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거의 잠을 이루질 못했다. 그래서 몹시 수척해졌고, 거울에다 자신을 비쳐보았을 때는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듯했다. 전에는 자신이 미남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그의 눈 밑에는, 기다림이 남긴 큼직한 퍼런 자국이 똑똑히 보였다.

그 기다림이 종말을 고한 것은 그 날로부터 나흘이 지난 후였다.
그 날은 호수를 둘러싼 골짜기에도 몹시 더웠다. 전날 저녁 그녀는 평상시와는 다른 머리모양과 옷차림을 하고 식당에 나타났었다. 머리는 내려 풀려 있었다.
그는 그녀가 자기 방안에서 외로이, 참지 못할 정도로 초조해져서 그렇게 머리를 풀 생각을 해냈고, 또 그것도 안심이 되질 않았는지 거의 대담한 몸치장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리라고 상상해보았다. 그 날 그녀는 빨강 색의 새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이와 같이 절박한 사건에 걸맞은 빛깔과 차림새를 하고서 그녀는 그의 바로 정면에 와서 우뚝 섰다. 그것은 바로 두 사람의 초조함, 그것의 폭발, 혹은 두 사람의 승리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는 두 사람의 기다림에 종말이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한데 아직은 이른 시간이었다. 남자는 저녁식사를 끝내고 테니스 코트를 지나, 호숫가를 둘러싸고 있는 초원 속을 거닐기 시작했다.
별안간 내일까지는 살아있을 시간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시간은 희한할 정도로 연장되는 듯 하였다. 바로 내일 일어날 일인데도 말이다. 이 기한은 아주 먼 옛날의 시간까지 온통 삼켜버리는 것같이도 생각되었다.
그가 걸어가던 길에는 마을들과 산, 그리고 초원의 광활한 경치가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그 공동묘지 쪽을 바라보았다. 일꾼들은 이미 하루의 일을 마무리하고 있었고, 그 오솔길에는 오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젠 네 번째 돌담이 똑같은 높이로 올라가고 있어서, 앞으로 남은 일은 담들을 하얗게 칠하는 것뿐이었다. 이제 완전히 끝난 공사나 다름이 없었다.
일체의 한정된 기한을 멀리 밀어내고 싶은 듯이 그는 계속 걸었다. 날이 저물었다. 하지만 그 호텔로 돌아가기엔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그는 온갖 이성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살아왔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점심을 끝내자, 그녀는 끽연실로 와서 그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전히 그녀는 머리를 풀은 채였고, 전날 밤에 입었던 그 빨간 드레스를 계속 입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바로 정면에 앉았기 때문에 둘은 서로 마주 바라보게 되었다.
그때 그녀가 먼저 나즈막하고도 경박한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것은 이윽고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않고 이 세상의 모든 공동묘지의 돌담들을 따라 걸을 수 있게된 한 여성의 우월감에 찬 웃음소리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 속에는 억누르고 싶었지만 압도적인 대담성이 강요하는 아연실색할 정도의 속된 면이 있었다. 그때까지 그녀가 내보였던 미소는 지금의 이 웃음소리와는 전혀 공통점이 없었다. 그러자 그도 그 비슷한 웃음소리로 그녀에게 응답해주었다.
그들 옆에 있던 호텔 손님들은 이 두 사람이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니면서 서로 보고 웃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약간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들 옆에 있던 사람들은 말문을 닫았다.
남자는 끽연실 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고, 국도 위로는 강렬한 햇빛이 수직으로 내리쬐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끽연실 문을 나와 국도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걸었다. 그 날 아침부터 행상인들이 소란스런 외침과 더불어 빨간 텐트들이 쳐지고 축제가 무르익어 가던 마을도 지나갔다.
많은 스탠드가 세워졌고, 광장의 나무그늘 아래서는 사람들이 고막이 터질 듯 시끄러운 전축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다. 사격장 앞에는 몇몇 젊은이들이 서서 석고로 만든 비둘기들에게 화살을 겨누고 있었다. 구름같이 모여든 조무래기들이 무대 위로 올라갈 때 딛게 되어있는 발판 앞 도로 위에 그대로 열려있는 캬라멜 캔디가 수북히 든 가방들을 부러운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호텔에서 백 미터쯤 떨어져 있던 그 마을의 축제 장소를 지나갔을 때 비로소 그는 그녀의 발자국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뒤로 돌아다보지 않고 그대로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소리를 내지 않고 웃었다. 그녀가 그를 따라오지 않을 수 없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계속 걸었고, 그녀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양 계속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가 꽤 오랫동안 그녀를 걷게 했다. 그는 빠른 속도로 걸었다. 그래서 그녀가 그 뒤를 따라 걷기가 몹시 힘들었음에 틀림없었다. 이따금 그의 뒤에서 재빠르게 다가오는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럴수록 그는 더 빨리 걸었다. 그녀가 따라오기를 단념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면 가끔 뒤로 돌아다보았지만 잠시도 그는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이따금 그녀는 도로 위에 꼼짝 않고 서서 그가 멀어져 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그것은 별로 상관없는 일이었다. 일단 그녀가 그의 뒤를 따라오기를 단념한 후에는 어디로 그녀가 갈 것인지를 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바로 그가 그녀를 데리고 가겠다고 생각한 길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았던가. 그렇게 멈춰섬으로 해서, 그녀는 두 사람이 만날 장소가 바로 거기임을 스스로 알아차렸음을 그에게 알려주는 것이었다. 다시 한 번 그가 돌아다보았을 때는 이미 그녀는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돌아갔다고 생각했다. 할 수 없이 그도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뒤돌아 섰다.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호숫가에는 갈대 숲으로 거의 완전히 가려진 후미진 장소가 있었다. 호수 물이 지면 위로 스며 올라오고 있어서 그곳에 가려면 신발을 벗어야만 했다. 지면은 서로 뒤엉킨 갈대 뿌리로 덮여 있었고, 그 썩은 땅 위에는 물을 듬뿍 머금은 또 다른 갈대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호수에 가려면, 남자는 갈대 덤불 속을 헤쳐서 길을 내야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꺾어졌거나 굽혀진 채 아직 펴지지 않은 몇몇 갈대들이 표시해 주고 있는 방금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있는 곳을 따라가야만 했다.
그가 갈대밭 한가운데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는 자기 키와 거의 같을 정도로 큰 갈대사이로 두 종류의 다른 식물이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중 하나는 갈대 크기의 절반 정도였는데, 그 꽃들의 노란색은 다른 꽃들이 가진 타오르는 듯한 진보라 빛을 배경으로 하여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먹물을 풀어놓은 것 같은 색깔의 꽃들을 피운 침침한 갈대들도 그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것들 위로 그 노란 꽃들이 유황을 뿌린 듯이 빛을 발하고 있었으니, 노란 꽃들은 단단한 나무줄기에 달려 있어서, 다른 꽃들과는 달리 호수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에는 미동도 하질 않았다. 그것은 마치 걱정스러운 투시력을 잠재하고 있는 그것들이 혹시나 자기들이 다시 권태로움에 빠지지나 않을까, 자기들을 태어나게 해 준, 감미로운 그들의 요람인 이 호수에 물이 말라버리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워 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 노란 꽃 옆에는, 털이 보송보송한 가는 줄기에 보라 빛 꽃들이 달려 있었는데, 보다 흔치 않고, 보다 유연한 그 꽃들은 미풍이 살랑대도 몸을 숙이며 하늘거리는 암꽃들이었다. 그런데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우면서도, 항상 양보할 태세가 되어 있는 그 노란 꽃들의 광채가 빨려 들어가 죽어버리는 곳은 바로 그 보라색 꽃들 속이었다.
꽃들이 보여주는 이와 같은 자연의 섭리는 결국 그 남자의 전신에 존재와 추억의 보라 빛 흐름들을 일깨워주었고, 그는 그런 체험으로 인하여 많은 것을 깨달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계속 길을 걸었다.
그가 갈대 숲에서 나오면서 보니, 그녀가 후미진 곳 저쪽 건너편에 서 있었다. 그녀는 자기를 향하여 걸어오고 있는 그 남자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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