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작품]/***** 좋은 단편

표범 조련사 / 잭 런던

소설가 구경욱 2009. 1. 13. 18:57

표범 조련사 / 잭 런던


그는 꿈을 꾸는 듯한, 먼 곳을 바라보는 눈을 하고 있었다. 젊은 아가씨
처럼 상냥하게 말하는, 우수어린 그의 목소리는 형언할 수 없는 고독함을
부드럽게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표범 조련사였으나 외관상으로는 전혀 그러한 느낌이 없었다. 그의
직업은 많은 관객들 앞에서 재주를 부리는 표범우리 속에 들어가 용기있는
행동을 보여주고, 관객들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것이었다. 고용주는 그가
만들어내는 스릴에 대해 보수를 주고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그는 그러한 인물로 보이지 않았다. 허리도 가늘고 어깨도
좁았으며, 다소 빈혈기가 있는 듯했으나 슬픔을 온건하게 참아내는 것으로
보아 그다지 우울해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한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끌어내려고 했으나, 그에게는 상상력이 결
핍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의 화려한 직업에는 로맨틱한 곳이란 전혀 없고
대담무쌍함같은 것도 없었다. - 있는 것이란 오로지 회색의 단조로움과 끝
없는 지루함뿐이었다.
" 사자 말인가요 ? 물론 싸운 적이 있지요. 별로 이렇다 할 건 없어요.
필요한 건 냉정을 잃지 않는 겁니다. 흔한 채찍만 있으면 누구나 사자를 조
용하게 할 수 있어요. 언젠가 30분동안 사자와 싸운 적이 있어요. 상대가
달려들 때마다 대들면 콧잔등을 채찍질하고, 상대가 영리해져서 고개를 숙
이고 대들게 되면 그때는 한쪽 다리를 들이미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에 달
려들면 다리를 당기고 다시금 콧등을 갈기는 겁니다. 그렇게만 하면 되는
거예요. "
그는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눈으로 부드럽게 말하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상처를 보여주었다. 그중 어깨의 상처는 암호랑이의 일격을 받아 뼈까
지 다친 것이었다. 나는 그의 상체가 정성들여 꿰매진 것을 보았는데, 특히
오른팔 부분은 팔꿈치에서 손등까지 마치 탈곡기 속으로라도 말려든 것 같
았다. 모두가 맹수의 손톱과 송곳니에 할퀸 자국이었다.
" 그러나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예요. "
하고 그는 얘기했다. 다만 약간 귀찮은건 비가 오는 계절에 옛 상처가 아
리는 것 뿐이라고.
느닷없이 무슨 생각나는 일이 있는 듯이 그의 표정이 생기를 띠웠다. 내
가 열심히 듣고 있는 것에 못지않게 그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좀이 쑤셨던 것이다.
" 사자 조련사가 어떤 자에게 미움을 받은 이야긴데 들으신 적이 있습니
까 ? "
그는 말을 멈추고 맞은편 우리 속에 있는 병든 사자를 지그시 바라 보았
다.
" 이빨이 아픈 거예요. 녀석은. " 하고 그가 설명했다.
" 그건 그렇고 그 사자 조련사의 십팔번 재주는 사자의 입 속에 머리를
집어 넣는 것이었어요. 그를 미워한 사나이는 언젠가 사자가 그를 물어뜯는
걸 보고 싶어서, 조련사가 출연할 때에는 반드시 관객석에서 지켜보고 있었
어요. 그는 서커스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나 따라다녔습니다. 그리하여 긴
세월이 흐르고 사나이도, 조련사도, 사자도 함께들 늙어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어느날 객석의 맨 앞줄에 앉아 있었던 그는 오랫동안 기다리고 바랐
던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자가 사자 조련사의 머리를 깨물었는데 의사
를 부를 사이도 없었습니다. "
표범 조련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자기 손톱을 홀낏 보았는데 그것은
그의 특유한 슬픔이 따르지 않았다면 냉혹하다고조차 말할 수 있는 태도였
다.
" 저로 말하면 그거야말로 인내력이라는 겁니다. " 하고 그는 말을 이었
다.
" 저도 실은 그런 식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제가 아는 그의 방식은 달랐습
니다. 그자는 키가 작은 사나이로, 칼을 삼키는 재주를 부리는 프랑스인이
었습니다. 이름을 드 빌 이라고 했는데, 아내는 대단한 미인이며 공중 그네
를 타고 천막 바로 밑에서 그물까지, 멋지게 회전하면서 다이빙을 했습니
다. 드 빌은 무대에서 보이는 재빠른 솜씨만큼이나 성미도 급한 사나이로
서, 민첩한 행동은 호랑이의 앞발에 못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어느날 서커스 단장이 그를 프랑스 놈이라고 욕을 하자 - 혹은 그 이상
심한 말을 했는지는 모르나 - 화가 난 그는 평소 나이프를 던지는 배경으로
쓰고 있는 부드러운 송판에 단장을 밀어 붙이고, 상대에게 무슨 짓을 당할
지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관객의 목전에서 느닷없이 나이프를 잇달아 던
지기 시작했습니다. 나이프는 단장의 옷을 꿰뚫고 살갗에 상처를 낼 정도로
가깝게 그의 주위에 꽂혔습니다. 단장은 핀에 꽂힌 곤충처럼 꼼짝도 못했
고, 광대들이 나이프를 뽑아 주고 나서야 간신히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로
부터 드 빌을 경계하라는 소리가 서커스단 내에 퍼져, 그의 아내에게조차
달갑지 않은 태도를 보이는 남자는 한사람도 없어졌습니다. 그 여자는 상당
히 바람기가 많았음에도, 드 빌이 무서워서 아무도 그녀에게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한데 워레스라는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무서울 것 없다는 사
나이었지요. 그도 사자 조련사였고 역시 사자의 입에 머리를 넣는, 같은 기
술을 보이는 이였습니다. 게다가 상대가 어떤 사자라도 거리낌없이 그 짓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거스터스라는, 덩치는 크지만 기분이나 마음을 알
수 있는 상냥한 사자를 상대로 할때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겁니다. 되풀이하
는 것 같지만 워레스는 - 우리는 워레스 대왕이라고 불렀습니다 - 살아 있
든 죽어 있든 무서운 것이 없겠지요. 어느날 술에 취한 그가 사나워진 사자
우리 속에 들어가는 내기를 하고는, 채찍 한번 쓰지 않고 사자를 온순하게
만든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사자의 콧대를 주먹으로 쳐서 온순하게 만든
거지요. "
등 뒤에서 소란이 벌어져 표범 조련사가 조용히 돌아 보았다. 그건 두 칸
으로 막은 우리였고 칸막이 저쪽에 손을 뻗친 한 마리의 원숭이가 반대쪽의
커다란 회색 늑대의 괴력에 끌려가고 있었다. 원숭이의 팔은 굵은 고무줄처
럼 자꾸만 길어지는 것 같이 보이고 한패의 원숭이들이 깩깩거리며 큰 소란
을 피우고 있었다. 가까이에 사육계원이 없었으므로 표범 조련사가 우리에
접근하여 손에 든 가는 채찍으로 늑대의 콧대를 꺾고, 슬픈 변명과 같은 미
소를 띠고 돌아오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야기를 계속했다.
" 워레스 대왕에게 드 빌의 아내가 애교를 떨고 대왕도 그녀에게 추파를
던지는 걸 보고, 드 빌이 대단히 불쾌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우리는 워레스
에게 경고했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조소를 퍼붓고, 그러다
가 드 빌에게 싸움을 걸 생각으로 그의 얼굴을 풀이 든 양동이에 쳐박고,
그 얼굴이 우습다고 놀려대는 판입니다. 드 빌의 꼴은 형편 없었지요. - 나
도 풀을 닦아 내는 걸 도울 정도였으니까요. 한데 그는 냉정했고 도전에 말
려드는 낌새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맹수의 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 타는 듯한 빛이 있었으므로 나는 부질없는 참견이라 생각하
면서도 워레스에게 최후의 경고를 했습니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그 후로는
드 빌의 마누라에게 추파를 던지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몇개월 동안은 아무 일도 없었지요. 그래서 나도 공연하 노파심
이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우리는 서부 지방을 순회 중이라
서, 샌프란시스코에 천막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날 오후, 내가 포켓 나이프
를 빌려준 시설주임 렛드 데니를 찾아갔을 때. 커다란 텐트 속은 아녀자들
로 만원이었습니다. 분장실인 텐트 하나를 지나쳤을때 나는 혹시 그 속에
렛드 데니가 있을까 하고 캔버스의 구멍으로 안을 들여다 보았지요. 그는
없었지만, 눈 앞에 타이즈 차림의 워레스 대왕이 나갈 차례를 기다리고 있
었습니다. 그는 공중그네타기팀의 말다툼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
습니다. 무대 뒤에 있던 다른 단원들도 이 언쟁에 정신이 팔려 있었는데,
드 빌만은 증오를 드러내고 워레스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워레
스와 다른 패들은 싸움에 정신이 팔려 드 빌의 표정에도, 잇달아 일어난 일
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캔버스의 구멍을 통해 모조리 보았습니다. 드 빌은 주머니에
서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는 시늉을 하면서 - 그 날은 몹시 더웠지요 - 워
레스의 뒤로 걸어 나갔습니다. 도중에 한번도 멈추지 않고 손수건을 나풀거
리며 똑바로 문까지 걸어 가더니, 나갈 때 잽싸게 돌아서서 힐긋 쳐다보았
습니다.
그 시선의 의미를 저는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눈초리에는
증오뿐 아니라 승리감도 보였으니까요. ' 드 빌을 감시할 필요가 있단 말이
야. ' 하고 나는 자신에게 타일렀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가 서커스 부지에
서 나와 시내행 전차를 타는 것을 보았을 때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정도
였으니까요.
그리고 몇분 후에 나는 큰 텐트 속에서 렛드 데니를 찾아냈습니다. 때마
침 그곳에는 워레스 대왕이 멋진 연기로 관객을 매혹시키고 있었습니다. 그
는 사자들이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렁댈 때까지 화를 돋구고 있었습니다.
- 하긴 늙은 오거스터스만은 별도였는데, 오거스터스는 너무나 살이 찌고
늙었지 때문에 아무리 다구쳐도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 이윽고 워레스는
륵은 사자의 무릎을 채찍으로 갈겨 앉혔습니다. 늙은 오거스터스가 온순하
게 눈을 깜박거리며 입을 활짝 버리자 워레스의 머리가 그 속으로 들어갔습
니다. 그 순간,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사자의 턱이 닫혔습니다. "
표범 조련사는 그리운 듯이 미소를 짓고 먼 곳을 바라보는 눈초리를 했
다.
" 그것이 워레스 대왕의 마지막이었습니다. "
그는 낮고 슬픈 목소리로 계속 했다.
" 소란이 가라앉을 무렵, 나는 짬을 보아 시체 위에 엎드려 워레스의 머
리 냄새를 맡아보았습니다. 순간 나는 재채기가 나왔습니다. "
나는 급히 말을 더듬으면서 물었다.
" 그건 코담배였어요. - 빌이 무대 뒤에서 워레스의 머리에 뿌렸어요. 사
자는 그를 죽일 생각이 아니었지요. 단지 재채기를 했을 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