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작품]/***** 좋은 단편

황조별가(黃鳥別歌) / 방영주

소설가 구경욱 2009. 4. 5. 00:14

황조별가(黃鳥別歌) - 방 영 주

-. 작가 프로필

충남 서천 출생. 국민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월간문학> 단편  당선. <한겨레문학> 중편 당선. <시인과 육필시> 시 당선. 소설집 <거북과 통나무> <내사랑 바우덕이> 장편소설 <무따래기>(상,하권) <우리들의 천국> <카론의 연가, 그리고 저승에서 온 여자> <국화의 반란> <돌고지 연가-춘원 이광수> <대무신왕> 등.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윤리위원

 

 

황조별가(黃鳥別歌)

 

여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유리왕은 문무백관을 둘러보고 말했다. 동명성왕이신 주몽 선왕의 유업을 이어 고군분투한 결과 우리도 이만하면 나라의 기틀이 잡혔다고 생각하오. 모두 그대들 덕택이오. 대보(大輔) 협부(陜父)가 한 발 앞으로 나서 허리를 굽혔다. 모두 대왕님의 치적 덕택이옵니다. 헌데, 지금 중궁전이 비어 있습니다. 유리왕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국상(國喪)도 끝나지 않았는데……. 대왕님과 백성의 경우와는 다르옵니다. 누구를 취하면 좋겠소? 다물후(多勿侯) 송양(松讓)의 따님 국향(菊香)이 어떨까 싶습니다. 송양후에게는 딸이 여럿 있었는데, 첫째의 이름이 국향이었다. 왕들의 결혼이란 일반 백성들과는 달리 다분히 정략적이었다. 쉽게 말해 나라를 키우는 데 있어 필요한 왕족들끼리의 혼사였다. 송양후는 기골이 장대하고 용맹스러웠다. 전술에도 능했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부여의 대소왕과 손을 맞잡고 고구려로 창끝을 돌릴 수도 있었다. 동명성왕은 이를 염려해서인지, 송양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유리가 태자에 책봉되고 왕위에 오르면, 첫째 딸을 비로 삼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유리왕은 국향을 본 적이 있었다. 동명성왕 원년에 태자의 자격으로 제후국을 순방한 적이 있었다. 그때, 다물도에 들렸다. 봄이 흠씬 무르익었다. 정원에는 봄꽃이 만발하여 있었다. 주위를 나비가 하늘거리며 날았다. 정원 한가운데 연못에서, 물고기가 유영하고 있는 모양새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여인네가 하나 있었다. 봄에 핀 들국화의 모습이었다. 약간 병약해 보이기는 했지만, 청초한 모습에 들국화처럼, 진한 향내를 풍기는 여인네였다. 그래서 더욱 남성의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키는 여자였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첫 대면부터 연정을 품었던 것이다. 그때 유리 태자는, 말 한마디 붙여 보지 못하고, 자리를 떴던 거였다. 유리왕의 입가로 미소가 맴돌았다. 협부는 때를 놓치지 않았다. 폐하, 동명성왕님의 유지도 있었습니다. 송양의 따님, 국향이 마땅한 줄로 아옵니다. 빨리 왕비를 맞으시어 왕실의 번영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왕권이 확실해지고 나라가 평안하여지옵니다. 유리왕은 신하들을 둘러보았다. 그대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신하들은 입을 모았다. 폐하, 대보 협부의 말이 옳은 줄로 사료되옵니다. 알겠소. 짐은 그대들의 뜻에 따를 것이오. 만조백관은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고구려는 협부가 중심이 되어 왕비를 들이기 위해 분주했다.

 

초가을 밤이었다. 섬돌 밑에서 귀뚜라미가 처량하게 울었다. 국향과 혼례를 올린 지도 벌써 한 달 가까이 되었다. 잔뜩 살진 보름달이 휘영청 밝아 있었다. 유리왕은 침전에 들었다. 유리왕은 왕비와 함께 침실에 누웠다. 서늘한 기운이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서둘러 난방을 하지 않은 때문이었다. 왕실의 검소한 생활로 백성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왕비의 간언 덕택이었다. 늘 이런 식이었다. 유리왕은 그것이 싫지 않았다. 게다가 왕비는 총명했다. 언행이 남달랐다. 몸가짐에 있어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말도 꼭 필요할 때만 했다. 정사에도 간간 충고를 했다. 그것이 딱딱, 들어맞았다. 유리왕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왕비에게 자문을 구하곤 하였다. 아직은 신혼 초였다. 유리왕은 여인의 곁에 누워 있자 마음 밑바닥에서 무엇인가 꿈틀거렸다. 그것은 온몸으로 퍼져 나가며 저릿저릿한 충격파를 주었다. 유리왕은 불을 껐다. 둘은 시나브로 불길에 활활 타올랐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둘은 풀어져 누웠다. 왕비는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남편 앞에 절대 알몸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슬그머니 유리왕 옆에 가 누웠다. 국향은, 유리왕에게 있어, 아주 귀여운 여인이었다. 그러나 유리왕은 불시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우리 오래도록 이렇게 해로합시다. 왕비의 음성은 쓸쓸했다. 인명은 재천이지요. ……. 유리왕은 비의 손을 잡았다. 왕비는 손을 꿈틀꿈틀했다. 잔다는 신호였다. 그녀는 녹초가 되어 수면의 나락으로 침잠하였던 것이다. 몸이 허약한 왕비는, 사력을 다해, 자신을 즐겁게 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유리왕의 목으로 무엇인가 뭉클한 것이 넘어왔다. 비의 건강을 생각하여 이런 무리한 정사는 삼가야겠다고 속다짐했다. 유리왕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잠의 입구로 서서히 빨려 들고 있었다.

 

왕비 국향은 왕실과 신하들의 존경을 받았다. 백성도 어머니처럼 생각했다. 하지만 유리왕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왕비는 자주 앓았다. 어떤 때는 온몸을 땀으로 목욕하며 숨이 자맥질하기도 하였다. 왕비는 남에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면서 왕실의 대소사를 모두 챙겼다. 부덕을 내세우며 침전의 청소까지도 손수 했다. 정사에도 관여했다. 허약한 몸이 견뎌 낼 수가 없었다. 타고난 성격이 어디로 가겠는가. 유리왕이 극구 만류했지만 듣지 않았다. 그러나 유리왕에게 경사가 있었다. 나라의 그것이기도 하였다. 왕비 국향이 임신을 한 것이었다. 유리왕은 산모를 걱정하여 골천(鶻川)에 별궁을 지어 요양토록 했다. 왕실의 번잡한 일에서 벗어나 심신을 편안히 쉬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주위의 풍광이 수려하여 정신 건강에도 이로울 터였다. 유리왕은 틈만 나면 비에게 들러 여러 가지로 정성을 쏟았다. 산모에게 좋다는 것은 무엇이나 구해 먹였다. 왕비의 배는 나날이 불러 갔다. 골천 뒷산만한 배를 내놓고 어기적거리는 비의 모습은 보기 좋았다. 어느덧 열 달이 꽉 찼다. 산고의 진통이 시작되고 있었다. 난산의 조짐이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 온 유리왕은 산실밖에 마음을 졸이며 대기하고 있었다. 어의들이 혼신의 힘을 쏟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한동안 법석을 떤 다음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이어, 궁녀들의 곡성이 터져 나왔다. 유리왕은 웬일인가 하여 산실로 뛰어 들었다. 왕비 국향은 이미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 있었다. 유리왕은 왕비를 붙들고 한동안 오열했다. 왕은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침소에 누워 있었다. 아직도 거기서는 왕비 국향의 들국화 냄새가 나는 듯했다. 유리왕은 왕비가 남기고 간 핏덩이를 위해 유모를 들였다. 이름을 도절(都切)이라 지었다. 도절은 별 탈 없이 잘 자라 주었다. 유리왕은 도절을 보면 왕비 국향이 그리워 참을 수가 없었다. 어전회의도 거의 안했다. 신하와 백성도 얼마간은 함께 슬퍼했다. 그러나 유리왕은 일반 백성이 아니었다. 한 나라를 책임지고 있는 왕이었다. 신하와 백성 사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 갔다. 대신들은 왕의 침전 앞에 모여, 머리를 조아리고, 국사 돌볼 것을 강력히 권했다. 유리왕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음 날부터 정식으로 어전회의를 갖겠다고 다짐했다. 날이 밝았다. 왕좌에 앉은 유리왕은 몰라보게 수척해 있었다. 동공도 풀려 있었다. 산천을 누비며 말을 달려, 활을 당기던 기상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자신들이 무엇 때문에, 목숨 걸고 주몽을 따라,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또한, 그의 아들 유리를 추종했다는 것인가. 신하들은 많이 실망했다. 일국의 왕이 한 여인의 추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저러다니. 왕을 그대로 두어서는 고구려의 앞날이 깜깜했다. 협부는 읍을 했다. 폐하, 동명성왕의 위업을 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명은 재천이라 하였사옵니다. 왕비를 거두어 가심도 하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대왕께옵서는 이제 왕비 잃은 슬픔을 털어 내시고 정사에 전념할 때라 생각되옵니다. 백성은 폐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나이다. 유리왕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후사는 대보에게 일임하겠소. 협부는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폐하, 골천 대가 화욱(禾旭)의 딸 화희(禾姬)를 천거하옵니다. 골천은 누대로 농업과 목축을 장려하여 풍요로운 고장입니다. 한인과 교역을 통해 상당한 재부도 축적되어 있습니다. 화희를 맞아들이면 대왕께 큰 힘이 될 것이옵니다. 유리왕은 얼굴을 찌푸렸다. 역시 정략결혼이었다. 유리왕은 일반 백성으로 돌아가도 좋았다. 전 왕비 국향을 닮은 여자를 취하고 싶었다. 유리왕은 다소 귀찮은 표정이었다. 알아서 하시오. 협부는 몸을 굽혔다. 폐하, 황감하옵니다. ……. 유리왕은 지겹다는 얼굴로 자리를 떴다. 협부는 자신의 사자를 통해 화욱에게 딸이 왕비로 간택되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화욱은 기뻤다. 자신은 왕의 장인이 되는 것이었다. 환언하여 고구려의 중추 세력으로 발돋움하는 거였다. 화욱은 화희를 불렀다. 대왕께서 너를 왕비로 삼겠다는구나. 가문의 광영이 아니겠느냐. ……. 왜? 싫으냐? ……. 화희는 골천 호족이었던 대가 화욱의 외동딸이었다. 화욱은 하나뿐인 딸을 극진히 위했다. 화희는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자랐다. 그녀는 안하무인이었고 자기중심적이었다. 화희는 마음에 둔 사람이 있었다. 화욱의 사자들 중 하나였다. 그는 훤칠한 키에 미남자였다. 용맹스러웠다. 머리도 뛰어났다. 둘은 깊은 밤이면 남몰래 만나 사랑의 정을 나누었다. 화희는 다분히 계산적인 여자였다. 몸을 함부로 허락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중요한 재산을 아무렇게나 내던질 수는 없었다. 화희의 눈은 바쁘게 움직였다. ‘계산적인 여자’가 ‘계산’을 하는 거였다. 화희의 입가로 드디어 미소가 번졌다. 아버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암, 그래야지. 역시 내 딸이야. ……. 화희는 연인과의 관계를 깨끗이 청산했다. 아무 미련이 없었다.

 

유리왕과 화희의 혼례가 끝났다. 유리왕은 예식 내내 화가 난 표정이었다. 화희는 전 왕비 국향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큰 키에 육덕이 좋았다. 전체적으로 풍만했다. 얼굴은 예쁘지만, 말상에 광대뼈가 툭 불거져 나오고, 눈매가 매서웠다. 유리왕은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일 것 같았다. 화희의 몸 위로 계속하여 전 왕비의 환영이 내려앉았다. 가냘픈 선으로 이어진 단아한 얼굴, 버들가지처럼 하늘거리는 몸, 유리왕은 눈을 꽉 감아 버리곤 하였던 것이다. 밤이 되었다. 신방에 든 계비(繼妃) 화희는 새치름히 앉아 있었다. 자색 비단옷에 금실로 수놓은 혼례복은 화려했다. 한껏 치장을 한 화희는 육감적이었다. 아름다웠다. 그러나 어딘지 섬뜩한 그것이었다. 유리왕은 아무 말 없이 앉아 술잔만 기울였다. 계비를 무슨 몹쓸 물건처럼 한쪽에 팽개쳐 둔 채였다. 시간은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화희는 혼례를 치르느라 하루 종일 긴장하고 있었다. 화희는 온몸에 쥐가 났다. 무릎 관절은 이미 마비되어 있었다. 화희는 왕이 자신을 침대로 데려 가기만을 학수고대했다. 그러면 지금까지 고이 간직한 처녀성을 고스란히 내줄 것이었다. 화희는 참을 수 없었다. 폐하, 이제 그만 취침에 드세요. ……. ……. 유리왕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계속 술만 마셨다. 유리왕의 몸이 옆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얼마 후, 왕은 술상 옆으로 푹 고꾸라져 코를 골았다. 화희는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얼마 전에 상처한 왕은 황감하여 자신을 감지덕지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했다. 전혀 오산이었다. 화희는 이를 빠득, 갈며 모로 쓰러졌다. 화희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왕비로서의 앞날이 심상치 않을 조짐이었다. 화희는 혼례복도 벗지 못한 채 뜬눈으로 아침을 맞았다. 유리왕은 태후(太后) 예씨(禮氏)의 설득과 강권에 못 이겨 어쩌다 화희의 침소에 들기는 했다. 그러나 화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밤새 술만 마시고 나오기 일쑤였다. 화희는 베개를 사타구니에 끼고 성적 기갈로 몸부림친 적이 한두 번 아니었다. 참으로 야속한 남편이었다. 차라리 부친의 사자를 잡는 건데 그랬다고 후회했다. 하지만,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물이었다.

 

유리왕은 사냥을 자주 다녔다. 전 왕비 국향을 잊기 위해서였다. 사냥감을 쫓으며 활시위를 당길 때만큼은 국향의 환영은 가뭇없이 사라지곤 하였다. 우리 한민족은 동이족(東夷族)이라고도 불리었다. 이(夷)는 큰 대(大) 자와 활 궁(弓) 자가 합한 글자였다. 이(夷)의 맨 처음 본 글자가 어질 인(仁)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동이족은 ‘동방에 사는 활을 매우 잘 다루는 아주 어진 사람들이 사는 군자의 나라’라는 의미였다. 주몽도 ‘활을 잘 쏘는 사람’이란 뜻이었다. 유리왕 역시 유년기부터 활을 잘 다뤘다. 유리왕은 활과 하나가 되어 산천에 노닐 때면 정서적으로 안정되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충일한 삶을 의식할 수 있었다. 소년 시절부터 같이 지내 온 사자 옥지(屋智), 구추 (句鄒), 도조(都祖)는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유리왕과 사냥의 동행을 기뻐했다. 유리왕은 조금씩 자신의 옛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유리왕의 사자들은 비로소 안심했다. 이번 사냥지는 기산(箕山)이었다. 유리왕은 멧돼지와 사슴 등을 뒤쫓으며 활시위를 당겼다. 왕의 사냥이었다. 작은 짐승은 제외되었다. 옥지가 말했다. 폐하, 솜씨가 아직도 그대로이시옵니다. 유리왕의 얼굴로 웃음이 물결쳤다. 허허, 그런가. 구추가 추임새를 넣었다. 대왕님, 백발백중이옵니다. 됐다. 아부는 그만들 해라. 잡은 짐승은 궁으로 가져가 신하들과 함께 잔치를 벌일 것이다. 사냥물을 수레에 모두 옮겨 싣도록 하여라. 사냥은 이만하면 족할 터이다. 더 이상의 살생은 피해야지……. 도조가 받았다. 폐하, 알겠사옵니다. 사자들은 포획물을 수레에 실었다. 세 대의 수레가 사냥물로 넘치고 있었다. 먹을 만큼만 잡아야 했다. 유리왕 사냥의 불문율이었다. 그런데 유리왕의 앞으로 흰 노루 한 마리가 튀어 나왔다. 잘 빠진 그것은 우아해 보이기까지 했다. 유리왕은 부지불식간 놈을 겨냥해 활시위를 귀밑까지 당겼다. 녀석은 미동도 없이 유리왕을 마주보았다. 두려움 없는 편안한 얼굴이었다. 어떻게 보면 놈의 표정은 웃는 것 같기도 하였다. 흰 노루는 영물로 대접받는 귀한 짐승이었다. 유리왕은 활을 내렸다. 노루는 앞발을 들어 유리왕에게 따라 오라는 시늉을 하였다. 녀석은 앞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유리왕은 녀석을 좇고 있었다. 녀석은 갑자기 빠르게 달렸다. 유리왕도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속력을 내었다. 왕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는 안 되었다. 사자들은 조바심을 태웠다. 옥지가 소리쳤다. 폐하, 숲이 깊습니다! 위험하옵니다! 알았다! 걱정 마라! 유리왕은 노루가 보이지 않았다. 말을 멈추고 사위를 둘러보았다. 노루의 흰 엉덩이가 계곡 쪽으로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유리왕은 말에 채찍을 가했다. 유리왕은 계곡 안으로 들어서 여기저기 둘러봤지만 놈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계곡물 흐르는 소리만 좔좔, 들렸다. 유리왕은 계곡 근처를 서성였다. 사자들은 잡은 짐승을 호위 군사들을 시켜 궁궐로 먼저 보냈다. 왕의 안전을 책임진 사자들이었다. 그들은 말을 달려 왕의 뒤를 좇아 왔다. 도조가 말했다. 폐하, 무슨 일이옵니까? 너희들의 눈에는 흰 노루가 보이지 않았더냐? 사자들이 말했다. 폐하, 무슨 말씀이신지요. 사자들은 노루를 보지 못한 거였다. 놈은 유리왕과 함께 있었던 바로 그들 눈앞에 모습을 보였잖은가. 유리왕은 고개를 갸웃했다. 비현실적 공간에 내팽개쳐진 느낌이었다. 꼭 무엇에 홀린 기분이었다. 영물 흰 노루는 왜 나타나 나를 이곳으로 인도하였는가. 이상한 일이었다. 무엇을 주기 위해서. 아니면, 무엇을 빼앗아 가기 위하여. 길조인가? 흉조인가? 흰 노루는 복을 준다고 하지……. 유리왕은 좋은 쪽으로 생각했다. 어둠이 거대한 구렁이처럼 산기슭을 타고 올랐다. 곧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유리왕은 길을 잃은 것이었다. 난감한 일이었다. 가을이 깊을 대로 깊어 있었다. 북방 계곡의 밤은 몹시 추웠다. 도조는 준비한 털옷을 유리왕에게 올렸다. 유리왕은 그것을 걸쳤다. 산골에서 태어난 도조는 산을 잘 알았다. 도조는 말에서 내렸다. 그는 말의 고삐를 잡고 앞장 서 계곡을 따라 내려갔다. 그 밑 어딘가에 민가가 있을 터였다. 얼마를 가니 오솔길이 나타났다. 사람이 자주 다닌다는 뜻이었다. 일행은 도조의 말이 인도하는 대로 한참을 걸었다. 도조의 얼굴로 기쁨의 표정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도조가 외쳤다. 폐하, 저 아래 불빛이 보입니다. 유리왕이 말했다. 서둘러라. 예, 폐하. 도조는 말에 올랐다. 그는 오솔길 따라 불빛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유리왕 일행은 한참만에야 마을에 당도할 수 있었다. 마을은 제법 규모가 컸다. 동네 한 복판에 커다란 기와집이 한 채 있었다. 도조는 그 집 앞에 말을 멈추었다. 유리왕은 말 위에서 작게 속삭였다. 짐의 신분을 밝히지 마라. 민폐를 줄 것이니라. 도조가 받았다. 폐하, 알겠사옵니다. 도조는 말에서 내려 문을 두드렸다. 하인이 나와 물었다. 뉘신가요? 주인을 모시고 사냥을 나왔다, 산 속 계곡에서 길을 잃었소. 주인에게 하룻밤 묵어 갈 수 있겠나 알아봐 주시오. 하인은 허리를 굽힌 다음,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되나온 하인은 유리왕 일행을 안으로 들게 했다. 유리왕은 말에서 내렸다. 유리왕들은 하인의 인도로 주인과 대면하게 되었다. 불빛에 드러난 주인은 넉넉한 인상에 풍채가 좋았다. 한마디로 귀골이었다. 주인은 유리왕 일행을 접빈실로 안내하였다. 주인은 그들과 마주 앉았다. 유리왕이 말했다. 한밤중에 폐를 끼쳐 미안 하오이다. 이것도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길을 잃고 산 속을 헤맸다면 무척 시장하실 겁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주인은 하녀에게 음식을 만들어 내오게 하였다. 모두 맛깔스러웠다. 유리왕과 사자들은 속이 비었던 때문인지 순식간에 상을 비웠다. 주인은 손님들을 자세히 살폈다. 차림새나 언행을 보니 보통 신분의 사람들이 아닌 것 같았다. 특히 주인을 따라온 사람들은, 그 앞에서 황공하여 안절부절 못하는 것 같았다.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될 사람들 같았다. 주인은 하녀에게 술상을 내오게 하였다. 술이 몇 순배 돌았다. 이야기가 꽃을 피웠다. 주로 사냥에 대한 무용담이었다. 주인도 일가견이 있었다. 주인은 대범하면서도 친절하였다. 손님에 대한 예의범절은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유리왕은 호걸을 만났다는 생각에 흡족하여 흥건히 취해 갔다. 유리왕은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참, 이렇게, 신세를 지면서…… 성함도 모르니……. 저는 치엽(稚曄)이라 합니다. 치 공은 이런 곳에 살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무슨 사연이 있을 것 같은데, 들어봐도 되겠소이까. 저는……. 치엽은 말을 끊고 한동안 침묵했다. 과거를 회상하는 모양이었다. 치엽은 자세를 바로 했다. 저는 원래 한나라 사람입니다. 선친은 사공(司公) 벼슬을 하였지요. 성제(成帝)는 어린 나이에 등극하였습니다. 태후가 섭정을 하면서 나라의 권력은 모두 외척 왕씨(王氏)에게 돌아갔습니다. 왕씨 일족의 탐심은 끝이 없었어요. 허허, 저런……. 뒤는 빤한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충신은 죽임을 당하거나 떠나고 간신들만 득실거렸겠지……. 선친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목숨 걸기로 작정했습니다. 가족이 만류했지만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선친은 우선 가옥과 논밭, 그리고 패물 등속을 팔아 금덩이로 바꿨습니다. 그것을 가솔에 건네며 바로 도성을 떠나 다른 곳에 정착하라 일렀습니다. 가급적이면 국경을 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일렀습니다. 선친은 차라리 홀가분한 것 같았습니다. 선친은 황제 성제에게 왕씨 일파의 횡행을 처단하라 권했습니다. 그리고 강력하게 바른 정치 펼 것을 진언하였습니다. 수렴청정을 하던 태후는 크게 노했겠군요. 황제는 전혀 사리를 판별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모든 정사를 태후에게 일임하고 있었지요. 선친은 목이 베어져 저자 거리에 효수되었습니다. 그것도 부족한지 가족을 모함하여 군사들을 풀었습니다.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종으로 삼게 하였지요. 저희들은 이미 성문을 빠져나가 요동으로 간 뒤였습니다. 태후의 명을 받은 요동 태수는 혈안이 되어 찾았겠네요. 하여, 천신만고 끝에 여기 기산에 정착하게 된 것입니다. 아, 그래요, 참, 안 되었군요……. 다 지난 일입니다. 여기 고구려 땅은 풍광이 아름답고, 풍족하며, 무엇보다 인심이 아주 좋습니다. 사람들이 순박하고요. 물론 화가 나면 호랑이처럼 무섭지만요. 게다가 고구려왕이 선치(善治)를 베풀어 이민 생활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허허, 그렇습니까. 칭찬을 들으면 노루도 춤춘다고 했던가. 유리왕은 기분이 좋아졌다. 치엽은 구겨져 있던 얼굴을 폈다. 치엽은 손님들에게, 드리운 마음의 음영을 걷어 내고 싶은지, 소탈한 술꾼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유리왕은 솔직 담백하고 대범한 치엽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한나라 충신의 아들이었다. 밤새도록 말발을 쳐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았다. 유리왕은 무슨 인연의 실 한 올이라도 이어 두고 싶었다. 유리왕은 말했다. 그대 같은 사람에게 계속 감출 수 없어 밝히오. 나는 고구려왕이오. 대왕님, 이 미련한 놈이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치엽은 벌떡 일어나 유리왕에게 절을 올렸다. 유리왕은 껄껄 웃으며 술잔을 건넸다. 괜찮아요. 편히 앉아 받아요. 항공하옵니다. 치엽은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잔을 받들었다. 유리왕이 계속, 편한 자세로 술잔을 받으라고 일렀지만, 치엽은 그대로였다. 치엽은 오히려 그것이 편하다고 했다. 술잔이 계속 오갔다. 유리왕은 취기로 몽롱해졌다. 전신이 나른했다. 바람이라도 쐬고 싶었다. 유리왕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사자들이 부축하려 했지만 뿌리치고 혼자 밖으로 나갔다. 미명의 시간이었다. 동녘의 기운이 칠흑 같은 어둠을 미세하게 벗겨 내고 있었다. 사냥에 지치고 술에 곤죽이 된 몸으로 밤을 꼬박 새웠던 것이다. 하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치엽은 그만큼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유리왕은 정원 쪽으로 걸었다. 만추의 새벽 공기가 얼마간 정신을 쇄락하게 했다. 그러나 아직도 몽롱한 취중이었다. 정원 한쪽에 여인이 바위 위에 정안수를 떠놓고 절을 올리고 있었다. 뒷모습이 전 왕비 국향을 닮아 있었다. 아니, 국향이 환생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유리왕은 걸음을 빨리 하여 다가갔다. 여인이 인기척에 놀라 돌아봤다. 유리왕은 소스라치며 놀랐다. 완벽한 국향의 모습이었다. 유리왕은 얼더듬었다. 저…… 국향이…… 여기, 웬일로……. 소녀를 아시옵니까? 유리왕은 눈을 감고 양손의 식지를 펴 한참 동안 관자놀이를 눌렀다. 눈을 뜨며 검지를 내렸다. 국향은 아니었다. 우선 혈색이 좋았다. 살도 적당히 붙어 있었다. 나올 곳은 힘차게 볼록 나오고, 들어갈 데는 푹푹, 잘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국향을 쏙 빼 닮아 있었다. 국향의 건강이 회복되었다면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유리왕은 아쉬움과 그리움이 교차했다. 이 여자를 붙잡고 싶었다. 이대로 떠난다면 국향의 환영에서 다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유리왕은 정감 어린 시선으로 여인을 물끄러미 보았다. 낭자의 이름이 무엇이오? 치희(雉姬)라 합니다. 부친이 치엽이오? 예, 맞습니다. 무엇을 빌고 있었소? 역적으로 몰린 조부님의 명예가 회복되기를 소원하고 있었습니다. 조부님이 충신으로 다시 봉해져 우리 가족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기원했습니다. 그것은 제 아버님의 속마음이기도 합니다. 나도 꼭 그러길 빌겠소. 감사합니다. 소녀는 이만……. 치희의 목소리는 또랑또랑하면서도 은근하여 착착 감겨들었다. 국향의 음성도 그랬다. 유리왕은 잠시 국향을 대면하고 있는 듯, 착각이 들었다. 마음 씀씀이가 부녀지간에 어쩌면 저렇게 같을까 싶었다. 아름다운 모습들이었다. 유리왕은 정신을 잃고 치희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치희가 한눈에 들었던 것이다. 치희는 새벽에 외간남자와 단 둘이 있기가 부담스러운지 등을 돌려 총총히 사라졌다. 유리왕은 치희의 뒷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멀리 산 속에서 뻐꾹새의 울음소리가 뻐꾹-! 뻐꾹-! 뻐뻐꾹-! 들렸다.

 

유리왕은 잠에서 깨었다. 창으로 어둠이 스멀스멀 기어들고 있었다. 새벽부터 지금까지 잔 것이었다. 도조를 불렀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와 침구를 정돈하고 목욕 준비를 해주었다. 유리왕은 이를 닦고 머리를 감았다. 그리고 욕조에 몸을 담갔다 나왔다. 몸이 개운했다. 어제 밤부터 여명의 시간까지 일들이 머릿속에 명멸했다. 그 끝에 아름다운 치희의 자태가 아롱거렸다. 옥지가 와, 아뢰었다. 폐하, 식사 준비가 다 되었답니다. 알았다. 유리왕은 사자들과 접빈실로 갔다. 치엽은 버선발로 나와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대왕님께옵서, 너무 곤하게 주무시어 깨우지 않았습니다. 잘했어요. 유리왕은 방으로 들어갔다. 상이 두 개였다. 그것들에는 산해진미가 가득했다. 술도 준비되어 있었다. 유리왕은 먼저 한 상 앞에 좌정했다. 치엽과 사자들은 다른 상에 앉았다. 유리왕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유리왕은 말했다. 여기는 사가(私家)입니다. 나는 손님에 불과해요. 주인 치 공(公)은 내 앞에 앉아요. 그리고 사자들도 이리 와, 합석을 하는 게 좋겠어요. 황공하옵니다. 치엽은 마지못해 유리왕의 맞은편에 앉았다. 사자들도 그들 사이에 착석했다. 유리왕은 술잔부터 들었다. 치 공, 한잔 따르오. 난 밥이 들어가면 술맛이 없어요. 폐하, 받으시옵소서. 치엽은 무릎을 꿇고 유리왕에게 술을 따랐다. 유리왕은 술을 단숨에 목안에 탁 털어 넣었다. 유리왕은 치엽에게 술잔을 넘겼다. 사자들에게도 돌렸다. 유리왕은 의도적으로 술자리를 자연스런 분위기로 이끌어 가고 있었다. 유리왕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편하게 행동해요. 오늘은 격식을 떠나 흥건히 취해 봅시다. 치엽과 사자들은 꿇었던 무릎을 풀고 편히 앉았다. 술잔이 계속 돌고 돌았다. 좋은 곡주였지만 독주였다. 일행의 얼굴로 붉은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유리왕은 소탈한 술꾼의 모습이었다. 많이 웃고 떠들었다. 유리왕은 치엽의 손을 덥석 잡았다. 치 공, 내 장인이 되어 주시오. 치엽은 입으로 가져가던 술잔을 멈췄다. 대왕님, 무슨 말씀이시온지요. 새벽에 정원에서 치성 드리는 치희를 봤소이다……. 유리왕은 전 왕비 국향과 현 왕비 화희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신이 사냥을 다니는 이유도 설명했다. 치희는 몽매에도 잊지 못하는 국향과 닮지 않은 곳이 없다고 말했다. 이대로 떠나면 국향으로 인하여, 아니 치희 때문에, 더 큰 고통의 나날이 연속될 것이라 첨언하였다. 유리왕은 체면도 잊고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치엽은 유리왕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거쿨진 몸에 잘 생긴 유리왕은 다소 감상적이었다. 그러나 소탈하고 인간미가 있었다. 치희를 잘 보살피며 사랑해 줄 것 같았다. 뿐만이 아니었다. 고구려는 강성했다. 가능성이 무한한 나라였다. 그런 국가의 왕이었다. 반면 자신은 한나라로 돌아갈 길이 막혀 있었다. 고구려의 신민이 되어야 할 터였다. 딸은 차비(次妃)로 들어가는 것이었지만, 역시 국모가 아니겠는가. 유리왕은 지금의 왕비를 싫어하고 있었다. 딸은 잘하면 나중에 원비(元妃)가 될 수도 있을 터였다. 게다가 지금 발붙이고 사는 국왕의 간청이었다. 어쩌면 왕명일 수도 있었다.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잘못하면 양쪽에 발을 붙일 수 없는 신세가 될지도 몰랐다. 치엽은 마음을 굳혀 가고 있었다. 폐하, 신의 여식을 잘 돌봐 주옵소서. 유리왕은 치엽의 두 손을 힘껏 움켜쥐었다. 고맙소. 혼인 날짜는 언제로 잡으면 좋겠습니까? ……. 유리왕은 잠시 생각했다. 화희와는 아직도 살을 섞지 않고 있었다. 독살스러운 화희가 가만있지 않을 터였다. 무슨 행패나 어떤 술수를 벌일지 알 수 없었다. 유리왕은 말했다. 내일 아침이 좋겠습니다. 궁궐을 계속 비워 둘 수는 없어요. 여기서 우선 약식 혼례를 올리고, 바로 따님과 함께 졸본에 가, 나중에 정식으로 예식을 올리는 것이 좋을 것 같으오. 오늘밤에 따님을 잘 설득하여 주시오. 신의 여식은 제가 죽으라면 죽는시늉이라도 합니다. 알고 있어요. 하여, 이렇게 부탁드리는 것이오. 신은 이만 일어나겠사옵니다. 희를 만나 봐야겠습니다. 잘 부탁드리오. 폐하, 염려 마옵소서. 유리왕은 술을 그만 마셨다. 간단한 요기를 하고 침소로 들었다. 유리왕은 절세가인, 그것도 국향과 닮은 여자를 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둥둥 떠올랐다. 밤새 뒤치락거리다 새벽에서야 설핏 잠에 들었다. 정원이었다.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벌과 나비가 그것들 사이를 활주했다. 유리왕은 명주로 눈을 가렸다. 유리왕은 순례가 되어 국향과 치희를 좇았다. 명주를 내리면 그네들이 안겨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향내가 진동했다. 유리왕은 행복했다. 그런데 정원 저편에서 화희가 독사의 눈으로 찍어 보고 있었다. 유리왕은 치희를 데리고 왕궁으로 돌아갔다. 전갈을 받은 화희는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이미 짐작한 일이었다. 유리왕은 괘념치 않았다. 다만 치희가 표독스런 원비 밑에서, 어떻게 차비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 그것이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여염집의 경우에 여자가 질투를 하면 사형감이었다. 일부다처제가 일반화된 사회에서 남자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는 악법이었다. 그러나 왕은 달랐다. 화희를 내치면, 골천 지역의 호족이었던, 대가 화욱을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화욱은 역심을 품고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아직까지 화희를 중궁전에 남겨 두었는지도 몰랐다. 유리왕은 신혼의 달콤함에 흠씬 젖어 있었다. 달고 단 정사를 끝내고, 풀어져 등을 돌리고 누운, 치희의 몸은 환상적이었다. 치희가 유리왕에게 몸을 돌렸다. 원비께서 저를 너무 미워하는 것 같아요. 왕실이 편안해야 할 터인데……. 신첩이 노력해 보겠습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잘할 것으로 믿으오. 그만 잡시다. 유리왕의 눈앞에 화희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춘흥이 깨져 버렸다. 유리왕은 치희를 보았다. 그녀는 곧, 고른 숨을 내쉬며, 잠에 빠져들었다. 치희는 고분고분하며 살갑기 그지없었다. 심성도 국향의 일면을 닮아 있었다. 치희는 자신과 국향 사이에 난 도절을 친자식처럼 돌봤다. 도절은 왕비 국향과는 달리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의 강한 유전인자를 받고 태어난 모양이었다. 문제는 화희였다. 도절을 냉혈동물처럼 대했다. 어떤 때는 먹이를 앞에 둔 야수처럼 노려보기도 하였다. 도절은 화희를 보면 슬금슬금 피했다. 도절은 정서가 불안한 편이었다. 집중력이 부족했다. 터무니없이 떼를 쓰기도 하였다. 도절은 치희가 들어오자 안정을 찾는 듯했다.

 

 

몇 달이 흘렀다. 화희는 거의 눈이 뒤집혀 있었다. 제 정신이 아닌 듯했다. 유리왕은 자신의 처소에는 아예 발길을 끊은 상태였다. 화희는 아직도 처녀의 몸이었다. 참는 데에는 한도가 있었다. 화희는 독기가 머리 꼭대기에 올라 있었다. 화희는 치희의 시녀들을 괴롭혔다. 툭하면 욕설에 매질이었다. 그것도 치희가 보는 앞에서였다. 치희는 난처하여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차라리 자신이 당하는 것이 낳을 것 같았다. 한 번은 치희의 침실에 독사를 넣어 난리를 피운 적도 있었다. 치희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야 했다. 부귀영화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그런데 형극의 길이었다. 유리왕은 보다 못해 양곡(涼谷)의 동쪽과 서쪽에 두 궁을 지었다. 왕은 동궁에 화희를, 서궁에 치희를 거처하게 하였다. 유리왕은, 화희의 부친 화욱도,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져 있음을 감지했다. 세월이 흐르면, 화희의 강샘도 잠잠해지겠지 하며, 수수방관하였다. 그것이 피차에 이로울 터였다. 유리왕은 사자들과 다시 기산으로 사냥을 떠나기로 하였다. 사냥을 마치고 호걸인 장인 치엽을 만나 마음의 그늘을 걷어 내고 싶었다. 그것을 치희에게 밝혔다. 치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번만은…… 아무래도……. 유리왕은 한 팔로 치희를 감싸 안았다. 걱정 말아요. 내 곧 돌아오리다. 폐하, 몸조심하세요. 하하, 내 걱정은 말아요. 유리왕은 이번에도 사자 옥지, 구추, 도조, 그리고 호위 군사들과 기산으로 말을 달렸다. 3일 만에 사냥을 마치고 치엽의 집에 갔다. 가옥은 텅, 비어 있었다. 옆집에 물어 보니, 치엽은 복권되어 바로 오늘 아침에, 한나라로 떠났다는 거였다. 천지신명이 치희의 소망을 들어준 것이었다. 아무튼 한 발 늦은 거였다. 유리왕 일행은, 치엽의 집에 하룻밤 유하고, 다시 사냥을 계속하기로 하였다. 화희는 이참에 치희를 내쫓을 계책을 세웠다. 화희는 사촌 오빠를 불러들였다. 사촌은 가끔 화희를 만나러 동궁에 들렸다. 그는 화희와 화욱 간의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사촌은 왕비와 가깝다는 것을 앞세워 온갖 행패를 다 부리고 다녔다. 성안에서 그를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 화희와 사촌은 한동안 은밀히 속삭였다. 해가 지고 있었다. 사촌은 동궁을 나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다. 사람은 비슷한 이들끼리 어울리는 법이었다. 사촌은 몸이 날랜 한 왈패를 점찍어 찾았다. 왈패는 반갑게 맞았다. 사촌은 왈패를 술집으로 끌고 갔다. 그는 왈패에게 술을 얼마간 퍼마시게 했다. 왈패는 적당히 술기운에 젖어 들었다. 사촌은 왈패의 귀를 끌어 당겨 무엇인가 속삭였다. 화희가 전한 패물도 건네주었다. 왈패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아, 뭘, 이런 것까지……. 화희의 사촌은 목소리에 힘을 넣었다. 치희도 왕비의 하나가 아닌가. 게다가 대왕이 끔찍이 위하는 여자야. 절대 치희의 몸을 건드려서는 안 되네. 너와 나의 목숨이 달려 있어. 유리왕은 왕비님에게 뭔가 꼬투리를 잡기 위해 혈안이야. 잘못하면 왕비님도 무사하지 못할 수가 있지. 붙잡혀 고문을 당하게 되면, 너도 네 입을 믿지 못할 것이야. 치희가 비명을 지르면 바로 달려 나와. 내가 모두 알아서 할 테니까. 왈패는 그제야 긴장한 표정이었다. 잘 알겠습니다. 화희의 사촌은 왈패를 데리고 양곡으로 갔다. 두 궁을 지키는 경비병들은 사촌을 잘 알고 있었다. 사촌과 왈패는, 동궁으로 가는 척하다가, 서궁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들은 야음을 틈타 치희의 궁에 접근했다. 사촌은 보초를 서고 왈패는 담을 넘었다. 다람쥐 같았다. 거의 신기에 가까웠다. 잠시 후였다. 치희의 숨넘어가는 소리가 담을 넘었다. 네 이놈, 누구냐?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썩 물러가지 못하겠는가! 경비병들이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왈패는 다시 담을 넘어 어둠 속에 자취를 감추었다. 사촌도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치희의 시중을 들던 시녀 하나가 배시시 웃고 있었다. 화희가 서궁에 심어 놓은 심복이었다. 날이 밝았다. 화희는 기세등등하여 시녀들을 이끌고 서궁으로 갔다. 화희는 치희를 보자, 도끼눈을 뜨며, 양손을 허리에 척 올렸다. 화희는 치희를 매서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일종의 시위였다. 치희는 집히는 것이 있었다. 전날 밤의 사건은 분명 화희의 농간이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어쩌면 저럴 수가 있나 싶었다. 치희는 대거리하고 싶지가 않았다. 치희는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화희의 입가로 냉소가 번졌다. 흥, 그래도 양심은 있는 모양이지. 치희는 화희를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무슨 말씀인지요? 왕이 출타한 사이에 외간남자를 들여놓고 뻔뻔스럽게. 불한당이었습니다. 아니, 그런 자가, 어떻게, 언감생심, 차비의 궁을 넘을 수 있담. 치희는 화희를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누군가의 간계이겠지요. 화희는 한 시녀에게 시선을 던졌다. 네가 어제 차비의 시중을 들었겠다? 시녀는 치희의 눈치를 살피며 받았다. 예, 그러하옵니다. 차비의 침구를 펴 주려다 남정네가 숨어 있는 것을 보았다 했지? 예. 당황한 차비는 호들갑을 떨며 소리쳤다고 했지. 시녀는 어금니를 꽉 사려 물었다. 예, 맞습니다! 화희는 득의만면하여 치희를 찍어 보았다. 더 할 말이 있나? 치희는 차갑게 웃었다. 허허, 없습니다. 네 조부는 한나라의 역적이지? 부친은 사형을 당하고, 너는 몸종이 되었어야 했어! 하면, 너는 한가(漢家)의 비첩(婢妾)이 아니더냐? 주제에 왕을 현혹시키어 궁을 차지하고, 그것도 모자라 다른 남정네를 끌어들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왕을 볼 것이냐! 이쯤에서 네 주제를 알고 물러남이 좋을 것이다! ……. 화희는 억울하게 타계한 저승의 조상까지 싸잡아 욕하고 있었다. 치희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전혀 앞길이 보이지 않았다. 치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술을 깨물었다. 아랫입술에 선혈이 맺혔다. 치희는 눈을 감았다. 유리왕과 함께 한 얼마간의 세월이 눈앞에 흘렀다. 다정다감하고 좋은 남편이었다. 그러나 한 나라의 왕이었다. 그런 사람을 이렇게 여자들 틈바구니에서 갈팡질팡하게 놔둘 수는 없었다. 사냥도 그래서 떠난 것이 아니던가. 치희는 자신의 전정에도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무슨 누명으로 왕에게 버림받고 비참하게 죽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화희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치희는 눈을 떴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돌아섰다. 치희는 자신의 방으로 가 간단한 소지품을 챙겨 말에 실었다. 치희는 기산으로 말을 달렸다. 맞은편에서 부친의 가신이 말을 몰아오고 있었다. 치희는 웬일인가 하여, 급히 말고삐를 잡아당겨 멈추었다. 가신은 치희 앞에 와 섰다. 가신은, 치희의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보며, 치엽의 일을 알렸다. 치희는 착잡한 표정으로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얼마 후였다. 치희는 앞장 서, 가신과 함께 한나라를 향해, 말을 달리고 있었다.

 

유리왕은 사냥에서 7일 만에 돌아왔다. 왕은 치희부터 찾았다. 서궁은 텅, 비어 있었다. 치희의 시녀들을 통해, 사건의 전모를 파악한 유리왕은, 전신에 힘이 쫙 빠졌다. 화희를 당장 요절내고 싶었다. 허리에 찬 칼집을 힘껏 움켜쥐었다. 유리왕은 동궁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가다 생각하니, 그게 아니었다. 한 번 참으면 살인도 피할 수 있다고 했던가. 일을 복잡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유리왕은 말에 올라 서궁을 빠져나갔다. 사자들과 호위무사들이 뒤를 따랐다. 유리왕은 우선 기산으로 말을 달렸다. 어쩌면 거기에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기산에서 부친의 가신이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유리왕은 치희가 부친의 가신과 함께 한나라로 간 것을 모르고 있었다. 유리왕은 채찍질을 가하며 바삐 말을 몰았다. 유리왕 일행이 기산 치엽의 집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었다. 유리왕은 곧바로 요동을 행해 쉬지 않고 말을 몰았다. 국경이 다가서고 있었다. 멀리서 수비대가 창을 들고 유리왕 일행을 노려보고 있었다. 유리왕은 그것을 무시하고 말을 달렸다. 구추가 외쳤다. 폐하, 더 이상 가시면 아니 되옵니다. 안될 게 무엇이더냐. 사직을 보존하셔야 합니다. ……. 유리왕은 정신이 번쩍 들어 말고삐를 잡아 당겼다. 말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멈췄다. 한나라는 날로 강성하여지는 고구려를 경계하고 있었다. 유리왕은 한숨과 함께 뱉었다. 그만 돌아가자……. 사자들은 고개를 숙였다. 폐하, 황공하옵니다. 유리왕은 말을 돌렸다. 유리왕은 말에서 내려 온 길을 되짚어 터덜터덜 걸었다. 산 중턱의 한 계곡에 이르렀다. 봄이 한창이었다. 감미로운 미풍이 전신에 감겨들었다. 물가로 진달래와 벚꽃이 만발하여 있었다. 짝짓기 철이기도 하였다. 종달새 한 쌍이, 하늘과 땅을 수직으로 오르내리며 사랑을 속삭이더니, 자취를 감췄다. 천지는 새로운 생명의 기운에 충만하여 있었다. 유리왕은 오히려 쓸쓸한 심회만 들었다. 유리왕은 바위에 앉았다. 눈을 감고 양손을 깍지 껴 머리에 얹었다. 그리고 얼굴을 무릎 사이에 파묻었다. 유리왕은 힘없이 말했다. 짐 혼자 있고 싶다. 사자들은 허리를 굽혔다. 알겠사옵니다. 사자들은 계곡 안으로 들었다. 유리왕을 볼 수 있는 거리만큼만 떨어졌다. 유리왕은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치희와 즐거웠던 추억들이 머리 안쪽에서 원무 했다. 왕의 볼로 뜨거운 액체가 계속 흘렀다. 가까운 곳에서 꾀꼬리 소리가 들렸다. 유리왕은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찾았다. 바로 앞에 있는 나무에서 꾀꼬리가 울고 있었다. 뒤에서 다른 꾀꼬리가 화답을 하고 있었다. 곧 뒤편에 있던 꾀꼬리는 앞쪽으로 날아갔다. 수놈이었다. 그러니까 앞에 있는 꾀꼬리는 암놈일 터였다. 둘은 한데 어울리더니, 날아 수풀 속으로, 종달새들처럼 몸을 감추었다. 미물도 봄을 맞아, 저렇게 좋아 난리인데, 자신은 무엇인가 싶었다. 더구나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다는 왕이 아니던가. 유리왕은 나직이 읊조리기 시작했다.

 

편편황조(翩翩黃鳥)

자웅상의(雌雄相依)

염아지독(念我之獨)

수기여귀(誰其與歸)

 

창공을 나는 암수 꾀꼬리는 다정한 데, 외로운 나는, 누구와 함께 왕궁으로 돌아갈 것인가. 그런 내용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꾀꼬리에 이입하여 노래로 지어 불렀던 것이다. 유리왕은 몇 번이고 황조가(黃鳥歌)를 되뇄다. 유리왕은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턱을 치켜들어 허공을 봤다. 저 멀리서 동명성왕이 노려보고 있었다. 자신은 왕이었다. 가서 할 일이 많은 사람이었다. 선왕의 유업을 이룩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여자들 틈바구니에서 중심을 못 잡고 갈팡질팡하고 있어서는 안 될 몸이었다. 유리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궁궐로 향했다. 등 뒤에서 꾀꼬리의 울음소리가 가물거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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