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연등 드높이 내걸고 / 김연수
보름달이라도 떠오른 것일까, 노란빛이 환하게 마음을 밝혔다. 명부전 돌아가는 진회색 축대 밑에 애기똥풀이 하늘 높이 노란빛 꽃을 피웠다. 아기 손바닥 같은 초록 잎이 더운 공기 머금은 봄바람에 한들한들 흔들렸다. 가느다란 꽃대를 따라 애기똥풀 노란 꽃이 끄덕끄덕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흔들었다. 노란 꽃잎 가장자리가 흐려지면서 노란색과 초록색과 진회색이 서로 경계도 없이 뒤엉켜 버렸다. 꼭꼭 막아둔 마음의 가장자리도 그렇게 풀리는 모양이었다. 대웅전 마당으로 향하던 예정은 그만 오후 햇살이 옴큼옴큼 내려앉은 명부전 섬돌 한 쪽에 앉아 버렸다. 애기똥풀 꽃대처럼 여윈 예정의 그림자가 섬돌의 윤곽을 따라 비뚜름하게 명부전 맞배지붕 날카로운 그림자 사이로 섞여들고 있었다. 봄바람은 애기똥풀 노란 꽃잎이나 흔들 줄 알았지, 예정의 마른 그림자나 떨리게 했지, 사래에 매달린 풍경 속 눈뜬 붕어 한 마리 제대로 흔들지 못할 만큼 기운이 없었다. 꽃 향기 훈훈한 봄볕을 너무 머금었는지 바람은 저 혼자서 무거워져 조금 불어오다가는 둥근 기와 박은 토담 모양으로 펼쳐진 비질 자국이 여전한 명부전 앞마당만 공연히 한 번 더 쓸어버렸다. 그리고 더운 바람은 차령산맥 바로 밑이라 더 이상 자라지 않고 가늘기만 한 대나무들이 옹기종기 모인 명부전 뒤쪽으로 돌아 들어갔다. 북한계선까지 치밀고 올라온 대나무들은 예정이 지금 머무는 곳이 온대 지역이라는 사실을 숨김없이 보여줬다. 하지만 예정의 마음은 사스레나무와 누운잣나무가 자라는 추운 지방의 풍경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그 바람 끊어진 자리 어디쯤에서 시선은 자꾸만 아물거리기만 했다. 머뭇머뭇 예정의 시선이 고인 자리 그 너머로 보이는 대웅전 앞마당에는 벌써 파란색, 초록색, 분홍색, 빨간색, 노란색 등이 빼곡이 들어찼다. 각 면에 하늘과 땅을 가리키는 어린 싯다르타의 그림, 봉축이란 두 글자, 卍자 등을 그려 넣은 팔각등도 있었고 진짜 연꽃처럼 얇은 종이 꽃잎을 풍성하게 붙여 만든 연꽃등도 있었고 형형색색의 원색 주름등과 세로로 번갈아 가며 다른 색으로 치장한 값싼 수박등도 있었다. 국회의원인 신도회 회장이나 운수회사 사장인 포교사 같은 사람들은 몇 백 만원도 넘는 큰 팔각등을 대웅전 안에다 매달기도 했다. 그러나 대개 일반 신도들은 투박한 명조체로 '부처님오신날'이라고 인쇄한, 비치볼 모양의 값싼 수박등부터 하얀 꼬리표를 매달게 마련이었다. 울긋불긋한 등 끝에 하얗게 매달린 종이들은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같은 방향으로 흔들렸다. 사람들이 등을 내걸면서 소망하는 바도 대개 그처럼 서로 비슷했다. 그 절은 본사였기 때문에 초파일이면 운집종이라도 울린 것처럼 사람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스님들은 물론 신도들도 벌써 한 달 전부터 준비해야만 하는 일이 많았다. 예정도 지장회 법회가 끝난 다음인 음력 19일부터 신도들과 함께 초파일 준비를 도왔다. 이제 어느 정도 절 살림에 눈이 밝아졌다고 해서 공양주 보살의 밥 보시를 도우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긴 해도 시간이 날 때면 예정도 관음회, 지장회 등 여신도 위주의 신행단체 회원들과 함께 요사 창고에 넣어둔 장엄등을 손질하고 새로 연등을 만드는 연등 공양에 참여했다. 보통 때 지장회는 불사에 보탬이 되도록 수의 짓는 일을 해왔지만, 초파일을 앞두고서까지 수의를 지을 수는 없다고 해 일찌감치 삼베를 손에서 내려놓았다. 예정은 연등 만드는 일이 아무래도 바느질하는 일만 못한 것 같아 영 손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름도 무색하게 함께 일하는 즐거움에 하루 종일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적묵당 서늘한 마루방 안에 앉아 그런 심정을 내색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나이 많은 보살들의 얘기를 듣는 사이 사이에 예정은 수의를 지을 때면 늘 읊조리던 그 열 여섯 자를 중얼거렸다. 어떤 죄라도 짓지 말며 무릇 선이란 받들고 행하며 스스로 그 뜻을 깨끗하게 한다면 그게 바로 부처님의 가르친 모든 바라. 열심히 열심히 그 말을 되뇌며 연등을 만들었건만 허전한 마음만은 영영 메워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수의를 지을 때만 해도 원하는 바로 그 곳에 들어 앉아있던 마음자리가 며칠 연등을 만드느라 풀어지더니 그만 초파일에 뜻하지 않은 쪽으로 터져 나왔다. 제비 맞으러 나온 애기똥풀이 하늘 높이 노란 꽃잎을 내걸었기 때문이었다. 그 줄기를 잘랐다면 아기 똥 같은 노란 즙이 배어 나왔겠지. 따가운 그 노란 즙이 예정더러 아프지 말라고, 아프지 말라고 달래주었겠지. 예정이 아니라, 그 아기 똥 같은, 따가운 노란 즙이 예정의 아픈 마음을 살살 만져주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예정은 그만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날은 사월초파일, 불두화 짧은 그림자도 그 꽃만큼 또렷해지는 시절이었다.
밤의 산길을 걸어 가다보면 사람은 과연 어디까지가 자신이고 어디까지가 자신이 아닌지 알게 된다. 빛이 없을 때 사람의 눈이란 그저 코앞만을 볼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현실의 공간 역시 손을 뻗거나 발을 내딛어서 닿을 수 있는 그 정도까지일 뿐이다. 그러고 나면 자신과 세계는 완벽하게 분리된다. 두려움은 자신이 이 세상 어느 것과도 연결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 일어난다. 어두운 밤, 시야에서 멀어져 윤곽을 분간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은 더 이상 매화나무라거나, 백송 가지라거나, 다래 열매라고 할 수 없었다. 칠흑처럼 어두운 산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 등뒤에 있을 때, 혹은 그 경계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멀리 있을 때, 사물들은 가슴을 섬뜩하게 만드는 비명이기도 하고 거대한 손아귀이기도 하고 발목을 감는 올무이기도 하다. 밤의 산길에서 바라볼 때, 이 세계는 바라보는 사람만 뚝 떼어놓고 저희들끼리만 서로 경계 없이 녹아든다. 사람의 감각은 여전히 시간과 공간의 흐름에 따라 직선적으로 흐르지만, 어둠의 공간은 하나로 펼쳐진 직선적인 공간이 아니라 주름이 잡혀 서로 말려 들어간 굴곡의 공간이다. 그 공간에서 사물은 하나로 존재하기도 하고 둘로 존재하기도 하지만, 외로 비켜선 사람만 오로지 하나일 뿐이다. 그날 봉우가 걸어가던 산길 역시 모든 게 하나이면서 둘인 비현실의 공간이었다. 그렇게 얼마 걸어가지 않아 덜컥 겁이 밀려들었으므로, 그러나 거기서 다시 돌아가기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므로 손전등이 아니라 차라리 M16 소총을 가져왔어야 옳았다는 생각이 얼른 봉우의 머리를 스쳤다. 사물의 윤곽이 모두 지워지는 밤의 산길에서 어깨에 걸고 다니는 국방색 손전등의 불빛은 봉우의 시야만 좁힐 뿐이었다. 손전등의 둥글고 얼룩진 빛은 그 빛이 닿는 곳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을 시커멓게 덧칠해버리는 효과를 지녔다. 알 수 없는 뭔가의 신원을 확인할 때는 손전등이 크게 필요할지 몰라도 산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성가시기만 했다. 어둠 속에서는 다른 사물과 마찬가지로 몸이 완전히 어두워지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려움이 가시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봉우는 손전등을 끄기 전에 산길에서 잠깐 벗어나 숲으로 들어갔다. 지팡이로 삼을 만한 나뭇가지를 하나 마련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땅바닥을 살폈지만, 얼른 마땅한 게 눈에 들어오지 않아 머뭇거리던 차에 봉우의 눈에 살구나무가 보였다. 언젠가 한 번 써먹겠다고 너하고 나하고 살구나무, 바람 솔솔 소나무, 십리 절반 오리나무, 어쩌구저쩌구하는 노래를 외워둔 게 봉우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일단 살구 보자고 살구나무니까, 밤길에는 산짐승도 그 향내를 피한다고 목탁으로도 만드는 살구나무니까 그래도 마음은 놓일 것 같아 봉우는 불빛을 위로 한 채 손전등을 바닥에 세워 놓고 나무 위로 조금 기어올라가 두 손으로 살구나무 가지를 붙잡고 흔들었다. 그 등살에 몇 안 남은 연분홍 꽃잎 몇 개가 손전등 불빛을 받으며 아래로 떨어졌다. 오랫동안 씨름한 끝에 봉우는 애채를 쳐낸, 한 팔 정도 길이의 살구나무 가지를 하나 구했다. 봉우는 산길로 다시 걸어나와 불을 끄고 손전등을 어깨에 걸었다. 한 순간에 모든 사물이 검은 장막 속으로 사라졌고 봉우는 한 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산길이 놓인 방향이라도 파악하려면 생각보다 더 기다려야만 했다.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을 따라 둘러가자면 두 시간은 족히 걸어가야만 하는 거리였지만, 능선을 가로질러 넘어가면 바로 닿을 수 있는 곳에 목적지가 있었다. 달이 늦게 뜨는 하현 무렵이 아니라 보름이었다면 깊은 밤이라고는 하나 휘파람을 불면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다. 봉우는 싸구려 전자시계의 조명을 밝혀 시간을 확인한 뒤에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달이 뜨려면 아직 세 시간 남짓 남아 있었다. 봉우는 느긋하게 마음먹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멀리 공지선 쪽을 바라봤다. 조금씩 두 사람 정도가 오갈 수 있는 좁은 산길이 주위에 비해 조금 누그러진 검은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별빛이나마 그 빛이 스며든 것인지, 아니면 암흑 속에서 사물들은 서로 구별할 수 있을 만큼의 빛을 뿜어내는 것인지 봉우로서는 알 수 없었다. 빛이라고는 사금파리를 박은 듯 검은 하늘에 흩뿌려진 별빛뿐인데도 어쩌면 가만히 서서 기다린다고 산길이 눈에 들어오는 것일까? 봉우는 필터까지 타 들어간 담배를 발 밑에 떨어뜨려 군홧발로 비벼 끄면서 두 손과 하반신을 바라봤다. 손의 윤곽은 희미하나마 어둠과 구분할 수 있었지만, 눈을 찡그려 살피지 않으면 군화는 잘 보이지 않았다. 봉우는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여기서 돌아가야만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실의에 빠진 친구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심정으로 봉우는 그날 작계지역까지 행군하면서 생각해낸 새 낙서를 떠올렸다. 만에 하나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면 그대는 사과나무를 심을 것인가? 만에 구천 구백 구십 구 지구의 종말은 오지 않는다. 나는 여자친구랑 데이트하러 가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봉우는 주춤거리면서 조금씩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조금 걸어가다 보니 그렇게 걷다가는 두 시간도 더 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봉우는 자신이 어둠 속에 혼자 버려진 듯한 느낌이었다. 온 길을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봉우는 앞으로 계속 걸어갔다. 달이 뜨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예정은 명부전 섬돌에서 일어나 대웅전 쪽으로 걸어갔다. 먼 빛으로 바라보니 이미 등마다 이름표가 줄줄이 내걸렸고 괘불을 세운 야단법석에서는 행사 준비가 한참이었다. 진작부터 자기도 등 하나 내걸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초파일을 맞아 절로 몰려든 사람들에게 공양 베푸는 일이 점심때부터 오후 내내 계속 이어진 탓에 도무지 짬이 나지 않아 그렇게 늦어졌다. 지갑 속의 돈을 어림짐작해보니 이름표를 내걸 수박등이 아직 남아 있을 지 조바심이 났다. 원체 신도들이 많은 본사였는데다가 초파일 천수바라가 유명해 대웅전 앞마당쯤은 사람들이 내건 등으로 너끈히 채울 만한 절이었다. 그래서 얼른 수박등이나 하나 내걸고 향적전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공양주 보살의 강권에 못 이겨 입은 한복 때문에 영 발걸음이 어색하기만 했다. 비 머금은 바람에 철쭉꽃이 무겁게 흔들리듯 가슴에 매달린 옷고름이 춤을 췄다. 초파일이니까 그저 목욕이나 하고 와서 새 옷 정도만 챙겨 입으면 될 줄 알았건만 공양주 보살은 그게 끝내 못마땅한 모양이었는지 시내 다녀오는 길에 한복 한 벌을 빌려왔다. 봄 풀색 치마에 연분홍 저고리가 너무나 화사한 한복이었다. 제등 행렬에 참여하기는커녕 관등도 하지 않으려 드는 게으른 며느리의, 그 꼴에 어울리지도 않는 한복이니 마음껏 입으라는 게 공양주 보살의 말이었다. 하지만 예정이 옷이 없어서 잿빛 승복바지에 같은 색 올 굵은 스웨터만 걸치고 다닌 것만은 아니었기에 영 그 한복이 자기 몫처럼 보이지 않아 극구 사양, 또 사양했다. 공양주 보살의 닦달은 그보다 더 심했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이 좋은 초파일에 꽃보다 더 젊은 예정이 잿빛 옷을 입는 꼴은 못 보겠다는 심사로 공양주 보살은 막무가내였다. 한복을 안 입었다가는 다시는 향적전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으름장과 함께 한복 꾸러미를 객실에 남겨두고 가는 데는 예정으로서도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러나 개발의 편자도 유분수지 자기 꼴에 풀색 치마 연분홍 저고리가 가당키나 하는가 그런 생각이 머리 속에서 끊이지 않았다. 자신이 진달래보다도 환하고 왕머루 덩굴진 잎사귀보다도 더 푸릇푸릇한 젊은 시절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실을 인정하는 게 왜 그리도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인지 예정은 알 수 없었다. 그저 어서 나이가 들었으면 좋으련만, 어서 어서 머리가 새하얗게 세어버리고 살갗도 물기가 말라버려서 누구나 자신을 늙은이로만 봐줬으면 좋으련만, 그런 바램뿐이었다. 처음 예정이 자신도 지장회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도 지장회를 이끄는 공양주 보살은 기가 차다는 듯이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공양주 보살은 자신의 웃음이 뭘 뜻하는지 설명하는 대신에 살아온 내력을 쭉 늘어놓았다. 공양주 보살은 일찌감치 남편을 여읜 뒤, 시내 시장에서 어물전을 하면서 발치에서 떠나지 않는 송이버섯을 키우는 늙은 소나무처럼 유복자를 포함한 두 아들 뒷바라지로 세월을 보냈다. 엉겁결에 남편의 가게를 그대로 맡게 됐지만, 공양주 보살에게 세상에서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다면 그게 바로 어물전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양주 보살의 취향 따위는 고려할 겨를이 없었다. 생선가게로는 봄 도다리, 여름 농어, 가을 고등어, 겨울 명태 등 사시사철 이런저런 바다 고기들이 들고났다. 게 중에는 건드릴 때마다 활발하게 움직이던 몸으로 들어왔다가 냄새만 잔뜩 풍기고 썩어버린 전복이 있었는가 하면 냉동하지 않아 흐물흐물 몸이 해체되던 옥돔도 있었고 눈부신 바다 속 그 생생한 은빛 비늘 그대로 팔려나간 갈치도 있었다. 오전 10시 문을 열 때면 공양주 보살의 생선가게는 싱싱한 비린내로 가득했고 저녁 8시 문을 닫을 무렵이면 죽어간 생선들의 썩은 내가 진동했다. 밤이면 공양주 보살은 자신이 이미 한 번 죽은 생선들을 또 죽이는 무간지옥의 야차와 같은 꼴이라는 생각 때문에 괴롭기만 했지만 전생에 무슨 업을 지었던 것인지 자고 일어나면 다시 생선의 배를 가르고 토막을 내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 싱싱했던 공양주 보살의 육신에서도 점점 생선 썩은 내가 풍겨나기 시작했다. 공양주 보살이 일하면서도 늘 지장경을 읽는 일을 멈추지 않은 까닭은 그 냄새 때문이었다. 광목이라는 여인으로 태어나 죽은 어머니의 행방을 묻는 지장보살에게 나한으로 환생한 무진의보살은 이렇게 말했다. 너의 어머니가 세상에 있을 때에 어떤 죄업을 지었는가? 지금 지옥에 떨어져서 큰 고통을 겪고 있다. 광목은 말했다. 저의 어머니는 습성이 물고기나 자라 같은 것들을 즐겨 먹었으며, 그중에서도 고기알 같은 것을 많이 먹었습니다. 때로는 굽거나 쪄서 마음껏 먹었으니 아마 그 수를 헤아리면 천만보다 배나 더 될까 싶습니다. 못내 자신에게서 풍기는 썩은 내를 견딜 수 없게 된 공양주 보살은 어느 날부터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그리고 자기도 서원을 하나 세웠는데, 그 덕택에 지금은 절에서 공양주 보살로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런 공양주 보살 생각에 지장회란 자신처럼 지은 죄가 무던하게 많아 지장보살에 기댈 수밖에 없는 늙은 영혼들에게나 어울리는 곳이었다. 공양주 보살은 예정에게 춘향이열무처럼 푸릇푸릇한 처자는 지장회에 들어올 자격이 없다고 단호하게 못 박았다. 사실 지장회에는 환갑을 넘긴 여신도만 입회할 수 있었다. 공양주 보살이 규정까지 들이밀면서 말하자, 예정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서다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곤 그럼 지장회에는 들어가지 않을 테니 수의 짓는 일만은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했다. 처음 지장회 보살들은 곧 죽을 자신들이 입을 생각으로 수의를 짓기 시작했다. 불사에 도움이라도 될까 해서 나이 많은 신도들에게 팔 목적으로 수의를 지은 것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 공양주 보살이 보기에 예정은 자기가 입을 수의를 만들 생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과연 누구를 위해 수의를 만들 것인가, 공양주 보살은 그게 궁금했다. 마음속으로는 섬섬옥수 같은 그 젊은 손에 삼베를 쥐어주는 일만은 피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어찌된 일인지 공양주 보살이 예정에게 수의 짓는 일을 허락한 뒤에는 그런 궁금증이 숨어 있었다. 그 궁금증이 풀렸기에 공양주 보살은 예정에게 풀색 치마와 연분홍 저고리를 떠다 맡겼다. 어쨌거나 초파일은 아기 부처님이 오신 날이 아니던가? 시간이 지나면,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면 공양주 보살이 왜 그렇게 화사한 한복을 입으라고 우겼는지 예정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때는 예정의 아픈 자리도 다 아물 테다. 예정은 불편한 종종걸음으로 형형색색의 등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 접수처를 찾아 두리번거리면서 사람들 사이를 걸어가는 동안, 예정의 파리한 얼굴로 빛과 그늘이 번갈아 드리워졌다. 초파일까지 예정은 모두 세 벌의 수의를 만들었다. 초심자치고는 꽤나 손이 빨랐다. 아니, 그렇다기 보다는 남들과 경우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예정의 머리 위로 어디선가 호적 소리가 흘러나 길게 너울거렸다.
예수와 부처의 차이는? 헤어스타일. 쥐도 새도 모르게 사람을 죽이는 방법은? 쥐와 새의 눈을 가린다. 그는 똑똑했다, 나도 똑똑했다, 문밖의 사람은 나의 똑똑함에 어쩔 줄을 몰랐다, 화장실에서. 진짜 절 좋아하세요? 저는 교회를 좋아해요. 보낼 수 없어, 그럼 주먹낼까? 네가 원한다면 나는 네모할께. 너 남자랑 해봤어? 나는 내 자랑밖에 안 해. 다시 만나줘, 미역 넌 가져. 넌 이쁜 천사, 난 재봉틀 살께. 아기 가졌어, 엄마가 이겼어. 아기가 졌어. 아기 가졌어. 머리 위에서 서걱서걱 들리는 나뭇잎들 서로 비비는 소리를 도무지 견딜 수 없어 봉우는 자기가 만든 낙서들이 하나 둘 머릿속에 떠오를 때마다 입으로 중얼거렸다. 봉우는 걸어가다가 몇 번이나 걸음을 멈췄다. 자신의 발걸음 소리를 따라 쫓아오는 또다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20미터 정도 간격을 두고 그 발걸음 소리는 봉우를 따라왔다. 걷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면 들리는 것은 신갈나무와 벚나무 우듬지에서 잎사귀들이 바람에 서로 몸 비비는 소리뿐이었다. 봉우는 몇 번이나 어깨에 매달아놓았던 손전등을 잡고 어둠 속을 향해 불을 비춰봤다. 누구냐? 너는 누구냐? 하지만 손전등의 불빛이 비치는 어둠 속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뭔가가 있다고 하더라도 손전등 불빛에 보이지는 않을 것이었다. 세상 모든 것이 손전등 불빛이 비치지 못하는 그 너머에 존재하는 듯했으니까. 두서없이 손전등으로 바위나 제비꽃이나 전나무 따위를 비추면서 봉우는 아였던가 어이였던가 그 비슷한 소리를 길게 냈다. 딱히 누구를 부를 심사일 리 없었건만 봉우의 목소리는 애절하게 누군가를 부르는 것 같았다. 대상도 없는 봉우의 호명에 깊은 밤 높은 가지 사이를 떠다니는 바람만 기척을 보내왔다. 따라오려면 따라오라지. 봉우는 귀신 따위는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부귀영화를 누려야 죽음이 무섭지, 당장 제대한 뒤에 어떻게 먹고 살 것인지 밤낮으로 걱정이 끊이지 않는 봉우에게 죽음 따위가 얼마나 깊은 고통인지 느껴질 리가 없었다. 전국낙서문학회 지역지부에서 '나대로'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봉우에게 삶이란 '만반의 준비는? 5천. 평생동지는? 12월 22일' 따위의 말장난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것에 불과했다. 방위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주간지의 독자페이지에 이런 저런 낙서를 지어서 투고하는 일에 열을 올리면서 봉우에게 삶은 더더욱 우스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봉우가 만든 최고의 낙서는 바로 '인생이란? 픽션에 불과하다'였다. 어두운 산길을 걸어가는 자신의 망상이 빚어낸 허상과 직면하니 그야말로 인생은 픽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컨대 인생이란 꼭 20미터 정도 뒤에서 자신을 쫓아오는 저 발자국 소리 같은 것이다. 거기서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손전등을 밝히며 다가가면 또 그 뒤 20미터쯤으로, 더 다가가면 또 그 뒤 20미터쯤으로 물러설 게 분명했다. 따라오려면 따라오라지. 나는 지옥 그 밑바닥까지도 갈 수 있다구. 비틀비틀 굴곡진 산길에 발을 헛디디며, 혹은 튀어나온 돌에 채이며 봉우는 공지선 쪽을 바라봤다. 고갯마루에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고개를 넘어가면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오래된 절이 나올 것이다. 그날 아침 일찍 부대에 출근해 군장을 꾸린 뒤, 작계지역으로 행군에 나선 길에 봉우는 사하촌 초입을 지나쳤다. 대대 ATT 훈련기간이었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몸이 가벼웠던지라 사하촌으로 들어가는 길을 바라보면서 봉우는 이따가 밤에 그 절로 찾아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산길을 타면 세 시간 정도의 거리였으니까 보초를 서지 않는 봉우로서는 취침시간 동안에 충분히 다녀올 수 있었다. 봉우는 몸을 재빠르게 움직였다. 상의가 온통 땀에 젖었다. 산길이 힘에 부쳐서만은 아니었다. 자꾸만 뭔가에 쫓기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밤의 산길에서는 때로 허상도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픽션도 더 없이 절절한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어쨌거나 고갯마루는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다, 라고 봉우는 생각했다.
신묘장구대다라니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야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사다바야 마하사다바야 마하가로. 하얀 장삼에 붉은 가사 녹색 띠를 두른 비구니 스님 둘이 연등이 즐비하게 도열한 대웅전 앞마당 조화 깔린 돗자리 위에서 두 발로 丁자를 짚어가며 겹바라를 추기 시작했고 겨자색 장삼에 붉은 가사를 입은 다른 스님들은 그 뒤에 줄지어 앉았다. 연등을 매달아둔 철사줄 모양으로 호적 소리가 너울거리며 대웅전 주변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천수경을 외는 염불 소리에 맞춰 두 스님은 앞뒤로 움직이면서 바라를 돌렸다. 때로 두 스님의 바라가 서로 부딪히거나 만날 듯 비켜갔고 그때마다 듣는 사람의 가슴을 뜨겁게 문질러대는 쇳소리가 들렸다. 예정은 저도 몰래 호로호로 마라호로 하례 바나마 나바 사라사라 시리시리 소로소로 못쟈못쟈 모다야 모다야 염불을 따라 외웠다. 연꽃의 한 가운데 앉으신 분이 근심과 두려움과 어둠의 바다를 건너 환한 곳으로 너를 데려갈 거야. 온몸이 환한 빛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너를 데려갈 거야. 무서워하지 말고 따라가. 어서 따라가. 예정이 열심히 따라 욀수록 독경 소리는 점점 늘어졌다. 예정의 눈에 좌요잡 우요잡 춤사위를 밟으며 솟구치는 장삼 자락과 함께 재빠르게 돌아가는 두 스님의 움직임이 점점 느려지면서 흡사 하얗고 붉고 푸른 그 빛만 남아 돌아가는 듯했다. 그 울긋불긋 뒤섞이는 빛은 대웅전 앞마당에 걸린 연등의 빛과 뒤엉켜 휘돌기 시작했다. 점점 호적 소리도, 염불 소리도, 연신 예정의 가슴을 문지르던 바라 소리도 조금씩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얗고 붉고 푸른, 그 둥근 빛만 남아 되려 예정더러 아프지 말라고, 너무 아파하지 말라고 말했다. 예정은 이제 그 소리가 무슨 뜻인지, 어디서 흘러나오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처음 예정이 삼베를 재단할 때부터 의아한 마음이 들었던 공양주 보살은 예정이 자리를 비운 사이 지장회 보살들의 쑥덕거림을 들은 뒤에야 그게 수의가 아니라 배냇저고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뜩이나 늙어서 할 일 없이 말 전하기 좋아하는 보살들 보기에 민망하기도 하고 가슴이 벌렁거릴 정도로 놀라기도 해 공양주 보살은 며칠을 두고 혼자서만 끙끙 앓았다. 저승사자도 아니고 배냇저고리 수의를 누구에게 준단 말인가. 누구에게? 혹시? 고민 끝에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꽃다운 나이를 생각해서라도 혼을 내도 아주 크게 혼내는 수밖에 없다고 공양주 보살은 결심했다. 어느날 공양주 보살은 저녁 공양 준비를 끝낸 뒤 예정을 향적전 곁방으로 불렀다. 예정이 자리에 앉자마자 공양주 보살은 예정의 거처에서 가져온 배냇저고리를 집어던졌다. 이게 무슨 짓이냐, 이게 도대체 무슨 해괴한 짓이란 말이냐! 이럴 거면 당장 내려가거라! 공양주 보살은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좀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한다고 결심했지만,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둘은 잠시 아무런 말없이 앉아만 있었다. 예정은 약간 무심한 표정으로 자기가 짓다만 배냇저고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공양주 보살의 입이 열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공양주 보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프지 말아라였다. 아프지 말아라, 너무 아파하지 말아라. 그 말에 예정의 눈썹으로 눈물이 맺혀들었다. 눈물이 예정의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눈물이 턱 끝에 방울 맺혀 곁방 온돌바닥으로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살아 생전 셀 수도 없이 많은 바다짐승들의 숨통을 끊은 사람이야. 손에서 피 비린내가 떠날 날이 없었단다. 그런 나도 이렇게 한 평생 잘 살아오지 않았겠냐? 이제 그만 잊거라. 그 말을 듣는지 마는지 예정은 그저 하염없이 배냇저고리만을 바라볼 뿐, 눈물을 닦지도 훌쩍거리지도 않았다. 공양주 보살은 자기가 제멋대로 던져버린 배냇저고리를 차곡차곡 개켰다. 옷도 제대로 입어보지 못한 아이였을 테니 극락 가는 길에라도 잘 해 입혀서 보내거라. 공양주 보살은 그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하고 훅, 더운 입김과 함께 눈물을 쏟았지만 이내 고목의 껍질처럼 갈라진 손끝으로 눈물을 훔쳤다. 함부로 울어서도 안 되는 법이니까 마음 단단히 먹고 잘 보내도록 해라. 예정은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공양주 보살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은 마음에서 솟구쳐 눈에서 나와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흘러내리는 동안 눈물은 상처를 달랜다. 그래서 눈물은 그렇게 쉽게 마르는 법이다. 어머니를 구하러 무간지옥까지 내려간 지장보살도 눈물을 흘렸을까? 예정은 지장보살의 서원을 떠올렸다. 원하옵노니, 나의 어머니를 영원히 지옥에서 벗어나게 해 주소서. 열세 살을 마치고 다시는 무거운 죄보가 없어 악도에 들어가지 않도록 해 주소서. 시방에 모든 부처님이시여! 자비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제가 어머니를 위하여 일으키는 넓고 큰 서원을 들어주옵소서. 만일 우리 어머니가 삼악도와 미천한 신분과 여인의 몸까지 여의고 영겁토록 보를 다시 받지 않게 된다면, 제가 청정연화목여래의 상 앞에서 맹세하겠습니다. 오늘부터 이 뒤로 백천만억 겁 동안, 세계에 있는 지옥과 삼악도에서 고통받는 모든 중생들을 맹세코 제도하여 지옥, 축생, 아귀에서 영원히 벗어나게 하며 이와 같은 무리들을 모두 다 성불하게 한 뒤에 제가 비로소 올바른 깨달음을 이루겠습니다. 지장보살의 눈물이 노랗고 빨갛고 파란 연등 아래 대웅전 마당으로 하얗고 붉고 푸른 빛과 뒤섞이며 맴돌았다. 그 둥근 빛이 아프지 말아라, 누구도 아프지 말아라 말하며 약지처럼 빙빙 돌면서 사람의 아픈 상처를 달래고 하늘 높이 솟구쳤다.
고갯마루에 올라선 뒤에야 봉우는 자기가 길을 잘못 접어들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고갯마루 너머 반대쪽 계곡에는 봉우가 이제까지 걸어온 것과 똑같은 어둠뿐이었고 기대했던 사하촌의 불빛은 보이지 않았다. 봉우는 그저 눈앞으로 보이는 길을 따라 걸어왔을 뿐, 어디서부터 잘못 걸어온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동서남북 어느 쪽으로 걸어온 것인지 알 수 있다면 다시 돌아가기라도 할텐데, 아직 달도 뜨지 않은 밤에는 도무지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었다. 고갯마루에 선 뒤에야 봉우는 북극성을 찾았다. 북쪽은 봉우가 서 있는 방향에서 오른쪽이었다. 숙영지에서 절은 남쪽 방향이었다. 그러니까 자기가 지금 동쪽을 향해 서 있다면 그건 잘못된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곳은 과연 어디란 말인가? 봉우로서는 알 수 없었다. 소나무 옆 작은 바위에 기대앉아 봉우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성냥불빛이 잠시 봉우의 시야를 가렸다. 봉우는 첫 모금을 길게 내뿜고는 살구나무 지팡이로 바위를 몇 번 두들겼다. 툭툭툭 봉우의 뒤쪽 어딘가에서도 나무 지팡이로 뭔가를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봉우는 화들짝 놀라면서 일어섰다. 귓불 아래에서 맥박 뛰는 소리가 심하게 들렸다. 봉우는 담배를 입에 물고 자기가 걸어온 길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 뭐가 있는지 바라봤다.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둠뿐이었다. 봉우는 한참동안 그 어둠 속을 바라봤다. 바람도 지나가지 않았다. 봉우의 마음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봉우는 이 어두운 산길을 따라 무엇이 자신을 따라왔는지 알 수 있었다. 아니야, 나를 따라와서는 안돼. 니가 올 곳은 여기가 아니야. 다른 곳이야. 턱 쪽으로 소름이 쫙 끼쳐 올랐다. 아니야, 여기가 아니야. 나를 따라와서는 안돼. 한 번 더 봉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너는 시덥지 않은 주간지에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낙서 따위나 투고하는 인간에 불과하지. 어디선가 그런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봉우는 한 걸음도 더 떼어놓을 수 없었다. 이 세상이 얼마나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지 하나도 모르는 어릿광대에 불과하지. 그저 삶은 픽션에 불과하다는 말이나 만들어놓고 정말 멋지다고 혼자 생각하는 바보에 불과하지. 뱃속에서 아기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멍청이에 불과하지. 아니야, 그렇지 않아. 봉우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봉우는 자기 목소리에 자기가 놀라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건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예정이 했던 소리였다. 초파일에 시내 다방을 빌려서 낙서화전을 할 테니 그날만은 꼭 절에서 내려와 달라는 말을 전하러 찾아갔을 때 예정은 그렇게 말했다. 너는 내 삶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아. 그깐 낙서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야. 지금 당장 나한테 해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데. 구름 속에 숨어 있는 B, 5월 5일을 좋아하는 I, 수박에서 귀찮은 것 C, 모기가 먹는 것은 P, 당신의 머리 속엔 E, 닭이 낳는 것은 R, 밤 말을 엿듣는 것은 G, 입고 빨기 쉬운 T, 기침이 나올 때는 H, 깊은 밤 골목길 조심해야 할 곳은 D,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U, 바로 너야. 니가 아파하지 않으면 좋겠어, 제발. 봉우는 그 말을 예정에게 전하고 싶었다. 절로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겠다고 말하는 예정에게 너무 오랫동안 아프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었다. 봉우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자기는 아프지 않을 줄 알았으니까 그런 말을 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기만은 어두운 산길에 혼자 버려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믿었으니까 예정더러 아프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봉우는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어두운 산길을 혼자서 걸어오면서도 한 번도 무섭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무섭다는 느낌이 들었다. 밤의 산길에서 길을 잃은 봉우는 혼자였다. 비로소 봉우는 눈으로 바라볼 수 있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몸뚱어리까지만을 자신으로 불러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밤의 산길에서 봉우는 매화나무이기도 하고 백송 가지이기도 하고 다래 열매이기도 했다. 봉우는 앞서 걸어가는 자신이기도 했고 자신의 뒤를 쫓은 뭔가이기도 했고 살아 있는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이기도 했고 모든 죽은 존재이기도 했다. 봉우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기가 죽으면서 봉우의 마음속에서도 뭔가가 죽어 나갔다. 그 자리가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봉우는 무서웠다. 자기도 곧 죽을 것만 같았다. 오늘 같은 날도 과연 달이 뜰까? 봉우는 체념한 듯 산길에 몸을 뉘였다. 봉우와 산길과 어둠이 모두 하나로 뒤섞여들면서 꼭꼭 닫아뒀던 마음자리 한쪽에 어둠 속으로 풀어졌다.
파란색, 초록색, 분홍색, 빨간색, 노란색 연등이 하오의 햇살을 저마다 물들였다. 햇살은 그 빛깔이 좋았는지 대웅전 마당을 빠져나갈 마음이 없는 듯 보였다. 예정은 청년회원들에게 연등을 하나 걸려고 하니 접수처를 알려달라고 말했다. 청년들은 접는 사다리와 의자를 이용해 철사줄에 연등을 다느라 정신이 없었다. 의자 밑에서 연등을 다는 모습을 올려다보던 한 청년이 예정을 돌아봤다. 손가락으로 탑 옆쪽을 가리키려다가 따라오세요, 라고 말하며 예정을 잡아끌었다. 오월의 바람이 청년의 긴 머리칼을 살랑살랑 들어올렸다. 아까는 밥 잘 먹었습니다. 청년이 힐끗 돌아보면서 예정에게 말했다. 한복이 신경 쓰여 조심스럽게 걸어가던 예정은 갑작스런 청년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예, 예라고 말하며 머리를 숙였다. 청년은 예정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연등을 다느라 어깨가 뻐근한지 두 팔을 휘휘 돌리면서 아까 그 비빔밥 말이에요, 매년 먹을 때마다 절밥이 좋아진단 말이에요, 이러다간 큰일나겠어요, 라고 말했다. 그럼 자주 오세요, 우린 매일 그런 밥 먹는 걸요, 라고 예정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럴려면 머리 깎아야 되잖아요, 라고 말하며 청년은 씩 웃었다. 여기에요. 청년이 가리키는 곳에는 불전함과 연등접수처가 있었다. 예정은 연꽃등으로 하기로 했다. 지갑을 톡톡 털어야 하긴 했지만, 그 정도는 내걸어야만 할 것 같았다. 접수처에 앉은 사람은 붉은 연등 하나와 꼬리표를 예정에게 건넸다. 예정은 붉은색이 아니라 노란색으로 달라고 말했다. 예정이 연등을 받기도 전에 청년이 먼저 연등을 받아들었다. 어서 이름을 쓰세요, 라고 청년이 말했다. 예정은 접수처에서 사인펜을 빌려 꼬리표를 바라봤다. 바람에 밀려 꼬리표 한쪽이 자꾸만 말려 올라가려고 했다. 예정은 오른손바닥으로 꼬리표 아래쪽 모서리를 누르고 봉우의 이름을 썼다. 그리고 망설이다가 그 옆에 우리 아기라고 썼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예정과 봉우도 이 세상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가게 되면 그 아이와 만날 것이다. 그때까지 아이는 마음속에 늘 머물 것이다. 예정은 사인펜을 내려놓고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몸을 폈다. 그럼 이리로 오세요. 청년이 말했다. 어디다 걸어놓을까요? 연등 거는 일은 제 담당이니까 제일 좋은 곳에 걸어드릴께요. 둘은 형형색색의 연등이 내걸린 대웅전 앞마당을 두리번거렸다. 저기 탑 옆에 걸면 어떨까요? 이따가 제등행렬 나갈 때도 볼 수 있으니까 제일 좋은 자리잖아요. 청년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면서 말했다. 예정은 청년의 호의가 점점 부담스러워지지 않았다. 예정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청년은 탑 쪽으로 걸어갔다. 이따가 제등행렬에도 나올 건가요? 글쎄요, 향적전에 일이 많아서. 일은 뒀다가 하면 되잖아요. 초파일에 등 하나 들고 차도로 걸어다니는 거죠, 언제 그러겠어요? 청년은 쉴새없이 중얼거렸다. 탑 옆에 도착한 청년은 이리저리 재보더니 마땅한 자리를 찾았는지 멀리서 등을 내거는 일을 하고 있는 다른 청년들에게 소리쳤다. 이 봐, 그거 들고 빨리 와 봐. 여기 급행으로 달아 드려야할 분이 생겼으니까. 점심을 맛있게 먹었으면 밥값을 해야할 것 아니야. 청년의 고함 소리에 다른 청년들이 입을 삐쭉거리더니 뭐라고 놀려댔다. 조금 뒤에 직접 의자와 풀을 가져온 청년은 예정에게 꼬리표를 달라고 말했다. 의자 위로 올라가 연등을 내걸려다가 문득 꼬리표를 들여다본 청년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라, 결혼하신 분이었어요? 그것도 모르고 저는, 이라고 하다가 청년은 말을 끊었다. 아직 안 했어요, 라고 예정이 말했다. 그럼 이건 뭐예요? 예정은 그저 청년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혼자서 무안해진 청년은 연등에 꼬리표를 달고 의자에서 내려왔다. 여기가 제일 좋은 자리에요. 이따가 제등행사하러 나갈 때, 꼭 올려다보세요. 청년은 의자를 들고 다른 청년들이 있는 곳으로 가려다가 갑자기 예정에게 돌아서서 말했다. 일찍 결혼한 게 뭐 죄인가요? 행복하게 사세요. 청년이 떠나가고 예정 혼자 남아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매달린 노란색 연등을 바라봤다. 노란색 연등이 한들한들 흔들렸다. 보름달이라도 떠오른 것일까, 노란빛이 환하게 마음을 밝혔다.(끝)
'[추천 작품] > ***** 좋은 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늘 / 천운영 (0) | 2009.07.16 |
---|---|
아기 부처 / 한 강 (0) | 2009.07.04 |
달과 6펜스 / 서머싯 몸 (0) | 2009.04.18 |
흰 종이 수염 / 하근찬 (0) | 2009.04.06 |
황조별가(黃鳥別歌) / 방영주 (0) | 2009.04.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