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여자 친구에게 / 이향아

남편의 여자 친구에게 / 이향아

 

X씨.
정직하게 말하면 당신은 내게 있어서 결코 유쾌한 사람은 못 됩니다.
그것은 당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나의 의심 때문이며, 남편 앞에서 유일한 존재가 되고 싶은 나의 욕심을 당신이 저해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성간의 우정과 애정에 수학적인 분량으로 구획을 지을 수 없다는 결론을 오래 전에 내렸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론에서 출발한 당신에 대한 회의감은 큽니다.
나는 부끄럽고 점잖치 못하게도 신경질과 흡사한 투기심이 일어나곤 합니다.

나의 경우 남자 친구란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결혼 전 처녀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결혼 후 성인으로 사귀게 된 사람입니다.
전자의 경우 <남자 친구>는 보통 두 번째 줄에 서 있던 사람입니다. 남편으로 삼기에는 어떤 조건인가가 서로 맞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를 최선의 인물이라 여겼었다면 그의 친구로 머물러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아내가 되려고 했을 것입니다. 물론 양자간의 지극한 갈망에도 아랑곳없이 결혼이 성립될 수 없었던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이성간의 친구는 결혼을 겨냥했으나 실패한 오발탄이 아닙니다. 나는 옛날 사랑하던 남자를 다시 만나 <친구>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보면 심한 저항감을 느낍니다.
「옛날에 좋아하던 사람이예요.」
「결혼할 뻔했던 남자입니다.」라고 하는 말이 듣기에도 상쾌합니다.
내가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지금 옛날에 사랑하던 이를 다시 만나 그와 친구로서 우정을 계속할 수 있다면, 옛날의 내 애정이 진실이 아니었거나 아니면 지금, 매우 잔인하고 뻔뻔스러워졌다는 설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던 사람은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는 친구의 대열에서도 쫓겨나 차라리 맨 후미에 죽은 듯이 숨어 있는 게 훨씬 보기에 좋습니다.

그러므로 제2대열에 선 이성의 친구란 최선이 아닌, 차선의, 함부로 마구 굴어도 남편보다 오히려 흉허물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인이 된 후 사귀게 된 사람은 친구라는 이름보다는 지인(知人)이라고 표현하는 게 훨씬 동양적 구미에 맞을 것 같습니다.
지인은 자기가 종사하는 일 뿐 아니라, 친구나 일가친척, 형제, 남편, 자식을 통해서도 사귀게 됩니다.
이 친구는 미혼 시절 사귀던 친구보다 사무적이고 공식적입니다. 교양이라 불리는 일종의 위선으로 조심스럽게 연관을 맺습니다. 그래서 많은 저촉을 받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우정이 지속된다면, 그리고 그 우정이 돈독하고 절대적이라면 참으로 훌륭한 일입니다만, 그 우정은 드디어 말썽을 일으키고 파탄을 안고 올 위험성도 있습니다.
이유는 그것이 동성간이 아닌 이성간의 우정이기 때문이지요.
X씨,
당신은 어떠십니까? 어느 쪽입니까?
당신은 내 남편을 제2대열로 물러난 그렇고 그런, 별 볼 일 없는 대상으로 여기면서 그저 부르기 편하게 친구라고 하는지요?
아직 연소할 여지가 있는 미진한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는지요? 타산과 위선으로 저울질하며 기대하고 있는지요? 아니면 파탄과 위험을 무릅쓴 절대의 것인지요?
그 어느 쪽도 나는 싫습니다.
나는 내 남편이 당신에게 있어서 유희적 대상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잉여 에너지를 연소할 대합실의 화로쯤으로 여기는 게 싫습니다. 당신에게 절대적 존재가 되는 것도 위험하지만, 만능의 편리한 도구, 단순한 오락적 기분의 소모처로 여기게 되는 것은 더욱 불쾌합니다.
X씨.
나는 당신이 아름답고 진실한 여자이기를 바랍니다만 당신들의 관계가 아름답고 진실한 우정이라 할지라도 나는 질투와 경쟁심으로 내 행복과 평화의 균형을 지레 내 편에서 파괴하고 말 것입니다.
내가 당신의 존재를 인정하려면 나의 거짓된 수양과 덕성을 옷 입고서야 비로소 가능할 것입니다.
X씨, 이것이 아내인 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X씨, 당신은 내 남편의 여자 친구입니다.
이상에서 열거한 나의 모든 이론과 주장을 뒤엎어 무시해 버리고 당신은 내 남편의 엄연하고 뚜렷한 <여자 친구>입니다.
그것이 애정이든 열정이든 우정이든 간에 사람 사이의 정은 불분명하고 가변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당신은 내 남편이 숨겨진 품성 몇 가지를 깊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의 특성과 취미를 알며 기름끼를 싫어하는 식성과 추위를 못 견디는 체질까지도 압니다.
그리고 당신은 내 남편이 외로운 궁지에 쫓김을 당할 때, 발 벗고 나서서 그의 결백과 정당성을 두호하는 변론을 자청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가장 유력한 증인이 될 사람입니다.
내 남편을 해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으며, 그의 사회적·가정적 행복을 기뻐하며 갈채를 보낼 사람입니다.
X씨.
나는 이러한 일에 대하여 불편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친구요, 아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우정이 당신 스스로를 만족스럽게 하며 도취하게 할지라도 나는 심히 미안한 마음을 갖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미안함을 가져야 되는 이 경우의 모든 조건들이 싫습니다.
X씨.
어떤 모양으로든지 친구의 관계로든, 부부의 관계로든, 이 땅 위에서 똑같은 사람을 만나 사귄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면, 나는 문득문득 당신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고 싶은 충동을 가질 때도 있습니다.
당신이야말로 내 친구가 될 요소가 가장 많은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실 명 : 이영희

필 명 : 이향아

한 자 : 李鄕莪

생년월일 : 1938-7-24

출 생 지 : 충남서천군문산면신농리

등단작품 :『설경, 가을은, 찻잔』(현대문학,1963-5)

학위논문 :『한국현대시에 나타난 삶의 인식방법연구』(경희대학교논문집,198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