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작품]/***** 좋은 단편

차나 한 잔 / 김승옥

소설가 구경욱 2009. 2. 13. 09:37

차나 한 잔 / 김승옥

오늘 아침에도 그는 설사기 때문에 일찍 잠이 깨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싫어서 참을 수 있는 데까지 참아 보려고 했다. 그러나 배가 뒤끓으면서 벌써 항문이 옴찔거려서 견디어낼 수가 없었다. 휴지를 챙겨들고 변소로 갔다. 어제 저녁에 먹은 구아니딘이 별로 효과를 내지 못한 모양이다. 변소에 쭈그리고 앉아서 그는 자기의 배앓이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과식을 했다거나 기름진 것을 먹은 적도 요 며칠 안엔 없었다. 있었다면 좀 심함 심리의 긴장상태뿐이었다. 신문에서 자기의 연재만화가 요 며칠 동안 이따금씩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는 나쁜 예감으로 불안해 있었던 것이다. 재미가 없었던 것일까, 하고 생각하며, 그래도 여전히 그 날분의 만화를 그려서 가지고 가면, 문화부장은 여느 때와 똑같은 태도로 만화를 받아서 여느 때와 똑같이 그것을 보고 나서 여느 때와 똑같이 아주 우스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오랫동안 고개를 끄덕이며 낄낄거리고 나서,
"좋습니다. 아주 걸작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는, 문화부장의 태도에 다분히 과장이 섞인 것을 보면서도, 역시 겨우 안심을 하고 묻는 것이었다.
"오늘치는 빠졌더군요."
그러면 문화부장은 안경을 벗어서 양복 깃에 닦으면서,
"아, 기사 폭주 관계입니다."
고 간신히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 이상 더 물을 수가 없어서 그는 자신을 안심시켜가며 데스크 위에 흐트러져 있는 경쟁지들과 일본에서 온 신문들 그리고 통신사에서 배달된 유인물을 대강 훑어보고 나서 나오는 것이었고 그 다음날 아침 신문을 보면 또 만화가 빠뜨려진 채 배달되곤 했다. 오늘도 기사 폭주 때문일까, 하고 문화면을 살펴보는 것이지만 썩 대단한 기사들이 실린 것도 아닌 데다가, '그렇다면, 그저, 만화가 꼬박꼬박 나올 때엔 한번도 기사 폭주가 없었단 말인가?'하는 의혹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그는 며칠 전부터 긴장되어 있었는데, 어제 새벽부터는 설사가 시작되었다. 그는 자기의 배앓이가 낭패해 가고 있는 자기의 심리상태에서 결과된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는 똥이 더 나올 듯한 개운치 않음을 느끼며 방으로 돌아와서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아직도 잠들어 있는 아내와 나란히 누웠다. 그는 머리맡에 풀어놓은 팔목시계를 누운 채, 한 손만 뻗쳐 더듬어 집었다. 그리고 미닫이의 방문을 비추고 있는 새벽의 희미한 빛에 시계를 비추어 보았다. 여섯시가 좀 지나고 있었다. 시계를 다시 머리맡에 놓고 그는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올려 덮고 왼손을 아내의 사타구니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오늘분의 만화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른 얘깃거리가 생기지 않는다. 삼분폭리(三粉暴利)를 깔까? 한일회담을 취급하자. 아니 그건 지난번에도 그려 가지고 갔었다. 신문엔 나지 않고 말았지만. 평범한 가정물로 하나 생각해 보자. 그러나 얼른 얘깃거리가 생기지 않는다. 대통령으로 약속하는 검정 안경을 쓰고 볼이 홀쭉한 인물과 '아톰X군'의 얼굴만이 그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아톰X군'은 어린이를 상대로 하는 어느 주간신문에 그가 연재하고 있는 우주의 용사였다. 꼭대기에 안테나가 달린 산소투구를 머리에 쓰고 등에는 산소탱크와 연료탱크를 짊어지고 만능의 고주파총을 들고 눈알이 동글동글하고, 화성인을 상대로 용감무쌍하게 투쟁하는 소년 용사였다. 검정 안경을 쓴 대통령 각하와 탱크를 둘씩이나 짊어진 '아톰X군' 그리고 어쩌다 생각난 듯이 청탁이 들어오는 몇 군데 잡지의 만화가 그와 그의 아내에게 밥을 먹여 주고 있는 것이었다. 주 수입은 아무래도 대통령이 많이 나오는 신문의 연재만화 쪽이었다. 그러나 주 수입이라고 해도, 끼니를 제외하고 담배와 차를 마시고 가끔 당구장엘 드나들고 나면 이따금 아내와 함께 영화를 보러갈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그 수입 원천이 흔들리는 불안을 그는 느끼게 된 것이었다. 설사가 나올 만도 하지, 라고 스스로 꼬집어 생각하자 잠깐 웃음이 나왔다가 사그라졌다.
그는 어쩌다가 내가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나 하고 자신의 이력을 검토해 보기 시작했다. 이른바 일류대학을 지망했다가 실패하자 '나만 열심히 하면 어느 대학이고 어떠랴' 하고 들어간 정원미달의 어느 삼류 대학 사회학과를 마치고, 입대하여 훈련을 마치자 어쩌다가 떨어진 게 정훈(政訓)이었고 정훈에서 어쩌다가 맡은 게 군내(軍內) 신문 편집이었고 그리고 어쩌다가 보니까 거기에서 만화를 그리고 있었고 제대하여 취직할 데를 찾던 중 어느 회사의 굉장한 경쟁률의 입사 시험에 응시했다가 떨어지고 그러나 거기에서 함께 응시했다가 함께 미역국을 먹은 여자와 사랑하게 되어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는 모험이라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로 군대에 있을 때의 어설픈 경험으로써 대학 동창 하나가 기자로 들어가 있는 신문에 그 친구의 소개로 만화를 연재하게 되었고, 밥값이 생기자 그 여자와 결혼식은 빼어 버린 부부가 되어, 한 지붕 밑에 여러 세대가 살고 있는 이 집의 방 한 칸을 세내어 들고 오늘에 이르렀음.
그야말로 '어쩌다가'의 연속이었다. 그는 자기가 지난날 우연 속에 자신을 맡겨 버린 것이 갑자기 역겨워졌다. '거지같은 자식이었다' 하고 그는 자신을 욕했다. 손톱만큼이라도 좋으니 나의 주장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그러나 다시 한 번 자기의 이력을 검토해 보면 그 망할 놈의 군대생활이 끼어 있었기 때문에 사실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군대 속에서 어떻게 자기의 희망대로 생활할 수 있단 말인가, '좌향 앞으로 갓!' 하면 왼쪽으로 돌아야 되고 '포복!' 하면 엎드려서 기어야 했었다. 마치 그의 만화 속의 인물들이 자기들의 표정과 운명을 그의 펜 끝에 맡겨버릴 수밖에 없듯이. 우연 속에 자신을 맡겨 버리는 습관을 가르쳐 준 게 그놈의 군대였었다. 그런데, 하고 그는 생각했다. 하긴 그것이 평안했어. 적어도 신경쇠약에 걸릴 염려는 없었거든. 그는 여전히 천장을 올려다보고 생각했다. 이제 와서 대학에서 배운 것을 팔아먹고 싶다고 앙탈하지는 않겠다. 만화일만이라도 계속할 수 있어야겠다.
그는 잡념을 없애기 위해서 베개에서 머리를 약간 위로 들어 머리를 몇 번 흔들었다. 오늘분의 만화를 구상해야 했다. 엊저녁에 그려 놓았어야 하는 건데, 아니 구상만이라도 해놓았어야 하는 건데, 하고 그는 자신을 나무랐다. 엊저녁엔 도대체 무얼 했었나? 그제야 그는 엊저녁에 자기가 술을 마시고 들어왔던 것을 기억해내었다. 선배 만화가 한 분에게 끌려가서 마신 게 퍽 취했었나보다. 몇 시쯤 집에 돌아왔는지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니까. 퍽 취했던 셈치고는 잠을 깨고나도 머릿속이 맑다. 좋은 술이었던 모양이지. 그러나 그는 자기의 긴장상태 때문이라고 할 수 없이 생각했다. 이렇게 배가 끓고 거기에다가 만취 후인데도 머리가 무겁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니면 무엇일까. 그건 그렇고 그는 오늘분의 만화를 구상해야 하는 것이었다.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자유로운 한쪽 손으로 머리맡을 더듬어 담배를 한 대 빼서 입에 물고 성냥을 집어들었다.
그런데 담배의 매운 연기가 잠들어 있는 아내의 코로 스미면 아내의 잠을 깨게 하리라. 그는 단잠을 자고 있는 아내를 깨우고 싶지가 않았다. 도로 담배를 머리맡으로 던져두고 시선을 아내의 얼굴로 돌렸다. 언제 보아도 귀여운 얼굴이었다. 이렇게 옆으로 누워서 보면 마치 전연 알지 못하는 사람의 얼굴처럼 보이는데 그것이 그에게는 꽤 재미있었고 야릇한 흥분조차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른 아침의 희미한 빛 속에서 엷은 명암을 지닌, 전연 알지 못하는 사람의 얼굴 같은 아내의 얼굴을 시선으로써 찬찬히 더듬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무래도 알지 못하는 사람의 얼굴 같았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달라서 오늘은 그 전연 남의 얼굴 같은 아내의 얼굴이 그에게 야릇한 흥분을 일으켜주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문득 조바심이 나고 불안해져서 고개를 들고 아내의 얼굴 바로 위에서 정면으로 아내를 내려다보았다. 틀림없는 자기의 아내였다.
속눈썹이 가늘게 떨고 있는 걸 보아서 아내는 잠이 깨어 있었던 모양이다. 남편이 만화 구상을 하고 있는 태도일 때면 아내는 언제나 없는 듯이 침묵을 지켜 주었다. 낮일지라도 흔히 잠자고 있는 시늉을 해버리는 것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서 아내의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했다. 그제야 아내는 눈을 뜨고 눈으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일찍 깨셨군요."
아내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는 미소를 띈 채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아내의 사타구니에서 자기의 왼손을 빼내어 아내의 팔베개로 해줬다. 그러자 그는 좀 전에 느꼈던 조바심과 불안이 가셔진 것을 느꼈다.
"엊저녁에 나 늦게 들어왔지?"
그도 속삭이듯이 말했다.
"별루요. 여덟시 반쯤 들어오셨어요."
아내는 빙긋 웃고 나서,
"굉장히 취하셨댔어요. 주정도 하시구…"
"주정? 어떻게 했지?"
"사람이란 시새움이 많아야 잘 사는 법야 하셨죠. 그 말만 자꾸 하셨어요. 천장을 보시면서요. 천장에 그 말을 박아놓을 듯이 말예요."
아내는 그에게 엊저녁의 그를 일러놓고 나서 소리를 죽여서 키득키득 웃었다.
그는 자기가 왜 그런 주장을 했을까 알 수 없었다. 평소에 맘에 먹고 있던 말도 아니었다. 아마 우연히 한마디했는데 그게 마음에 들어서 자꾸 반복했었던 것이겠지.
"내가 엉뚱한 주정을 했던 모양이군."
그가 쑥스러워 피시시 웃었다.
갑자기 아내가 그의 입을 자기의 손가락으로 막고 고갯짓으로 옆방을 가리켰다. 옆방과 이 방을 가르는 벽이 옆방에 사는 아주머니와 아저씨의 높은 숨소리를 이쪽으로 통과시키면서 규칙적으로 그리고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난 또 뭐라고."
하며 그는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을 눈에 담고 있는 아내를 내려다보며 또 한번 피시시 웃었다.
"엊저녁에도 한바탕 싸워서 아주머니는 울고불고 야단했었는데… 부부싸움이란 정말 칼로 물 베기인가 봐."
아내는 여전히 장난스런 눈을 하고 속삭였다.
"또 싸웠어? 난 잠들어서 몰랐었는데… 그리고는 재봉틀을 돌렸겠지."
"그럼요. 한바탕 싸우고 나서도 다시 재봉틀을 돌렸어요. 제가 잠들 때까지 재봉틀 소리를 들었으니까요. 하여튼 지독한 아주머니예요."
"저 아저씨도 나쁜 사람은 아닌데…"
"그러게요. 술만 안 마시면 조옴 얌전한 분이에요?"
"허긴 흔히 아주머니가 먼저 시비를 걸더군. 며칠 전에 저 아저씨가 날더러 그러더군. 술을 마시고 들어가면 아내가 앙탈을 하는데 말야, 사실 염치도 없고 그래서 별수 없이 주먹질을 한다는 거야."
"그렇긴 해요. 그렇지만 아주머니도 그럴 만하잖아요? 부인이 팔이 빠지도록 밤 열두시가 넘도록 재봉틀을 돌려서 번 돈으로 술을 마시면 어떡해요. 애들이 넷이나 있는데 벌어 오진 못할망정 말예요."
"뭐 가끔이던데."
"하여튼 지독한 아주머니예요. 전 이젠 달달거리는 재봉틀 소리 땜에 미칠 것 같아요."
"정말이야."
사실 옆 방 아주머니의 삯바느질의 재봉틀 소리는 좀 과장하면 이쪽을 비웃는다고 할 정도로 밤낮없이 달달거렸다. 제법, 제법이 아니라 진짜로, 진짜 정도가 아니라 무지무지하게 생활을 아끼며 순종하고 있다는 듯했다. 그 재봉틀 소리가 그들의 안면을 유난히 방해하는 저녁이면 때때로 그들은 이불 속에서 입을 삐쭉거리며 속삭이곤 했다.
"어지간히 성실하게 사는 척하지?"
"정말예요."
아내는 잽싸게 대답하며 키득거리곤 했다.
"그래도 별수 없는 셋방살인데요, 네?"
저 정도 열심으로라면, 하고 그는 이따금 생각하는 것이었다. 다른 일을, 말하자면 시장에 가서 장사라도 한다면 수입이 더 나을 텐데.
"오늘치, 다 생각하셨어요6?"
아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아니, 아직…"
"아이! 그럼 어서 생각하세요."
아내는 자기가 베개삼아 베고 있던 그의 팔을 자기의 손으로 빼내고 나서 그를 살짝 밀면서 말했다.
"저 조용히 하고 있을 게요."
아내는 반듯이 누워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서 그의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담배 피우세요."
라고 말하고 나서 다시 고개를 반듯이 하고 눈을 감았다.
그는 아까 던져두었던 담배를 집어서 입에 물었다. 막 성냥을 켜려고 할 때 그는 대문께에서 들려오는 배달원의 '신문이요오' 하는 소리와 신문이 땅에 떨어지는 찰싹 소리를 들었다. 아내도 들었는 모양인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문간에 배달된 신문을 가지러 가는 일은 항상 아내가 해왔었다.
"아니 내가 가져오지."
그는 아내에게 말하면서 일어났다. 그러자 갑자기 부끄러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다시 누워 버리면서 그는 아내에게 말했다.
"당신이 가져오구려."
그는 신문을 들고 방으로 들어오는 아내의 표정에서 오늘도 만화가 나지 않았음을 알았다.
"요즘은 매일 기사가 넘치나봐요."
아내는 신문을 그에게 건네주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글세."
그는 신문을 받아서 1면부터 훑어보기 시작했다. 자기의 만화가 실리는 5면부터 펼치던 여느 때의 습관을 누르고서. 아내는 옷을 갈아 입고 아침밥을 지을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 면 한 면을 천천히 그러나 실상은 아무 기사도 보지 않은 채 넘겼다. 5면에서 자기의 만화가 들어갈 자리에 오늘은 영국의 어느 '보컬 그룹'에 대한 소개기사와 그들이 입을 쩍 벌리고 찍은 사진이 버티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내는 바가지에 쌀을 담아 가지고 밖으로 나가려다가 생각난 듯이 그의 머리맡에 쭈그리고 앉으며 말했다.
"오늘은 그리시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동안 밀려 있는 만화가 많지 않아요?"
"그렇지만 그때 그때의 시사성에 따르는 거니까 말야… 또 그려 가지고 가야 해."
그는 생각하며 말하듯이 일부러 느릿느릿 대답했다.
"한 달분 스물 여섯 일곱 장은 채워야 월급을 줄 게 아니야?"
아내는 생긋 웃으며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그는 방금 아내의 웃음이 아마 알았노라는 대답이려니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그는 천천히 담배를 빨면서 소재를 찾기 위해 신문을 뒤적거렸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생각이 나서 밖을 향하여 말했다.
"난 흰죽을 좀 쒀줘요."

그는 열시 가까이 되어서 집을 나섰다. 여느 때와 같이 서류용 봉투 속에 아직 먹물이 마르지 않은 만화를 조심스럽게 넣어서 옆구리에 끼었다. 오늘분의 만화도 독자를 웃기기에 별로 자신이 없었다. 항상 그렇듯이.
"화장지 좀 넣고 가세요."
그가 방을 나설 때 아내는 둘둘 말린 휴지 뭉치에서 얼마간 찢어내어 차곡차곡 접어서 그의 호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세심한 주의력을 가진 아내에게 감사와 귀여움이 섞인 느낌이 울컥 솟아나서 그는 손을 들어 아내의 볼을 쓰다듬었다. 아내의 볼 위에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침식사 때, 밥상 위에 기어올라오는 이름 모를 작은 벌레를 그는 무심코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러 버렸는데 그것이 아내를 울게 만든 이유였다. 아내가 더듬거리며 말하는 내용을 종합하면, 그가 요즘 이상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뚜렷이 이상해진 증거를 댈 수는 없지만 느낌으로서랄까, 말하자면 조금 전 벌레를 잔인하게 눌러버릴 때의 그는 확실히 좀 변해 버린 사람 같다는 것이었다. 묵과하려고 했지만 요즘 좀 당황해하고 있는 당신을 보니까 자기마저 이상스레 불안하고 허둥거려진다고 하고 나서 '울어서 미안해요' 하며 방긋 웃으면서 눈물을 닦았던 것이다.
"혼자 심심할 텐데 영화구경이나 갔다와요."
그는 집을 나서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그가 버스 정거장으로 나가는 골목을 빠져나오는데, '이 선생, 이 선생' 하고 누가 그를 불렀다. 골목의 입구에는 판잣집 하나가 가게와 복덕방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를 부르는 사람은 복덕방 영감이었다. 그 영감이 그가 지금 들어 있는 방을 소개해 준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를 부르고 있는 사람 앞으로 걸어왔다.
"영감님, 안녕하세요?"
그가 인사했다.
"안녕하슈? 어째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영감은 안경 너머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예, 배가 좀 아파서요."
"허어, 요샌 배앓이쯤은 병두 아닌데, 약 사 잡숫구려."
"먹었는데 별루…"
"허긴 요샌 가짜 약도 흔해서. 참 곶감을 다려 먹어 보우. 뭐 금방 나을 걸."
"그래요?"
그는 신기한 처방을 들었다는 듯한 말투를 꾸며서 대답했다.
"암, 그만이지요. 그런데 이 선생…"
그러면서 영감은 무슨 비밀히 할 얘기가 있다는 얼굴로 그의 한팔을 붙잡고 그를 복덕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요즘 신문에서 왜 이 선생 망가(漫畵)를 볼 수 없수?"
영감은 그의 턱 앞에 자기의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물었다.
"아, 그건…"
그러자 영감은 고개를 쩔레쩔레 흔들면서 추궁하듯이 말했다.
"아아아, 난 절대로 이 선생 지지자요. 나한텐 솔직히 얘기해두 염려할 거 하나두 없어요. 심하게 정부를 까더니 그예 당했구려?"
그제야 그는 영감이 묻는 의도를 알았다.
"그게 아니라…"
"뭐가 그게 아니야. 그렇잖고서야 그렇게 꼬박꼬박 나오던 망가가 갑자기 나오지 않을 리 있수? 이야기해 보아요."
영감은 술 때문에 항상 핏발이 서 있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면서 기어코 자기의 예상을 만족시키고 말겠다는 듯이 물어 대었다.
"그게 아니라 제가 직업을 바꿨어요."
그는 얼떨떨해서 그렇게 대답해 버렸다.
"아니 이젠 망가를 그만두었다구?"
영감은 예상이 어긋나서 맥이 빠졌다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그는 정말 자기는 만화 그리기를 그만둘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무슨 까닭이 있겠지. 암, 있구 말구. 틀림없이 있어."
영감은 자기 좋을 대로 한마디해댔다.
버스에 흔들거리며 신문사로 가면서, 그는 영감의 의견과 같이 정부측의 압력 때문에 만화연재를 중단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것은 필화사건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만 된다면 그는 영웅이 될 수도 있다. 사실 옛날 자유당 시절에는 그런 사례가 있기도 했었다. 그러나 위정자가 바뀌고 보니 그런 경우를 당하기가 힘들어졌다. 만화가를 건드리면 손해보는 건 자기들이라는 걸 알아 버린 모양이지. 허긴 선배 만화가의 얘기에 의하면 지금도 그런 경우가 전연 없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차라리 행복한 편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의 경우는 아마, 아마가 아니라 거의 틀림없이 자기 만화 자체 속의 어떤 결함, 말하자면 '웃기는' 요소가 부족했다든가 하는 결함에서 당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을 그는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자기 만화 때문에 노해 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자 그는 자신이 우스꽝스러워져서 눈을 감아버렸다.
편집국 안에 들어섰을 때, 그가 두려워하고 있던 예측이 이젠 어쩔 수 없게 된 것을 최초로 그에게 느끼게 해준 것은 국내(局內)에서 심부름을 하는 계집애의 표정에서였다. 여느 때 그 계집애는 만화가를 만화 속의 인물과 똑같이 생각하고 있는 탓인지 그를 보기만 하면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며 휭 가버리곤 하는 것이었는데, 그날은 제법 나붓이 '안녕하세요'를 하고 나서 미소를 띈 채 그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는 것이었다.
그것이 극히 잠깐 동안이었지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그에게 모든 걸 알 수 있게 해주었다. 계집애가 자기를 올려다보던 맑은 눈 속을 살짝 스치고 가던 게 어쩌면 연민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자 분노보다도 오히려 전신에서 맥이 빠져나가는 것을 그는 느끼면서 굳어진 얼굴로 문화부를 향하여 갔다.
자기들의 데스크 앞에 앉아 있던 몇 명의 기자들이 여느 때와 달리 유별나게 반갑게 인사할 때는 그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자기도 덩달아서 지금 작별을 하듯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잠시 동안 그는 자기가 어떻게 처신해야 될지 알 수 없었다. 흐르던 시간이 갑자기 끊어지면서 공백이 생기는구나 하는 생각이 알 수 없는 부끄러움과 함께 그를 엄습했다. 그러고 있는 그를 문화부장이 구해 줬다.
"오늘치 만화 좀…"
하면서 문화부장은 손을 내밀었던 것이다. 그는 당황해졌다. 그가 짐작하고 있던 사태 속에서 문화부장의 지금 얘기는 불필요한 게 아닌가. 그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서류봉투를 살그머니 좀더 힘을 주어 끼면서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빨개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닦으며 말했다.
"그려오지 않았는데요."
말하고 나서 그는 금방 후회했다. 어쩌면 자기의 짐작이란 게 얼토당토않은 게 아닐까… 자기의 신경과민으로 자기는 지금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러나 문화부장의 다음 말은 그의 그러한 희망에 찬 기대를 산산이 부숴 버렸다.
"그럼 알고 계셨군요."
문화부장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그에게 말했다.
"차나 한 잔 하러 가실까요?"
할 얘기가 있다는 암시를 그에게 주면서 문화부장은 그의 앞장을 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주 섭섭하게 되었습니다. 퍽 오랫동안 함께 일해 왔었는데…"
다방에 들어가서 자리에 앉아 문화부장은 그에게 말했다.
"저는 이형(李兄)을 두둔했습니다만… 국장님도 이형의 만화에는 항상 칭찬을 하셨댔는데… 그… 독자들이 자꾸 투서를…"
"아니 사실 재미가 없었지요. 제 자신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문화부장이 우물쭈물하고 있는 게 미안해서 얼른 말을 받았다.
"난 커피. 이형은?"
"저도 그걸로…"
"그런데 말썽이 난 것은 지난 주일의 만화들 때문인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 일주일 동안에 히트가 하나도 없었다는 게 아마 독자들을… 하여튼 그 주일의 독자 투서 때문에 저나 국장님이 좀 애를 태웠지요."
그러나 가장 애가 탔던 사람은 만화를 그리는 바로 그였었다.
"예, 사실 재미가 없었어요."
"어디 컨디션이 좋지 않으셨던가요?"
"예, 배가 좀… 배가 퍽 아파서…"
그러나 배앓이는 어제 새벽부터 시작했던 것이다.
"아, 그거 야단났군요. 크로로마이싱 잡숴 보셨어요?"
"뭐 이젠 다 나았습니다."
"아, 다행이군요."
찻잔이 그들 앞에 놓여졌다.
"자, 듭시다."
문화부장이 말했다. 그들은 뜨거운 차를 홀짝거리며 마셨다. 예의상 찻잔을 탁자 위에 잠시 놓았다가 다시 들어서 마시곤 했다.
"이상하게도 이형과는 차 한잔 같이 나눌 기회가 없었군요. 이게 아마 처음이지요?"
"예, 처음인 것 같습니다."
"어떤 까닭인지 요즘 우리 신문의 기고가들 컨디션이 저조한 모양예요. 지금 연재중인 소설에 대해서도 매일 거의 대여섯 통씩 투서를 받고 있습니다. 재미가 없으니 중단시켜 버리라는 거지요. 우리 신문에 수난이 닥친 모양입니다."
문화부장은 아마 그를 위로하느라고 그런 얘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노엽게 들리었다. 아마 저 재미없는 소설을 쓰는 사람에게 연재중단을 통고하러 가서는 이 만화가의 예를 들겠지. 그리고 역시 말하겠지. 우리 신문에 수난이 닥친 모양입니다. 그의 뱃속에서 꾸르륵하는 소리가 꽤 길게 났다.
"보는 사람은 잠깐 웃어 버리고 말지만 만화를 그리는 사람은 퍽 힘들 거야."
문화부장은 혼잣말하듯이 말했다.
"하여튼, 이형, 참 용하십니다. 어디서 만화를 배우셨던가요?"
"뭐… 그저… 어쩌다가 그리게 되었지요."
그리고 어쩌다가 당신네 신문에서 밥을 얻어먹게 되었구요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물론 그 말은 입안에서 사라져 버렸다.
"사람을 웃긴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 이형, 무슨 비결 같은 게 없습니까? 만화를 그리는 데 말예요. 말하자면 만화 그리는 걸 배울 때 이렇게 하면 사람이 웃는다라는 법칙 같은 게 있어요?"
문화부장은 마치 아주 무식한 사람처럼 얘기하고 있었다. 그는 문화부장이 지금 무식을 가장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자면 이쪽을 무식한 자로 취급하고 나서 자기가 이 무식한 자의 수준만큼 내려가 주겠다는 의도임이 틀림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문화부장이 괘씸해지기 시작했다.
"아시겠지만."
그는 약간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서 문화부장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사람이 웃음을 웃게 되는 데는 몇 가지 메커니즘적인 과정이 있습니다. 프로이드는 사람이 웃게 되는 과정을 분석하기를…"
그러자 문화부장은,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굴 보고 무슨 강의를 시작할 작정이냐는 듯이 얼른 그의 말을 가로챘다.
"아, 프로이드가 그것에 대해서 분류해 놓은 정도라면 누구나 알고 있겠지요. 그렇지만 유머가 성립되는 몇 가지 패턴을 알고 있다고 해서 누구나 금방 우스운 만화를 그릴 수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이형도 그 패턴들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시지만 이따금 우습지 않은 만화가 나온다는 경우가 있잖습니까?"
문화부장은 그를 괘씸하게 여긴다는 말투로 얘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좀 전의 분노가 쑥 들어가 버리고 기가 죽어 버렸다.
"그… 사실 그렇죠."
그는 의미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는 이상스럽게도 이제야 자기가 그 신문사로부터 해고당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조금 전까지 그는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생긴 혼미 속에 갇혀서 지나치게 당황했다가, 지나치게 부끄러워했다가, 기가 죽었다가 노여워했다가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제 대신 누가 그리기로 되었습니까?"
그는 문화부장을 향하여 처음으로 사무 냄새가 나는 질문을 했다. 그리고 그는 누구와도 항상 사무적인 대화를 하기 싫어했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왜 사무적인 대화를 하기 싫어했을까? 줘야 할 것과 요구해야 할 것을 떳떳이 서로 얘기하고 필요하다면 소리를 높여 다투기라도 해야 했을 게 아닌가? 생각이 비약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하고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만화가밖에 될 수 없었던 것인지 몰라.
"이형 대신 누가 그렸으면 좋을 것 같습니까? 추천해 보시지요."
문화부장은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는 새에 또 한번 이쪽의 부아를 돋우는 말을 했다. 그는 대답하고 싶었다. 글쎄요, 참 이 사람은 어떨까요, 바로 저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소리 높이 좀 웃어보았으면. 그러나 그는 자기의 그런 엉뚱한 생각을 눌러 버리고 그가 가입하고 있는 만화가협회 회원들의 이름을 하나씩 속으로 체크해 나갔다. 이 사람은 지금 어떤 신문에 연재를 얻고 있다. 이 사람도 역시. 이 사람은… 글쎄, 나의 재판이 되고 말걸. 이 사람은… 그러고 있는데 문화부장이 웃으면서 말했다.
"실은 반쯤 내정이 되어 있습니다."
"누구로…"
그는 문화부장의 '반쯤'이라는 말이 '결정적'이라는 뜻과 맞먹는다는 걸 경험으로써 알고 있었기 때문에 또 속았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서 화가 났다.
"이형의 만화를 중단시킬 정도일 때야 국내에서 이형 대신 그릴 사람이 있지 않을 거라는 건 짐작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럼…"
그는 한창 해외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는 미국 만화가들의 신디케이트가 얼른 생각났다.
"누구가 될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미국 만화가들 중에서 한 사람이 되는 건 틀림없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이렇게 되면 이번 해고당하는 것이 내 개인의 문제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국내 만화가들의 소멸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한 장의 만화를 여러 장으로 복사해서 세계 각 곳에 싼값으로 팔아먹는 미국 만화가들의 신디케이트에 국내 신문이 걸려들기 시작했다면 이건 큰일이다. 오래지 않아서 모든 국내 신문들은 미국 가정의 유머를 팔아먹고 있게 되리라. 미국 만화가들의 복사된 만화는 사는 편에서만 생각한다면 값이 싸니까 그리고 문명인들답게 유머가 세련되어 있으니까. 그는 언젠가 한국을 방문했던 미국의 한 뚱뚱보 만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양반은 자기 복사가 열 군데나 팔린다고 했다. 스위스에 별장을 가지고 있다는 자랑도 했다. 그때 국내의 협회 회원들은 그 뚱뚱보를 부러운 듯 쳐다보고 있었던 것도 그는 생각났다. 그렇지만, 하고 그는 생각했다. 한탄을 한들 내가 어쩔 수 있단 말인가.
"역시 그렇군요."
그는 또 한번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이형한테는 내가 아주 면목이 없는 건 아니지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문화부장은 껄껄 웃었다.
"국내에서 꼭 찾겠다면 왜 이 선생님께 이런 괴로움을 드리겠어요."
"아니 별루… 괴롭게 생각지는 않습니다."
"날 원망하시진 마시기 바랍니다. 나 역시 거기서 밥 얻어먹고 있는 놈에 불과하니까요. 자 그럼 가보실까요. 도장 가지고 경리부에 들러 가세요. 뭐가 좀 있을 겁니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신문사 정문의 계단 위에 서서 어디로 갈까 망설이고 있었다. 경리부에서 여자 직원이 내주는 봉투를 받아서 윗도리의 안주머니에 넣을 때, 그는 문득 '이걸로써 내가 그 속에서 살아왔던 한 가지 우연이 끝장났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여자 직원에게,
"미스 신은 볼의 까만 사마귀가 항상 매력적이야. 그 사마귀만 믿고 살아 봐요. 앞으로 행복할 테니까. 자 그럼 잘 있어요."
하고 농담을 해서 그 여자 직원을 놀라게 해줄 수조차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계단 위에 서서 사람과 자동차들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그는 겁이 나기 시작했다. 어서 또 무엇을 붙들어야 한다. 오늘 중으로 무언가 확실한 걸 붙들어 둬야 한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순조롭게 연속시켜 주는 것을 붙잡아 둬야 한다.
"안녕하십니까?"
누군지가 계단을 올라오며 말소리를 길게 빼면서 그에게 인사했다.
"예, 안녕하십니까?"
그는 황급히 인사를 돌려주었다. 알 만한 사람이었다. 당구장에서 늘 만나는 사람이었다. 아마 흔해빠진 예술가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름은 모른다. 그에게는 그런 친구들이 많다. 때로는 밤늦도록 술집에 앉아서 함께 술을 마시면서도 지금 자기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는 그 친구의 이름을 모르고 마는 경우는 흔해빠진 것이었다. 아무개 신문의 기자입니다. 시도 씁니다만. 아무 학교에서 그림을 가르쳐 주고 빌어먹고 있습니다. 옛날에 아무 출판사에서 일보고 있었지요. 지금은 그 출판사가 망해 버려서 저도 요 모양이 되어 버렸습니다만. 혹은 그에게 만화청탁을 하러 온 적이 있던 정부기관이나 제약회사나 은행의 기관지들의 기자들…
"요즘은 재미가 좋으시다더군요."
계단을 올라온 사람은 지금의 그에게는 터무니없는 인사를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서울 식의 인사에는 익숙해져 있었다.
"예, 그런데 배가 좀 아파서…"
"크로로마이싱을 잡숴보시죠…"
"예, 그래야겠습니다."
"자, 실례하겠습니다."
그 사람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시 그의 앞에는 사람들과 자동차들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거리가 나타났다. 이렇게 멍청한 자세로 이곳에 더 서 있을 수 없다고 그는 생각하며 좀 차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장소를 찾아서 그는 계단을 떠나 걷기 시작했다. 좀 걷다가 그는 신문사의 건물을 돌아보았다. 자기가 여기에 관계를 갖고 있던 그동안 타인들로 하여금 자기를 볼 때에 몇 점 더 놓고 보게 해주던 그 회색빛 괴물을. 이 회색빛 괴물의 덕분으로 그는 생전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긴 설명이 필요없이 자기를 신용해 버리게 할 수 있었다. 만일 이 괴물이 없었다면 평생을 두고 설명해도 신용해 줄지 말지 모를 사람들로 하여금 말이다.
여태까지 꾸르륵거리기만 하던 배가 살살 아파 오기 시작했다. 그는 광화문 쪽으로 걸어갔다. 우선 조용한 다방으로 가자. 그는 느릿느릿 걷고 있었으므로 빠르게 걷는 사람들이 그를 뒤로 떨어뜨렸다. 어떤 사람들은 그와 어깨를 부딪치기도 하였다. 조용한 다방으로 가자. 그러나 손님도 몇 사람 없고 레지도 우울한 얼굴로 전축만 지켜보는 그런 다방에 가서 앉아 있기는 싫었다. 지금 자기가 그런 다방의 딱딱한 의자 위에 앉아 있으면 아마 최고로 몰골이 추해 보일 것이다. 어쩌면 하루종일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나오게 되어 버릴 것 같아서 그는 좀 조용한 다방으로, 좀 조용한 다방으로를 뇌이면서 '초원'이라는 아주 번잡한 다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방의 이름이 가리키듯이 상록수들로써 가득 장식되어 온실 같은 실내가 무척 넓었다. 카운터만 해도 네댓 개나 되는 모양이었다. 이 어둑신하고 넓은 실내에 사람들이 꽉 차있고 스피커들이 운동회 때처럼 음악을 내지르고 있었다. 겨우 자리를 차지하고 앉자 그는 마음이 좀 놓인 것 같았다. 미국 만화가들의 신디케이트 같은 다방이로군,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때 그는 누가 자기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좋은 게 좋아요."
"그럼요. 좋은 게 좋지요."
그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오른쪽으로 놓인 좌석에 앉아 있던 젊은이 한 떼가 높은 목소리로 자기들끼리 얘기하고 있었다. 자기에게 한 거라고 그가 착각했던 말은 그들의 대화에서 튀어나온 것이었다. 그는 자기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 그들의 대화가 우연히 들어맞아 버린 것에 짜증이 났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우연이 많은 모양이군.
"…이 년. 군대 삼 년. 오 년만 기다려 줘. 기다릴 수 있어?"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는 대학생 차림의 남자가 자기 곁에 앉아 있는 역시 대학생 차림의 여자에게 나직이 얘기하고 있었다. 그가 만일 친한 친구와 같이 들어왔더라면 그 친구에게 '저 여자 굉장히 색이 강하겠는데'라고 했을 얼굴을 가진 여자였다.
"기다릴 게요. 그렇지만 딱 서른 살까지만 기다리다가 서른 살에서 하루만 더 지나도 다른 데로 가버리겠어요."
여자는 대답하고 나서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웃었다.
'서른 살이 되기까지. 그래 정말 지루하지'라고 그는 생각했다.
"무얼 드시겠어요?"
레지였다.
"커피. 그리고 성냥 좀 갖다 주시오."
그는 담배 한 대를 꺼내어 한쪽 끝을 탁자 위에 톡톡 두드리면서 궁리하기 시작했다. 오늘 중으로 반드시 오늘 중으로 붙잡아야 한다. 그런데 무엇을 무엇을 말인가? 레지가 커피를 가져오고 그가 그것을 다 마시고 그리고 담배를 두 대 계속해서 피우고 나서 그는 답을 얻었다. 만화다. 아직 연재만화가 실려 있지 않은 신문에 자기 만화를 연재해 달라고 하자. 그런데 그런 신문이 있던가? 글쎄 잘 생각해보자.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서 빙빙 돌고 있는 건 이때까지 그가 그려왔던 만화 속의 가지가지 유형들이었다. 돼지를 닮은 사장님, 고양이를 닮은 여비서, 고슴도치를 닮은 룸펜 청년, 불독 같은 탐관오리… 멍청하나 순진한 돌쇠, '아톰X군', 대통령 각하… 그는 담배를 계속해서 피웠다. 담배 세 대를 더 태우고 났을 때 그는 드디어 한 신문을 생각해 냈다. 그가 알기로는, 보수가 적다는 이유 외에 인쇄가 더럽다는 이유까지 곁들어서 만화가들이 아무도 만화를 그리려고 하지 않는다는 신문이었다. 아마 어느 개인회사에서 자기네의 선전용으로 만들어 놓은 신문이었다. 따라서 신문 자체에 큰 비용을 들이지 않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은 듯했다. 그렇지만 그 신문에도 만화가들의 이름쯤은 외우고 있는 사람이 있겠지. 가보자.
그는 밖으로 나와서 버스를 탔다. 버스에서 그는 앉고 싶었지만 자리가 없었다. 배가 꾸르륵거리며 살살 아파 왔기 때문에 손잡이를 붙잡고 서 있기가 고되었다. 그의 앞에 눈을 얌전히 내리깔고 앉아 있던 여대생이 역시 얌전하게 일어나서 자리를 양보했다. 그러나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옆에 서 있던 영감을 위해서였다. 차의 진동이 심했다. 그리고 그의 배는 점점 뒤끓고 있었다. 금방 설사가 나올 듯 해서 그는 다리를 꼬았다. 손에 힘을 주어서 손잡이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하여 차의 진동에 몸을 맡겨 버렸다. 이마에 진땀이 솟아나고 입술이 바짝 말랐다. 그는 눈을 감았다.
"젊은이, 멀미를 하나베."
그는 눈을 떴다. 여대생의 양보로 자리에 앉은 영감이 그를 올려다보며 말하고 있었다.
"안색이 좋지 않구려."
"예, 배… 배수술을 받은 지가 얼마 않아서요."
그는 대답하고 나서 깜짝 놀랐다. 왜 이렇게 간사해져 버렸을까. 자기는 영감에게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한 셈이었다.
과연 영감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여기에 앉구려."
"앉아 계세요. 괜찮습니다."
"앉구려."
영감은 그의 팔을 잡아서 자리에 앉혔다. 그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무슨 수술을 받았댔소?"
"뭐 대단찮은 거였습니다."
"맹장수술이었소?"
"예, 맹장이었습니다."
그는 이 영감이 설마 이 버스 칸에서 배를 좀 보여 달라고 하지는 않으려니 생각하면서 대답했다.
"내 손주 녀석도 맹장수술을 받았댔지."
"아, 그랬습니까?"
"옛날엔 없던 병이 요즘은 많이 생겼단 말야. 세상이 험하니까 병도 새로운 게 자꾸 생기나부지?"
"그럴 리가 있을라구요? 옛날에도 있었지만 몰랐었던 것뿐이겠지요."
"그럴까? …그럼 젊은이도 방귀 때문에 꽤 걱정했겠구려."
"예?"
"내 손주 녀석은 수술을 받고 나서도 사흘 동안이나 방귀가 나오지 않아서 걱정들 했었지. 젊은이는 며칠 만에 방귀가 나옵디까?"
"예, 글쎄요. 그게…"
"하여튼 의사선생이 하루에도 몇 차례씩 와서 묻는 거였지. '방귀 나왔습니까? 방귀 나왔습니까?' 방귀가 나와야만 수술이 성공한 것이래나? 세상을 오래 살다보니까 방귀가 안 나온다는 애를 다 태워 봤군."
영감은 어허허허허 하고 요란스럽게 웃어제꼈다. 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도 모두 영감을 따라서 웃었다. 그의 배는 계속해서 꾸르륵거렸다. 똥이 조금 밖으로 나와 버린 듯했다. 그는 입속으로 하느님, 하느님, 하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는 대로 크로로마이싱이란 걸 사먹자. 내리는 대로 당장. 그러나 그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자기가 찾아온 신문사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이층으로 올라가는 층계를 막 밟기 시작한 사람이 있어서 그는
"변소가 어딥니까?"
고 물었다. 키가 작달막하고 안경을 쓴 그 사람은,
"에또, 여기서 가장 가까운 변소가 가만 있자… 아, 일층에 있군요."
하고 그를 변소 앞까지 안내했다. 그가 변소 문을 막 열고 들어가려고 할 때 그를 안내해 준 사람이 싱긋 웃으면서 농담을 했다.
"그럼 배설의 쾌감을 많이 즐기시기 바랍니다."
그는 그 사람을 향하여 웃어 보이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되어서 얼굴이 찡그러져 버렸다.
변소 안에서 그는 아내가 넣어준 휴지를 만지작거리며 아내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영화 구경을 갔을까? 갔겠지. 아마 최무룡이 김지미가 사람을 울리는 영화겠지. 세상엔 참 별 직업도 많다. 나는 사람을 웃겨야 하고 최무룡이는 사람을 울려야 하고… 그리고 나서 그는 상표가 되어 버린 몇 사람의 이름들을 생각해 보았다. 이름이 신용있는 상표가 되면 그러면 되는 것이다. 어설픈 만화가 이 아무개 정도 가지고는 아무리 너그럽게 생각해도 좀 곤란하다. 나를 이 신문사가 사줄까? 지금 자기네의 변소 안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거의 기도하는 심정으로 자기네에게 구원을 부탁하려는 이 사람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이 사람은 한 이년 동안 어떤 신문에서 만화를 그렸던 사람이다. 탄압받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잡혀가게 될 경우엔 얼씨구나 하고 잡혀가 줄 용의가 없었던 것도 아니어서 그보다는 국민된 자의 공분(公憤)으로써 때로는 겁나는 줄 모르고 정부를 공격하고 사회악을 비꼬던 만화가 이 아무개다.
그러나 그는 아무래도 부탁하러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이상 더 필요가 없겠지만 그러나 그는 용기를 돋우기 위해서 변소 안에 그대로 쭈그리고 앉은 채였다. 담배가 피우고 싶었지만 성냥이 없었다. 크로로마이싱을 사먹자. 그리고 성냥도 한 갑 사자고 그는 좀 엉뚱한 생각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될 수 있는 대로 좀 엉뚱한 생각만 되풀이하기로 하고 있었다. 엉뚱한 생각들이 포화되어 그의 머릿속에서 '취직 부탁하러 간다'는 생각을 쫓아 버릴 때 그는 이 신문사의 편집국 문을 밀 수 있을 것 같았다. 말하자면 저돌적으로 일단 문 안에만 들어서고 나면 그때는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아마 문화부장을 찾겠지. 천만다행으로 혹시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통하여 교섭을 부탁해 보자. 그는 다리가 저려서 더 이상 쭈그리고 앉아 있을 수가 없을 때에야 일어섰다. 그는 바지를 추켜 입고 곧 변소문을 나오자 바쁜 일이라도 있는 듯이 곧장 편집국 문을 향하여 빠르게 걸어갔다. 도중에서 멈칫거리다간 영영 들어가지 못하고 말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편집국 문을 열고 그 안에 들어섰다.
실내가 예상외로 좁고 지저분했기 때문에 그는 당황했다. 그는 마침 자기와 가까운 곳에 책상을 놓고 앉아 있는 계집애에게, 문화부장이 계시냐고 물었다. 저깁니다 하면서 계집애가 가리키는 곳에 아까 변소를 안내해준 사람이 이쪽으로 보고 빙글거리고 있었다.
"저 안경 쓰고 키가 작은 분 말입니까?"
"네 바로 그 분예요."
그는 돌아서서 나와 버릴까 하고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창피하다는 느낌보다도 더 큰 것이 그를 끌고 가서 그를 문화부장 앞에 세워 놓았다.
"문화부장님이세요?"
그가 말했다.
"그림 그리시는 이 선생님이시죠? 일루 앉으세요."
문화부장님은 그에게 의자를 권하면서 말했다.
"용무를 꽤 오래 보시는군요. 그걸 오래 보면 오래 산다는데, 축하합니다."
그에게는 문화부장의 농담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사람이 나를 알고 있었다. 내가 만화가 이 아무개라는 것을 전연 인사한 적도 없는데 알고 있었다. 환희.
"그런데 웬일이십니까? 전 변소에 용무가 급해서 들어오신 줄로 알았는데요."
"예, 실은 좀 부탁드릴게 있어서… 저어 나가서 차나 한 잔 하실까요."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럴까요?"
문화부장은 선뜻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구한테나 그렇게 농담을 잘 하십니까?"
층계를 내려오면서 그가 물었다.
"천만에요. 이 선생님을 제가 알고 있었으니까 그럴 수 있었던 게죠. 노여우셨댔어요?"
"아아니요. 실은 갑자기 배탈이 나서…"
"설사였군요. 그 정도야 빨가벗고 여자를 끼고 하룻저녁만 자고 나면 거뜬히 나아버리지요."
그들은 함께 소리내어 웃었다. 다방에 들어가서도 그는 오랫동안 화제를 공전시키고 있었다.
마침내 문화부장이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아까, 제게 부탁할 일이…?"
"예."
그는 얼른 말을 받았다.
"실은 이번에 제가 관계하던 신문과 관계가 끝났습니다."
"그렇게 됐어요? 요즘 이 선생님의 그림을 볼 수가 없어서 짐작은 했습니다만. 다투기라도 했던가요?"
"아닙니다. 미국 만화가들의 작품이 실릴 계획인 모양이더군요."
"아, 그렇군요? 요전번엔 저의 신문에도 교섭이 왔더군요."
"미국 만화가 측에서요?"
"네, 중개인이라는 사람이 찾아왔었지요. 물론 한국 사람이었습니다만."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아유, 말씀 마십시오. 우리 사장이 만화에 원고료 한푼 내놓을 사람인 줄 아십니까? 지금 문화면을 몇 사람이 만들고 있는 줄 아십니까? 세 사람입니다. 단 세 명이 매일 몇십 장씩 남의 것을 훔치고 번역해 내고 해야 합니다. 만화 연재는 엄두도 못 내고 있지요."
"그렇습니까?"
그는 절망을 느끼면서 말했다.
"이 선생님께서 절 찾아오신 이유를 조금은 짐작은 하겠습니다만 거의 백 퍼센트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 그렇습니까?… 그런 곳에서 일하시려면 속 좀 상하시겠습니다."
"그런 신문사에서 견뎌 낼 사람은 저 같은 사람 아니면 안 됩니다. 불만이 있으면 큰 소리로 외쳐 대고 화가 나면 잉크병도 내던져 버려야만 견딜 수 있지요. 만일 꽁생원처럼 참고만 있으면 자기 속에 썩어 버려서 하루도 못 참고 달아나 버리게 돼요."
"그럴 것 같군요."
"그럴 것 같은 게 아니라 사실이 그렇습니다. 아까 보셔서 아시겠지만 우리 신문사 기자들 표정들 좀 보세요. 누가 자기를 건드려 주지 않나, 사흘이고 나흘이고 물고늘어지겠다는 표정들이 아닙디까?"
"몰랐는데요."
"다음에라도 좀 보세요."
그는 이 수다쟁이 문화부장의 농지꺼리에 진력이 나기 시작했다. 신경의 한올 한올이 곤두서서 그는 작은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랬다. 보통의 경우에는 의식하지 못하는 모든 소음들―다방 안에서 나는 소리들과 거리에서 들려오는 소음들이 모두 한꺼번에 살아서 그의 귓속으로 밀려들어 그의 머리는 터져 버릴 듯 했다.
"만화 연재할 계획이… 그러니까 없으시겠군요?"
"네, 지금으로서는 그렇습니다."
"혹시…"
그는 주저하면서 말했다.
"요담에 기회가 생기면 절… 제게…"
"그럭허지요. 꼭 그럭허겠습니다."
문화부장은 선선히 대답하고 나서,
"그럼 저도 한 가지 부탁드리겠는데."
"예, 말씀하세요."
그는 부탁 받는 게 기뻐서 큰 소리로 대답했다.
"혹시 예수 믿으시거든, 우리 사장이 좀 빨리 뒈져 달라고 기도해 주십시오."
문화부장은 하하하하 웃었지만 그는 이 헐리우드 식의 농담에 씁쓸한 미소만 띠었다.
"바쁘실 텐데 실례 많았습니다. 잘 부탁하겠습니다. 나가실까요."
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네, 그럼 저도 단단히 부탁드렸습니다."
문화부장이 일어서면서 말했다. 그리고 재빨리 카운터를 향하여 갔다. 그는 당황하여 자기의 서류용 봉투도 탁자 위에 그대로 둔 채 카운터를 향하여 가고 있는 문화부장의 뒤를 뛰다시피 쫓아갔다.
"아니 제가 모시고 왔는데요…"
그는 문화부장의 팔을 잡았다.
"다음에 술이나 한잔 사주십시오."
문화부장의 손에서 돈이 벌써 마담의 손으로 넘어가 버렸다.
그들은 밖으로 나왔다. 곧 이어 레지가 그가 잊고 온, 잃어 버려도 좋은 서류용 봉투를 들고 쫓아 나왔다.
"이거 가져가세요."
레지가 소리쳤다.
"감사합니다."
그걸 받아들 때 그는 살며시 서글퍼졌다.
문화부장과 헤어지자 그는 더 이상 갈 데가 없어서 잠시 동안 길 가운데 마치 누구를 기다리는 자세로 서 있었다. 크로로마이싱. 그는 문득 생각이 나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길 저편에도 그리고 자기의 바로 근처에도 '약'이라는 간판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는 자기에게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약방을 향하여 걸어갔다.
아마 대학을 갓 나왔을 듯싶은 젊은 여자는 설사하는 한마디에 약을 네 가지나 번갈아 내보였다. 그리고 약 한가지마다 긴 설명을 덧붙였다. 약 자체의 값보다 설명 값이 더 많겠군 하고 그는 생각하면서 '크로로마이싱!'하고 짜증이 나서 투덜대는 목소리로 말했다.
"크로로마이싱하고 이것을 함께 잡수세요."
"여기서 좀 먹어야겠는데요."
캡슐에 든 크로로마이싱과 새까만 가루약을 입에 털어넣고 여자가 건네주는 컵의 물을 마셨다. 그는 컵을 받을 때 컵을 잡은 여자의 손에 큰 흉터가 있는 것을 보았다.
"손에 흉터가 있군요."
그는 컵을 돌려주며 무심코 말했다. 여자의 얼굴이 금세 빨개졌다.
"실험하다가… 대학 다닐 때…"
그는 목안으로 자꾸 기어드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려니까 콧등이 시큰해졌다. 얼른 계산을 해주고 그는 허둥지둥 쫓기듯이 밖으로 나왔다.
"어딜 그렇게 급히 가세요?"
그의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키가 큰 사람이 여전히 걸음을 계속하면서 그에게 말했다. 그가 관계하고 있는 신문사의 카메라맨이었다.
"어디 가세요?"
그는 반가워서 빠른 말씨로 인사를 했다.
카메라맨은 벌써 지나치면서
"이형, 다음에 좀 봅시다."
라고 말하며 가버렸다.
그는 그네들의 말투를 알고 있었다. 저 도회의 어법을. 그리고 그는 항상 그 어법에 잘 속았었다. 방금 카메라맨이 말한 '다음에 좀 봅시다'는, 그 뜻을 따라서 정확히 표기하자면 '그럼 다음에 또 만납시다. 안녕히 가십시오'이다.
그런데 그들은 '좀'이라는 부사를 집어넣어서 듣는 사람을 환장하게 만들어 버린다. '다음에 좀 만납시다', 어쩌면 당신에게 일자리를 얻어줄 수도 있을지 모르니까요인가? 생각해 보라. 그렇게밖에 들리지 않지 않은가? 그는 아침나절에 그가 관계하던 신문에서 문화부장에게 속히우던 일이 생각났다.
그가 해고당한 것을 알리기 전에 문화부장은 먼저 '오늘치 만화 좀…' 했던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해고당할 것을 예측하고 있던 거를 당황하게 했던 것이다. '오늘치 만화…'라고 했으면 그는 자기가 해고당하지 않았음을 알았으리라. 또는 '오늘부터는 그리실 필요는 없게 되었습니다'라고 하면 유감스럽긴 하지만 그것도 뜻은 분명하다. 그런데 '오늘치 좀…' 했던 것이다. 오늘치의 만화를 보아서 재미가 있으면 계속하겠고 그렇지 않으면 해고다, 라고 밖에 들리지 않던 그 말투. 그는 갑자기 느릿느릿 걸었다. 거리의 모퉁이에서 공중전화가 눈에 띄었다. 집에 전화가 있다면 아내를 불러내었으면 좋겠다. 아내와 함께 밤늦도록 거리를 쏘다닌다면 좋겠다. 쇼윈도라도 보면서, 그래 쇼윈도라도 보면서.
그는 누구에게라도 좋으니 전화를 걸어서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얼른 생각난 사람이 엊저녁에 술을 사주던 선배 만화가 김 선생이었다. 김 선생은 자기가 근무하고 있는 신문사의 자리에 있었다.
"김 선생님, 결국 목 잘렸습니다."
저쪽에서는 잠시 침묵이었다.
"제기럴, 또 한잔할까?"
"그럽시다. 나오세요. 아니 제가 선생님께 지금 가죠."
"오게. 제기럴, 한잔하세."
수화기를 놓고 나올 때 그는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그는 김 선생이 따라주는 술을 빨리빨리 마셨다.
"좀 천천히 마시게."
김 선생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그는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싱긋 웃었다.
"우리나라 만화가들의 그 단순하면서도 회화적인 선이 얼마나 훌륭한 걸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르고 있단 말야."
김 선생은 술잔 속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기계로 그린 것 같은 양키들의 만화가 진짜인 줄로 알고 있거든."
"만화가 우스우면 그만이지 쥐뿔나게 회화적이고 아니고를 찾게 됐어요?"
그는 술을 또 들이켰다. 김 선생은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제가 군대 있을 때 말입니다." 그는 힐끗 말했다. "남들은 제가 정훈으로 떨어졌다고 부러워했거든요. 편할 거라는 거죠. 그렇지만 전 말예요, 총대를 쥐지 않았으니까 말이지요, 군대 기분이 안 났거든요." 그는 취해 오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아마 그때 총대를 쥔 사람들이 지금은 안정된 직장에들 앉아 있겠지요? 저는 항상 만화만 붙들고, 남들은 편하려니 부러워하지만 실상은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르고 말입니다."
"그럴까?"
김 선생이 말했다.
"술이 없으면 말야…" 그들의 뒤쪽에 앉아 있는 패들의 하나가 소리쳤다. "인생이란 말야…" "허, 또 나오시는군." "허, 저 소리 듣기 싫어서 이젠 술 끊어야겠어." 누군지가 소리쳤다.
"문화부장이 차나 한 잔 하자고 하더군요."
그는 속으로는, 자기가 만화 연재를 부탁하러 갔던 문화부장을 생각하면서 말하고 있었다.
"다방에 가서 그 양반이 그러더군요. 사람 웃기는 방법의 몇 가지 패턴을 안다고 곧 만화가가 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 양반이 그랬어요. 두꺼비 같은 눈알을 부라리면서 말입니다."
찻값을 앞질러 내버리던 그 키가 작은 작달막한 문화부장. 날 무척 무안하게 해줬었지.
"그러면서 말입니다. 너는 미역국이다, 이거죠."
자기네 사장이 얼른 뒈져달라는 기도를 하려던 그 사람, 난 참 면목이 없어서 혼났지.
"차나 한 잔. 그것은 일종의 추파다. 아시겠습니까? 김 선생님?" 그는 혀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그 속에서 성실을 다했던 하나의 우연이 끝나고…"
그는 술을 한 모금 꿀꺽 마셨다.
"새로운 우연이 다가온다는 징조다. 헤헤. 이건 낙관적이죠, 김 선생님?" 그는 김 선생이 방금 비워낸 술잔에 취해서 떨리는 손으로 술을 따랐다. "차나 한잔. 그것은 이 회색빛 도시의 따뜻한 비극이다. 아시겠습니까? 김 선생님, 해고시키면 차라도 한잔 나누는 이 인정. 동양적인 특히 한국적인 미담… 말입니다."
"그, 어린이 신문에 그리고 있는 거라도 열심히 하고 있게. 기다리면 또 뭐가 생길 테지."
김 선생이 술잔을 들면서 말했다.
"자, 드세."
그는 자기 술잔을 잡으려고 했다. 잘못해서 술잔이 넘어져 버렸다. 그는 손가락 끝에 엎질러진 술을 찍어서 술상 위에 '아톰X군'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 '아톰X군', 차나 한 잔 하실까? 군과도 이별이다. 참 어디서 헤어지게 됐더라." 그는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는 다른 손으로 자기의 이마를 한번 찰싹 때렸다. 골치가 쑤셨기 때문이다. "오, 화성인들의 계략에 빠져서 군이 포로가 되어… 바야흐로 생명이 위험해져 있는 데서 '다음 호에 계속'이었군… 미안하다, '아톰X군'… 사람들은 항상 그런 걸 요구하거든. 아슬아슬한 데서 '다음 호에 계속'". 그는 다 그려진 '아톰X군'의 얼굴을 다시 손가락 끝에 술을 찍어서, 지우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아톰X군', 어떻게 군의 힘으로 적진을 뚫고 나오기 부탁한다. 이제 난… 힘이 없단 말야. 나와 헤어지더라도… 여보게, 우주는 광대하고." 그러면서 그는 양쪽 팔을 넓게 벌렸다. "어두운 공간 속에서 영원한 소년으로 살아있게."
그들은 밤늦도록 그런 식으로 술집에 앉아 있었다.
김 선생이 부축해서 태워준 택시를 타고 그는 집으로 왔다. 택시 안에서 그는 술이 좀 깨어 있었다. 그는 택시에 탈 때 김 선생이 쥐어준 서류용 봉투를 택시에서 내릴 때 그대로 두고 내렸다.
"또 술을 먹고 와서 미안하오."
그는 방문을 열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퍽 취하셨네요."
아내는 남편이 반가워 깡충거리듯이 뛰어나왔다.
"배 아프시던 건 좀 어떠세요?"
"크로로마이싱을 먹었어. 크로로마이싱을 말야. 흉터가 있더군."
"어디에 흉터가 있어요?"
"어디긴 어디겠어? 크로로마이싱에지."
"정말 취하셨어요."
아내는 그를 이불 위로 눕혔다. 옆방에서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어지간히 성실하게 사는 척하지?"
아내는 자기의 손으로 남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있었다. 그때 옆방에서 방귀소리가 둔하게 벽을 흔들며 들려왔다.
"그래도 별수 없이 보리밥만 먹는 신센데요, 네?"
아내가 킬킬거리며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만해 두자, 아내야. 그는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하… 꽤 오랫동안 웃었나보다. 아주머니가 지금 무안해하고 있나 보다. 재봉틀 소리가 그쳐 있었다. 돌려요, 아주머니, 어서 재봉틀을 돌려요. 웃음소리가 잠꼬대였던 것처럼 할 수는 없나, 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면서 아까 낮에 버스칸에서 자기에게 자리를 내주던 영감이 생각키었다. 아주머니, 그건 건강한 증거입니다. 돌려요, 어서 돌려요. 그 사이에 재봉틀이 다시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흥, 방귀 좀 뀌었기로서니, 하며 입술을 삐죽 내민 아주머니의 얼굴이 보이는 듯하다. 그럼요, 아주머니, 방귀 좀 뀌었기로서니 재봉틀 소리를 죽여야 할 거까지는 없습니다. 돌려요, 어서요.
그는 두 팔로 아내의 상반신을 껴안았다. 그러면서, 앞으로 자기도 아내를 때리게 될는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자 앞으로 다가올, 아직 확인되지 않은 수많은 날들이 무서워져서 그는 울음이 터질 뻔했다.
그는 아내를 껴안고 있는 자기의 팔에 힘을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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