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위 -르 클레지오 홍상희 옮김
그 여인의 얼굴은 내게는 모든 베일이 벗겨진 듯 보였다.
완벽한 얼굴이었다. 고른 윤곽에 깊고도 촉촉한 눈, 그리고 짙은 머리칼이 높은
광대뼈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녀는 노래를 불렀다. 내 앞 검은 화면 위에 떠
있는 그 얼굴은 부드럽게 흔들거리며 인위적인 표정을 풍부하게 꾸며낸 감동으로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 감동을 나를 위해, 짓고 있는 그 얼굴은 내가 믿도록
하기 위해 연기하고 있었다. 균형잡힌 몸에 얹혀 있는 머리는 저 어깨와 원통형의
저목과 잘 어울리게 보인다.
두 팔이 움직였다. 길게 뻗은 두 팔은 십자로 교차하며,
두 팔 끝의 두 손은 방금이라도 껴안을 듯 손가락들이 긴장되어 있었다.
그 손은 고통의 희극, 혹은 사랑의 희극을 연기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손에게, 팔에, 정열에 봉사하는 법을 가르쳤다. 동작의 세세한
부분을 보여주었으며, 영혼이 느끼는 것을 표현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분노의
동작, 질투의 동작, 찬미의 동작, 신뢰의 동작, 행복의 동작, 고통의 동작,
모성의 동작, 이제 이 손과 팔은 그것들을 모두 다 알고 있다. 이것들은 혼자
살 수도 있고, 표현할 수도 있으며 끊임없이 설명할 수도 있다. 그리고 몸의
나머지 부분도 마찬가지다 : 증오를 표현하는 무릎, 비탄을 표현하는 가슴,
경악과 찬탄을 표현하는 배, 관능의 허벅지, 흐느낌의 어깨, 초조함의 발, 미덕의
등, 음탕의 등, 웃음의 머리카락, 아무것도 아닌 것, 예를 들어 근육의 미세한
수축이, 혹은 신경과민인 자세 하나로도 감정을 바꾸어놓기 충분하다. 그것은
마치 아주 어린 유년 시절부터 배운 암호처럼 지금은 완전히 훈련되어 습관과
동시에 본능을 보여주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저 육체 전체가 아주 유용한 기계였다.
그리고 그 몸이 표현하는 것 중 어떠한 것도 낯선 것은 없었다. 만약 감정이
정말로 일어난다면(때때로 감정이 생길 때도 분명 있다) 그 감정은 시늉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리고 겉모양 속에서만 살 수 있을 감정이었다.
이상한, 참으로 이상한 기계가 아닌가! 예전부터 사람들은
이 여자에게 그녀가 여자라는 것을 가르쳤다. 말하자면 그녀의 육체와 정신을
제작한 것이다. 이제 이 영혼과 육체는 자동차의 모터처럼 완벽하게 화답한다.
여자로 만들어졌었던 여자가 이제 여자 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민첩한 몸 위에 마치 잘린 듯한 그 얼굴은 전대미문의
풍요로 가득 차 있었다. 아름다움과 생명으로 거의 투명하게 움직이는 희미한
그 얼굴은 하나 의 물건처럼 제공되어 있었다. 아픔을 주고 추억과 회한을 일깨우는
내밀한 물건 : 우리는 이런 것을 잘 알고 있다. 저 깊고 부드러운 두 눈, 그
눈꺼풀, 코, 콧날, 도톰한 두 뺨, 눈썹 선, 머리카락, 귀, 이빨과 입술을,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마치 예전처럼, 보아왔던 것처럼 잘 알고 있었다. 종의 틀에서
낙인이 찍힌 잘 아는 인종의 모든 광채로 주어진 저 얼굴은 당신에게 달라붙어
당신 자신의 눈, 당신의 입, 당신의 코, 당신의 귀, 당신의 머리, 당신의 눈꺼풀,
당신의 눈썹, 당신의 턱, 당신의 이마를 당신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당신이
쓰는 똑같은 언어로 말한다. “나는 당신 것이에요…… 나는 당신 것이에요……
나는 당신 것이에요.” 그리하여 당신은 끊임없이 당신의 심연의 심연 속에서
당신을 혼란하게 뒤섞고, 당신 자신의 구렁 속에 당신을 잠그며, 당신을 남자로
언제나 영원히 남자로 명명한다.
그녀는 여전히 몸짓으로 흉내를 낸다. 그녀는 계속
인간이라는 종의 희극을 천진난만하게 연기한다. 그녀는 자신의 비밀이 폭로된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육체와 속을 짐작할 수 없는 얼굴을
구경거리로 보여주지만 이런 갑옷에도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녀를 다 짐작하였다는 것, 그녀를 속에서부터 비쳐보았으며, 그녀의
찌푸린 표정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벌거벗겨졌다는 것, 말로 다 할 수
없이 반투명으로 벗겨지고 신화가 벗겨졌다는 것을 그녀는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이제 더이상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는 여자였다. 그녀의 감각,
생각, 신경, 임파선, 피부 그리고 엑스레이에서 보듯 눈에 보이는 해골까지
온통 여자였다.
살과 신경섬유와 세포로 만들어진 여자. 전부 다 지각된
총체적인 여자, 너무 잘 알고 있는 신비한 살덩이, 어두운 은둔처,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는 하나의 미로, 검고 촉촉한 화장한 두 눈, 그것은 장식품이 아니다
: 그 눈은 보고 있었다. 강렬한 빨간색 루주가 발린 저 입술도 분명 입술이다.
그려진 눈썹도 분명 눈썹이었다. 저 머리카락, 연약한 콧날이 선 코, 마스카라가
칠해진 속눈썹, 주름살, 분홍색 분이 발린 피부, 이 모두가 진짜, 끔찍하게도
진짜였다. 비단천을 두른 몸, 어깨, 젖가슴, 이것들은 아무리 덮어도 소용이
없다. 위장해도 소용이 없다. 수많은 장식과 조각 같은 아름다움으로 그것들을
신화적으로 만들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그 자체로 남아
있을 뿐이다. 성교와 해산을 위한 파괴할 수 없는 인류라는 종의 목적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인 살아 있는 신체기관일 뿐이다.
두개골 속에선 사지에서 느끼는 감정들이 형태를 갖추고
끊임없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그 동상 속에는 생명이 깃들여 있다. 저 동상은
생각하고 보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고통과 쾌락들을 느끼며 감동과 상상력이
넘쳐흐르기도 한다. 그녀에게는 과거도, 유년 시절도, 부모와 친구들, 애인들도
있었다. 그녀는 자기만의 생활도 자기 집도 있었다. 보잘것없는 생활, 신비하고도
진절머리나는 동화 같은 삶은 끊임없이 그려지면서 연재소설처럼 거듭해서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어느 날 그녀는 늙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는
죽을 것이다. 죽음은 그녀의 몸속, 작은 부분부분마다, 그녀의 아름다움마다
등록되어 있었다. 그 비극적인 젊음의 마스크 뒤에, 유연하고 관능적인 그 육체의
갑각 밑에 있는 것, 그것은 이제 찾아올 썩은 시체다. 이 점에 있어서도 그녀는
역시 속이지 못한다. 그녀가 아무리 여신의 연기를 해도, 그녀의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검은 화면 위에 뜨게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부드럽고 장중한 목소리로
인위적인 사치 속에서 노래를 불러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녀의 가면 밑에는
몰락의 가면, 유전적인 원죄의 숙명적인 신호, 망각이 새겨져 있다. 그녀의
투명한 육체와 영혼은 반드시 다가올 법령을 공표할 뿐이다 : 거기엔 인간적
진실은 없다. 아름다움도, 확신도 없다. 노쇠와 혼합과, 소멸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흐름과 교체는 인생의 법칙 자체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죽음의 법칙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영속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저 여인이 노래부르는 목소리가 그렇듯이, 그녀가 사용하는
단어들이 그렇듯이, 그녀의 인생에 리듬을 주던 섬세하고 감동적인 음악이 그렇듯이,
모든 고통과 쾌락이 그렇듯이 그녀의 육신과 우리들의 육신은 몰락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선 물질과 정신,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이 서로 만나
한데 용해되어 교체의 광대무변 속에서 서로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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