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서산성
-. 위치 : 충남 보령시 청소면 성연리
청소면 성연리(靑所面 聖淵里) 산(山)32번지 일대(一帶)로 청소면(靑所面) 소재지에서 동(東)쪽으로 4㎞쯤에 성연리가 있다.
이곳에서 동(東)쪽으로 가장 높은 산(山)이 오서산(烏棲山)이며 해발 790m이다.
오서산의 중턱에 길다란 성벽이 있는데 자연할석(自然割石)의 막돌 쌓기로 남쪽에는 높이 2.4m, 길이 50m정도의 석축이 남아있기도 하나, 동(東), 북방(北方)으로는 자연적(自然的)인 절벽도 많이 이용(利用)하였다.
성안에는 건물터로 생각되는 평탄한 곳이 거의 없고 다만 토기편(土器片)이 간혹 수습되고 있어 확실한 성(城)의 성격을 알 수가 없다.
둘레가 약 2㎞쯤으로 토루(土壘)가 달리는 듯한데 석축(石築)이 무너지고 낙엽이 부식되어 덮인 듯하다.
2)향천리 시루성
-. 위치 : 충남 보령시 청라면 향천리 산44-1번지
대천시(大川市)에서 청양(靑陽)으로 가는 도로로 4㎞쯤 가면 북편(北便)으로 청천(靑川)저수지가 있고 그 남쪽이 향천리(香泉里)이다.
시루성이라고 불리우는 야산(野山)은 성주산(聖住山) 북지(北枝)의 낮아진 야산지대이며 이곳에 정상(頂上)을 두른 둘레 약 300m의 석축산성(石築山城)이 있다.
지금은 군용지(軍用地)라서 정확한 조사(調査)가 어렵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시대 말엽에 김성우장군(金成雨將軍)이 이곳에서 군사를 훈련시키고 복병리에 복병(伏兵)을 배치시켰다가 바닷쪽에서 침입하는 왜적(倭敵)을 갯벌에서 섬멸시켰다고 한다.
성 아래의 마을은 시루성이와 창터가 있는데 창터에는 창고가 있었다고도 한다.
성의 안팎에서는 백제계(百濟系)의 토기파편(土器破片)들이 발견되고 있어서, 이미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축조되었던 듯하고, 폐성화(廢城化) 되었다가 고려 때 왜구(倭寇)를 막으려고 수축(修築)하여 이용했던 듯하다.
3)대봉산성
-. 위치 : 충남 보령시 남포면 제석리
남포면 제석리(藍浦面 帝釋里)에 위치(位置)하였다.
문헌에는 기록이 없어 후대(後代)에는 이용(利用)되지 않았고 백제(百濟)때의 것인 듯하다.
남포면 읍내리(藍浦面 邑內里)에서 서(西)쪽으로 약 2㎞ 떨어져서 제석리(帝釋里)와 봉덕리(鳳德里)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 100m 남짓한 봉산(鳳山)이 있다.
이곳 정상부(頂上部)에 석축(石築)의 산정식(山頂式)(테뫼식) 산성이 있는 바 둘레는 약 380m이다.
산의 경사가 급하고 오똑하며 석축되었던 석재가 붕괴되어 흘러내렸다.
암괴(岩塊)로 되어있는 지세에 사방의 급경사를 이용해 석축하고 안쪽에는 성벽보다 낮은 위치에 2~3m 너비로 통행이 편한 내황부(內隍部)가 형성되어 있다.
정상(頂上)에서 서쪽의 제석리 방면을 주향(主向)하였고, 정상부에는 지름 10m쯤의 석축 웅덩이가 있다.
이 웅덩이는 물의 저장과 식량의 저장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봉수대의 역할을 했던 것인지 분명치 않다.
산의 정상에서는 서해바다가 멀리 보이며 동쪽으로는 남포읍성(藍浦邑城), 남(南)으로 달산리산성(達山里山城)이 바라다보이고 있어 전망이 매우 좋다.
4)고남산성
-. 위치 : 충남 보령시 주포면 봉당리
주포면 봉당리(周浦面 鳳堂里) 산 62번지에 있는 것으로 보령읍성(保寧邑城)이 축조(築造)되기 이전의 읍성(邑城)으로 사용(使用)되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인용된 정대(鄭帶)의 동헌기(東軒記)에는 왜구(倭寇)에 대비하여 태조 경진년(太祖 庚辰年)에 봉당성(鳳堂城)을 쌓고 비어(備禦)의 장소를 삼았으나 성지(城池)가좁고 얕았으며 험조(險阻)한 지형도 아니고 샘과 우물이 없어서 세종(世宗)때 동쪽 1리(里)쯤 떨어진 지내동(池內洞)의 당산(唐山) 남쪽에 새로운 읍성(邑城)을 쌓았다고 하였다.
태조대(太祖代)에는 경진년(庚辰年)이 없고 서기 1400년(年)인 태종즉위년(太宗卽位年)이 경진년(庚辰年)이어서 어떤 착오가 있었던 듯하다.
따라서 서기 1400년(年)에서 읍성(邑城)이 새로 축조(築造)된 1430년(年)(세종12년(世宗12年))까지는 봉당성(鳳堂城)이 읍성(邑城)이었다.
세종실록(世宗實錄)의 지리지(地理志)에서 읍(邑) 석(石) 성(城) 주(周) 회(回) 일(一) 백(百) 칠(七) 십(十) 삼(三) 보(步) 무(無) 정(井) 천(泉)이라는 것이 곧 봉당성(鳳堂城)을 말한 것이며 새로이 축조되어 있었던 읍성(邑城(현재(現在)의 읍성(邑城))은 석(石) 성(城) 주(周) 회(回) 이(二) 천(千) 일(一) 백(百) 구(九) 척(尺)이라하여 아직 완성(完成)되지 못한 상황임을 기록하고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世宗實錄 地理志)는 세종(世宗) 7·8년경(年頃)을 기준한 것이기 때문이다.
석축(石築)으로 둘레가 173보(步)에 불과한 작은 것임을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봉(鳳) 당(堂) 고(古) 성(城) 서(西) 이(二) 리(里) 본(本) 조(朝) 정(定) 종(宗) 이(二)년(年) 축(築) 성(城) 지(址) 천(淺) 협(狹)이라고 하였는데 어느덧 폐성(廢城)이 되어 1930년대(年代)에 조사된 자료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서는 둘레 270칸(間)의 토루(土壘)로, 벽이 대체로 완전(完全)하다고 하였음을 보아, 석축(石築)의 위에 약500여년 동안에 부토(腐土)가 쌓였음을 모른 듯하다.
봉당천(鳳堂川)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서쪽에 해발 200m쯤의 산맥(山脈)이 있는데 이 산줄기의 북쪽 끝에 해발 98.8m의 작은 야산이 있어 사방이 거의 단절되어 독립구릉(獨立丘陵)처럼되어 있다.
이 야산의 약 7부능선쯤을 둘러싼 테뫼꼴의 자그마한 산성으로 남쪽에 작은 골짜기가 있고 이 계곡 아래에는 「골내미」라 부르는 부락이 있다.
산은 높지 않으나 사방의 전망이 좋아 서해바다까지 훤히 트여 보인다.
성(城)은 산(山)의 정상부(頂上部)에서 동(東)·서(西)로 높은 위치가 되며 남(南)·북(北)쪽은 각기 특징있게 축조되었다.
전체의 평면은 반달꼴이며 좁은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고 있다.
남쪽 성벽은 서쪽과 동쪽성벽까지 ω형(形)으로 지세(地勢)를 이용했다.
성벽 안쪽은 약간 평평하고 성벽은 단(段)을 이루며 형성되고 폭 5∼10m정도의 단구형(段丘形)을 이루었다.
따라서 마치 이중(二重)의 계단식 성벽처럼 보이는데 성의 외부(外部)의 단장부분(段狀部分)은 해자(垓字)였다가 메워진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안쪽의 성벽은 군데군데에 경사지게 축조한 석재(石材)가 노출(露出)되어 있어 토축(土築)이 아니고 기본적(基本的)으로 석축(石築)이었음을 보여준다.
남쪽 성벽의 중앙부는 바깥으로 내밀고 있으며 그 좌우에는 문터처럼 안팎으로 통행할 수 있다.
북벽(北壁)은 서쪽에서 돌아온 성벽이 경사를 잃다가 다시 성벽이고 또다시 성벽의 물매가 적어지곤 하여 4단(段)의 계단식으로 되어있다.
성문터는 분명히 확인되지 않으나 남벽의 중간쯤에 계곡으로 오르내리는 통로가 있어 S자(字)모양으로 돌면서 통행한다.
북벽(北壁)의 서단(西端)에 있는 통행로는 성벽을 허물어 최근에 만든 것이다.
성안에는 우물이 없으나 서쪽에 치우쳐 작은 웅덩이가 있는데 아마도 물을 저장했던 시설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성안에는 건물이 들어설만한 평탄(平坦)한 대지가 정상부(頂上部), 정상부(頂上部)의 서(西)쪽 남벽(南壁) 중앙부(中央部)· 동남각부(東南角部) 등 4곳이 있고 북벽(北壁)의 중간쯤에도 비교적 평탄한 곳이 있다.
성내(城內)에서는 토기편(土器片)과 와편(瓦片)이 수집됐는데, 특히 경질(硬質)의 회흑색(灰黑色) 승석문(繩蓆文)인 것과 사격자문(斜格子文)이 있는 것이 많아 이들 토기편(土器片)은 백제(百濟)의 특징적(特徵的)인 것에서 이 산성(山城)은 15세기초(世紀初) 읍성(邑城)으로 한때 이용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백제시대(百濟時代)의 산성(山城)이었음이 분명(分明)하다.
기와조각도 양면(襄面)에 포목문(布目文)이 찍히고 황갈색(黃褐色)의 격자문(格子文)의 표면(表面)에 찍힌 것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朝鮮時代) 초기에 사용(使用)되던 퇴화된 청자편(靑磁片)과 황록색(黃綠色)의 유약(釉藥)이 발라 자기(磁器), 와편(瓦片)으로서 비교적 후대(後代)의 것들도 발견되어 1400년대(年代)에 일시(一時) 읍성(邑城)으로 사용(使用)되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성안에는 최근에 지역(地域)의 유지자(有志者)들이 세운 연혁을 간단히 적은 비(碑)가 있다.
5)황율리 산성
-. 위치 : 충남 보령시 주산면 주야리·유곡리·창암리
주산면(珠山面) 주야리(珠野里)와 유곡리(柳谷里)의 북방이고 창암리(倉岩里)의 남쪽에 나즈막한 병릉상(丘陵狀)의 야산(野山)이 있고, 이 산의 정상(頂上)에는 테뫼식의 작은 규모인 토축산성(土築山城)이 있다.
성(城)은 내부(內部)의 흙을 삭토(削土)한 흔적이 있으며 본디 성벽이 지나는 토루(土壘)의 흔적이 뚜렷하다.
둘레가 200m 남짓하며 문터는 남쪽과 북쪽에 있었던 듯하다.
성안에서는 백제계(百濟系)의 승석문(繩蓆文), 격자문계(格子文系), 경질토기편(硬質土器片)이 발견된다.
앞의 창암리산성(倉岩里山城)과 후술(後述)할 삼곡리산성(三谷里山城)과 함께 삼각형으로 배치된 소규모의 산성들로 이 지역에 있어서의 방어상(防禦上)의 성곽배치 혹은 초기(初期)의 국가형성(國家形成)문제와 결부시켜 주목(注目)할 수 있는 곳이다.
6)창암리 산성
-. 위치 : 충남 보령시 주산면 창암리
주산면(珠山面) 소재지에서 북쪽 약 1km에 창암리(倉岩里)가 있다.
이 마을의 뒷산은 운봉산(雲峰山)인데 이 운봉산의 지맥이 창암리쪽으로 흐른 낮은 산단(山端)을 그 정상부(頂上部)에 돌려 토축(土築)한 테뫼식이다.
일제(日帝)때의 조사된 기록에는 마산(馬山)이라고 하여 이 산 이름을 적고 있다.
둘레 약 200m의 작은 규모이고 성벽은 파괴가 심하여 문터를 비롯한 시설물은 알 수 없고 다만 성안에서 삼국시대(三國時代)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격자문계 토기파편(格子文系 土器破片)이 발견된다.
7)대천리 산성
-. 위치 : 충남 보령시 웅천읍 대천리
남포(藍浦)에서 웅천(熊川)에 이르는 도로를 따라가다가 웅천에 이르기 조금 전에 웅천면 대천리(熊川面 大川里)가 있다.
이곳 뒷산은 봉화산(峰花山)과 잔미산으로 이어지는 산맥의 서남쪽 능선이며 해발 206m이다.
산정부(山頂部)를 대략 수평으로 에워싼 석축(石築)의 테뫼식 산성으로 둘레가 대략 450m쯤인데 붕괴가 매우 심하다.
내부에서는 회청색(灰靑色)의 경질토기편(硬質土器片)으로 승석문(繩蓆文)과 격자문계통(格子文系統)의 무늬가 있는 백제(百濟)때의 그릇조각들이 발견된다.
8)삼곡리 산성
-. 위치 : 충남 보령시 주산면 삼곡리 산142번지
주산면 삼곡리(珠山面 三谷里) 산(山)142번지인데 정곡초등학교의 뒷산이다.
이곳은 용오리재라고 불리우는 한편 성치(城峙)로도 불리웠다.
낮은 구릉(丘陵)의 정상부(頂上部)가 평탄하고 둘레가 250m정도의 퇴뫼꼴인데 성벽은 토축(土築)이나 석재(石材)가 일부 보인다.
성벽은 성터라고 인정할수 있을만큼 완연치 않으나 성터가 분명하고 성안에서는 이웃한 작은 산성들처럼 승석문(繩蓆文), 격자문(格子文)이 찍힌 삼국시대(三國時代)의 토기파편(土器破片)들이 발견된다.
9)봉화산성
-. 위치 : 충남 보령시 웅천읍
웅천면(熊川面)의 소재지에서 대천시(大川市)쪽으로 북상(北上)하다가 부여행(扶餘行)의 도로가 갈라지는데 이곳으로 따라가다가 수부초등학교가 있다.
이 학교(學校)의 뒷산은 해발 416m의 잔미산이며 그 북쪽에 봉화산(峰花山)이 있는데 이 두산을 걸쳐서 쌓은 포곡식(包谷式)의 석축산성(石築山城)이다.
서남향(西南向)하여 잔미산의 정상에서 봉화산(峰花山)에 연결되며 자연할석(自然割石)으로 쌓아 둘레 약 900m쯤 되며 이곳에서 남쪽으로 보이는 성동리(城洞里)의 운봉산성(雲峰山城)과 흡사한 형태이다.
성벽은 내탁(內托)에 의하였고, 문지(門地)부분의 좌우는 내축(來築)하였다.
문터는 수부초등학교에서 오르는 곳과 남포에서 오르는 곳 두 개가 있다.
이 성(城)에서 남포읍성(藍浦邑城)이 내려다 보이고 달산리산성(達山里山聖)도 가깝다.
성안에서는 봉화산 쪽에서 승석문(繩蓆文)이 찍힌 토기파편(土器破片)들이 나올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자기편(磁器片)들도 나오고 있다.
따라서 이 산성(山城)은 남포읍(藍浦邑)을 지키는 입보용(入保用)으로 이미 백제(百濟)때 축조되어 조선시대까지 간헐적으로 사용(使用)되어온 것으로 판단된다.
10)달산리 산성
-. 위치 : 충남 보령시 남포면 읍내리
남포면(藍浦面) 읍내리(邑內里)에서 서남쪽에 있는 남포저수지(藍浦貯水池)의 남쪽에 있는 나즈막한 야산에 테뫼식의 토축산성(土築山城)이 있어서 달산리(達山里)와 옥서리(玉西里)의 경계를 이룬다.
일제(日帝)때의 조사된 기록에는 산정(山頂)에 있고 둘레가 약 250칸(間)(450m)의 토루(土壘)인데 벽이 대체로 완전하다고 하였다.
성벽 안쪽의 흙을 깎아 비탈을 채운 삭토(削土)의 방법(方法)으로 쌓여진 것으로 판단되며 전체의 둘레가 크지 않은 소형(小型)의 것이다.
성의 남쪽성벽은 삭토(削土)가 아니고 성토(盛土)한 성벽이 약 30m쯤 남아있고, 이 안쪽으로는 꽤 넓은 평탄대지가 있어 전지화(田地化)되었다.
성벽의 안쪽이 통행에 편리하게 요형(凹形)의 통로처럼 되었으나 바깥쪽은 꽤 험한 비탈사면이다.
문터는 동쪽에 하나가 있는데 붕괴가 심하여 규모와 형태는 알 수 없다.
다만 너비 2.8m쯤의 통행로이고 문터 안쪽에 평탄한 대지가 있으며 직면(直面)하여 민묘(民墓)가 자리하고 있다.
산의 정상부(頂上部)에도 길이 30m, 폭 20m쯤의 평탄한 대지가 있어서 건물터로 추측된다.
성안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극히 적고 격자문(格子文)의 토기파편(土器破片)이 수습되었을 뿐이다.
서쪽에 전개된 넓다란 평야의 배후에 위치한 성으로 주목(注目)된다.
11) 증산리 시루뫼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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