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프로필>
본명 정안길(鄭安吉)
*1943년 부여출생
*1963년 월간 소설문예 추천
*한국문인협회 부여지부장
*한국신문학협회 충남지부장
*단편소설집집 '무지개 영혼'발간
*장편소설 '백마강' '종이새의 지평'발간
*민속발굴서 '꼬댁각시 놀이'
*풍수서 '정산풍수지리학강론' 6권
*장단편소설 80여 편 발표
*일붕문학상(소설부문). 매월당문학상(소설부문). 허균문학상(소설부문). 충헌문화상(문화부문)외 수상
<정안길 단편소설>
무지개 영혼
동쪽 하늘로 불끈 솟은 태양빛이 골안개 속으로 깊이 스며든다. 안개는 불꽃처럼 피어오르고 붉게 휩싸인 골짜기는 여울이 졸졸졸 소리를 내며 흘러내린다.
어엉 씨의 집은 안개가 걷힌 뒤 마당으로 아침 햇살이 밝게 내리 깔린다. 아침상을 물리고 방을 나온 어엉 씨는 대뜸 마당을 질러가서 헛간 문을 열어젖힌다. 그리고 안에서 분무기통과 500cc들이 농약 한 병을 꺼내들고 나온다. 그때 뒤따라 나온 응아 댁이 밥상을 부엌에 내다놓고 재빨리 밖으로 나오더니, 이은동작으로 어엉 씨에게 달려가 그의 등을 두드린다. 적이 놀란 어엉 씨는 들고 있던 분무기통과 농약을 일단 땅바닥에 내려놓고 그녀의 눈치를 살핀다. 그의 동공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흰자위를 헤엄친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해서이다.
“어엉? 어엉?”
그러자 응아 댁은 춤추듯 손짓 몸짓을 한참 해대며 수화한다. 해가 높이 솟아오르면 안개도 걷히고 이슬도 마를 터인데, 왜 이른 아침부터 농약 일을 서두를 게 뭐냐고 따지는 품이 다분히 신경질적이다.
“응아응아!”
응아댁은 방금 자신이 쏟아 놓은 말을 그에게 알았느냐고 다짐까지 받으려한다. 그러나 어엉 씨는 그녀의 살천스런 인상과 투박하게 불퉁거리는 꼬락서니가 못마땅하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그는 대뜸 눈을 부릅뜨며 반박하고 나선다. 열 마지기 논을 열 손가락으로 헤아려 보이면서 해가 져서 어두워지면 잠을 자야 하는데 해가 떠있는 동안 어떻게 일을 다 끝내라고 생트집을 잡느냐면서 오만상을 찡그리며 얼굴을 꾸긴다.
그렇게 내지른 그는 응아 댁이 뒤에서 뭐라던 개의치 않고 고집스럽게도 땅바닥에 놔두었던 분무기통을 등에 걸머지더니, 농약병을 챙겨들고 훌쩍 밖으로 나간다.
어엉 씨가 형님 집을 나와 따로 살림을 차린 건 지난 이른 봄이다. 결혼한 지 십여 년에 다섯 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낳아 거느리다 보니 형님 집에 빌붙어 줄곧 함께 어울려 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부지런하고 마음씨 착한 어엉 씨를 형님은 내보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남들처럼 멀쩡하다면 잡아둘 겨를 없이 벌써 제풀로 나가 따로 살림을 차렸을 터이다. 그러나 따로 내보낸들 내외가 모두 사람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터에 늘 마음이 안 놓인다면, 차라리 한 집에 데리고 사는 쪽이 편하리라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형과 아우가 낳아놓은 아이들이 십여 명이나 되어 온 집안을 떠들썩거리는 마당에 길래 함께 어울려 산다는 건 불가능한 고통일 수밖에 없어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처지이다.
그런데 눈치 빠른 응아 댁은 벌써부터 남편에게 자꾸 충동질을 치면서 들볶아댄다. 그게 여러 해를 거듭해왔는데, 지난봄에는 그 동안 벙어리 냉가슴만 앓던 그녀가 결국 시숙 앞에 나서서 하고 싶은 말을 건네게 되고, 따로 살게 해달라고 강력하게 호소하면서 안달을 떨기에 이른 거다. 어엉 씨는 마음도 착할 뿐 아니라, 강철 같이 건강한데다 부지런하여 무슨 일이든 빈틈없이 해치우는 게 되레 정상인 못지않다. 하지만 약삭빠르지 못하고 둘림성이 없는데 응아 댁은 그렇지 않다. 비록 말은 못하지만 눈치와 속셈이 빨라서 한 살림 쩍지게 하리라는 말이 나돈다. 게다가 아름다운 얼굴과 예쁜 몸매를 갖춘 그녀는 늘 옷맵시가 단아하고 품위 있어 보인다.
그녀는 한번 대화가 터지더니, 줄곧 그리로 달라붙어 시숙을 들볶아댄다. 그래 견디다 못한 재영 씨는 기어이 세집뫼에다 집을 한 채 사서 열 마지기 논과 함께 살림을 따로 내준다. 일부러 한적하고 조용한 세 집 뜸에 제급내서 보낸 것이다. 그러나 재영 씨는 동생내외가 마치 물가에 내놓인 어린 아이마냥 마음이 안 놓이고 늘 속이 꺼림칙하기만 하다.
아무튼 따로 살림을 차린 그네는 정상인이나 다름없이 깔끔하고 알뜰한 살림살이를 잘 꾸려나가는 듯 보인다. 비록 헌 집이지만 허물어지고 뚫어진 데를 시멘트로 바르고 토방과 툇마루를 말끔히 고치는가 하면, 부엌과 지붕도 새로 개량한다. 이렇듯 고칠 데를 고치고, 바를 데를 발라서 새집처럼 단장한다. 또 빈터에는 축사를 짓고 채소밭도 일군다. 축사에는 돼지 닭 토끼 같은 가축들을 사다가 가둬 키우고, 채소밭에는 계절에 맞춰 상추랑 쑥갓, 아욱 같은 걸 골고루 심어 가꿔서 언제나 싱싱한 소채를 뜯어먹는다. 뒤란에는 감나무를 심고 앞마당 가에는 복숭아 자두 대추나무 같은 유실수를 심어 온갖 정성으로 보살피고 가꾸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네는 늘 정겹고 화사한 낯빛으로 얼굴을 맞대고 웃음꽃을 피우며 잠시도 손을 맺고 우두커니 앉아있지 않고 집안 일이 아니면, 전장으로 나가 논밭 일에 묻힌다. 모처럼 얻어낸 독립가정이라 모두가 내 것 같고, 풍요롭고 자유로워 즐거움이 실실 넘친다. 그네가 거느린 오 남매의 아이들도 큰집에서 사촌들과 찌그럭거리고 큰아버지 큰어머니의 눈치 보면서 살 때보다는 훨씬 활기차고 생기가 돋아난다.
그렇지만 오늘 어엉 씨는 기분이 안 좋아서 속이 착잡하고 검정 연기 같은 그름이 가슴을 가득 채워든다. 그래 불규칙한 발걸음을 옮겨놓는다. 붉게 물든 안개를 헤치고 개울을 건너 논둑길을 걸으며 이슬을 머금은 파란 벼 잎을 넌지시 본다. 아직은 파랗게 성성한 게 농약이 급한 건 아니지만 으레 그렇듯 병충이 생기기 전에 미리미리 손을 써야 피해가 적다는 걸 그는 너무도 잘 안다. 지금쯤 농약을 하는 건 마땅한 일이라고 다시금 깨닫는다.
그런데 문득 그의 뇌리를 스치는 불쾌한 생각이 찜찜하게 달려든다. 이제껏 그녀의 말을 어긴 적도 없으려니와 마음이 좀 내키지 않더라도 따라주곤 하였는데, 오늘따라 고집을 피우고 여기까지 뛰쳐나온 것도 이상하지만, 그렇다고 남편이 혼자 나가게 버려 둔 채, 멋대로 하라는 식으로 따를 생각을 아예 않는 그녀가 문득 의문의 꼬리를 물고 달려든다. 따로 살림을 차린 뒤 그녀는 늘 어엉 씨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모든 행동을 같이한다. 농사일이고 집안의 모든 잡다한 일을 언제나 정겨운 원앙새처럼 얼굴을 맞대고 붙어 다니며 해낸다. 다만 그녀가 오일장을 보러 갈 때만 이웃의 방환을 딸려 보내는데 외모는 아름답고 예쁘게 생겼으나, 말을 못하는 속사정 때문에 장바닥에서 행여 놀림감이 되지 않을까 하여 방환을 동행시킨다. 허나 그도 읍내 시장은 시내버스를 타고 갔다가 오면 되지만 오가면서 사람들 만나기가 싫어 일부러 번화한 곳을 피하여 고개를 두 개나 넘는 시골 장을 보러 다닌다. 이전에는 형님내외가 살림살이를 도맡고 있어서 시장에 갈 일이 숫제 없지만 이제는 집에만 틀어박힐 수가 없는 노릇이다. 사람이 가정을 갖고 살아가려면 장을 안보고 살 수 없으니,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라 그렇게 한다.
그래 어엉 씨는 방환에게 늘 고마운 생각을 잊지 않는다. 그렇듯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면 하루살기도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든다. 방환도 마침 군대에서 제대하여 집에 와있으면서 어중이로 농사일도 못하고 늘 빈들거리며 놀고 있는 터라, 그네에게는 아주 맞춤처럼 잘 된 일이기도 하다. 방환은 응아 댁과 장에 가서 장보기를 도와주고 오는 일만 아니라, 어엉 씨네 모든 집안 일을 거들어주면서 밥도 함께 먹으니, 한 가족이나 다름없어진다.
어엉 씨는 개울물을 퍼다 분무기 통에 부어넣고 거기다 농약을 적당량 풀면서 생각해보니 집에서 서둘러 뛰쳐나온 게 뉘우쳐진다. 응아 댁 말마따나 아직 이슬에 흠씬 젖어 벼 잎에 물이 줄줄이 흐르는데, 거기에다 농약을 뿌리면 무슨 약효가 있을까. 그는 약물을 그렇게 타놓고, 물고 쪽으로 논두렁을 타고 걸어간다. 위 물고는 막아두고 아래 물고는 활짝 터서 논바닥의 물을 말려야한다.
그리고 아무리 눈여겨봐도 벼논에는 피 한 포기 눈에 띄지 않고 논두렁도 말끔히 깎았으니 할 일이 별로 없다. 그는 잠시 안개가 걷힌 뒤, 벼 잎에 축축하게 젖은 이슬이 마르기를 기다릴 셈으로 잠시 무료히 논두렁에 앉는다. 응아댁이 뒤를 밟아올 것도 같아서 이따금 집 쪽으로 눈길을 보내보지만 그녀의 모습은 나타나주지 않는다. 그의 머릿속은 어느덧 복잡하게 얽히고설킨다. 어젯밤에 있던 일과 오늘 아침 일이 줄줄이 이어져 머릿속에 떠오르는데 응아 댁의 대하는 눈치가 이전 같지 않아서 서운한 마음이 개운치 않게 보글거린다. 오늘 아침에도 안개가 걷히고 이슬이 마른 뒤 느지막하게 일을 나가라고 수화를 거듭해대던 그녀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꽁꽁 얼어붙은 얼굴에다 숫제 사람을 모멸하고 얕잡아보는 멸시의 눈초리이다. 그는 아까 그녀의 말이 옳다고는 생각하였으나, 얼굴에 감긴 저주와 증오의 꼬리가 그의 눈을 자극한 나머지 마음이 한량없이 쓸쓸하고 비애마저 느껴진 거다. 게다가 어젯밤은 어떠한가. 방환과 셋이서 방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데 그녀는 줄곧 방환의 곁에만 찰싹 달라붙어 앉아서 저희끼리 시시덕거릴 건 뭔가. 하기야 그가 없으면 시장 가기도 찜찜하고 온갖 크고 작은 집안일들이 그에게 맡겨져서 좌지우지되는 터에 그의 비위를 잘 맞춰서 도움이 되게 할 건 뻔한 일이다. 그게 바로 남편과 자식을 위한 길일지는 모르지만 그토록 눈에 거슬리게 할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그녀는 으레 얼굴을 맞대고 자신을 부둥켜안다시피 하던 잠버릇조차 저버리고 숫제 팽 돌아눕는 일까지 생긴 게 아닌가. 그는 원망스러움은 말할 것 없고, 가까이 있던 사람이 갑자기 멀어져 가는 듯싶어서 분명한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이게 정령 예삿일이 아니라는 생각마저 자아내는 것이다. 그래 그는 어젯밤 꼬부라진 심사가 오늘 아침까지도 풀리지 않는다.
안개가 걷히더니, 불덩이 같은 태양의 뜨거운 열기가 온 누리를 삶아대기 시작한다. 그러자 벼 잎에 물기가 마르면서 일을 시작한 게 벌써 네 통째 농약을 뿌린다. 온몸에 땀이 휘감기고 끈적거린다.
정오가 가까워 진다싶을 무렵이다. 얼핏 보니 옷맵시를 말끔하게 단장한 응아 댁이 점심밥을 함지박에 담아 머리에 이고 온다. 그녀는 집을 나와 개울을 건너고 둑길을 걸어와서는 으레 그렇듯 머리에 이고 온 것을 아카시아나무 그늘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함지박 위에 덮인 보자기를 걷어내고 속에 든 밥과 반찬들을 하나씩 꺼내놓더니, 그가 한창 농약을 뿌리고 있는 논둑으로 달려간다.
그녀는 어엉 씨와 시선이 마주치자, 어서 나와 밥을 먹으라고 손짓으로 말한다. 그런 그녀의 표정은 아침에 보던 얼굴과는 달리 유난히 밝고 화사한 게 정겨워 보인다. 그는 아침 안개가 걷히듯 마음속에 갇혀있던 찜찜한 그을음과 앙금 같은 것들이 봄눈 녹듯 금세 스러져서 선뜻 하던 일을 멈추고 논두렁으로 나온다. 그의 등에 지워진 분무기를 그녀가 대뜸 달려들어 멜빵을 풀어주면서 얼른 내려놓게 거들어주고, 들고 온 타월로 목덜미에 흥건한 땀을 닦아준다.
그는 어쩐지 산란하고 복잡하던 머리속이 홀가분해지는 기분이어서 마음이 개운해진다. 그래 개울로 들어가 흐르는 물로 팔다리에 덕지덕지 묻은 시커먼 논흙을 대강대강 닦아내며 생각해보니, 불만을 품던 일이 뉘우쳐지고 되레 그녀가 가엾어져서 분노와 원망이 일순간에 싹 가신다. 그는 이전보다 그녀가 더욱 아름다워 보이고 사랑스러워져서 되레 연민의 정마저 느껴지는 걸 어찌할 수 없다.
그는 아내가 기다리는 아카시아나무 그늘로 다가간다. 안개가 거칠 무렵, 부엉산마루에 걸쳐있던 한 점의 구름마저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산봉우리는 온통 푸른빛이 짙게 아른거린다. 그런 하늘가로 하얀 뭉게구름이 뭉실뭉실 피어오른다.
그가 나무그늘에 앉자 그녀는 그의 앞에 마주앉아 밥그릇뚜껑을 열어주고 수저를 손에 들려준다. 그러자 그는 그녀가 들려주는 수저를 손에 들고 넋 나간 사람처럼 그녀를 넌지시 바라본다.
“응아! 응아!”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에게 손짓을 한다. 일하느라 어려울 텐데 배부르게 많이 먹으라고 연신 손놀림을 해댄다.
“어엉! 어엉!”
그는 웃음을 피우면서 알았다고 고개를 마구 끄덕거리더니, 밥술을 커다랗게 떠서 입에 우겨 넣기 시작한다.
그녀는 그가 한 그릇 밥을 다 먹어치울 무렵, 옆에 놓인 술 주전자를 들어 보이면서 농약을 다한 뒤에 한 잔하라고 이른다. 그리고 오후에는 장을 보고 오겠다고 일러준다.
“어엉! 어엉!”
그는 그녀의 수화를 알아차렸다는 듯이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술 주전자와 안주거리만을 남겨두고, 먹다 남은 반찬과 빈 그릇을 함지박에 챙겨 넣은 뒤 그걸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녀가 집안으로 들어서자, 방환은 벌써 닭 두 마리를 닭장에서 끌어내어 비닐 끈에 다리를 묶어들고 기다린다. 그를 본 그녀는 화사한 웃음을 피우면서 곧장 부엌으로 들어가 이고 온 함지박을 급히 부뚜막에 내려놓고는 밖으로 튀어나오는데, 방환은 어느새 문간을 빠져나가 저만큼 걸어간다. 그걸 본 그녀는 잽싼 걸음으로 앞서가는 그를 따라간다. 그네는 곧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어느덧 마을을 벗어난다.
부엉산을 오르다가 산모퉁이를 돌아서니, 환히 내려다보이던 마을이 시계에서 감춰진다. 그네는 새절고개로 이어지는 오르막 굽잇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한낮의 불볕더위는 교목이 울창한 산길에서도 그 턱으로 식지 않은 채 가녀리게 불어오는 바람조차 후덥지근하다. 너무 뜨겁고 후끈거리니 나뭇잎조차 삶은 배추 잎처럼 힘을 잃고 늘어져 생기를 잃은 모습이다.
앞서가던 방환이 턱에 닿는 거센 숨을 몰아쉬더니 웃옷을 벗어들었고, 응아댁은 저만큼 뒤쳐진 채 안간힘으로 앞서가는 방환을 따라 올라간다.
“응아! 응아!”
드디어 고갯마루가 눈앞에 다가와 보이는데 응아댁이 방환을 부른다. 그가 넌지시 돌아보자, 그녀는 덥기도 하고 다리도 아프니 나무그늘에 가서 쉬었다가 가자고 손짓, 몸짓을 해댄다. 그녀는 텃골을 의식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방환은 그녀의 속을 지레 알아차리고 텃골을 생각해낸다. 고갯마루를 한 턱 못미처 있는 골짜기인데, 교목과 넝쿨 숲이 울창하게 들어선 데다 맑고 시원한 물이 골짜기를 끊임없이 흘러내려 아무리 더운 날에도 아래에서 거슬러 오르는 시원한 바람은 늘 서늘한 느낌이다. 게다가 물가에는 좁다란 풀밭이 펼쳐져서 호젓하기만 하다. 그네는 이 고개를 넘을 적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 곳을 숨어들어가 몰래 쉬며 놀던 밀회의 장소이다. 고갯길에서 멀지도 않고 길을 다니는 사람들의 눈에도 얼른 띄지 않으니 무던히 아늑하고 조용한 곳이다.
응아댁은 방환을 부르면서도, 지금쯤 논배미서 줄줄이 흐르는 땀으로 멱을 감으며 불볕에 몸을 새까맣게 그은 채, 무거운 분무기통을 걸머지고 농약 일을 하고 있을 남편을 생각한다. 그의 칙칙한 모습이 눈을 어지럽히며 떠오르자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떤다. 또한 자신의 몹쓸 심사를 나무라며 뉘우친다. 남편도 자신과 똑같은 병신이니 동병상련의 연민이 속으로 검정 잉크 물처럼 번진다. 남편은 어디까지 자신이 돌봐줘야 가까스로 기쁨을 얻고 보람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 뜸뜸이나마 남편과 함께 장을 보러 다닐 수 없을까 하며 엉뚱한 생각을 불연 듯이 떠올린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생각이 추호도 이뤄질 수 없는 꿈인 줄을 안다. 해서 방환과 같이 시장을 본다거나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그와 어울려 추슬러야 하는 건 어찌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또 두어 달 전 처음 방환과 몸을 같이 한 뒤로는 일찍이 남편과 느껴보지 못한 짜릿하고 달콤한 맛이 속을 감질나게 하고 흥분을 고조시키니, 이제 두 남편과 살아간다는 착각에 빠진다. 처음 방환은 진정으로 이웃의 정리로 장을 보는 일과 집안일을 도왔지만 이제는 장날이 아니고 별 볼일이 없어도 방환과 함께 장보러 가는 척 쾌락에 빠지곤 한다.
그네는 마침내 길을 버리고 숲을 헤치며 텃골로 파고든다. 예의 풀밭에 다다르자, 방환은 들고 온 닭 묶음을 소리 나지 않게 가만히 한쪽에 놔둔다. 그런데 응아댁은 성급하게도 그의 앞에 마주서서 얇은 천의 재킷을 거침없이 벗어 풀밭에 내던진다. 그리고 버릇처럼 지퍼를 여니 스커트는 저절로 발치에 걸린다. 브래지어와 팬티마저 재빨리 벗어젖힌 그녀는 내던진 스커트와 재킷을 주어다가 풀밭에 깔고 자신의 알몸을 그리로 발랑 눕힌다.
골짜기를 거슬러 오르는 골바람이 살랑거린다. 바늘처럼 따가운 불볕햇살이 간헐적으로 나뭇잎 사이를 뚫고 내리 꽂힐 적마다 눈이 부신다. 그녀는 아이를 다섯이나 낳은 여자 같지 않게 탄력 있는 몸매가 유연하고 날렵하다. 알몸의 그녀는 수목들이 폭염으로 무르익는 풋내와 함께 원시의 상큼한 여체와 같다.
방환은 대뜸 따라서 아랫도리를 벗고 그녀의 알몸으로 밀착한다. 그리고 손을 뻗쳐 방금 원초로 부풀어 오른 듯한 작고 야무진 한 쌍의 젖무덤을 연신 쓸어댄다. 그러자 그녀의 여린 숨결이 거칠게 치솟더니 기어이 몸체가 걷잡을 수 없이 뒤틀리고 꼬인다.
“으응아! 으으응-아!”
그녀의 몸부림은 신음소리와 함께 안간힘으로 숲을 삐어져 나오려는 발버둥 같았으나, 차츰 그녀는 되레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듯싶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그녀는 윗몸을 불끈불끈 일으켜 남자의 목을 두 팔로 휘감는다. 남자는 목에 매달린 그녀의 알몸에서 향긋한 몸 냄새가 코끝에 걸리는 대로 두 팔이 그녀의 파도치는 허리를 꼼짝 못하게 안으로 잡아들인다. 남자의 얼굴은 이제 그녀의 젖무덤 사이에 묻힌다. 그러나 그네는 그런 짓으로 끝내지 않는다. 그건 허리를 감은 남자의 팔 밑에서 미친 듯이 맴돌던 팡파짐하고 둥근 엉덩이의 나부끼는 바람결 때문이다. 그래 남자의 한 팔이 그녀의 허리에서 매듭을 푼 뒤, 이내 아래쪽을 감아 돌린다. 다음 순간 처음 그녀가 발랑 누었던 자리에 아기 눕히듯이 내려 뉜다. 그러나 그녀의 알몸은 남자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남자는 그 위에서 여체를 송두리째 덮쳐누른다.
용광로처럼 이글거리는 무더위에 온 누리는 고적이 깃들여 풀벌레소리나 매미소리도 죽은 듯이 적막함을 함부로 깨지 못한다. 그만큼 태양은 악랄한 열기를 사정없이 뿜어댄다. 오직 벌거벗은 두 남녀의 거친 호흡과 용트림으로 빚어지는 샅 고리 걸리는 소리만 연신 숨 막히게 들릴 뿐이다.
시간이 흘러 그런 소리마저 적막 속으로 잠기었을 때는 해가 이미 서녘으로 훨씬 기운 뒤이다. 그네는 벌거벗은 원시의 몸을 풀밭에 뉜 채 잠에 빠져든다. 그리고 얼마를 잠들었는지, 해가 서산너머로 사라지고 붉은 노을만 곱게 물들어 음영의 꽃을 피운다.
“푸드득, 꼬꼬”
이제껏 놔둔 대로 잠자코 있던 닭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소리에 방환이 눈을 떠보니 옆에 놓인 두 마리의 닭이 날개 짓에 소리를 내며 버둥거린다. 그는 몸을 일으켜 풀밭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옷들을 하나씩 주어서 몸에 끼운다. 그리고 알몸인 채 아직도 잠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응아댁을 흔들어 깨운다.
“응아! 응아!”
그녀도 눈이 떠지자 버릇처럼 입소리를 되뇌면서 얼른 몸을 세우고 허둥지둥 풀밭에 널브러진 속옷과 방금 깔았던 스커트와 재킷을 부리나케 꿰어 입은 그녀는, 묶인 닭을 들고 앞장서는 방환의 뒤를 따라나선다.
온종일 삶아대던 찜통더위는 해진 뒤에도 얼른 식지 않고 지열이 후끈거린다. 어스름 무렵 산속은 어둠이 빨리 찾아와 땅거미 지는 산비탈을 터벅터벅 걸어 내려간다.
어느덧 그네가 마지막 산모퉁이를 돌아설 때이다.
대뜸 눈에 와 닿는 세집뫼를 건너다보니 괴이하게도 어엉 씨의 집 안팎으로 전등불이 환하게 밝혀진 게 마치 꽃밭 같이 보인다.
“응아? 응아?”
그러나 갑자기 섬뜩해진 응아댁은 철렁 내려앉는 가슴을 두 손으로 움키며 적이 울먹이는 소리를 낸다. 그녀는 무심코 앞서가는 방환의 뒷덜미를 냉큼 낚아챈다.
“푸드득, 꼬꼬”
그녀가 방환을 낚아채자, 그가 들고 있던 닭들이 놀라서 또 날개 짓을 하며 소리를 낸다. 응아댁은 돌아보는 방환의 얼굴을 황당한 눈으로 쏘아본다. 의문과 분노에 찬 그녀의 동공이 잠시 걷잡을 수 없이 허둥거리며 흰자위를 맴돈다.
“응아?”
그녀는 뭔가 방환에게 캐낼 게 있는지, 다시 한번 다그친다. 그러나 방환은 바위처럼 선 채로 입을 굳게 다물고 무슨 표정도 내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어떤 반응도 보여주지 않는 방환의 얼굴을 한참 쏘아보더니, 그를 뒤로 제치고 앞질러 집을 향하여 허겁지겁 내리막 산비탈 길을 내달린다.
그녀가 냇물에 발을 빠지면서 허둥지둥 내를 건널 때 얼핏 보니 밝혀진 여러 개의 전등불빛 아래에 큰 마을사람들이 전부 모여든 모습이다. 그렇다면 큰 일이 났을 거라는 느낌이 들어 대뜸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몸이 얼어붙는 듯하다.
(무슨 일일까?)
냇물을 건너서부터 집안에서 아이들 울음소리와 마을사람들의 웅성거리며 떠드는 소리가 사방으로 떠돌았지만 그런 소리를 그녀가 알 턱이 없다. 그녀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어서 의문을 부여안고 무작정 문간으로 다가선다. 눈치가 빠른 그녀는 그때 마을사람들이 쏘대는 따가운 눈총을 느끼며 휑하게 열어젖뜨린 문간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선다. 그때 방문 앞을 메우고 방안을 채워든 오 남매의 자식들과 큰집식구들의 어수선한 모습들이 그녀의 가슴을 더욱 콩 볶듯 하면서 큰일이 터진 눈앞의 정황이 확실한 것을 알아차린다.
그러면 필시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으리라.
그런 생각이 스치자, 그녀는 사람들을 제치고 총알처럼 방으로 뛰어든다. 아랫목에 반듯이 누운 남편의 모습이 눈을 가득 메운다. 얼굴은 희다 못해 푸릇해 보이고 언뜻 보면 깊은 잠에 빠져든 사람만 같다. 그러나 자식들과 조카들이, 그리고 시숙내외가 그리로 엉기어 울부짖는 모습만 봐도 다시는 눈을 뜰 수 없고 먼 길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엄연한 사실을 깨닫자, 갑자기 가슴이 멘다.
그녀는 잿빛으로 변한 어엉 씨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한 순간 풀썩 몸을 아무렇게나 방바닥에 주저앉히더니, 실성한 사람처럼 손을 뻗쳐 주검을 부여잡고 흔들지만, 이미 차디찬 돌이 된 주검은 손끝에 냉기만 돌뿐 무감각하게 흔들린다. 그녀는 흔들어도 움직일 줄 모르는 주검 앞에서 이게 곧 죽음이라는 걸 깨우친다. 절망감이 문득 앞으로 막아서 눈망울에 뜨거운 눈물이 채워지더니, 이내 줄줄이 뺨 위를 흘러내린다.
“으으응아 -으응아 으응-.”
그녀는 기어이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그때 뒤에서 그녀를 세모눈으로 쏘아보던 동서가 갑자기 이를 갈며 그녀에게 달려든다. 그리고 머리채를 낚아채더니 날카롭게 내지른다.
“이런 불여우 같은 ×년! 사람을 잡아먹은 살쾡이 같은 년! 낯짝에 똥을 바른 년! 지어미지아비가 죽었간듸 우냐. 짝짝 찢어죽일 년! 요년 눈깔을 쏙쏙 빼야 혀. 대가리를 메로 작신 바숴갖고 개골창에 내쏴야 혀!”
동서는 날카로운 쇳소리를 연신 내지르더니, 볼 것 없이 움켜잡은 머리채를 사정없이 끌고 밖으로 내닫는다. 그때 아빠를 외치면서 울부짖던 오 남매들이 그래도 제 어미라고 끌려 나가는 그녀를 따라가며 울부짖는다.
이렇게 방 안팎으로 떠들썩하더니, 마당에서도 외마디소리가 터진다.
“사람을 죽인 살인마는 나와라! 놈을 이 참나무 작대기로 목을 쳐서 당장 숨통을 끊을 테니! 당장 앞으로 나와라.”
재영 씨는 분함을 못 참고 눈이 뒤집힌다. 작대기 하나를 두 손으로 다부지게 잡고서 허공을 향하여 마구 휘둘러댄다. 그는 인사불성으로 마당 한 가운데를 실성한 사람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고함을 내지른다. 속으로 집히는 데가 있는 모양이다. 필시 놈이 독약을 탄 막걸리를 동생에게 줘서 죽인 게 틀림없다고 믿는 것 같다.
누가 언제 지펴놓았는지 마당에는 굵은 통나무의 화톳불이 화드득거리며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불똥을 튀며 활활 타오른다.
동네사람들은, 마당을 펄펄 뛰면서 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동네방네 폭로하는 걸 보고 안타까워한다. 그렇지만 뜨거운 불길처럼 분노가 달아오른 그들 내외를 잡고 타이르며 진정시킨다. 농약 일을 하다가 술 마시고 죽은 농사꾼이 하나둘이 아니고, 농약중독으로 논두렁 베고 쓰러져 병원신세를 지는 사람이 한둘이던가. 그런데 뚜렷한 증거도 없이 제 나름대로 짐작만 대고 누굴 지목해서 사람을 죽였다고 뒤집어씌우면, 무엇으로 뒷감당을 할 터인가. 괜히 잘못 짚었다간 무고죄를 뒤집어쓸지 모른다. 불분명한 것을 일삼아보았자, 결말은 뻔할 뻔자이다. 잃은 놈이 죄인이라고 되레 망신살이 비칠지를 누가 알겠는가. 범인을 잡더라도 침착하게 곱씹고 자제하라고 일깬다. 더욱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어떤지를 누가 아느냐. 죽고 사는 게 죄다 운명 탓이고 타고난 제 명도 있으니, 누구를 무작정 원망할 일이 아니다. 또 죽은 사람은 기왕 죽었더라도 산 사람이나 살게 놔두는 게 바로 큰 덕이 아닌가. 괜히 이 사람, 저 사람 생사람 끌어다가 걸어 대보았자, 인심만 사나워진다. 경찰에서 나오면 검시를 하느니, 배때기를 째느니- 죽은 사람을 두 번, 세 번 죽이는 꼴이니, 보기도 꺼림할 뿐 아니라, 상서롭지 못한 일임에 틀림없다. 허니 분을 누그러뜨리고 무작정 참는 게 약이다. 마을사람들이 혀가 달토록 달랜다.
동네여론도 그렇듯 하나로 떠도는 터에 발끈하던 그네는 가까스로 분노를 삭이고 증오의 칼날이 번뜩이던 속을 수그리고 진정시킨다. 그리고 이 일을 더는 문제 삼지 않기로 마음을 다잡는다. 그렇지만 불쌍한 병신동생이 억울하게 비명으로 세상을 떴다는 뼈저린 아픔은 엿물처럼 끈끈히 핏속을 흐른다. 사람을 죽인 놈을 당장 밝혀내서 마땅히 벌을 줘야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동네사람들을 봐서도 솟구치는 감정을 억눌러 참아서 넘길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다지 쇳덩이처럼 건강하고 우람차던 어엉 씨가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논두렁에 쓸어져 홀로 쓸쓸히 죽어간 사실은 도시 믿어지지 않는다. 극한의 뙤약볕에서 폭염을 맞으며 농약을 뿌리다가 술을 마셔서 죽었다는 말도 딱 부러진 사인(死因)이 못 될 것만 같다. 농약 일은 말할 것 없고 농약으로 멱을 감는다 해도 까딱없을 강철 같은 사나이일 뿐 아니라, 몸 다치게 푼수 없이 술을 퍼마실 사람도 아니다.
그는 동네여론에 밀려 이 일을 다시는 입에 올리지 않기로 했지만, 동네사람들이야 무작정 탈 없이 조용하기만 바랄 뿐이다. 누가 누구에게 피해를 입히고 억울함을 당한지는 굳이 시비를 가려 따지려들지 않는 게 속성이다.
그러나 곰곰 생각하면 할수록 방환의 짓이 틀림없다는 일이다. 제아무리 남의 눈을 피해 몰래몰래 숨어 다니며 개지랄을 해 싸도 남들이 다 그렇고 그런 걸 이미 다 아는 터에-. 정령 그놈이 막걸리에 독약을 넣었든, 농약을 풀었을 게 틀림없다고 믿는다. 그런 생각이 들면 몸이 부르르 떨려오고 가슴에서 메질을 해대지만, 이제 죽은 놈이 되살아날 턱이 없으니, 꾹 참는 길밖에 없다. 더욱 재영 씨의 아내는 이 끔찍한 일이 여편네 때문이라고 들고일어나 응아댁을 몰아붙인다.
(그년이 술에 약을 타서 시동생을 죽였다)
이렇게 뒤집어씌워도 응아댁은 할말을 잃고 만다.
장삿날 아침, 며칠을 두고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바람에 온 천지가 부글부글 끓더니, 그날따라 하늘에는 검정구름이 무섭게 채워들기 시작한다. 금방이라도 굵은 빗줄기가 땅이 패게 쏟아질 듯 대지는 어둠에 휩싸인다.
느닷없이 허망하게 쓰러져 목숨을 잃은 어엉 씨의 주검은 쉬쉬하며 경찰에 알리지도 않은 채 읍내 장의사에서 곱게 맞춰온 꽃상여에 실려 세집뫼 뜸을 떠나려한다. 분가한지 다섯 달만의 일이다. 한창 살림 맛에 재미를 느낄 무렵이다. 어느 멀쩡한 부부가 이처럼 정답고 재미있게 살아갈 수 있으랴. 오 남매의 자식을 키워내기만 하면, 저희 엄마아빠 병신시정 알아주고 가엾은 줄 가슴속에 간직하고 연민의 정을 느끼면서 오래토록 남다른 효심이 솟구칠 테지만, 어엉 씨는 이것저것 다 팽개치고 고물고물한 어린 자식들만 무정하게 떼어놓은 채 다시 못 올 먼 곳으로 떠나간다.
-딸랑딸랑 요령소리가 상여소리와 한데 어우러져 부엉산 골짜기로 메아리친다.
“구르릉, 구르르릉 쿵-.”
마을사람들이 길게 상여 뒤를 따르는 장례행렬은 마음씨 착하게 살다간 그의 짧은 인생길이 가슴마다 아쉬움과 함께 알알이 새겨진다.
그런데 상여가 막 여울목을 건널 무렵이다. 검정구름 속에서 기어이 공포의 천둥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불그레하게 상기된 요령잡이는 하늘이 무너지든, 구름장이 내려앉든 모름지기 자기 흥에 겨워 요령을 연신 거세게 흔들어 싼다.
‘말못하는 벙어리로 이세상에 태어나서 -에헤야 어헤/말한마디 못해보고 속절없이 떠나가네 -어헤야 어헤/억울하다 원통하다 말못하는 이뿐아내 -어헤야 어헤/토끼같은 어린자식 남겨놓고 난못가네 -어헤야 어헤/뉘가고이 키우려나 나는나는 못가겠네 -어헤야 어헤/원통해서 난못가네 발이무거 못가겠네 -어헤야 어헤-’
상여가 부엉산기슭로 가까이 다가갈 무렵, 날카로운 번갯불이 바로 상여 앞에서 작렬하더니, 장작을 패는 듯한 천둥소리가 대지를 뒤흔든다. 소리를 먹이던 요령잡이는 천지개벽이라도 할 듯한 천둥소리에 놀라 문득 기세를 죽이더니 기여 입을 꾹 다물고 만다. 그런데 기여 장대비가 쏟아져 내리자, 그제야 잽싸게 서둘러 상여를 이끌고 산비탈을 기어올라 부엉산에 오른다.
한낮인데도 사위는 캄캄한 어둠으로 휩싸이고, 비는 줄곧 세차게 쏟아진다. 상여는 거센 비를 맞아 곤죽이 되고, 상여꾼과 마을사람들도 모두 비에 젖어 흙투성이가 된 채 부랴부랴 질흙 탕 속에 주검을 묻는다.
이렇게 벙어리 어엉 씨의 장사가 끝난 날밤, 응아댁은 아이들이 잠든 사이에 어둠을 타고 몰래 집을 빠져나간다. 한밤에 방환을 만나 얼싸 함께 어디론지 사라진 것이다.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뜬 아이들이 저희 엄마를 찾느라 두리번거렸으나, 엄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모두 일어나 밖으로 나가본다. 그리고 꿩 새끼 풍기듯이 집을 나서 마을고샅으로 흩어져간다. 아직도 못다 온 비가 구질구질 내리고 아이들은 비를 맞으며 동네고샅길을 헤매지만 멀리로 도망친 엄마의 모습이 아이들 눈에 나타날 리가 없다. 고샅을 헤매던 아이들은 물에 빠진 생쥐처럼 비를 맞고 허탈감을 안은 채, 하나같이 어깨를 무너뜨리고 하나둘 하릴없이 집으로 돌아온다.
좀 뒤는 다섯 아이가 모두 집에 모여들어 제비새끼처럼 툇마루에 나란히 걸터앉는다. 저마다 머리칼과 옷이 빗물에 흠씬 젖어 머리에서 얼굴로 연신 흘러내리는 물방울과 까칠한 입술이 초점을 잃은 눈동자와 함께 그보다 더한 우수가 깃든다.
아이들은 마주 보이는 새절고갯마루에 괜한 눈길을 하염없이 던진다. 적이 시무룩한 표정들이다. 그때 문득 세 살배기 막내아이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입을 삐죽거리더니, 칭얼칭얼 울음을 터뜨린다. 막내가 칭얼거리자, 모두 따라서 눈물을 짠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연신 손등으로 닦으며 아이들은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다섯 아이의 칭얼거리는 소리는 마치 육성변주곡이다.
비가 멈추기 시작하자, 곧 구름이 걷힌 부엉산은 푸른 나무숲이 마치 초록물감을 쏟아 부은 듯 짙푸르다.
어느 순간 산골짜기에 무지개가 꽂힌다.
“야! 무지개다! 무지개다!”
한 아이가 하늘로 치솟아 오른 무지개를 먼저보고 외친다. 그러자 아이들은 젖은 눈망울을 비벼대면서 생경한 얼굴로 신기한 듯이 무지개를 향하여 눈길이 모아진다.
그러더니 모두 일어나 밖으로 내달으며 무지개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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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인간사회는 서로 돕고 따뜻한 정감을 나누며 산다고 한다. 그건 강자와 약자가 같은 대열에 서는 적자생존의 한 방법일 수 있다. 더불어 산다는 말과 다를 리 없다. 하지만 그런 인간의 사랑과 도움이 진정인가, 거짓인가 의문을 제기해보면 위선(僞善)이란 사실도 부정할 수 없겠다. 그렇듯 인간은 무던히 이기적이고 습관적인 동물의 본성을 들어낼 때가 많다. 진정한 사랑과 도덕이 아쉬움을 더하는 가운데 그 야릇한 내면을 잡고서 장애인부부의 독자적 삶이 과연 인간사회에서 가능할지 가늠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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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2009년3월호 발표>
한원균 평론 -말을 못하는 청각장애인 부부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김동인 문학의 탐미주의적 경향과 매우 유사한 분위기의 작품에서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과 아내의 외도는 eros와 thanatos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아내의 일탈이 인간관계의 파국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 순수 욕망 그 자체로 그려지고 있으며, 농약 살포 일을 하다가 갑자기 쓰러진 남편의 죽음 역시 일정한 도덕적 요구를 동반하지 않은 듯하다. 소설의 결말에서 아내와 정부가 도망치는 장면은 오히려 작품을 자유롭게 읽는데 방해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판단이 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작가는 남겨진 아이들의 순수한 영혼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작품이 전체적으로 파국으로 치닫지 않은 것은 작가의 세계관의 일단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한국소설2009년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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