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감자 수제비
(동인지 은빛물결... 발표 2000년)
시절이 또 다시 바뀌고 있다.
보리 익는 냄새가 상큼하게 진동하던 언덕빼기였다. 노고지리 귓불을 쪼을 듯 청량하게 우짖는가 싶더니 어느새 여름이었다. 녹음방초(綠陰芳草), 짙푸르게 흐르듯 우거진 나무 그늘에는 꽃다운 풀들이 세상을 차지해 버린 것이다.
그 뿐이랴. 눈부시게 흐드러졌던 복사꽃 자리엔 천도복숭아가 수줍은 새색시처럼 얼굴을 붉히고 있다. 우물가에는 청포도가 치렁치렁 매달려 새콤달콤 무르익고 있다. 바야흐로 세상은 신록의 계절이었다.
천방산 언저리는 구름의 길목인 양 늘 구름이 부지런히 오고갔다. 오늘도 치솟은 대가리 위엔 분봉을 시작한 벌떼처럼 뭉게구름 하나가 몰려오더니 무단히 이합집산 하기를 거칠게 반복한다. 정오 무렵엔 기어이 적란운(積亂雲)을 만들어 냈다. 반목과 갈등, 저주와 증오, 편협한 생각과 이에 따른 돌출된 행동들로 뜨겁게 달궈진 세상을 한줄기 소나기를 뿌려 식혀 주었다. 눈꼴사나운 세상을 호되게 대갈 하듯이.
승태와 복례는 천방산을 내려오고 있다.
둘은 절골에서 지천으로 돋아난 오이꽃버섯을 채취했다. 생수 터진 계곡에서 시원하게 목욕도 했다. 언제나 승태가 먼저 물에 들어가 목욕을 한다. 물론 복례가 승태의 몸 구석구석을 씻어 준다. 승태는 복례에게 알몸을 보이고 맡기는 것에 한점 허물이 없었다. 다음은 복례 차례였다. 복례 역시 승태처럼 벌거숭이가 되어 계곡물로 들어간다. 복례는 그런 일에 스스럼없지만, 오히려 승태가 얼굴을 붉힌다. 이유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얼굴이 마냥 뜨겁다. 그럴 때면, 잽싸게 고개를 돌려 바위에 올라간다. 누가 접근해 오는지 사방을 살피는 것으로, 적진을 살피는 척후병처럼 행동하는 것은 승태의 몫이다. 그래서 복례의 속살들을 누가 훔쳐본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간혹 웃음을 날리는 복례의 옷차림도 시절이 바뀐 것처럼 변해 있었다. 그 동안 입고 있던 연두색 저고리와 다홍치마를 벗어 던졌다. 더할 나위 없이 하얀 목덜미와 하퇴가 시원스럽게 드러나 보이는 얄따란 여름살이 차림이다. 지난 읍내 오일장에서 승태가 골라 준 것으로, 승태는 그 옷차림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복례는 해질녘에 잽싸게 세탁해 다음날 다시 입곤 한다. 승태를 위해서 였다.
승태는 여전히 빡빡 머리였으나 봄에 쪽지여 올린 복례의 머리도 변해 있다. 바글바글 지져 놓은 파마 머리였다. 이 또한 승태의 권유에 의해 바뀐 것이지만, 읍내에 미장원이 개업한 이후 마을 아낙들의 머리는 거의가 그러했다.
이글거리던 햇덩이가 서산으로 무너져 내리는 해질녘이다.
사방을 날카롭게 휘둘러보던 승태는 고양이 걸음에 게 걸음을 뒤섞어 대문간을 나서고 있다. 멀리 장탉이 목을 길게 빼더니 무섭게 노려보고 있다.
“얼래? 이 시간에 워딜 그렇쿰 슬그머니 싸질러 가능 겨?”
승태는 움찔하며 목소리를 쫓는다. 어머니였다. 부엌 문설주에 손을 기댄 채 이맛살을 잔뜩 오그라뜨린 인상이 만만치 않다.
승태는 잔뜩 긴장했던 표정을 금세 지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퉁명스런 어조로 입술을 뗀다.
“복례 누나네 가능구먼.”
“또또, 고놈에 주동아리 조심! 알아들을 만큼 누누이 일렀는디 또 그렇게 함부로 복례를 누나랜다.”
어머니가 삿대질이라도 하듯 손에 든 몽땅 빗자루를 흔든다. 이내 쫓아와 볼기를 칠 기세다. 모습으로 보아 심사가 어지간히 뒤틀려져 보인다. 그러하긴 승태 역시 마찬가지다.
“쳇! 암만 뭐래도 내겐 복례 누나구먼.”
“그렇게 불르믄 안�다고 혔잖여?! 워쨌든 거길 가드래도 저녁밥은 묵고 가얄 게 아녀?”
“칫! 난 복례 누나네 가서, 이 시상에서 젤로 맛난 감자 수제빌 허발하고 먹을 껴!”
승태의 입술이 뱁새처럼 튀어나온다. 눈을 가자미처럼 흘끔하더니 냅다 달리기 시작한다. 이럴 때면 뒤도 안 돌아보고 뛰는, 득달같이 치는 줄행랑이 최고였다.
애당초 어머니의 잔소리쯤 눈 하나 끔쩍도 안하는 승태였다. 결국 안되겠다 싶을 땐 언제나 그랬듯이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면 그만인 것이다. 그중 하나가 줄행랑이다. 그것이 실패로 돌아갔을 땐 다음 단계의 묘수가 준비되 있다. 앞 뒤 따질 것 없이 우는 것이다. 장항 앞 바다에 떠 있는 외항선의 뱃고동 소리를 무색케 하는 것으로 모든 게 한 순간에 해결된다. 어머니는 범이 달려들어도 무서워하지 않아 할 사람이었다. 그런데 기를 쓰고 우는 승태에겐 사족을 못쓴다. 따라서 앉아서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이 방법 외에도, 밥을 먹지 않는다던가 하는 여러 가지의 방책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허나 거의 이 단계에서 끝이 난다. 승태의 울음소리는 어머니에겐 쥐약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세상에 묘약이나 묘책이 따로 있을 리 없는 것으로, 유독 어머니에게 지엄한 할머니를 부르는 승태의 적색 구조 신호음인 것이다. 승태에게 있어 할머니는 이 세상에서 제일 믿고 신뢰하고 있는 구석 중 하나였다. 그래서 우뚝 치솟은 천방산 보다도 든든한 뒷배경이요, 마을 어귀 정자나무 그늘보다 커다란 뒷손이며, 가장 안전하다 여기는 보루나 마찬가지였다. 그랬으므로 장손 집안의 외동이인 승태가 무서워해야 할 사람이란 이 집안 식구 중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가 계시긴 하지만, 면사무소에 근무하기 때문에 얼굴 마주칠 일이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알량하기 그지없는 권위였으나 나라님에 버금가도록 휘두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울안에선 무소불위의 존재나 다름없다.
승태가 달음질을 멈춘다. 안도의 한숨을 몰아쉰다. 뛰어오느라 이마에 돋은 땀방울이다. 땟물이 자르르 흐르는 손등으로 쓱 문지른다.
“퓨! 겐신히 빠져나왔네...”
반 푼 어치의 무람없는 승태였다. 허나 소금장수에게 비처럼 여느 때 어디에서 만날까 두려워하고, 끔찍해 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뒷간 옆 장작더미 위에 둥지를 틀고 사는 장닭이다. 애송이 수탉이 몇 마리 있긴 하지만, 암탉들 옆엔 얼씬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씨암탉 아홉 마리를 혼자 거느리고 사는 놈으로 대단한 근력을 소유한 놈이다. 그놈이 바로 승태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느끼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놈은 승태 알기를 발뒤꿈치의 땟자욱 정도로 우습게 취급한다. 십 년은 족히 묵었다. 그래서 몸집이 이웃집 거위 엉덩이가 갸냘퍼 보이게끔 하는 놈이다. 승태에겐 과히 괴물 같은 존재였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영락없이 퍼덕거리며 날아 와 정수리를 쪼아댄다. 그리곤 뒷꼭지에 대고 종자 번식이라도 하듯 못된 짓거리였다. 혹간 뒷목에 정충을 잔뜩 배설해 놓을 땐 정말 학질 받히고, 분한 생각에 환장할 노릇이다. 하늘같이 지존한 외동이의 특권도 그놈에겐 전혀 통하지 않는다. 더구나 독불장군 같은 감때사나운 생떼 거지도 아예 먹혀들지 않았으므로, 오죽잖은 자존심일 망정 한 순간에 묵사발 되기 일쑤였다.
“낭중에 두고 보래지 요놈에 장탉.”
승태는 머지않아 장닭의 시퍼런 서슬쯤 우습게 여기는 나이가 될 것이라 여겼다. 그때가 되면, 우선 그놈의 모가지부터 비틀어 뜨거운 물에 목욕을 시킬 작정이었다. 그런 다음, 지난 시절 숱하게 겪어야 했던 눈물겨운 속박과 서러움을 어금니로 잘근잘근 짓씹는 것으로 철저히 복수하리라 내심 단단히 벼른다.
승태의 이런 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 어머니였다. 허나 장닭을 잡아 없애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는 듯 했다. 승태가 장닭에 쫓길 때면, 마냥 깨소금을 씹고 있는 것처럼 고소해 한다. 배를 움켜쥐고 웃음을 터트리곤 한다. 그리곤 포상이라도 내리듯 모이까지 한 됫박 마당에 뿌려 준다. 기가 막힐 일이다.
그럴 때면, 못내 서운한 마음에 볼멘 소리였다.
“참말로 울엄니 맞능 겨?”
“글쎄다? 잘은 몰러도, 니 아부지가 길산장에 갔다가 질메다리 밑에서 징징거리고 있능 걸 주워 왔다던디?”
“워메, 그 게 참말여?”
“참말이잖고... 니가 이 에미를 닮았음 그렇게 생퉁스런 일만 허구 댕기는 극성쟁이 일까? 난 암만 봐도 니가 내 뱃속에서 나온 게 아닌 것 같구먼. 호호호...”
승태는 어머니가 자신을 낳은 친어머니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장닭으로부터 어이없이 쫓기는 측은한 처지를 수수방관할 리 없었다. 그래서 할어니께 몇 차례 여쭈어 봤지만, 그때마다 피식 웃을 뿐이다. 승태는 그것이 도무지 서운하고 서럽기까지 했다.
그렇듯 무관심하고, 무심하게 여겨지는 어머니였으나 복례를 누나라 부르는 것만큼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참견하고 나선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복례는 승태에게 다름 아닌 종숙모였다. 당내에 해당되는 혈족친이었으므로, 그때마다 잔소리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복례를 누나라 부르게 된 것에 대해 따진다면, 승태에게도 할 말은 있었다. 복례의 나이 겨우 열 여섯이다. 승태와 고작 아홉 살 차이밖에 안된다. 정자나무 아래에 모여 ‘객지 벗 십년’ 운운하는 어른들의 말을 빌리어 볼 때, 아무런 문제점도 없어 보였다.
미운 일곱 살인 승태는 쌩이질에 어지간히 일가견이 있다. 앞니가 죄 빠져 버린 데다가 주근깨 투성이에 야무지게 생긴 모습이 이를 한눈에 짐작케 한다. 헌데 체구가 작았다. 그래서 밤톨이란 별명을 갖고 있다. 지난 봄 승태 역시 또래들처럼 읍내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허나 일주일도 못 다니고 휴학을 했다. 입학 다음날부터 갑작스럽게 홍역이 발병한 때문도 있지만, 작은 체구가 안쓰러워 내년에 다시 입학하기로 한 것이다. 그 일이 있은 뒤부터 밤톨이란 별명은 풋밤으로 바뀌었다.
복례가 이 마을에 들어온 것은 지난해 늦은 가을이다.
승태는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려 마을 어귀 공터에서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갑자기 아이들이 벌에 쐰 듯 동요한다.
“우와! 차가 온다!”
“어, 어디?”
회색 자가용이 보였다. 뽀얀 흙먼지를 일으키며 마을로 들어와 멈춰 선다. 승태는 그 차가 자가용 영업 행위를 하고 있는 면 소재지에 유일한 정류소집 자가용이라는 것을 쉽사리 알 수 있다. 며칠 전, 오일장에 할머니를 따라 나갔다가 막차를 놓쳐 버렸다. 그래서 면사무소 서기로 근무하는 아버지를 찾아가 함께 집으로 돌아온 적 있다. 그 때 난생 처음으로 자가용을 탔다. 비록 게딱지같은 폐차 직전의 고물이었다. 허나 승태는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 집으로 돌아오며 퍽 신이 났던 기억들이 여기 저기에 잔뜩 묻어 있어 그랬다.
갑작스런 자가용 출현에 아이들이 모여든다. 호기심 어린 눈초리들이 반짝거린다. 자가용이 흔하지 않았다. 그랬으므로, 이 차가 행여 학교 운동장에 들어서는 날이면, 그날 학교 수업은 엉망이 되기 일쑤였다. 아이들이 차를 구경하려고 우르르 몰려 나가는 것을 선생님도 통제할 수가 없었다.
차문이 열렸다. 누군가 커다란 가방을 들고 내려선다. 다름 아닌 서른 나이의 노총각 영섭이었다. 승태를 보자, 반갑게 웃는다.
“잘 있었든 겨?”
“얼래? 당숙...?”
“그려, 당숙이구먼. 고놈 �달 안 본 새 몰르게끔 훌쩍 컸구먼. 이젠 이불에다 오줌 지리고서, 쟁배기에 키 쓰고 소금 받으러 요집 조집 안 댕길 테지?”
늘 만나기만 하면 꺼내 놓던 레퍼토리다. 아이들이 뒤쪽에서 키득거린다. 힐끔 돌아보는 얼굴이 후끈하다. 승태에게 그런 일은, 기억도 희미한 일이다. 반가움보다 돌연 섭섭함이 앞선다. 여느 때 같았으면, 씨... 당숙은 또 고놈에 묻잖은 소리! 하며 배짱껏 달려들었을 일이다. 그리곤 영섭의 정강마루를 엿장수 가위 치듯 제멋대로 걷어차며, 내가 원제 그런 겨? 라며 사납게 앙탈을 부렸을 터였다. 헌데 반가움이 앞서고, 평소와 달리 새색시처럼 얌전을 떨고 있다. 영섭의 뒤를 따라 내리는 누이 때문이다. 조그만 보따리를 가슴에 안고 있다. 고양이에 잔뜩 주눅든 생쥐의 모습이다.
낯선 누이는 낡아 헤진 연두색 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고 있다. 군데군데 기운 자욱이 어뜩 보였는데 뚜렷하지가 않다. 바느질 솜씨가 그만인 모양으로 옆집 중 3년생 석이의 누이 또래쯤 될까. 곱살하고 앳띤 모습이다.
“얼래...? 저 누난 대체 누군 겨? 암만 봐도 츰 보는 낯인디...?”
승태는 낯선 얼굴이 몹시 궁금하다. 반쯤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영업의 뒤쪽을 흘끔 흘끔거린다.
“누나? 하하하... 허긴, 누난 누나지. 하하하...”
영섭이 멋쩍게 웃음을 터뜨린다. 쑥스러움이 잔뜩 묻어 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영섭은 유복자였다. 열 다섯 살엔 모친까지 여의었다. 그랬으므로 자갈논 일곱 마지기가 그에게로 물려졌다. 허나 진작에 장항 떡전 골목을 기웃거리며 흐지부지 탕진하고 말았다. 그 후로,
“틀림�이 발발이처럼 쏴 돌아다니다가 얼어 뒈진 귀신이 붙응 겨.”
하는 할머니의 말처럼, 역맛살이 낀 탓일까. 잠시도 가만히 집에 붙어 있지 않았다. 일 년이면 열 달은 객지로 떠돌아 다녔다. 탄광이나 공사판의 잡역부, 또는 벌목 현장이나 고깃배를 타고 다니는 등 각처를 발길 닿는 대로 전전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얼굴이 잊혀질 만 하면 이렇듯 어김없이 나타나 자신이 살아 있음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곤 한다. 그랬던 영섭이 풋내가 풀풀 나는 뜬 계집 하나를 이끌고 집에 돌아온 것이다. 그것도 색싯감이라 하면서.
영섭은 열 다섯 나이에 벌써 눅눅히 밤이슬을 맞고 다녔다. 산너머 주막집 과수댁의 이부자리를 파고들어 펄럭거렸다. 그런 화려한 이력으로 볼 때, 오가다 어찌어찌 상관하게 된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만나게 된 내력은, 본인들이 철저히 함구했으므로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마을로 들어온 복례는, 우리 섬마을에서는... 라는 말을 대화 중에 곧잘 사용하곤 했다. 또한, 사면이 바다로 가로막힌 그곳에서, 나를 육지로 데려갈 사람을 어릴 적부터 초조하게 기다렸어. 란 말을 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녀의 고향이 육지가 아닌 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객지로 굴러다닌 탓인지, 유난히 입심 좋은 영섭이었다. 복례에게 달콤한 언변으로 집적거렸을 것이고, 철없는 그녀는 그 언사에 혹해 보따리를 쌓아 이곳까지 따라왔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었다.
방랑벽에 비워 놓은 날이 많았으므로, 귀살쩍게 허물어져 가는 영섭의 집이었다. 흉가와 다를 바 없는 낡은 집을 수리하는 동안 복례와 영섭은 승태네 문간방에 들어와 살았다.
그런 연으로 가깝게 지내게 된 복례를 승태는 제 멋대로 누나라 불렀다. 형제 자매가 없었던 탓에 외롭게 자라난 승태였으므로, 복례를 친누이같이 여기며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이를 빌미로 복례와 영섭의 잠자리 사이에는 승태가 버젓이 터를 잡았다. 이제 막 봉긋하게 부풀기 시작한 복례의 비릿한 품이 승태의 차지가 된 것이다.
“요런 망할 것아! 눈치 �이 왜 거긴 껴들어 자빠져 자능 겨?! 달음질 허믄서 잘 수 있는 넓찍헌 방을 놨두고서?”
벼르고 있었던 어머니가, 문간방으로 들어가는 승태를 불러 놓고 똥개 닦달하듯 호되게 다그쳤다.
“놨두슈 사촌 형수님... 우리가 저렇쿰 좋아서 그러능걸 워떻게 무정 허니 막것슈.”
“이이 말이 맞아요. 전 괜찮아요.”
“사촌 동세, 암만 그려도 그렇지... 거기가 워디라고 지가 헤벌레 끼어들어 훼방을 놓능가 몰르것구먼?”
“염려 마세요. 어차피 머지않아 집수리가 끝나면 살림을 따로 날텐데... 저 역시 팔자에 없는 동생 하나를 얻은 것 같아 너무 좋아요.”
“그렇쿠만유. 허허허...”
영섭은 씁쓸한 속이야 어찌 됐던 언제나 웃음으로 일관했다. 그 역시 승태를 예뻐하긴 복례와 마찬가지였다.
할머니는 승태에게 지청구를 늘어놓고 있는 어머니가 늘 불만이다. 뒷전에서 이맛살을 구기곤 빈정거리는 어투로 탓한다.
“어멈아, 놨두거라. 암만 어린것이 둘 새에 끼어 자빠져 있어도, 시퍼런 것들이 한 방에 있는 한, 얼라는 틀림 �시 생겨날 테니께 말여.”
“그렇긴 하지만서도...!”
어머니의 기우는 성급하고 괜한 것이었다. 복례는 해질녘만 되면 승태를 찾아 챙기기에 바빴다. 흙투성이 승태를 물을 데워 목욕을 시킨 뒤, 밤이면 숨이 막히도록 힘껏 끌어안고 잠자리에 들곤 했다. 열흘 내지 보름에 한 번 꼴로 아침에 눈을 떳을 때, 영섭과 잠자리가 바뀌어 구석 쪽으로 밀려나 홀로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허나 그 까닭을 승태는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그날은, 평소 뱁새처럼 삐쭉하게 나왔던 영섭의 입이 영락없이 귀밑까지 찢어지는 날이다. 복례는 이와는 상반되게 충혈된 눈으로 하루 진종일 우울해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승태는 대부분의 날엔 자신을 두고 조용히 다투는 소리를 잠결에 얼핏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복례는 이를 개의치 않았다. 승태는 복례가 끝내 자신을 끌어안고서 아침까지 자는 것이, 늘 고맙고 가슴 뿌듯할 따름이다.
날이 해동하자 영섭과 복례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다 놓고 혼례를 치뤘다. 정안수 한 그릇을 달랑 올려 놓고 올린 단출한 혼례였다. 그날부터 두 사람은 승태네 문간방을 떠나 본격적인 신혼 살림에 들어갔다. 복례가 떠나자 승태는 몹시 서글펐다. 옆집 석이가 큰누이를 시집 보내고 울먹였던 허전한 기분을 그제야 이해할 것 같았다.
승태의 아픔은 길지 않았다. 스무날이 채 못가서 복례의 품은 또 다시 승태의 차지가 됐다. 영섭이 벌목 현장 산내림 품팔이와 공사 현장에 막일을 나가면서, 생겁 많은 복례의 이부자리를 승태에게 내맡겼다. 승태는 복례의 수호천사가 된 것이다.
그렇게 다시 집을 떠난 영섭은, 가끔 집을 다녀갔다. 그것은 날이 궂어 일을 할 수 없는 날이었으므로, 한 달에 기껏해야 이삼 일에 불과했다.
승태는 낮에 갑자기 집에 왔던 영섭이 막차를 타고 마을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날씨가 맑은 날에 영섭이 집에 왔다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승태는 그 이유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더욱이 복례와 겨우 한나절 떨어져 지냈는데도 과히 열흘쯤 지나간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발걸음이 몹시 급하기만 하다.
복례가 살고 있는 오두막집은 야트막한 언덕을 두 개나 넘어야 했다. 마을에서 제법 외떨어진 천방산 골짜기였다. 그랬으므로, 무당이 푸닥거리 판을 벌려도 모를 곳이다.
풀벌레 소리가 촉촉하다. 숱하게 이 길을 오가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소리였다. 허나 오늘따라 더욱 정겹게 들린다. 인기척에 깜짝 놀라 날아가는 메뚜기며 딱따개비였지만, 승태에겐 흉허물 없다.
승태가 들뜬 마음으로 영섭의 집 사립문에 들어선다. 갑자기 얼굴을 찡그린다. 집안이 나간 집처럼 어수선하다. 마당엔 세간들이 나뒹군다. 갈갈히 찢겨진 낯익은 하늘색 여름살이는 마루 위에 흉물스레 널부러져 있다. 더구나 푹푹 찌는 한 여름 날씨에 방문이 상가집처럼 굳게 닫혀져 있다. 분위기가 몹시 삭막하기만 하다.
승태는 겁이 덜컥난다. 이곳을 드나들며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섬뜩함이 전신을 핥아왔다. 섬뜩한 공포력이 전신으로 퍼져 나간다. 배꼽과 허벅지에 잔뜩 힘을 줘보지만 소용이 없다.
“복례누나! 누나! 누나?!”
가리사니를 잡을 수 없는 예기치 못했던 상황이다. 승태는 울음을 반쯤 섞어 목청껏 복례를 부른다. 부엌에서도, 방안에서도 대답이 없다. 다만 훌쩍거리는 소리가 문틈 사이로 가느스레 하게 흘러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승태는 그 소리가 복례가 내고 있는 흐느낌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승태는 방문을 급히 연다. 어두운 구석에 복례가 옹크리고 있다.
“누나 괜찮응 겨?”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 입고 있었던 낡은 녹의홍상(綠衣紅裳) 차림이다. 승태는 부랴사랴 방으로 뛰어들어간다.
“누나, 이 게 무슨 일인 겨?”
“아, 아니야, 무슨 일은... 아무런 일도 없었어.”
복례가 당혹스러워 한다. 볼에 난 눈물 자국을 지우기에 급급하다. 승태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진다.
“누나, 왜 울고 있었던 겨?”
복례가 고개를 흔든다. 감정을 채 다스리지 못한 어조로 변명을 한다.
“아, 아니야, 울긴 누가 울었다고... 그냥 눈이 아파 눈물을 조금 흘리는 거야.”
“칫! 거짓말. 콧물 훌쩍거리는 소릴 다 들었능 걸?”
“아니래도...”
“아니긴? 걸레처럼 찢겨져 마룻바닥에 뒹구는 이쁜 여름살이는 어떻고?”
복례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못한다.
승태는 복례의 볼에 촉촉하게 얼룩진 눈물 자국을 지우려 손을 뻗는다. 승태의 손 끝이 파르르 떨린다. 얼굴에 선명하게 들어 있는 것은 분명 피멍이었다.
승태는 금세 눈물을 글썽거린다.
“얼래? 누나, 이것 손자국 맞지? 당숙이 때린 손자국이지? 그렇지? 못된 당숙이 누나 볼따구니를 두꺼비 같은 그 큰 손으로 마구 후려 패믄서 조련질(調練-) 한 거 맞찌?”
“승태야, 그, 그게 아니래도......”
“아니긴, 뭐가 아니라능 겨? 꼴이 이 모양인디?”
복례는 머리를 급히 도리짓한다. 허나 어께는 하릴없이 달막거린다. 승태가 입술을 사납게 실룩거린다. 뜨거움이 가슴을 치받는다.
“씨부랄! 못 되먹은 당숙...! 지가 뭔디 우리 복례 누날 함부로 패고 난리여?! 곰같이 힘만 세면 최곤가?!”
“그런 소리하면 못써. 어린아이가 어른한테 함부로 욕을 하면 안돼... 영섭씬 더구나 승태에겐 당숙인데...”
“씨, 욕허믄 워뗘?! 누날 요렇쿰 때린 당숙은 사람도 아니구먼!”
승태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붉게 물든다. 질끈덩 깨무는 아랫입술은, 금세 잘려 나갈 듯 새파랗게 변한다.
승태는 울타리 쪽으로 간다. 자두나무를 타고 오르는 호박 넝쿨에서, 연한 잎에 따다가 다듬는다. 솜씨가 서투르지 않다.
복례는 호미를 들고 텃밭으로 간다. 감자를 케기 시작한다. 자줏빛 꽃만 찾아 다니며 감자를 켄다. 영락없이 승태가 좋아하는 자주감자가 나온다. 그래서 승태는 자주꽃 핀 건 자주감자임을 알 수 있었다.
복례는 거지반 닳아 버린 수저 끝으로 감자 껍질을 긁어 낸 뒤 송송 썰고 있다. 역시 익숙한 솜씨다.
잠시 후 둘은, 밀가루를 대충 주물럭주물럭 반죽한다. 이어 물이 바글바글 끓고 있는 무쇠솥 위에 머리를 맞댄다. 뒤질세라 반죽된 밀가루를 제멋대로 떼어 넣는다. 얼이 빠진 듯 웃음이 터져나온다. 숱하게 먹어서 물릴 때도 되었으나 둘은 얼굴을 마주하면 노상 얼멍덜멍한 감자수제비였다.
연기가 매워 눈물 콧물을 쏙 빼놓는다. 허나 승태는 웃음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으면서도, 뒤로 물러날 기색이란 찾아볼 수가 없다.
복례가 짖궂은 어투를 건넨다.
“그렇게 웃지마.”
“왜지?”
“다 된 수제비에 콧물 빠뜨리겠어.”
짐짓 눈을 흘깃하던 승태는 역시 뾰루퉁한 어투로 말을 받는다.
“칫! 누난 워떻고...?”
“나...? 내가 어때서?”
“누나 턱주걱이서 떨어지는 비지땀이 벌써 한 종지는 가마솥에 떨어졌을 꺼구먼. 에잇 드러워...”
“저런! 아직도 그걸 몰랐던 거야?”
“내가 뭘 모른다능 겨?”
“누나가 만든 감자수제비 맛이 이 턱 끝에서 떨어지는 땀방울이 들어가야 제맛이 난다는 것 말이야.”
“참말?”
“그럼, 정말이잖고. 내가 왜 괜한 소리를 할까.”
“피, 거짓뿌렁.”
“거짓뿌렁? 호호호... 누나 땀방울이 수제비에 들어가 승태가 못먹겠다면... 그럼, 이 누나만 수지 맞는 일이지.”
“수지 맞는 일? 왜...?”
“혼자서 몽땅 먹어버리면 되니까.”
“피, 그럼 난 얌전히 보구만 있을 것 같응 겨? 콧물 빠뜨려 하냥 못먹게 허믄 되지!”
“저런, 승태는 정말 짖궂은 훼방쟁이구나? 호호호...”
승태의 곤댓짓에, 복례가 폭소를 터뜨린다.
한낮에 있었던 일로인해 잔뜩 꼬여 있던 복례의 심사였다. 허나 승태와 마주한 지금, 천방산을 불태우는 석양빛과 함께 그윽하게 사위어 간다.
밤이 이슥하다. 복례의 눈이 반짝인다. 희망이 꺼져간 능성이를 향해 너울치는 운명처럼 별똥별이 곤두박질 친다. 소쩍새의 울음소리가 서글프다. 어릴적 들은 말이 떠오른다.
“소쩍새가 울었던 나무 아래 가보면 피가 흥건하다.”
라는 말이었다. 헌데 누구에게 그런 말을 들었는지 기억이 없다.
청개구리의 울음소리도 앙칼지다. 복례는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비웃는 것 같아 싫다.
복례의 한 여름밤은 물것들의 날개짓에 떠밀려 그렇게 깊어만 간다.
복례는 승태를 잠재우려 업고 있었다. 마당에 피워놓은 모깃불가를 천천히 서성거리고 있다. 몇차례 이죽이던 끝에 입술을 뗀다.
엄마가 섬그늘에 굴따러 가면
아기는 홀로 남아 집을 보다가
파도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승태를 위해 부르던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의 자장가였다. 몇차례 반복해 부르던 복례는 시선을 하늘쪽으로 슬며시 옮겨 놓는다. 검은빛 망망대해가 떠오른다. 삭연히 시선를 허공에 뿌리고 있던 복례가 한숨을 내쉰다.
“휴...!”
심뇌하는 마음이 뱉어내는 의식 없는 행위였다.
“아낙네가 함부로 한숨을 내쉬믄 안�댔구먼.”
아무런 움직임이 없어 벌써 잠이 든 줄 알았던 승태였다. 갑자기 몸을 움직이더니 한숨을 탓한다. 복례가 밤송이를 만진 듯 움찔한다.
“아직 안자고 있었니?”
“응...”
복례는 뭔가 말을 하려 했으나 급히 절제한다.
잠시 동안 침묵하던 복례가 미소진 얼굴로 등쪽을 힐끗한다.
“그래...? 누가 그러시든?”
“할무니... 우리 할무니가 그러셨어. 아녀자가 한숨을 내쉬어 집안 살림에 보탬될 꺼 하나도 �다구.”
“저런...! 하지만 어떻하지? 나도 모르게 한숨이 절로 나오는 걸...”
상대는 어린 승태였다. 허나 아망스런 영섭보다 훨씬 어른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복례는 거세게 너울치는 착잡한 속 마음을 허공에 한숨을 내뱉어서라도 풀고 싶다. 그렇지 않고서는 가슴앓이로 까맣게 타는 속을 도무지 달랠 길 없다. 그렇지만 승태를 의식해 그럴 수가 없었다.
승태가 또 다시 말을 건네온다.
“그러믄 좋았을 적 생각허믄 돼. 그럼 한숨이 안 나오거든.”
“그것도 할머니가 그러시던?”
“아니.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구먼. 난 속상헐 적이믄 누나허고 감자수제비 허벌하고 먹을 때 같은, 그런 좋았든 일들만 생각 허능구먼.”
복례가 고개를 끄덕인다. 일리가 있었다.
“그래, 알았어. 누나도 한숨은 이제 그만 쉬고, 우리 승태가 가르쳐 준 말처럼, 앞으로는 꼭 그렇게 할게. 꼭...”
“약속 헐꺼지?”
“그럼, 약속해야지. 누구의 충고인데...”
예기치 않았던 책언과 충고였다. 복례는 어색한 미소를 흘린다. 어설프기 짝 없었으나, 그것마저 금세 어둠속으로 사라져 간다.
복례는 두 눈을 감는다. 승태가 존조리 했던 말처럼 이 짧은 순간에도 가슴 속 어딘가에 남아 있을지 모를 기분 좋은 기억들을 더듬는다. 그렇지만, 떨치고 싶은 기억들이 한 걸음 앞 서 떠오른다. 술에 취해 들어와 어머니를 이유 없이 구타하던 아버지의 험상한 얼굴이 보인다. 견디다 못해 모든 걸 팽게치고 섬을 빠져 나가기 위해 사립문을 몰래 나서던 어머니의 뒷 모습도 보인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아무도 없는 선착장으로 뛰어가 멀리 수평선으로 사라져가는 여객선을 바라보던 자신의 모습이 안쓰럽다. 몇 날 며칠을 복받치는 서러움을 삼키며, 한없이 느껴 울던 초라한 모습이 아련히 스친다.
의지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버그러진 기억들이다. 복례는 오히려 가슴만 저민다. 아무리 더듬어 봐도 좋았던 기억이란 없다. 있다면 오직 지긋지긋한 기억들로 점철된 덕적도 탈출 때 뿐이다. 어머니가 눈물로 몸을 실었을 여객선을 타고, 영섭의 품에 안기어 빠져나오던 때, 숙망이 해갈되는 부푼 꿈으로 가슴 설레였던 것이 전부인 듯 하다. 그때는 예감이 좋았었다. 행복에 대한 예감. 헌데 앞만 바라보며 정신없이 달려오다 멈춰서서 지난 세월을 뒤돌아 본 지금, 영섭의 감언이설에 부풀어 있었던 가슴엔 채 일년이 못된 벌써부터 칼로 에이는 아픔만이 가득하다. 육지를 바라보며, 눈물로 환호했던 입안엔 쓴맛만 그들먹할 따름이다.
“철 없는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거야...”
자책의 아픔을 짖씹는 복례의 입술 사이로 넉두리가 조용히 흘러 나온다. 승태는 등에 코를 묻고 있다. 숨소리가 잠든 모양이다. 승태가 잠들지 않았다 해도 또렷이 들을 수 없는 작은 소리였다. 하지만 허화에 눈이 멀어 어리석게 흘러온 회두리의 참담한 결과에 대한 후회가 잔뜩 수반되 있었다.
복례는 영섭을 처음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났다. 넓은 마음이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같아 보였다. 따라서 세상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햇살처럼 한 없이 따스하게 느껴졌었다. 허나 이제는 분명 아니었다. 설레이는 사랑의 이면 속에 깊숙히 감춰져 있던 것들이 확연히 드러나 있었다. 썩은 생선을 보는 듯한 추악한 몰골이다. 몸서리가 일도록 흉칙한 바다괴물처럼 모습으로 부상하고 있어 이제는 그 실체를 또렷이 파악할 수가 있다. 영섭은 드디어 의심과 모멸의 종작없는 속마음을 자명하게 드러 내놓은 것이다.
복례는 자칫 오해일 수도 있다고, 아니 분명 오해일 것이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허나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떨쳐지지가 않는다. 오늘은 기어이 아버지에게 언제나 이유 없이 내박쳐져야 했던 어머니였다. 그 꼴을 감히 피할 수 없는 업보나 숙명처럼 답습 당하고 말았다. 가슴을 치며 통탄할 일이다.
복례는 등쪽을 흘끔하며 입술을 깨문다. 가슴이 찢겨지는 아픔에 다시금 새어나오는 한숨을 승태를 의식해 조용히 삭히기 위해서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복례는 승태와 나다니던 오일장 구경은커녕, 산보를 겸해 버섯과 산채나물을 채취하기 위해 오르던 천방산 나들이도 되도록 삼가했다. 괜스레 오해를 불러 올 소지가 있는 이상한 말들이 영섭의 귀에 흘러드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영섭은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드나들었다. 그때마다 사소하기 그지없는 일 하나까지 들추며 트집을 잡았다. 집에 올 때 미리 준비해 온 생트집이었다.
“천방산엔 뭣땜시 또 올라간 겨? 맘씨 좋은년 아랫도리 마를 틈새 �다댕, 푸장나무 허는 놈팽이놈들 꼬들길려구?!”
“그게 무슨 소리예요? 승태와 함께 나물을 케러 간 거예요. 당신이 좋아하는 산채 나물 말이예요.”
“그럼, 김가네 원두막엔 왜 간 겨? 고것도 어둑헌 밤에. 외막에 올라가 치맛자락 들춰 주고 나물 켄 건 아닐테고?!”
“이러지 말아요. 당신이 그랬잖아요. 승태 군입질 시켜주라고...”
“승태, 승태! 말 끝마다 고놈에 승태...! 사내에 미친 화냥년, 주둥아리는 살아가지고! 승태를 들먹거리며, 뻔한 변명 작작허라고?”
“여보. 왜 이러세요?”
“죽으믄 말지 허고 모가지를 끌어안고 메달릴 때, 니 년의 추접헌 화냥끼를 진작시 알아 봤으야 혔는디 말여.”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그건 제가할 소리예요. 당신이 이렇게 의심 투성이의 비덕한 사람인줄 그땐 정말 몰랐어요.”
“뭐셔? 요런 망할 것! 워디다 대고 함부로 말 댓꿀 허능 겨?!”
“악...! 미,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영섭이 집을 드나들 때마다 복례의 얼굴과 몸은 새로운 피멍으로 얼룩졌다. 이와 함께 복례의 해맑은 웃음도 점차 세월의 그늘 속으로 사라져 갔다.
어수선한 나날이었다. 허나 승태와 함께 감자 수제비를 놓고 마주하는 시간만은, 복잡하게 어그러진 모든 일들을 까맣게 잊을 수 있었다. 행복에 겨운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푸르름이 지나쳐 갈 가을 무렵엔 영섭은 아예 집으로 들어와 뒹굴었다. 그리곤 모든 일을 참견하며, 복례의 치맛자락만 변격으로 집적거렸다. 그러다 뭔가에 심사가 뒤틀리면, 즉각 폭력을 행사했다.
“당숙은 밴댕이 소갈딱지...”
승태는 복례에게서 웃음을 앗아간 영섭이 미웠다. 가장 얄궂고 저주스런 존제는 더 이상 장작더미 위의 장닭이 아니었다. 복례를 철저히 구속하며 애태우고 있는 영섭은, 이 세상에서 가장 추잡하고 속이 비좁은 사람일 것이라 단정했다.
승태가 속상해 했던 것은 복례에게 가해지는 영섭의 끔찍한 손찌검이다.
복례는 달랐다. 영섭의 변별 없는 폭력이 아니라, 사사건건 부정스런 계집으로 취급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면 소제지 저잣거리에 있는 작부집에 드나들며, 며칠간 질퍽하게 나뒹굴다 지쳐 들어오곤 했다. 그때마다 복례는 사내로서 그럴 수 있노라 부단히 이해하려 했다. 그렇지만 말 끝마다, 춘심이는 이렇게... 삼월이는 저렇게...하며, 거칠게 가슴을 파고들 땐 썩어가는 동물의 시체에 붙어 욕심껏 포식하고 있는 구더기를 상상했으므로, 사는 게 곤죽을 떠먹는 맛이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덕적도를 탈출했던 것처럼 이곳을 훌쩍 뜨고 싶었다. 허나 갈곳도, 오라고 반기는 곳도 없었다. 그것이 복례의 유일한 약점이었다.
“의처증...! 변태...!”
영섭은 변해 있었다. 복례의 괴로움을 즐기고 있는 듯 했다. 날이 갈수록 그의 괴팍한 행동거지는 광기에 가깝게 급속도로 변해갔다. 따라서 복례는 지난 날, 나와 뭍에 나가면...하며 달콤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던 영섭이 더 이상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랬으므로 정신대의 여인처럼, 전혀 내키는 기분 없이 고역스런 부부생활을 이어가야만 했다.
격랑 같은 시간이었으나 쏜살 같은 세월이기도 했다.
어느새 가을이 황망하게 돌아서고 있었다. 하늘은 쪽빛으로 사뭇 드높았다. 두 눈을 부릅뜨고 천하를 대갈하던 소나기 구름이 북새(北塞)에 맥을 못추고 떠밀려 간다. 푸르름이 지쳐 떨어져간 앙상한 빈자리는 복례의 멍든 가슴처럼 스산하기 이를 데 없다. 허나 내려쬐는 햇발만은 자못 따스하다.
복례는 승태와 함께 방문을 고치고 있다. 문살이 거의 성한 것이 없다. 어젯밤 술에 취해 돌아온 영섭의 짓이다. 그는 밤새 복례를 들볶다가 세벽녘 어디론가 사라졌다. 첫차를 타고 읍내에 간 것이 분명하다.
복례는 문살을 노끈을 이용해 묶고 있다. 승태는 창호지에 풀칠을 한다. 이골이 난 일이지만, 둘 다 침묵한다.
복례가 불현 듯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기울인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방으로 뛰어들어간다. 벽에 붙어 있는 월력 앞으로 급히 다가간다. 그리곤 서툰 손가락 셈을 반복한다.
“무슨 일인 겨 누나?”
승태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오, 이런...!”
복례의 얼굴에 어떤 긴장감 같은 것이 감돈다. 승태를 바라보던 복례는 얼굴에 환희와 두려움을 함께 교차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내 환한 표정으로 고정된다.
의아해 하던 승태가 묻는다.
“왜 그려 복례누나?”
흘끔 고개를 돌리는 복례의 입가에 미소가 흐른다. 여름 이후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곰살궂은 미소다. 복례의 입이 들뜬 어조로 열린다.
“네게 곧 동생이 생길 것 같아.”
“동생...?”
난데없는 말이다. 승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다.
“그래... 누나가 아이를 낳는 거야.”
“참말로? 복례 누나가 웃집 새댁 아줌니처럼 쬐멘헌 얼라를 낳는다능 겨?”
“응.”
복례는 짧게 끊어 대답하곤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미소 짖는 복례의 손이 아랫배로 가 있다. 자랑스럽다는 듯 어루만진다.
“야, 신난다...! 누나, 근디 워떻허지...?”
“어떻게 하다니, 뭐가?”
“누나가 낳은 얼라가, 나한티 성아라 불르믄... 난 누날 뭐라고 불르야 허능 겨? 울 엄마 말대로, 요참부텀은 당숙모라 불러야 허능 겨? 그건 싫은디...”
“싫으면... 승태 좋을대로 그냥 누나라 부르면 돼.”
“참말로?”
“응... 하지만 아기가 승태 만큼 크면, 그땐 어쩔 수 없이 당숙모라고 불러야겠지?”
“그건 또 왜? 난 그렇게 불르기 싫은디...”
“아기가 엄마라 하지않고, 승태처럼 누나라고 따라 부르면 곤란하잖아? 안 그래?”
“정말 그렇네. 하하하...”
복례는 승태를 와락 끌어 안는다. 환한 웃음이다. 오랫만에 마음껏 쏟아내는 파안대소였다.
복례는 마루에 앉아 있다. 혼자였다. 영섭을 기다리고 있다.
드높은 하늘에 시선을 던져 훑는다. 아이를 갖었다는 이 사실이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스럽다. 영섭에게 한 시라도 빨리 알리고 싶다. 지금쯤 술판에서 작부들과 희희낙낙 나뒹굴고 있을 영섭이다. 그렇지만 자신을 닮은 아이를 갖었음을 알게 된다면, 더할나위 없이 반색할 것 같았다. 영섭은 이 사실을 알게 됨과 동시에, 생억지로 일관했던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되돌아 볼 것이다. 그리곤 반성하게 될 것이고, 새로운 각오로 변모된 모습을 보이게 될 것이라 짐작한다.
복례는 자신에게도 커다른 변화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한 아이의 어미가 되는 것은 물론 당연한 변화일 터였고, 아이의 출생과 더불어 자신의 사위어버린 사랑의 자리엔 또 다시 불꽃이 지펴지게 될 것이었다. 그 사랑은 지난날 행복을 맹목적으로 꿈꾸던 시절과는 사뭇 다를 것이라 가늠해 본다.
복례는 가슴 뿌듯한 미소로 자신의 아랫배를 계속 어루만지고 있다. 힘찬 생명의 태동이 벌써부터 손 끝에 느껴지는 듯 하다. 지금은 조그만 핏덩이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꿈이 사라지고, 신뢰가 허물어진 두 사람 사이를 끈적한 사랑으로 연결해 주는 튼튼한 고리 역할을 당당히 해낼 아이였다. 틀림없이 행복한 날의 주체와 객체로서 버젖이 자리메김 할 생명이리라.
복례는 입술을 깨문다. 눈 웃음이 곱던 자리에는 어느새 이슬이 맺히더니 촉촉히 볼을 가른다. 지금까지 한숨으로 흘리던 눈물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기쁨이었다. 애증의 세월속에 자신도 모르게 싹터온 생명이 그저 가슴 저미도록 고마울 따름이다. 그래서인지 눈물이 하염없다. 젖가슴이 금세 축축하게 젖어들고 있다.
승태가 눈을 뜬 것은, 떠오른 해가 중천에서 눈부시게 부서지는 때 늦은 아침이다.
“어, 이상허네...?”
집안이 조용하다. 섬뜩한 정적마저 감돈다. 이런 일은 처음 있는 일이다. 최소한 우물에서 어머니의 빨래 방망이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와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어머니를 향해 무언가 참견하는 할머니의 잔소리 한 마디쯤 들려와야 했다. 허나 쥐 죽은 듯 고요할 뿐이다.
“할무니! 할무니!”
아침부터 나비되어 날아간 번데기처럼 텅빈 집이 이상했으므로, 승태는 한껏 목청을 돋구어 할머니를 찾는다. 하지만,
“어이쿠 우리 이쁜댕이 손자, 이제사 일어난 겨?”
하며, 단숨에 뛰어 와 엉덩이를 다독거려야 했을 할머니의 모습은 그림자도 안 보인다. 대신 장작더미 위의 장닭만이 홰를 치고 있다. 금세라도 날아 올 기세다.
“흥! 망할놈에 장닭. 누가 니깟 것에 잔뜩 겁먹고 달아날줄 알았던 겨? 이제부텀 어림쪽도 �는 일이구먼!”
승태는 마루를 내려선다. 두 눈을 부라려 장닭을 노려본다. 눈 싸움에서 지게되면 장닭이 널 얕잡아 보거든. 했던 복례의 말이 퍼뜩 떠올랐으므로, 사나운 눈빛을 던져 일단 녀석의 야코부터 죽여보려는 속셈이 가득 깔려 있다. 그렇지만 마음 뿐이다. 슬금슬금 가제걸음으로 대문간을 빠져나오고 있다. 아무리 태연한 척 하려 해도 이내 날아올 듯 거칠게 홰를 치는 장닭에, 승태는 등골이 오싹하다. 이마엔 벌써부터 식은땀이 후터분하게 돋아 있다.
승태가 집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마을 어귀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다. 낯 익은 정류소집 자가용도 와 있다. 승태는 먼발치였으나 어머니의 뒷 모습도 그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얼레? 뭔 일이랴?”
누군가가 업혀 오더니 차에 태워지는 모습이 보인다. 사람들에 둘러 싸여져 자세히 볼 수가 없다. 추측컨데 몸이 아픈 누군가가 급히 병원으로 실려 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일은 종종 있었던 일이다.
승태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달린다. 궁금증 보다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보고 나서, 복례에게 자세히 말을 해 줄 작정이었다.
승태가 마을 어귀에 도착한 것은 잠깐이다.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휘청인다.
“누, 누나! 복례누나! 누나...!”
승태는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를 토해 낸다. 승용차 창문을 세차게 두드린다.
뒷좌석 어머니의 품안에 쓰러져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복례였다. 눈에 익은 녹의홍상은, 이미 걸레처럼 너덜너덜 하다. 누군가가 눈 뜨고 볼 수 없어 수건을 던져 주었는지, 겨우 부끄러운 곳만 간신히 가리고 있다. 또한 찢겨져 옷 사이로 드러난 속살들은 석양빛으로 물들어 그 태깔이 흉칙하다 못해 끔찍하기만 하다. 초죽음이었다.
“누나, 괜찮응 겨?! 누나!!”
승태의 목소리를 들은 것일까. 복레가 마법에서 풀려나듯 파르르 몸을 떤다. 승태는 계속해서 창문을 두드린다. 복례가 힘없이 고개를 들더니 힘들게 창 밖으로 시선를 옮긴다. 초점 잃은 눈엔 두려움과 반가움이 교차되고 있다.
핏물이 끈적하게 엉긴 복례의 입술이 어렵게 열린다.
“스, 승태야. 널 다신 못 보는 줄 알았어. 다시는...”
순간, 승태의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린다. 헤어지고 피덩이로 얼룩진 복례의 볼이다. 검붉은 피눈물이 뜨겁게 흘러내리고 있었던 껏이다.
복례가 어머니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오열을 터트린다. 하지만 신음소리 뿐이다
차에 시동이 걸렸다. 이내 존망지추(存亡之秋)의 복례를 싣고 읍내를 향해 달린다. 안개처럼 뽀얀 흙먼지를 일으키며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간다.
“누나, 죽으믄 안돼! 아랐찌...?!”
승태가 울부짖는다. 자동차가 멀어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목젖이 떨어져도 괜찮을 양이다.
승태의 뇌에 방정맞은 생각이 가득 채워지고 있다. 행여 맛 있는 감제수제비를 다시는 먹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섣부른 생각이다. 그래서 서럽다.
뒷 쪽에서 어른들이 수근덕거린다.
“영섭 고놈이 미쳐 환장을 한 겨. 그렇찮은 담에야 눈구녕에 쑤셔 넣어도 안아플 어여쁜 샥시를 저지경으로 맨들어 놓았을까. �쯔쯔...”
“헌디 영섭이가, 왜 복례를 저렇쿰 다죽게 맨들어 놓응 겨? 대관절 뭔 까닭으로...?”
“복례가 얼라를 뱄다능구먼. 그런는디 말여, 고 게 워떤놈에 씨앗이냐? 하믄서 저렇쿰 몰메를 놨다능구먼. 아까 보니께 지놈은 여시 같은 술집 작부년을 버젓이 집으로 끌어들여 이부자리 질퍽허드락 흐무지게 놀아났으믄서 말여.”
“저런, 몹쓸 것! 근디 복례 얼라는 워떻게 됐댜?”
“워떻게 돼긴, 하혈로 치맛폭이 흥건헌 걸 못 본 겨? 잘은 몰러두 아마 지워졌을 게 뻔 허구먼.”
“�쯔쯔... 저런 천벌을 받아 마땅헐 잡놈 같으니...!”
맥없이 서 있던 승태가 주먹을 불끈 쥔다. 탱자보다 조금 큰 하잘 것 없는 주먹이다. 분에 못이겨 파들파들 떨고 있다.
승태가 별안간 뒤돌아 뛴다. 복례를 그 지경으로 만든 영섭을 만나 따져 묻기 위해서였다. 주먹질로 어림 없다면, 발길질을 할 것이었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어금니로 코 끝이라도 물어 뜯을 결심이었다.
영섭이 사립문을 나오고 있다. 술기운에 비척이는 발걸음이다. 곁에 낮선 여인네의 어께를 끌어안고 있다. 분화장이 역겹고 몹시 천박해 보이는 여인네다.
승태는 그 낯선 여인이 복례가 한숨과 함께 얼핏 얘기했던, 음탕하기로 소문난 저잣거리 술집 작부 삼월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요 게 누구야? 승태 조카님 아니신겨?”
영섭이 걸쭉한 웃음을 흘린다.
승태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아니, 할려고 해도 나오지가 않는다. 야무지게 노려볼 뿐이다. 영섭의 눈빛에 기가 꺽여서가 아니다. 어이가 없어서 였다.
“새 당숙모께 인사하러 온 겨? 이렇쿰 땀을 삐질거리믄서 말여? 내 진작시 니놈 동작이 빠르다능 걸 알고는 있었지만, 고놈 번개같이 되게 빠르구먼 허허허...”
“어머나, 요놈이 말끝마다 복례년 서방이라고 말했던 승탠가 보죠? 고놈 어쩜 저렇게 야무지게 생겼을까? 호호호...”
“그려, 요놈이 바로 승태여. 직접 보니께 워뗘? 고놈 밤톨츠럼 단단허니 잘 생겼잖응감? 복례가 반할 만큼 말여. 풋밤이라서 문제지만서도. 하하하...”
“풋밤...? 그러게요. 복례년 서방, 주근께 투성이, 풋밤...? 호호호...”
간들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이 얄궂다. 승태는 자신도 모르게 부아가 치밀어 주먹을 되알지게 쥔다.
“복례누날 그렇쿰 맨들어 놓고 워딜 가능 겨, 당숙?!”
“워딜 가느냐구? 눈으로 보고서도 모르능 겨? 새 당숙모 맞은 기념 삼아 시방 천방산으로 원족(遠足)을 가던 참이구먼. 니놈도 하냥 갈련? 간다믄이야 큰 맘 묵고 데려 갈 수도 있고말구. 하하하...”
영섭은 술병과 안주 꾸러미를 들어 보인다.
승태는 그것을 걷어차며, 목청껏 욕설이라도 퍼붙고 싶었다. 허나 야살스런 영섭의 모습에, 욕설도 실상 아까워 온몸을 바들거릴 뿐이다.
“그럼, 복례 누난 워떻게 되능 겨?”
“복례? 고년은 원래 나와는 무관한 년이지. 호적에 올라 있었던 것도 아니니께. 승태 니가 좋아서 밤이면 끌어안고 자면서, 젖무덤을 만지작거려 그렇게 부풀려 놨으니 니눔이나 데려다 갖고 놀으렴. 하하하...”
“다, 당숙... 시상에 그런 말이 워딧어?!”
해망하기 그지없는 말이다. 승태는 어금니를 악문다. 금세라도, 씨부랄! 당숙이 사람 맞능 겨? 하고 어눌한 어투가 튀어나올 것 같다. 허나 온몸은 싸늘히 얼어붙고 있다.
“왜? 덤벼 들기라도 할련? 하하하... 늬놈은 아직 사내가 아니니께, 이 당숙이 매가리 �이 있을 때 뒤로 슬그머니 와설랑 뒷통수라도 치렴. 어리니께 그리 혀도, 어느 눔도 잘못이라 욕허지 않을테니께 말여. 흐흐흐...”
영섭과 삼월이 조소를 뿌리며, 그 자리를 떠나간다.
승태는 분노를 삭히느라 얼굴이 잘 익은 석류빛이다. 응징할 마음은 굴뚝 같은 데 아무런 방법이 없다.
노랫 가락으로 활개를 치며 천방산 등성마루를 향해 올라가는 두사람이 보인다. 승태의 눈엔 더 이상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허울일 뿐이다.
승태가 아롱진 시선을 마당으로 돌린다. 한켠에 걸어 놓은 검정 무쇠솥이 눈에 띈다. 그 곳에서 감자수제비를 만들던 복례의 모습이 보인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복례의 흉측한 얼굴이 떠오르고 있다. 이를 떨치려 거칠게 고개를 흔들던 승태의 매서운 눈초리가 천방산을 오르고 있는 영섭에게로 던져진다.
“그렇구먼! 난 아직 사내가 아니구먼! 허지만... 복례 누날, 아니 힘 �능 거 뻔한 여잘 그렇게 죽사발로 맨든 사람은, 어느 누구도 용서할 순 �구먼! 암만 날 이뻐혀 줬던 당숙이라 혀도 말여!”
승태의 목소리가 천방산에 메아리져 돌아온다. 영섭의 웃음소리도 함께 들려온다. 기괴하기 짝없는 비웃음이다.
승태가 무쇠솥 쪽으로 달려간다. 두리번거린다. 뭔가를 손에 집어 든다. 성냥이었다. 감자 수제비를 만들 때, 불을 지피며 무서워 손을 심하게 떨곤했던 것이다.
승태가 천방산 자락을 향해 울먹이며 뛰어간다. 뒹구는 낙엽들을 급히 긁어 모은다. 가시가 손끝을 찌른다. 금세 피가 비친다.개의치 않는다.
승태가 성냥을 그어댄다. 서스럼 없다. 감자수제비를 만들 때, 성냥불이 무서워 감히 성냥을 켜지 못했었다.
불길은 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세 사납게 억세밭으로 번져간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산기슭을 핥아버린다.
오열하던 승태가, 앙칼진 목소리를 천방산을 향해 토해 낸다.
“난 복례 누나의 수호천사구먼! 이건 당숙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구! 아니, 고약헌 짐승한티 하늘을 대신혀 내리는 천벌...!”
승태의 절규가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 올 때 쯤이다. 때 마침 곡풍(谷風)이 거칠게 불어온다. 불길은 삽 시간에 메마른 천방산을 휘감아 치솟는다. 험한 세상의 추악한 모든 것을 삼켜버린 소돔과 고모라의 불기둥처럼.***
'[나의 이야기] > 내 소설 속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경욱 단편 소설) 잠들지 못하는 영혼. (0) | 2008.08.27 |
---|---|
(구경욱 단편소설) 자웅눈이 삼촌 (0) | 2008.08.27 |
(구경욱 단편소설) 迷路엔 비상구가 없다. (0) | 2008.08.27 |
(구경욱 단편소설) 악몽에 사로잡힌 남자 (0) | 2008.08.27 |
[구경욱 단편소설] 발가벗은 여자 (0) | 2008.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