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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곡리 산성과 육굴 - 서천 문산

소설가 구경욱 2009. 11. 6. 14:42

은곡리 산성과 육굴 - 서천 문산

 

-. 서천군 문산면 은곡리, 마산면 지산리

-. 은곡리 산성은 은곡리 육굴(陸~ 백제 군영지)과 마산면 지산리 뒷산 정상부에 있는 테뫼식 토축 산성이다. 아직까지 관련 학계에 보고된 적 없는 백제 토성으로 필자가 처음으로 지표조사를 하였으며, 이 사실을 행정기관에 보고하였다. 둘레가 대략 250m 정도이다. 외성은 퇴락이 심해 흔적을 찾기 힘들지만 남측 내성 부분의 삭토 흔적과 토루 및 동문지, 정상 북측 평탄 흔적은 아직도 남아 있다.

-. 은곡리 육굴(陸~)은 백제군영이 있던 골짜기를 말하며, 지원리산성과 은곡리산성에 둘러쌓여 있다. 육굴의 지명 유래가 강과 바다가 보이지 않고 사방이 산으로 막혀 있어 천혜의 요세라는 뜻이며, 백제군이 활을 쏘며 훈련하던 사장터가 있는 곳이다. 남쪽으로는 갈물산성과 가깝고, 서쪽으로는 지원리 산성과 이어져 있으며, 동쪽으로는 충화 시루산성과 가깝다.

 

 660년 김유신의 신라군 5만명과 당나라군 13만, 도합 18만의 군사가 백제로 쳐들어왔을 당시. 당나라는 수로를 이용해 백제의 백강쪽으로 쳐들어왔고, 신라군은 육로를 이용하여 백제의 탄현쪽으로 쳐들어왔다. 이때 의자왕은 백제장군 의직에게 2만의 군사를 주어 당나라군을 막게 하였고, 달솔 계백에게는 5천의 군사를 주어 신라군을 황산벌에서 막게 하였다.

 

 

 위 사진은 금강하구로 하늘색 화살표 지역이 당나라 13만 대군이 상륙한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노란색 화살표는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향했 진군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저령대로(猪嶺大路)이다. 또 분홍색 선으로 표기한 곳은 차령산맥 끝 능선으로 이곳이 무너지면 사비성 사이에는 논티리 산성(둘레 약 250m)밖에 없게된다. 따라서 의자왕의 명을 받은 좌평 의직의 2만의 백제 정예군, 서천 지역 20여개 성에서 퇴각한 백제군사와 당나라 13만 대군 사이의 백제 서부권 최대의 혈전 벌어졌던 곳으로 필자가 추정하는 곳이다. 환갑을 넘긴 노구를 이끌고 전선에 나섰던 좌평 의직은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게 되며, 달솔 흑치상지가 첫번째 항복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 전투에서 살아 남아 보령의 봉화산성 등으로 퇴각했던 귀실복신, 지수신 등이 훗날 백제 부흥군을 이끌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 사진 중 하늘색 원은 은곡리 새태지역이며, 노란색 원은 지원리산성, 또 분홍색 원은 은곡리 산성이 있는 곳이다. 현재 지원저수지 제방이 있는 자리에 저령대로를 방어키 위한 백제 토성이 있었다. 파란색 화살표는 차령산맥 끝 능선이다. 

 

 

 ▼ 문인방 앞에서 바라본 옛 저령대로  지원리산성과 새태 협곡

 

 ▼ 저령대로를 방어하던 백제 토성 자리에 들어선 지원소류지

 

 

 ▼ 안산 위에서 내려다본 전장말 - 고려말 최영장군의 홍산대첩과 백제 부흥군과 나당 연합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 장수고개 풍경 - 한산~홍산 간 옛 곡현대로

 

 

 ▼ 은곡리 산성 내성 동측 토루의 모습 - 외성은 퇴락이 심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음

 

 

 

 ▼ 산성 정상부에 있는 가의대부 라막립의 묘

 

 ▼ 가의대부 묘역에서 바라본 내성 장대의 모습

 

 ▼ 정상 안부에서 본 내성벽의 모습

 

 ▼ 장대 동측 토루의 모습으로 삭토한 흔적이 또렷이 남아 있다.

 

 ▼ 남측 성벽의 모습

 

 

 

 ▼ 서측 성벽의 모습 - 서측 능선은 지원리 산성과 연결되 있다.

 

▼ 남측 장대 서측 토루의 모습

 

▼ 서측 능선 아래에서 올려다 본 장대의 모습

 

▼ 큰육굴 군영터 추정지에서 올려다본 은곡리산성

 

▼ 큰육굴 군영터 추정지에서 바라본 지원리 산성이 있는 테뫼봉 모습

 

▼ 큰육굴에서 바라본 새태

 

▼ 작은육굴 풍경으로 군사들이 활을 쏘며 훈련을 하던 사장터가 있던 곳이다.

 

▼ 큰육굴과 은곡리 산성의 테뫼봉 풍경

 

▼ 새태봉 모습